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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론
교회란 무엇인가?
글쓴이 : 김성주 목사
1. 도입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용어 중 교회만큼 그 본질적 의미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과 달리 왜곡되게 이해되어지는 단어도 없으리라 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 교회하면 의례 떠올리는 생각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의 성전개념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성전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인해 곧 건물개념으로 연상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교회에 대한 잘못된 개념정립은 자연스럽게 성전건축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하나님의 복이 바로 이 성전 곧 교회를 합심하여 축성하는 것을 통해 가장 현실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설교되곤 합니다. 이때 과거 솔로몬의 성전건축과 이에 상응해 내려주신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의 내용을 현재의 교회건축의 필연과 당위의 명분으로 예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이렇게 구속사적 계시의 점진성에 대한 무지와 오해는 나아가 교회건축이 교회부흥의 대전제이며 기초인양 잘못 가르쳐지고 인식되는 것을 통해 목회적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하게 온갖 부작용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세속화는 어떤 의미에서 교회를 구약시대의 성전개념으로 곡해한데서부터 나와진 바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우상 숭배적 신앙관으로 바뀌어지고 전락한데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적 기독교의 성격적 특징이 기복적이고 보상 심리적이며 지성감천주의의 인본주의적 신앙관을 자초하는 대로 나아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잘못은 그것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보다 많은 잘못을 잉태하는 대로 나아가는 원인을 제공하는 빌미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심각한 이유로 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교회관의 정립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관의 성경적 재정립이라는 차원에서도 새롭게 음미(吟味)해 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네 가지 국면(局面)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전개
앞에서 지적했듯이 교회는 구약의 성전이 아닙니다. 따라서 건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를 성전개념으로 오해해서 성전건축을 교회건축으로 이해하고 이를 위해 결코 적지 않은 건축비용을 하나님의 축복이란 미명(美名)하에 헌금의 명목으로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自意的)으로 해석한 데서 나와진 성경계시의 무지(無知)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오늘 우리의 부인할 수 없는 실정(實情)입니다. 실로 고통과 탄식으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그 수준과 단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깊은 총체적 무지 속으로 빠져든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제기됩니다. 저는 지금 적당한 예배처소를 위해 성령의 유기적인 역사를 통해 마음과 뜻을 같이 하려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원하는 수고와 애씀을 탓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을 빙자한 무모한 종교적 열심과 성령의 이름을 남용한 자의적 열심을 부추기는 경우를 들어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무지의 소치(所致)일 뿐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분깃도 없는 자의적 숭배신앙의 발로일 뿐입니다.
에베소서 기자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기도 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구했던 사실의 배경이 이런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엡1:17상).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령님의 내적 조명을 통해 그 내용을 바르게 해명할 수 있는 첩경이 되기 때문입니다(엡1:17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명만이 하나님의 뜻을 그 분의 본의대로 지각(知覺)하고 인식(認識)해서 생명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길에 밀레도에 있으면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한 기사가 행20:17-38에 기록돼 있습니다. 바울은 이때 교회 장로들을 주와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는 가운데 그 말씀이 능히 저들을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할 것을 당부합니다. 바울은 그래야 될 이유를 29-30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계2:2에서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사실"을 칭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의 크신 경륜에 입각한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해명이 선행됨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하기 위한 전제로 하나님의 지혜 곧 영적 안목과 통찰력을 먼저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르게 통치할 수 있는 통치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에게 다른 무엇에 앞 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는 것을 통해 신정적(神政的) 통치에 있어서 지혜가 차지하는 성격과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왕상3:4-9). 과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해명해 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에 족한 요소입니다. 작금의 상황하에서 교회가 본연의 본질을 잃고 세속화돼 가는 정도가 더욱 심화되고 따라서 기독교 신앙 또한 본래적 천상 지향적인 방향성을 잃고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성공과 무사안일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되는 시점에서 교회의 성경적 본질을 회복시키는 일은 신앙관의 재정립에 앞서 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란 과연 무엇일까요.
