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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북한 공군 군관의 수기를 연재합니다. 이 수기는 2001년 중국에서 씌어진 것으로 수기 주인공의 이후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북한을 탈출한 전 인민군 군관 상위 박태용이다.
나이는 서른 살, 고향은 평양시 모란봉구역, 제도와 주의 주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독재를 숭배하는 제1선의 총알받이로 젊은 혈기를 키웠던 나다.
살 수가 없어 탈북하면서도 세상 보는 ‘눈’이 어두웠던 나에게, 이국땅은 눈을 띄워 주었다. 눈을 조금씩 뜨니 나의 북한 생활이 다시금 돌이켜 짐과 함께 그 실상을 알리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다. 남북의 군이 서로 마주서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내가 북한에서 겪은 일들과 체험들이 한국이나 국외에서 자못 관심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진솔한 마음으로 피력하는 이 글이 아무쪼록 북한을 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내놓으니, 국내나 국외에 사는 동포들 모두가 반갑게 읽어주시기 바란다. 1.21사건의 생존자 김도연 여단장 나는 1970년에 평양시 모란봉구역 비파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구역 행정위원회에서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구역도서관에서 근무 하셨다.
모란봉구역 비파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1986년 8월에 학교 당국의 강박 강압으로 군 ‘집체 탄원’ 바람에 걸려들었다.
평양외국어대학을 목표로 공부했던 나에게 뜻밖의 암초였지만 피할 길이 없었다.
구역 당 위원회와 학교 당국의 강박으로 우리 졸업생들은 집체적으로 군에 입대할 ‘맹세문’을 써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앞으로 올렸다.
학교 당국은 김정일의 감사문을 받았지만, 우리 졸업생들 150명은 울며 겨자먹기로 군에 강제 입대하게 되었다. 물론 북한 헌법에 군복무는 의무적이라 하지만 이건 강제 ‘의무병역제’였다. 부모님들도 외아들인 나를 대학 공부시키려고 하던 꿈이 수포로 돌아가 한숨만 내쉬었다.
그런 부모님께서 바라는 건 꼭 건강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라는 부탁이었다. 군에 모집된 우리는 평양시 군사 동원부에 갔는데 예상외의 환영을 받았다.
‘자원탄원’한 우리에게 향한 접대였다. 군사동원부는 특별우대로 거의 1000명 가량 붐비는 초보생들 속에서도 우리에게 먼저 가고 싶은 병종을 고르라고 우선권을 부여했다. 나는 평양과 멀리 떨어지고 싶지 않아 평양시 옆의 황주 비행장 부대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나의 제기는 수락되어 이해 8월에 조선인민 공군사령부 제3비행사단 직속 통신결속소에 배치되었다. 당시 우리 집과 안면이 있는 북한군 제11여단장은 1968년께 한국에서 소란을 일으킨 북한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사건 당시 게릴라로 참가하였다가 배에 총상을 입고 터져 나온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빠져 나온 김도연이었다. 부대안의 소문은 그가 서울 버스주차장에서 경찰 30명과 격투를 벌였는데 지지 않고 도망쳐, 김일성으로부터 ‘일당백’ 상과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 받았다 한다.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신병훈련만 잘 마치면 그 김도연이가 꼭 좋은 곳에 배치해 준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공군사령부 제3비행사단 통신결속소에서 신입병사 훈련을 받게 되었다. 통신결속소는 6개의 무전, 유선 중대로 구성된 대대보다 규모가 좀 큰 부대였다.
신병 훈련은 70명 정도가 교육받았는데 습관되지 않는 규율생활에 적응하자니 정말 힘이 들었다. 신병들은 중국 군인들처럼 개별 침대가 아니라, 큰 함짝 같은 것을 짜서, 그 위에 널판자를 깐 뒤 다시 그 위에 볏겨를 넣은 마다라스(매트리스)를 놓고 자곤 하였다. 이렇게 잇달아 누운 침대에선 볏겨 먼지가 풀썩풀썩 일곤 하였다.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열리지 않는 눈을 비벼 열고, 달리기와 격술을 하고 나면 온 몸이 나른해지곤 하였다. 하루 종일 대열, 체육, 격술 훈련에 겨우 따라다니다시피 하였다. 북한군에서는 태권도 훈련을 격술훈련이라고 호칭하는데, 격술은 태권도 종목과는 좀 달리 눈알빼기, 목 울대치기 등 반칙에 속하는 야만적인 동작이다.
신병 훈련은 거의 고정 격식화되어 있었다. 오전 정치상학 학습 2시간, 대열 훈련 2시간, 체육훈련 1시간이다. 오후에는 또 대열훈련 1시간, 태권도 훈련 2시간을 하곤 하였다.
