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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강산[小金剛山] 143m 경북 경주
산줄기 : 형남시루소금강단맥
들머리 : 용강초교
위치 경북 경주시
높이 143m
♣이차돈 순교의 넋 '金剛'되어 머물러. 해발 143m 야산 3시간 원점회귀 코스 개척.
백률사· 굴불사 등 유적 즐비, 신라불교 성지. 추석 연휴 가족 · 친구와 함께 부담없는 산행.
소금강산(小金剛山).
이름에서 느껴지듯 수려한 기암괴석과 빼어난 산세 및 주변 경관으로 예부터 시인묵객들이 몰려와 시를 읊으며 노닐던
명산으로 연상된다.
국립공원인 영암 월출산과 속리산을 위시해 남해의 금산, 봉화의 청량산, 양산의 천성산 등이 하나같이 소금강산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경주의 소금강산은 별칭이 아니라 아예 이름이다. 입구 산안내도에는 금강산과 견줄 만한 아름다움에서 유래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견해를 달리하는 목소리도 있다.
경주 동국대 박물관 김호상 연구원은 "소금강산은 아름다움도 빼어나지만 신라 불교 공인의 계기가 됐던 이차돈의 넋이
어린 신령스러운 곳으로 신라 불교의 성지"라고 말했다. 신라 법흥왕 때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차돈이 순교라는 방법을
택했을 때 그가 예언한 것처럼 흰 피를 흘리며 목이 하늘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진 곳이 이곳 소금강산이다.
이에 탄복한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함은 물론이요,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곳 소금강산에 자추사를 세웠으며 후에
백률사로 이름이 변했다. 소금강산에서 발굴된 이차돈 순교공양비는 현재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김 연구원은 "이런 연유로 소금강산의 '금강'은 변하지 않는 진리 또는 불법(佛法)이란 불교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다"
고 말했다.
연휴때 가족과 함께 부담없이 떠날 수 있는 경주 소금강산을 찾았다. 비록 해발 143m에 불과하지만 산행팀은 이웃 능선을
연결해 3시간 안팎의 원점회귀 코스를 만들었다. 완주를 해도 좋고, 1시간 정도 산행후 백률사와 굴불사 사면석불을 구경
한 후 하산해도 좋다. 산행 후엔 분황사나 대릉원 첨성대 황룡사지 등 가까운 유적지를 덤으로 둘러볼 수도 있다.
산행은 승삼저수지 입구 주차장~고물상 옆 컨테이너 가건물~전망대~체육공원~소금강산 정상~백률사~굴불사지 사면
석불~경주 김씨 부부묘~도로~예비군교장~잇단 철탑~금학산(297m·확트인 터 무덤)~삼거리 갈림길~사거리~철탑~
용강사슴목장~도로~승삼저수지~주차장 순.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고물상 옆 컨테이너 가건물 옆에 바로 산길이 열려있다. 제법 넓은 오르막길이자 동시에 소나무
길이다. 4분 정도 뒤 첫 갈림길에선 오른쪽으로 간다.
월성 이씨묘를 지나면서 자연스레 발걸음이 늦춰진다. 산죽과 소나무가 아직도 푸름을 자랑하며 맘껏 멋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곧 길 오른편에 전망대가 나온다. 발밑에는 방금 지나온 도로가 한 일자로 달리고, 왼쪽 10시 방향에는 선도산
이, 그 오른쪽에는 구미산이 펼쳐지고 그 앞쪽 봉우리가 옥녀봉이다. 체육공원이 이어진다. 10여명의 주부와 노부부가
운동을 하거나 쉬고 있다.
이제부터 만나는 길은 소나무길. 굴곡없이 편안해 마냥 걷고 싶은 길이다. 오른쪽은 경주시내가, 왼쪽은 우리가 달릴 또
다른 능선이다. 갑자기 푹 꺼지는 사거리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천태종 청광사, 오른쪽은 다불마을로 가는 길이다.
산행팀은 직진한다. 가버린 여름을 아쉬워하듯 아직도 매미울음소리가 들린다.
길은 이제 더욱더 운치있다. 소나무길에 예쁘장한 바위로 조경을 한듯하다. 여기에다 경주시가지는 더 넓게 펼쳐진다.
10분 뒤 또 다른 체육공원과 산불감시초소를 지나면 시나브로 정상이다.
해발고도가 낮다보니 들머리서 4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정상석은 없고 바닥에 삼각점이 박혀있다. 정작 정상은
나무에 가려 조망이 없다.