불러냄을 입은 자들(Called out)
교회는 단순히 기독신자들의 모임이나 단체로서의 집합이 아닙니다. 뜻을 같이 하는 몇몇이 모여서 기독교의 이름으로 모인 예수 동호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들이 발전해서 교회로 자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유기적으로 연합돼 존재하고 활동하는 천상적 공동체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 신적 기원에 의해 세상 가운데 출현하게 됩니다.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고전1:2, 고후1:1, 갈1:13, 살전2:14, 딤전3:5, 15).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지칭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는 교회원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소유된 백성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벧전2:9).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상과 원리에 깊이 연루돼 있습니다. 성도의 위로와 소망이 이런 사실에 기초합니다. 이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닙니다. 실질입니다. 실제적 상황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아무 피조물도 심지어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는 것이 성경이 증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에 의해 늘 눈동자와 같이 보호를 받으며 절대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특별한 자들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처음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됩니다. 먼저 말씀의 은사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의 택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십니다. 다수 중에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서 불러 내셔서 구원의 은총을 입혀 주십니다. 이때 성령께서 이 일을 주도하십니다. 성령님의 내적 음성이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깨닫게 하십니다. 믿게 하십니다. 죄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전인적으로 회심케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당신의 백성을 사단에게 종노릇하던 세상 가운데서 본래의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불러내십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내용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학정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중보자로 세워 불러내시는 것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계시해 주십니다(출12:40-41, 19:4).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 하에 430년간의 애굽의 종살이에 종지부를 찍고 해방돼 시내산에 총회로 모이게 됩니다. 율법을 하사 받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소유와 제사장 나라로 존재하게 됩니다(출19:1-6). 하나님께서는 이를 보증하기 위해 짐승의 피로 언약식을 체결하십니다(출24:1-8).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로 열방과 차별화 시키는 가운데 인(印)쳐 주십니다. 이는 마치 신약적 관점에서 볼 때 사단이 왕노릇하는 세상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인 성도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구원의 도리에 대한 성례전적 의미를 예표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일컫는 말로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의 은혜를 입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들의 모임을 집합적이고 공동체적으로 부르는 계시적 용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 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 부르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생명으로 연합돼 유기적 공동체를 이루는 성격을 띠고 세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독립된 개인들이 공동의 목적추구를 위해 단체적으로 모인 조직체가 아닙니다.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성경이 교회를 몸으로 비유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몸으로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은 이런 차원에서 비유이상의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의미를 간직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몸으로서의 유기적 공동체인 지상의 교회는 단순히 조직체 이상의 주님의 생명적 활동을 본능적으로 전개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란 유기적 신앙공동체로서 주님의 인격이 구체적으로 발휘되는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기독교적 종교활동의 현장이 아닙니다. 정리하면 교회의 일차적 국면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선택적으로 불러낸 유기적 신앙공동체인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우선돼야 합니다. 교회가 몸을 구성하는 유기적 인격체가 아닌 건물이나 성전으로서의 구약적 개념의 수준에 머물게 될 때 구속사를 운반해 가야하는 성경적 기독교신앙의 본질은 방향감각을 잃고 마침내 실종하게 됩니다.
특별한 목적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Called for)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 안에서 주권적으로 불러주십니다. 다수 중에 남은 자를 택하셔서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구원하셔서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성령의 인치심과 내주하시는 사역을 통해 영원히 구원을 보증해 주십니다. 성도의 견인교리가 이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목적을 위한 일차적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구원의 의미를 애써서 과소평가 하거나 축소시키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에는 신묘막측하신 경륜이 있다는 얘길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벧전2:9 하반절에서 지적하기를 "...........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속의 도리와 구속의 경륜에 있어서 복음의 내용과 목적을 가리킴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궁극적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전제돼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의 회복과 관계의 정상화입니다.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의 화목에로의 복귀 말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중보사역을 통해 베푸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도 놀라운 것인지를 중심에서부터 감심(感心)으로 깨닫는데서 자연발생적으로 나와지는 현상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되고 훼손된 교제와 관계가 원래대로 회복되고 치유됐을 때 마땅히 행할 바의 종 된 사역은 사랑이 동기가 돼 나타나게 되는 바, 무익한 종의 심정을 갖고 자원해서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자로서 마땅히 발동되는 본능적 반응이지 억지와 강요된 책임과 의무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가 재정립되고 교제와 화목이 회복되는 곳에서 자발적 순종은 꽃을 피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학정에서 구출해 내실 때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생각하셨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 가운데?구체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입니다. 이 언약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先)언약이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성취되는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에 접촉되는 방식입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열국 중에서 선민으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언약의 신실한 성취의 일환으로 말입니다(신7:7-8).