6개월간 신병훈련 정치 상학 시간에는 김일성과 그 후계자 김정일이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분이라는 그때 어린 그 당시에도 듣기 거북할 정도로 과장된 ‘혁명업적’들을 배웠다. 또 북한군이 역사와 발전 과정에 대한 학습도 들었는데 모두 김일성과 김정일이가 현명하게 이끌었다는 내용이 90%를 차지했다. 주목할 것은 6.25 전쟁을 미군과 한국군이 도발했으며 오늘도 북한을 먹어보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것인데, 어찌나 매일 매시각 삽입하는지 골수에 사무칠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6.25 전쟁 발발의 배경을 말하라면,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줄줄이 토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다. 덜레스의 한국 행각, 덜레스와 이승만의 분계선 시찰, 6.25 전날 미 국방성 고위관리들의 도쿄 휴양, 6.25 당일 북한 쪽 50리 구간을 밀고 들어 온 국방군의 진격…. 하지만 이국땅에서 책을 보고 방송을 들으니, 사실은 전도 된듯하다. 김일성과 스탈린의 회담, 북한군의 분계선 무력집결,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한 후방의 예비군조직, 북한군의 무력 증강. 나 자체로 판단해 보건대 확실히 6.25 전쟁도발은 북한 쪽에서 일으켰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신병훈련 중에서 대열 훈련이 제일 힘이 들었다. 내리 쪼이는 태양열에 달아 오른 운동장에서 소련식으로 발을 60㎝이상 올려 정보로 걷는 훈련을 하고 나면 다리에 쥐가 올라 잠을 못잘 지경이었다. 반대로 운동체질이 되어서 그런지, 손발을 건들건들 놀리는 격술이나 체육동작은 흥미도 있었고 힘들지 앉았다. 잘못하면 기합만 돌아오는 지긋지긋한 신병훈련은 6개월간이 흘러 마감 짓게 되었다.
신병훈련은 군복무를 거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마 제일 힘든 고비였을 것이다. 부대에서 한달에 한번씩, 명절을 계기로 삼거나 아니면 다른 조건으로 ‘특식’을 치려 주곤 하였다. 특식이란 살코기는 다 어디 달아나고, 주먹만한 비곗덩이가 한두 개씩 떠오르는 돼지고기국에 쌀밥이었다. 신의주 쪽을 거쳐 중국에서 들여보낸 냉동한 이 비육 돼지고기들은 우리 신병대원들을 절반쯤 죽여주었다.
한창 먹을 나이에 부모의 품을 떠나 염장무나 배추에 쌀을 조금 섞은 통밀밥을 먹으며 훈련하는 어린 신병들은 모두 굶주린 이리떼 같았다. 오래 간만에 차려지는 절호의 기회라 모두 주먹만한 비곗덩이를 한 사발씩 먹고는 열이 나 타는 속안을 달래느라 냉수를 몇 사발씩 들이키곤 하였다. 식사가 끝나 얼마 지나면 열명 정도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부대 변소에 부대 군인들이 일렬종대로 기다리는데 가관이다.
거개가 신병들이었는데 거기에 구대원들까지 섞여 있어, 모두 너무 바빠 바지춤을 쥐고 발을 동동 구르곤 하였다. 기다리기에 지치니, 화장실로 들어가는 병사들은 모두 사타구니에 물찬 것처럼 오리걸음으로 기우뚱거리며 걸어 들어가곤 하였다. 열악한 식량공급에 내모는 훈련은 병사들을 속이 텅 빈 쇠약한 체력만 가지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북한이 식량난에 그렇게 허덕이지는 않았을 때였다. 훈련을 마치고 정식으로 부대에 배치 받으면서 우리는 군인 선서를 다졌다.
군인 선서 내용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목숨바쳐 보위하고 사회주의를 무력으로 옹호하겠다는 것과, 우리 대에 조국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싸움’에 나서서 한 몸 바치겠다는 것이다. 또 전투에서 적에게 포로 가 되지 않고 자결하겠다는 내용이다. 군인 선서를 마치니 김도연은 약속대로 나를 제 3비행사단장의 타자수로 배치해 주었다. 제3비행사단은 황해북도 황주군 읍 옆에 위치한 황주비행장을 둘러싸고 부대가 전개되어 있었다. 황주 비행장은 북한 공군 사령부 소속의 최전연 전투기를 움직이는 전방 비행장으로 평양을 지켜선 관문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국으로 말하면 아마 김포 비행장과 거의 맞먹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배치 받은 사단장 타자수라는 직무는 공군 사령부의 각종 명령과 그 하달을 타자로 쳐서 인쇄화된 문건을, 사단장과 작전부서들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사단장 타자수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한 개 분대였다. 당시 우리 사단장은 북한이 월남 전쟁 당시 비행사들을 파견하여 지원하고 있을 때, 월남 파병 비행사로 가서 미국 비행기 세 대를 쏴 떨구었다는 월남 영웅 겸 북한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받은 박남형이었다 묘지밥 우리 타자수분대는 통신 결속에 귀속되어 일체 훈련과 군무 생활을 통재 받게 되었다, 처음 신대원으로 배치 받으니 청소란 청소는 도맡아 놓고 해야 했다. 군대라는 것이 내리 지시로 움직이다 보니 심부름도 역시 도맡아 해야 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일 그리운 것은 잠이었다.