이어지는 산길은 두 갈래. 결국 만나지만 백률사를 쉽게 찾기 위해선 오른쪽길로 내려서자. 왼쪽길은 두 번의 갈림길을
거쳐야 한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서 나무사이로 백률사 대웅전 기와지붕이 보인다.
삼성각을 지나 계단을 내려서면 왼쪽이 대웅전, 정면에 요사채 범종루가 거의 잇따라 위치해 있다. 절 자체는 아담해 보
이지만 절 주변 대나무와 거대 수목의 위엄은 신라때 상당히 번창한 사찰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백률사에서 계단으로 3분 정도만 내려가면 굴불사지 사면석불. 신라 경덕왕이 백률사로 나들이하던 도중 땅속에서 이상
한 소리가 들려 파보게 하니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나왔던 것. 지금 절은 오간데 없고 사면석불만 남아있다. 사면
석불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 보살입상 11면관음보살상 등이 조각돼 있다. 신라 예술의 황금시대인 경덕왕 시대에 조각된
이 불상들은 섬세하기 그지없다. 사면불상 주위를 돌며 치성을 드리는 여인들이 네댓명 보인다.
문화유적 감상이 끝나면 '주차금지' 팻말 오른쪽 옆 산길로 다시 오른다. 7분 뒤 경주 김씨 부부묘를 지나면 갈림길.
오른쪽길로 방향을 잡고 숲을 지나 왼쪽 U자 방향으로 크게 돈다. 유난히 무덤이 많은 이곳 주위에는 추석을 앞두고
벌초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10여분 뒤 도로와 만난다. 눈앞은 예비군교장이다. 도로를 건너 유격장쪽으로 오른다. 이웃능선으로 갈아타는 길이다.
이 능선길은 앞서 온 능선길보다 인적이 드물어 묵은 길이다.
15분 뒤 철탑. 숲길 주변 트인 곳에는 때이른 억새가 바람에 날려 춤을 춘다. 제법 너른 터에서 가운데 무덤있는 곳에 닿
는다. 지도상의 금학산 정상이다. 두 갈래길 중 왼쪽으로 내려선다. 오른쪽 아파트쪽이 들머리이며 정면에 보이는 능선이
방금 지난온 길이다.
길찾기 유의할 곳이 나온다. 무덤에서 30m 지점 오른쪽에 풀숲에 가린 길을 찾는다. 이 길만 찾으면 이후부턴 길 찾기는
쉽다. 7분 정도 내려오면 삼거리 갈림길. 20m쯤 오른쪽길로 가다 왼쪽에 난 길로 방향을 바꾼다. 입구 나무에 파란 화살
표가 그려져 있다. 쓰러진 나무를 지나면 키작은 소나무가 촘촘한 좁은 길로 나아간다. 7분 뒤 사거리. 왼쪽으로 간다.
길따라 돌기둥이 서있다. 벌초된 무덤 2기를 지나면 갈림길. 다시 왼쪽으로 가서 철탑을 지나면 또 갈림길. 우측길로 계속
내려서면 정면에 승삼저수지가 보인다. 우측에 사슴농장. 여기서 도로까지는 2~3분, 도로에서 주차장까지는 10분 정도
걸린다.
#산행코스
○ 승삼저수지 입구 주차장~고물상 옆 컨테이너 가건물~전망대~체육공원~소금강산 정상~백률사~굴불사지 사면
석불~경주 김씨 부부묘~도로~예비군교장~잇단 철탑~금학산(297m·확트인 터 무덤)~삼거리 갈림길~사거리~철탑~
용강사슴목장~도로~승삼저수지~주차장.
#주변볼거리
경주 五岳중 하나 빼어난 절경 자랑. 굴불사 사면석불 정교한 조각 예술.
산을 높이로만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경주의 소금강산과 이어지는 금학산은 비록 해발 100~200m의 뒷동산 높이에
불과하지만 국립공원 소금강산권에 올라있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빼어난 절경이 입증되는 셈.
소금강산은 삼국통일 이전에는 토함산(동악) 선도산(서악) 남산(남악) 낭산(중악)과 함께 경주의 오악(五岳) 중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불렸으며 서라벌을 지키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소금강산 기슭에 위치한 백률사는 이차돈과 함께 잘 알려져 있어 많은 불교신자들이 찾고 있다.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운
추억을 더듬으며 자녀와 함께 찾아볼 좋은 기회이다.