이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율법의 여러 규례와 시행 세칙들을 수여하시는 가운데 특별히 성막제정에 관한 규례를 주십니다(출25장). 성막제정은 율법수여와 함께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서 선민으로 구별해 당신의 친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의지의 표명인 동시에 은혜의 현시(顯示)입니다. 이후부터 율법은 이를 신실히 지켜 행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삼으시는 은혜의 수단으로 작용합니다. 성막의 제정과 제반 제사와 의식과 절기의 신실한 시행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동행과 교제와 통치의 상징을 성례전적으로 보여주는 가시적 제도입니다(출25:8, 29:45-46).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저들의 왕과 아버지가 되는 실제적 관계(창17:8, 출19:5-6, 레26:12, 렘31:33, 겔36:28, 벧전2:9, 계21:3)를 성막제도를 통해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사역을 통해 성전의 실체 되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게 하시는 보증의 사역을 통해 실제화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연약과 부족과 쉽게 잊어버리는 성정(性情)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에 성막이라는 가시적이고 계시적인 방식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애정과 언약에 신실하심을 실물교육을 통해 가르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신뢰를 잃지 않도록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곧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은 저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성에서 비롯되는 깊은 교제의 현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때가 차매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왕 치하에서 창조자와 역사의 주권자적 권능으로 불러내신 일차적 목적은 저들과 교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처음 창조의 원리에 의해 지음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됐다는 사건 속에 담긴 근본 사상은 바로 인격적 교제의 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창1:26-27, 2:7, 16-17, 3:8-9). 그래서 이들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교제와 교통의 삶을 통해 사람의 제일 된 목적과 본분을 감당할 자로 피조(被造)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과의 영적이고 인격적인 본래적 교제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당초의 창조의 원리가 죄의 유입으로 방해를 받음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정상적인 교제의 관계는 단절되게 됩니다(사59:1-2, 창2;17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처음부터 복의 형식을 빌려 은혜의 성격으로 주셨기에(창1:28) 인간의 실패(창2:17, 3:6)가 하나님의 선(先)언약(창1:28, 엡1:3-6)을 폐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갈3:17). 이런 결과로 해서 은혜언약으로 주어진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후 창조의 원리를 구속의 원리로 갱신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당초의 창조원리를 회복시키는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목적은 인간의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담당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려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복된 정상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며 그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으시게 됩니다. 이는 처음 창조원리에 근거한 에덴에서의 관계가 현재적으로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이미). 물론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 될 종말론적인 교제의 회복과 관계의 정상화는 아직도 미래적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아직).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과 목적을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언약식 체결 및 율법수여와 성막제작 그리고 성막제도의 구체적 시행을 통해 선취적으로 이를 계시하셨습니다. 나아가 구원받은 이스라엘을 교제의 대상으로 삼아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은 저들의 왕이신 사실을 구체적으로 현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한 계시적 방편으로 성막제정에 관한 규례가 세밀하게 수여된 것입니다(출29:45-46).
그렇습니다. 성도를 구원에로 부르신 목적은 구속의 원리를 통해 창조원리에 입각한 당초의 교제의 회복을 위함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교회공동체적 교제 말입니다(엡2:19). 고전1:9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함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Called together)
성도란 세상 만민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불러낸 무리일 뿐 아니라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창조적 교제의 관계를 회복시킬 목적으로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때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그것이 표면적으로 비록 개인적인 성격을 띠고 있을지라도 '공동체'적으로 함께 불어내셨다는 구원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 말입니다. 신약의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할 자로 불러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언급합니다(엡3:6). 본 절에서 '함께'라고 지적하는 부분이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교회공동체를 몸으로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을 통해 그 실질이 풍성히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교회를 이루기 위한 전제입니다. 교회를 이루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비록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다 할지라도 반드시 교회공동체인 주님의 몸에 지체로 더해지는 실질을 통해 구원이 지속적으로 보증됩니다. 물론 이 말은 구원이 중간에 상실되거나 빼앗길 수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아닙니다. 구원과 교회와의 관계가 불가분리적 함수관계로 접촉돼 있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지 못할 때 바른 구원을 누리는 신앙을 정상적으로 유지해 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신앙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집합적이고 유기적인 상호 관련성을 통해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풍성히 자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엡2:21-22, 4:13, 16). 비록 성경이 개인적인 신앙을 언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이루는 일과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 밖의 무교회적 신앙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대속적 사역을 만홀(漫忽)히 여기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의 사역의 본질이 오직 교회를 세상 가운데 출현시키기 위함이라는 본래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께서 제자들을 향해 처음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실 것과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언급하시는 내용 속에 담긴 교회출현에 대한 계시적 배경이 이렇습니다(마16:18-21).