나는 그 시절에 사람이 인간 생활에서 제가 바쁘고 고달프면, 부모형제들에게 편지도 하고 감정의 교류를 함께 나누고 싶어 함을 느꼈다. 후에(훗날) 군복무 생활이 헐해지고(쉬워지고) 익숙하게 되어 편안해지니 편지도 하게 되었다. 우리 식사는 주로 절인 배추를 비롯한 절인 남새류들을 볶은 것에 옥수수나 통밀을 절반쯤 섞은 밥이 주식이었다. 취사원은 없이 군인들이 순번으로 돌아가며 자체로 밥을 지어먹었다. 항상 모자라는 남새로 인해 매끼 두세 가지 반찬을 한 젓가락씩 놓아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식량은 하루 800그램 공급한다.
하지만 위의 군관들로부터 내려오며 층층이 떼어 먹어, 늄 밥식기가 항상 곯군 하였다. 그래서 병사들에게 차려지는 밥 이름도 각이하다. ‘폭탄밥, 골짜기밥, 수평치기 밥, 묘지밥’ 등이다. 이 중에서 불룩한 묘지밥이 차려지면 군인들은 제일 좋아한다. 작은 밥량으로 인하여, 군인들 속에서는 별 해괴망칙한 일이 다 벌어졌다. 넓은 식당으로 들어갈 때 먼저 열을 서서 들어가는 군인들은, 벗어든 모자 안에 식탁에 미리 차려 놓은 아무 밥그릇을 연속 엎어 가지고 들어가 슬그머니 자기 밥그릇에 덧씌워 놓곤 했다. 이 현상 때문에 식당 안은 없어진 밥 그릇 찾기로 항상 소란하고, 식당 직일관들은 두 눈을 부릅떴지만 ‘소란’은 그칠 사이 없었다. 배가 고프니 어린 신대원들은 ‘취침’시간이 돌아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식당 주변을 맴돌곤 하였다. 남은 밥이나 누룽지라도 얻어먹을까 해서였다. 내가 군복무를 시작하면서 끝마칠 때까지 인상에 남는 것은 인민군 협주단과 공군 선전대의 공연이었다. 그들은 자주 한국을 풍자하는 공연종목을 가져와 공연하곤 하였는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때가 반질반질한 국군복에 모자를 비뜰어지게 쓴, 전라도 태생 사병과 경기도 태생 사병이 나와 재담을 엮어간다.
“야 임마, 니 취사 당번 나가면 나 좀 누룽지 달라는 기여, 나도 기회 있으면 너한테 누룽지 그만큼 주겠다는 기여.”
이때 다른 사병 하나가 식당에서 누룽지를 훔쳐 가지고 뛰어나와 먹어댄다. 굶주렸던 사병들은 서로 누룽이를 놓고 꼬집기내기를 벌이며 빼앗기를 한다.
“야 이 꽁초다리야 .보리밥 누룽지는 내가 훔친거란 말이야”
“임 마 , 누룽지에 네 이름 붙여 놨는기여.”
“이 씨팔 새끼들아, 누룽지가 없으면 내 배는 병 걸린다.”
이런 재담 형식을 너무 많이 보고 들어 우리 군인들의 머리 속에는, 한국군이 모두 보리밥에 멀건 소금국 먹는 줄로 인식 되어 있다. 한국군에 대한 인식 북한 군인들에게 가장 크게 인식되는 것은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다. 미국의 조선 침략전쟁사와 그 참상, 결과를 모든 군인들이 무조건 암기하게 만든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통일의 장애물이며, 한반도의 절반 땅을 만들고 북한땅을 마저 먹어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식의 교육이다. 적개심 교육을 위해 군에서는 하루 평균 2시간을 소비하군 한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미제 침략자들을 소탕하라’는 구호를 합창하고 훈련을 해야 한다.
한국군에 대해서는 좀 아량적이고 관대하다. 미국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허수아비’ 군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군인들은 미국에 대해서는 모두 반사적으로 악랄한 마음을 품고, 끝까지 싸움해야 된다지만 한국군은 얼마든지 쉽게 ‘제낄수’ 있는 군으로 인식되어 있다.
이러한 교육이 군인들이 진행하는 학습 토론에 그대로 반영된다. 수백 명 군인들이 모인 토론회 마당에서 집행하는 군관이 나서 군인들에게 전문한다. “미제 침략자들을 어떻게 해야 하오?”
모두 한결 같은 대답이다.