백률사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정교한 예술품인 보물 제121호 굴불사 사면석불 또한 놓쳐선 안될 산행의 덤이다.
소금강산의 줄기를 따라가면 신라 6부장의 하나인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을 모신 표암제와 탈해왕릉 등 신라문화 부흥의
볼거리가 산재해 있으니 출발전 꼼꼼히 준비해 많은 것을 효율적으로 보도록 한다.
금학산 이후의 산길은 조금 거친 편이다. 자녀를 동반한 산행이라면 백률사까지만 해도 된다. 또는 금학산까지 올라 왼쪽
길로 내려서면 산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철탑을 따라 하산하면 다불마을로 내려서고 오른쪽 승삼마을로 시골길을 따라
가면 수확을 앞둔 벼와 과실 들꽃 등 가을정취를 맛볼 수 있다.
#들머리안내
*부산서 경주행 버스 15분간격 운행. 터미널서 포항방면 용강초등 하차
*부산 노포동종합터미널(051-508-9966)에서 경주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는 오전 5시30분부터 15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4000원.
*경주시외버스터미널 옆 버스정류장에서 안강행 217, 212번 버스를 타고 근화여고를 지나 용강초등학교 앞에서 내린다.
용강초등에서 담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5분 정도 걸으면 들머리인 승삼저수지 앞 주차장에 닿는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 바로 옆 경주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 버스정류장 50, 51번 버스를 타고 역시 용강초등학교 앞 하차.
800원. 이 노선 모두 막차가 밤 9시대까지 있다.
*경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 노포동종합터미널까지 시외버스는 15분마다 있으며 막차는 밤 9시.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경주 IC~포항 7번 국도 직진~보문단지 입구 지나~백률사
굴불사 직진~탈해왕릉 직진~울진 포항 7번 국도 우회전~육교 지나 경주 동국대 한방병원 우회전(우회전시 정면에
대구은행 큰 간판)~길따라 직진~승삼저수지 앞 주차장 순으로 가면 된다. [한국의 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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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산행기[사네드레]
양동마을과 흥덕왕릉의... 경주 소금강산(178.6m)
"내가 가는 길은 이미 순탄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예감한다. 길은 이미 정해져 있다. 해 지는 서해에서 해 뜨는 동해까지 천 년과 새천 년이 교차하는 그 시간 속에 우리가 가는 그 길이 얼마만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며 그 길에서 만나게 될 어둠이나 빛이나 그 미세한 소리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각양각색의 마음들이 염원들이 어떤 형태로 표출되고 숨죽이고 있을 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그렇다. 천 년의 마지막 해가 지는 것도 새천 년의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도 이미 예정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바램이나 우리들의 의식과는 어떠한 관련도 없을 것이다.
평해 월송정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두 시였다. 안동의 하회와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으로 나라 안에 이름난 양동은 경주에서 포항으로 16km쯤 가다 만나는 형산강 중하류에 있다. 이 마을에서, 조선 성리학의 정체성을 확립한 회재 이언적은 태어났다.
회암(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뜻에서 회재라 한 이언적(성종 22년, 1491년~명종 8년, 1553년)은 27세 때 영남학파의 선배인 손숙돈과 조한보의 무극태극논쟁에 뛰어들어 둘을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로써 조선 성리학은 중국 성리학에서 벗어나 독창적 철학을 가지게 되었으며 퇴계 이황에게 계승되어 오늘날 퇴계학이라는 세계적 문화유산을 창출해냈다.
가장 번창했던 17세기 무렵에는 육칠백여 채쯤 되었다던 양동마을은 1979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와집 124채와 초가집 27채가 있었다. 그 중에 집 세 채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무첨당 411호, 관가정 442호, 향단 412호) 서백당과 낙선당 등 열두 점의 중요민속자료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열두 점이 있다. 규모와 질에 있어서 우리의 전통한옥이 이렇게 밀집되어 있는 곳은 나라 안에 양동마을뿐인데도 그러나 경주 지역의 현란한 문화유산에 눌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나 알고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부슬부슬 내리던 이슬비도 멎고 새해 첫날 마지막 답사지인 흥덕왕릉에 도착한 것은 어둠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흥덕왕릉을 에워싼 솔숲은 나라 안의 여느 소나무숲과는 비교할 수가 없이 아름답다. 마치 라면가락이나 엿가락처럼 한 그루 한 그루가 휘어져 있고 길인가 숲속인가를 모를 나무 숲길을 걸어가면 왕릉에 닿는다.