따라서 교회에 더해지는 방식으로의 구원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의미의 성격적 구원이라고 정의할 수 없습니다. 칼빈이 교회를 일컬어 '신앙의 어머니'라고 말한 데는 성경의 교회진리를 바르게 이해한 데서 나와진 결론이란 사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합니다. 이런 원리에 입각해서 일체의 기독교적 복음은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에 종속되어서 전파돼야 함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만이 복음의 유일한 중보적 매체이며 기관임을 천국열쇠를 오직 교회에 일임하신 사실을 통해 밝히 드러내십니다(마16:19). 오늘날 교회와 선교회와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며 의존적일 수는 있지만 결코 독립된 두 개의 복음적 기관으로 양립한다면 이는 성경적 원리에서 어긋나는 처사입니다. 어떤 선교회도 교회를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이는 오히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복음의 이름으로 분리시키는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며 온전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때만이 참된 복음의 가치와 기능이 올바르게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꿩 잡는 것이 매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으로 복음이 교회진리와 무관하게 마구잡이 식으로 전파되는 것을 바라보며 어거스틴이 말한 바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간혹 성경에서 신앙은 경주와 격투기에 비유됩니다(고전9:26, 딤후2:5). 거기에는 일정한 법칙과 법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경기의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 승자는 승자로서 인정함을 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면류관을 빼앗깁니다. 부끄럼을 당하게 됩니다(마7:21-23).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를 순적히 좇지 않는 신앙은 그것이 제아무리 열심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할지라도 자기의 종교적 의만을 세우는 바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것으로 판정 받게 된다고 성경은 경종을 울립니다(롬10:2-3). 우리의 수고가 훗날 주님 앞에서 헛된 열심과 자기의 종교적 과시와 만족으로 드러난다면 어디에다 이를 하소연하며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와를 힘써 바르게 아는 일에 우리의 신앙적 관심과 안목과 통찰력을 집중시켜야 할 시기입니다. 이는 성경적 진리의 체계를 하나님의 심정으로 바르게 알고 거기에 자신의 신앙적 삶을 부단히 드려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욱 가까왔기 때문입니다(롬13:11).
교회는 주님의 생명에 접촉돼 유기적으로 연합된 신앙공동체입니다. 함께 몸을 이루고 있는 인격적 예배공동체입니다. 구원받은 개인의 집합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단지 예수 동호회나 기독교 종교단체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날 흔히 제기되는 문제는 교회가 하나의 맘모스적 거대한 기독교 종교단체로서의 모습만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거대한 교회를 성공한 교회의 표본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이를 뒤좇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의 본질과 표상(表象)과 표지(標識)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이를 전심으로 추구하는 일은 뒤로 한 채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를 공동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 시대의 보편적 특성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적 발상과 행동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이런 세속적 사고와 행동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 이상 신앙의 어머니로서 성도들의 신앙을 교훈하고, 책망하며, 바르게 지도할 뿐 아니라 의로 교육하는 통제의 기능을 상실하지 오래(?)입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교회의 삼대 표지(標識) 중 하나로 제시된 성도의 권징과 치리는 더 이상 한국적 교회 속에서 찾아보기 힘든 구시대의 유물이 돼 버린지 오래입니다. 조금이라도 제 마음에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일언반구의 말 한마디 없이 어느 날부터인가 돌연 나오지 않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입니다. 구원받는 신앙과 구원을 누리는 신앙이 주님의 몸 된 지역 교회공동체에 '함께' 지체로 더해지는 것을 통해 우주적 보편의 교회를 이루어 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부족한 데서 나와지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성경적 구원은 교회공동체를 함께 더불어 몸으로 이루어 가는 것을 통해 실현되고 보증됩니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교회공동체를 지향하는 성경적 신앙의 최대의 걸림돌입니다. 이는 사단의 궤계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선악과 금령법에 대한 사단의 시험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자존심을 자극해 하나님을 의존하는 종속적 교제의 관계를 거부하고,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지존(至尊)에로의 욕심을 자극한데서 비롯됩니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본주의를 지향하는 바, 신본주의에 정면으로 배치(背馳)되는 사상으로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자력으로 행복한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다는 불신앙적 망상에서 나와진 사단의 미혹의 한 방식인 셈입니다. 사단적 발상 말입니다. 