“예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무조건 철저히 없애 버려야 합니다!”
“남조선괴뢰군은 어떻게 해야 하오?”
북한에서는 한국군을 ‘남조선괴뢰군’이라 부르고 있다.
대답은 각양각색이다.
“예, 손들지 않으면 총으로 쏘아 버리겠습니다.”
“함화 귀순 공작을 들이대 투항시키겠습니다.”
“예, 사병들은 투항하라고 권고하고 장교들은 모조리 쏘아 버리겠습니다.” 이것이 현 북한 군인들의 한국군에 대한 관점이다. 북한군에서는 아직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인식을 주지 못하고 있다. 왜냐 하면 같은 동족을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반민족적인 감정을 주입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군 복무 시작부터 군관으로 자라기까지 인식하는 한국군에 대한 관점도 이러하다. 마주서 싸움하면 같이하고, 서로 양보하면 같이 하고, 악질적으로 놀면 같이 악질처럼 놀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이 어쩌면 옳은 것 같다.
제 민족을 죽여 봤자, 없어지고 녹을 건 제 민족뿐이기 때문이다. 203연대에만 월남전 참전 비행사 50명 우리 타자수 분대는 통신결속소 제4중대에 소속되어 검사와 식사, 군무 생활 총화를 짓곤 하였다. 4중대는 유선 통신들을 조작하는 남자 두 개 소대와 여자 교환소대 , 여자 전신소대로 되어있었다. 군의 하루 정규 생활이 시작되는 아침 검사는 까다롭기 짝이 없다. 항상 목달개를 새것으로 달아야 했고, 모표를 반짝반짝 닦아야 했으며, 더워도 목단추를 하나 풀어놓지 못하고 서로 서로 검사하여 시정해야 했다. 우스운 것은 나란히 선 여자들의 아침 검사였다. 곁눈질해 보면 손톱검열을 할 때 월경날이 된 여자 군인들은 손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손바닥을 보이게 되어있다. 그러면 군무생활에서 빠져 그날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게 되어있다. 남자 군인들은 아침 검사 때면 흘끗 흘끗 곁눈질 해보고, 그런 여자들을 발견하는 것을 흥미로 여긴다
“저 계집애 또 고장났구나?”
“나도 아래에서 뭘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땅땅 마르기만 하니 야단 아니야.” 말썽 많은 군인들은 여군인들의 월경날짜를 완전히 통달하고 있다. 우리 통신근무 장소는 유사시 적의 습격을 피한다고 갱도 안에 있었다. 갱도는 비행장 옆 큰 산에 통째로 굴을 뚫어 만든 것이다. 유사시 1000명은 수용할 수 있게 각종 지휘, 작전, 통신시설을 갖춘 대형 갱도 안에 있다 나오면 무릎 관절과 허리 통증이 심하게 왔다.
여기에서 복무하다가 제대하는 군인들은 거의 관절염이나 신경통 후유증을 가지고 갔다. 우리 타자수들은 부대 안의 각종 명령, 지시를 타자로 새기다 보니 부대안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덕에 항상 입을 다물도록 부대 보위 지도원들의 엄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 나는 보위 지도원들의 요구에 의해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서’에 군복무간 몇 년이나 지장을 찍었다. 황주 비행장은 김일성 부자의 사냥터 황주 비행장은 북한 비행장의 모든 시범 훈련을 도맡아 놓고 진행하여,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대표단이 오면 으레 시범비행을 진행하곤 하였다. 나는 군복무 과정에 김정일의 2회에 걸친 부대 지도와, 전 무력부장 오진우의 열댓 번도 넘는 부대 지도를 목격하였다 후에 3비행사단을 군단 병력과 거의 맞먹는 3비행전단으로 승격시키면서, 북한에서 ‘항일 투사’로 권력을 부리던 오백용의 맏아들을 김정일이가 직접 전단장으로 임명해 내려 보냈다.
3비행사단은 최전선인 황해북도 과일군과 태탄군에 각각 비행연대를 배치하고 비행장을 부설해 놓았다. 여기서는 한국의 섬 백령도를 비롯한 조선 서해의 해상봉쇄와, 개성 이남을 조준한 출격 태세를 항상 갖추고 있다. 이외에도 각 미사일 3개 연대들을 더 가지고 있다. 또 황주비행장 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냥터이기도 하다. 비행장안에는 1000마리 정도 되는 꿩과 50마리 가량의 사슴과 노루를 기르고 있었다.
우리 군인들도 모르게 김일성과 김정일은 비행장에 와서 하루 사냥을 즐기고 가곤하여 비행장안에는 그들의 별장까지 따로 지어놓고 있다. 나의 군복무는 이 드넓은 비행장 안의 풀 다듬기와 청소로 거의 절반을 보냈다고 말 할 수 있다. 출처: 탈북자동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