이 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왕릉으로 꼽힌다. 더욱이 주목되는 것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상이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뭉툭하게 우뚝 솟은 서역인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는 시간에도 사소한 불행은 온다. 주차장에서 버스를 돌리다 뒷바퀴가 빠졌다는 것이다. 효종의 싯구처럼 "길은 먼데 해는 떨어진다." 날은 어두워지고... 어떻게 한다? 할 수 없지, 안되면 렉카차를 부를 수밖에...
그러나 운전기사는 남자들이 모두다 달려들면 빠져나올 것이라고 한다. 한 번 해보자. 어영차아! 차는 단번에 올라선다. 그래, 사람만이 희망이다.
둘쨋날 아침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온다. 언제 비 내렸냐는 듯이 하늘에는 구름만 조금 떠 있고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 앞을 흐르는 자계천의 물소리는 맑고 청아하다(이언적의 또다른 호가 자계옹이다). 층층을 이룬 반석 사이로 작은 폭포가 있고 그 가운데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느티나무, 회나무, 참나무, 벚나무들이 휩싸인 옥산서원의 정문 역락문이 나타난다. 논어 첫머리의 군자삼락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선조 때 학자 노수신이 지은 것이다.
24살에 문과에 급제한 회재는 벼슬길에 올라 문관의 총아 이조정랑, 요새의 검사 비슷한 사헌부장령, 밀양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조선 성리학의 큰 틀을 세웠다. 화담 서경덕과 쌍벽을 이루면서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퇴계의 성리학 연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중종 30년(1570년) 왕에게싫은 소리 하는 자리 사간으로서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좌천되어 이곳 자옥산 기슭에 은둔,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537년 다시 벼슬길에 나가 전주부윤,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그러나 명종 2년(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사후 그를사랑하던 영남의 사림들이 그가 은둔하였던 이곳에 서원을 짓고 1574년에 옥산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정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누각 무변루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고 구안당 정면에 걸려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에 쓴 글씨다. 그러나 아쉽게도 너무 이른 아침이라 서원은 닫혀 있고 우리의 여정은 정혜사지로 향한다.
도덕산 자락에 위치한 정혜사지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석탑과 함께 대표적인 이형석탑인 정혜사 13층석탑만 있다. 하서 김인후가 그의 시속에서 "해당화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동백꽃이 가가운 얼음 속에 오연하다" 고 노래했던 그 시절은 과연 어느 세월이었던가?
정혜사지 바로 아랫자락에 회재가 7년 동안 은거했던 사랑채 독락당이 있다. 보물41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집은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집과 계곡 사이에는 담장이 있는데 그 담장의 한 부분을 헐어내고 살창을 설치하여 대청에서 자계계곡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독락당 경내에는 계정이라 이름붙인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있다. 난간에 기대어 보면 자옥산과 자계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하나가 된다.
길은 원곡면 나원리석탑으로 이어진다. 신라 팔괴-남산부석, 문천도사, 계림황엽 등 경주의 여덟 가지 괴이한 것-중 하나인 이 석탑은 신라 초기의 탑인데도 불구하고 지금가지 순백색의 빛깔을 유지하고 있다.
신라탑으로는 보기 드물게 5층석탑이며 탑의 높이가 9.76m로 감은사지석탑과 고선사지석탑 다음으로 크다. 하층 기단 각 면에는 구석기둥 우주 둘과 가운데기둥 탱주 세 개씩을 조각하였으며 상층 기단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두 개씩을 조각하였다. 나는 천 삼백여 년의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흰 색을 잃지 않고 있는 나원리오층석탑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용담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경주 사람 수운 최제우는 1860년 4월5일 이곳 용담정에서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고서 동학을 널리 펴다가 1864년 정월 대구 장대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관리인 한 사람만이 우리를 맞고 있는 그 구미산 자락은 적적하기만 했다.
용담정을 내려오며 나는 수운이 하느님으로부터 처음으로 들었다는 계시 오심즉여심(吾心卽旅心)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다"를 떠올렸다. 내 마음이 우주가 되고 하느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는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
형산강을 지나자 보이는 자그마한 산이 소금강산이다. 금강산이나 금강령, 북악으로도 불리우는 소금강산은 경주시 동천동과 용강동에 걸쳐있는 높이 178.6m의 산으로서 산허리에 백률사지와 굴불사지가 있고 남쪽 기슭에는 신라 4대 왕이었던 탈해왕의 무덤이 있다.