따라서 개인주의적 사상의 배경에는 철저히 사단의 고차원적 궤계가 역사하고 있음을 감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사실을 통해 현 시대가 얼마나 공중권세를 잡고있는 흑암의 세력이 만연해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자신의 하수인으로 삼고 있는 지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발휘해야 할 줄 압니다. 엡6:12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부름을 받아 주님의 몸을 이루는 것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존재합니다. 이런 사실은 신약에서 뿐 아니라 신약계시의 전신(前身)이며 예표적 성격을 띤 구약계시에서도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창12:1-3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주권적으로 부르시는 가운데 그와 언약을 맺으십니다. 내용인즉 아브라함과 그의 씨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브라함 개인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서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할 것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집합적이고 공동체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이삭과 야곱을 통해 역사적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과 나라로 나타나게 되었을 뿐 아니라(출1:1-7)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그 분의 생명에 연합돼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새 이스라엘로서의 교회공동체로 출현하는 것을 통해 성취됩니다(갈3:28-29).
이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역사에 있어서 구원계시의 전형(典型)인 출애굽사건에서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개인이 아닌 가족단위로 구출해 내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모세와 아론에게 이스라엘 회중들로 하여금 흠 없는 일년 된 어린양을 준비케 하되 각 '가족단위'로 어린양을 취할 것을 명하십니다. 만약 양에 비해 식구 수(數)가 적으면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 한 마리를 계산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출12:3-4). 그렇습니다. 후에 유월절 양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가 이스라엘의 출애굽(구원)을 가능케 했던 유월절 사건 속에서 이와 같은 예전(禮典)적 방식을 통해 예표(豫表)적으로 시행된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족단위로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구원의 계시적 상징인 출애굽사건에 연합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본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구원방식은 개인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지만 항상 공동체적으로 나타나고 마쳐지는 것을 봅니다.
이후부터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은 당초 족장들과 개인적으로 맺은 방식에서 발전돼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공동체적으로 맺게되는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이를 극명하게 현시하는 사건이 시내산 언약식 사건입니다(출19:1-6, 24:1-8). 모세는 짐승을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피를 취하여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모든 율법을 성실히 지켜 행할 것을 엄숙히 약속하게 됩니다. 이것을 소위 시내산 언약식이라고 부릅니다(출2:8).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인 시내산 언약과 언약식에 근거해서 명실상부(名實相符)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과 신정왕국의 통치자로서 저들의 삶에 깊이 개입하셔서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십니다. 시내산 언약식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결코 개인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민족공동체적으로 간섭하십니다. 심지어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는 그 사람 개인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관계된 모두를 집합적으로 심판하시는 것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물으십니다. 몇몇 경우를 소개합니다. 먼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는 일과 관련해서 모세의 내려옴이 더딘 것을 보고 백성 중에 소요가 일어납니다. 저들은 급기야 자기들을 인도할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세와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배역(背逆)을 시도합니다(출32:1-6).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을 징계하실 때 레위 족속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리자로 삼아 무작위(無作爲)로 무려 삼 천명 가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시에 도륙하는 엄중한 심판을 시행하십니다(출32:28). 주동자 몇 명을 본보기로 문책하신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열방 중의 한 나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열국 중에서 택하신 선민(選民)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선취적(先取的)으로 현시하고 운반하고 건설해야 하는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서 막중한 계시적 책임을 담당할 자들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사적 계시원리는 오늘날 성도들에게 구약계시의 실질로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원리이며 원칙입니다(벧전2:9). 본 사건만이 아닙니다. 레위의 후손인 고라와 그를 추종하는 일단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대항해 반기를 든 사건이 민161-3에 소개됩니다. 민수기 저자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소상하게 기록하면서 이들 뿐 아니라 이들에게 속한 가족들까지를 포함해서 다수를 공동의 연대책임을 물어서 땅속에 생매장하는 방식을 통해 처단하시는 내용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이 사건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세 가지 측면에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합니다. 먼저 모세와 아론은 지금 백성들의 대표자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대리자로의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고라와 그의 일당들은 이들 임무가 신적 기원에 따른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미쳐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나 아론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회중 중에 한 사람으로 여긴 나머지 모세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시기와 질투가 눈을 가리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은혜로 주시는 은사의 다양성과 직임의 차별성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모세와 아론의 직임이 신적 기원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대항하는 고라의 행동이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나 다름없는 반역적 처사라는 사실입니다. 고라는 지금 모세와 아론을 자신과 동일시한 나머지 인간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그들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의 실상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고라는 대결과 대항과 반목이 아닌 적극적인 순종과 협력을 통해 구속사를 집행(執行)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기쁨으로 동참했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한 나라와 백성으로서 여호와 신앙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한사람의 잘못은 곧 다수와 전체의 잘못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마련입니다. 이는 자연히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로 발전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소수의 잘못과 범죄에 대해 공동체적으로 책임을 물으시는 경우를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한 후 전리품 몇 가지를 숨긴 사실로 인해 아간과 그의 가족들과 심지어 그에게 속한 가축들조차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수7:20-26). 가데스바네아 회귀사건은 어떻습니까? 열 사람의 정탐꾼이 전한 오보(誤報)로 인해 이스라엘 전체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 방황하는 가운데 급기야 출애굽 일 세대 모두가 광야에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값비싼 불순종의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민14:30-34). 민족적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언제나 민족공동체적으로 존재했으며 여김을 받았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의 경우에 있어서 뿐 아니라 출애굽 구원사건의 경우도, 그리고 마침내 사십 년 광야생활 후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에도 이스라엘은 항상 나라와 민족공동체적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설명과 내용을 통해 신구약의 모든 구속사적 성경역사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개인이 아닌 전체와 공동체로 부르시고, 다루시고, 인도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잃어버린 자들을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유기적으로 연합시켜 함께 주님의 몸 된 지역교회공동체를 이루게 하시는 가운데(고전12:13, 27 - 보이는 교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인 우주적 보편의 교회(엡2:21-22 - 보이지 않는 교회), 곧 하늘의 예루살렘으로 지어져가게 하십니다(히12:22-23, 계21:2-3, 9-10). 주님의 온전한 몸으로 말입니다. 공동체적으로 말입니다. 교회의 성격을 얘기할 때 다양성 뿐 아니라 일체성(연합성)과 통일성을 아울러 말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 벧전2:9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특별한 목표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Called to)
하나님의 구원에는 목적뿐만 아니라 목표도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을 출애굽 시키신 구원사건 속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로 인도하시려는 당초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에 하나님 나라라는 신정왕국을 가시적으로 건설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제사장나라로서의 사명과 직분을 감당케 하심으로 열국을 하나님께로 인도해 동일하게 구원하시려는 구속사적인 목적과 경륜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가운데서 성취시켜 나가시고자 열방 중에 적은 무리인 이스라엘을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계시적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 인간편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펴봅니다. 이는 우리의 마땅히 행할 바 신앙의 참된 도리와 방향성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줄 압니다.