신라 때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적에 대신들이 이 산에 모여 회의를 하면 반드시 성공했다 하여 매우 영험한 산으로 유명했다. 신라 도읍의 북쪽 산이 되므로 북악이라고 하여 기우제를 지냈던 산이기도 하다. 또한 사로6촌의 하나인 금산 가지촌의 금산이 바로 이 산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분황사로 가는 길 우회도로의 "백률사터 입구" 라고 쓰여진 표석 옆에 차를 세우고 소금강산을 오른다. 얼마나 산이 아름다웠으면 소금강산이라고 했겠는가 자문하며 한참을 올라서자 굴불사터에 닿는다.
<삼국유사>는 "경덕왕이 백률사에 행차하여 산밑에 이르렀을 때 땅 속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그곳을 파게 하였더니 큰 돌이 나왔다. 그 돌 사면에는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어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굴불사라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잘못 전하여 굴석사라 한다"고 했다.
어딜 보아도 절의 자취는 없고 사면석불만이 남아있는 굴불사터에는 앞서 온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원래 동서남북 사면에 불상을 조각하는 것은 사방정토를 상징하는 것으로 대승불교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한 사방불 신앙의 한 형태였다.
굴불사를 지나 산을 향하자 계단길과 찻길의 두 갈래길이 나타난다. 게단길을 오르자 한참을 잊어버리고 있던 백률사가 나타난다. 대웅전과 요사채, 그리고 작은 해우소 한 채뿐이다. 그렇지만 이 절은 신라 불교의 순교자인 이차돈과 깊은 관계가 있다.
고유 신앙을 받들던 귀족들 때문에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법흥왕의 뜻을 알아차린 이차돈은 왕에게 절을 세울 테니 왕명을 거역하였다고 처벌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이 거절하였음에도 이차돈이 절을 짓자 신하들이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차돈은 죽기 전에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기적이 일어날 것" 이라고 하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하였다. 형리의 칼이 허공을 향해 뱅뱅 돌다가 조용히 앉아있는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젖과 같은 흰 피가 수십 장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땅이 진동하면서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비가 내려 대궐 뜰 안을 수놓았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임금은 슬퍼하여 눈물로 곤룡포를 적시었고 놀란 신하들은 등골이 오싹하여 모두 엎드려 떨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크게 뉘우치고 이차돈의 시체를 북악 금강산에 장사지낸 후 불교를 공인하였다. 자기를 죽여 진리를 퍼뜨린 예수의 행태였다. 법흥왕 14년(572년). 그 뒤 이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금강산에 자추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서 치성을 올리면 반드시 영화를 얻고 불도를 행하여 법리를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백률사에서 발견된 금동약사여래입상은 높이가 179cm로 현존하는 통일신라시대 최대의 금동불상이며 국보 28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 발견된 이차돈순교공양비 역시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특이한 육면기둥 형식으로 다섯 면에는 명문이 있고 나머지 한 면에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양각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여 혜공왕 2년 이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글씨는 신필 김생의 것이라고 한다.
소금강산 정상에 이르른다. 겨울 햇살은 내리쬐고 경주 시내를 건너 남산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천마총, 황룡사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국유사>의 일연이 "절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떼처럼 솟아있다"고 표현했던 저 남산에 신라 전성기에는 808개의 절이 있었고 그 아래 경주에는 한 때 17만 호, 90만 명쯤의 사람들이 살았다.
해는 벌써 서쪽으로 기울고 돌아갈 시간이다. 전주에서 익산 미륵사지로, 해지는 서해에서 비 내리는 동해까지 천년을 뛰어넘는 여정 속에서 우리가 만났던 것은,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무엇이었던가.
*교통
서울에서 경주는 06:30부터 18:30까지 35분 간격으로 우등고속(19,900원)이 다닌다. 그냥 고속은 13,400원이다. 경주시내버스터미널(055-772-4885)에서 안강까지(1,000원)는 버스가 많다. 안강에서 양동마을로 가는 시내버스는 10:00, 14:30, 17:30, 18:50 네 대가 있고, 요금은 600원이다. 안강에서 옥산서원으로는 07:10, 09:30, 12:40, 15:10 차가 있고(요금 700원) 소금강산은 택시 기본요금이면 간다.
*잘 데와 먹을 데
양동마을 입구에 강촌가든(055-762-3662), 옥산서원 입구에 옥산가든(772-3369)이 있고 경주시내와 안강읍에는 숙식할 곳이 많다.
참고: 월간<사람과산> 200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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