먼저 아브라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성격은 미래적인 기업에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곧 약속의 가나안 땅 말입니다. 히11:8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사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서 이 약속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통해서 그에게 주신 미래적 기업으로서의 가나안 땅은 처음부터 현세적인 것이 아닌 내세적이고 영적이며 천상적인 성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복음의 빛 안에서 성령의 내적 조명을 통해 밝히 드러냅니다. 히11:10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이 성이 무슨 성이며 어디 있는 성일까요? 히 11:15-16입니다.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다시 말해 10절의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성(城)이란 16절에서 지적하는 바 더 나은 본향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곧 천상의 도성(都城)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의 약속의 자녀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기업이 가시적인 가나안 땅이 아니라 종말론적 본향인 하나님 나라인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봤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11:13). 그렇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자녀들은 가나안 땅 너머에 있는 언약의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나그네 같은 심정으로 타향살이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언약과 계시가 이중 구조적(예표-실체, 현세적-내세적, 현재적-종말론적, 지상적-천상적, 가시적-불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깨닫는 일은 성경을 총체적인 입장에서 바르게 해명할 수 있는 첩경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크신 구속의 경륜 가운데로 불러내실 때 거기에는 분명한 미래적이고 종말론 적인 목표가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과 이것의 계시적 실체인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이와 같은 구속사적 부르심은 비단 아브라함과 그의 약속의 자녀들뿐만이 아닙니다. 그에게 부속돼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약역사 속에서 출현한 이스라엘도 동일한 언약 아래서 같은 목표를 추구할 자들로 애굽으로부터 불러냄을 받게 됩니다. 출6:8입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들인 교회는 어떻습니까? 갈라디아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참 된 후손을 표면적인 혈통적 후손으로 보지 않습니다. 새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이면적 신약의 성도들(유대인+이방인)을 진정한 새 이스라엘로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해석합니다(갈3:7, 29). 따라서 이들 모두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동일한 성격의 언약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로 연합돼 같은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엡3:6입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성령의 인침(엡1:13)과 내주하심(고후1:22)의 역사는 이상의 사실을 가능케 하는 보증이며 첫 분할금(installment)이 됩니다. 마6:33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과 하나님의 법도를 좇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이 신약성도들의 신앙의 도리이며 목표라고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복음서에서 기술합니다. 엡2:10절에서 저자는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선한 일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딛2:14에서는 '선한 일에 열심하는 하나님의 친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말합니다. 벧전2:9에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케 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딤전6:12에서는 '영생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고 지적하면서 부단히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신구약을 막론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신 데는 합당한 이유와 목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곧 미래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미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하고 탁월한 천상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며 확장시켜 나가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들을 어떻게 무엇을 통해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가 하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적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구현해 내는 것을 통해 현시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공동체는 단순한 기독교적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늘의 총회에 속한 천국백성들의 모임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천상의 시민들의 회집(會集)입니다(빌3;20). 곧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하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에베소서기자는 이 교회를 일컬어 '새로운 사회공동체'로 부르고 있습니다(엡2:14-15). 세상에 존재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생명과 법도로만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천상적 공동체 말입니다. 따라서 교회적 신앙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모습으로 만 나타나져야 함이 마땅한 이치입니다. 교회의 본질이 이렇습니다.
3.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 성경이 자증(自證)하는 네 가지 국면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 가운데서 은혜 가운데 섭리적으로 불러내셔서 함께 교회를 이루게 하신 데는 합당한 이유와 목표와 목적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적으로 불러내셔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하나님의 심정에 합한 성경적 교회상을 몸의 형태로 추구하며 구현해 내는 것이 사실상 바람직한 기독교신앙의 본질이며 신앙의 자태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통해 볼진대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호의적인 관심을 가진 일단의 무리들이 지적인 동의아래 개인적으로 모여 이루어진 집합으로서의 종교단체가 아닙니다. 각종 다양한 연중 행사계획과 치밀하게 사전 준비된 프로그램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때를 좇아 초청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기독교적 조직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적 원리에 의해 합당한 내용과 형식이 충족돼야 합니다.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돼 유기적으로 몸을 이루는 가운데 주님의 생명과 인격을 소유한 자들로 선(先)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이후 일체의 삶이 오직 그 분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인생의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들로 나타나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물론이며 교회공동체적으로도 이런 삶의 성격이 총체적으로 현시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오늘도 세상 가운데 머물게 하시는 가운데, 공중권세 잡은 흑암의 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전투하는 교회원들로 살아가게 하시는지를 밝히 해명할 줄 알 뿐 아니라, 거기에 합당히 자신의 삶을 드려가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깨닫는 자들로 서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본질적인 영적 의식의 변화와 발상의 전환 속에서만이 합당한 교회적 자태가 공동체적으로 정당(正當)하게 발휘되게 되는 법입니다. 합당한 예배, 합당한 찬양, 합당한 기도, 합당한 성경공부, 합당한 구제와 봉사, 합당한 전도와 선교 등등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적 상황에서 보편화 돼 가는 교회의 세속화와 신앙의 기복화 현상은 바로 정당한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교회관의 부족과 이에 따른 신앙관의 왜곡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실상 교회진리는 하나님의 전 구속사의 경륜에 있어서 계시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오해와 왜곡은 자연히 신앙의 외도를 부추기게 마련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입니다. 따라서 이 시대에 교회갱신과 신앙의 회복은 무엇에 앞 서 말씀의 정당한 회복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4).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첫댓글 교회개혁 포럼 공간의 원할한 토론을 위해 성서적 교회를 잘나타내고 있는 글하나를 올려봅니다..교회의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교회개혁은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것이기 때문에.. 개혁을 위한 포럼공간인 만큼 성서적 교회관을 모두가 확고히 하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 하나님...(에클레시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지죠. 그러니 우리에 마음이 성전입니다. 그러나 교회건물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죠. 우리마음에 하나님나라가 임해야 하고 우리 이땅에도 하나님나라가 임해야죠. 둘다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동감합니다. ^^ 둘다 너무나 소중합니다.
바른 말씀이십니다.
교회건물이 하나님의 거룩한 장소라는 설명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주변에 제대로 신학을 하신 분께 물어보십시오. 그것을 모르고서는 목사고시에 합격할 수 없을 테니까요.
향기님 교회건물이 더러운 장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게시판 중에 전체멜방..공지로 걸려있는 교회론에 대한 글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얼렁뚱당 대충 그럴것이라고 추정하는 것과 성경적인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더럽다, 거룩하다는 말로 표현되어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속이기 위한 포석일 뿐입니다.
거룩과 구분에 대해서 뭔가 오해가 있는듯 합니다. 제가 말하는 거룩은 향기님이 늘 부정하는 그런 교회건물이 아닙니다. 향기님께 충고할 자격은 없지만..향기님안에는 교회에 대한 상처라는 돌이 아주 많이 박혀 있어서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못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가끔듭니다..빨리 돌을을 갈아내길 기도 할께요..죄송
더럽다는 표현은 써서 죄송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다가 갈때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교회건물을 우상시하여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전 ...거룩과 구분을 잘분별 하자는 것입니다.
윗글에 교회론을 올렸는데도...교회당과 교회를 혼돈하시는 분은 여전하시네요...
교회와 교회당을 구별못하는 색맹(?)이 있을까요 교회당을 폄하하려는 의견에 동의못하는 것이지요? 보아하니 어디 신학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신학자들이 다 버려놨구만
물론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이건 너무 당연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마음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룩된 장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모세에게 신을 벗어라고 했겠습니까. 거룩과 구분의..삶은 우리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나라는 무법천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산.....하나님께서 교회건물에 임재한다???
몽구스님 하나님의 일터에도 임재 하시는데요.루터인가 칼빈의 말도 못들었나요..일터 가정등등...하나님은 어디에서나 임재 하시죠. 몽구스님..근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산이 무슨 뜻인가요......???예전신천지에서 한번 들어 본것 같은데...
소리꾼님은 자신의 편견으로 상대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함으로써.... 본론을 호도하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치시는 것이 바람직할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산?" 은 소리꾼님이 말한 건데..눈치채지 못하고 마치 몽구스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계시기도 하구요. 장소로써의 거룩은 구약에 한정됩니다. 기독교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나 건물을 갖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들을 갖게 될 뿐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비본질을 본질되게 하려는 것은 진리를 왜곡하는 일 일뿐입니다.
향기님...죄송한데요...신학부와 신대원 어디나오셨는지 궁금합니다...혹시 무교회 주의자...?
개혁주의 교회론을 소개하면 자주듣는말이 무교회주의라는 말입니다 대체 이단어는 누가 만들었는지...無교회주의자? 교회를 없에자는 사람들인가요??교회당을 성전화 하지 말자는것을 무교회주의라고 호도하면 막막해지죠......
무교회주의는 무슨뜻인가요??
주일학교에서 어느 초등생이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의 홍해의 기적은 밀물,썰물의 조류에 의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신학자가 쓴 책을 봤는데요" 그 때 선생님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그럼 바로의 군사들은 어떻게 쫓아와서 수장되었지?" 성경보다 신학 교과 내용이 먼저인가 정신차리세요 성경과
배치되는 신학 논문도 부지기수인데.. 그걸 모르면 문제가 되는냥..? 향기님 자중하시죠 그 지식으로 망할까걱정됩니다
향기님의 넘치는 지식을 다 100%인정한다면 그순간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들은 위선자에,사기꾼에, 거짓말장이 중죄인이 되는건가요?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그렇게 배워놓고 자교회와서는 다르게 적용한다는거 아닌가?
하늘사랑21님,너무 치우치는듯합니다. 만약 님이보기에 다르다 하여도 타인이 말한 내용을 상고해보고 그에맞게 반론을 펴야지 자기주장만 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말하는것을 좀 쉴 필요가 있다고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