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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군은 어떤 사람인가?/ 사도행전 6:1-7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본문은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운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일곱집사를 세운 이야기이지만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일군이기에 분문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초대교회에서 교회의 직분자는 세웠습니까?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교회의 부흥과 평안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교회의 부흥과 평안을 위하여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파도가 없는 바다가 없듯이 시험이 없는 사람이 없고, 시험이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교회가 부흥하고 사람이 많아지니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 구성원들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히브리파 사람’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 성장한 유대인들이며, ‘헬라파 유대인’이란 각처에서 흩어져 살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Diaspora) 출신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부흥하니 교회 안에 어려운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구제했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과부들이 가장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제를 하면서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헬라파 사람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원망이 일어났을 때 “뭐 그렇게 불만이 많냐? 불평하려면 나오지 말라!”고 했다면 초대교회는 끝났을 것입니다. 나무를 키울 때, 이 가지는 뭐가 나빠서 잘라버리고, 저 가지는 뭐가 보기 싫어서 잘라버리고... 이런 식으로 부족한 것마다, 나쁜 것마다, 모자라는 것마다 잘라버리면 결국 그 나무는 줄기만 남고 나무는 죽고 말 것입니다.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안수집사 일곱 명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일곱 명의 이름을 보면 다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 말은 일곱 집사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을 안수하여 집사의 직분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만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크게 부흥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교회 가운데 좋은 일군이 세워진 후에는 반드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12사도 중에서 예수님을 팔고 자살한 가룟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를 세웠습니다. 맛디아가 사도로 세워진 후에 사도행전 2장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방언의 은사입니다. 그때에 명절을 맞이하여 천하각국에서 모여든 유대인들이 각기 자기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했습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설교했습니다. 그날 베드로가 전한 말씀을 받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3천이나 되었습니다. 맛디아라는 일군을 세운 후에 일어난 부흥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일곱집사가 세워지고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세 가지 면에서의 부흥입니다. ①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습니다. 왜냐하면 4절에 보니 사도들이 일곱집사의 사역으로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힘을 썼기 때문입니다. ②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제자훈련을 하시던 목사님께서 특별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이 제자훈련을 시킨 교인들을 보라고 하시더랍니다. 목사님이 보시니 대부분이 쭉정이였답니다. 알곡이 아니었습니다.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초대교회에 진짜 제자가 많아졌다고 말씀합니다. 신앙생활은 대충 해서는 안 됩니다. 알곡이 되어야지 쭉정이가 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진짜가 되어야지 가짜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가짜가 너무 많습니다. 가짜 목사, 가짜 장로, 가짜 안수집사, 가짜 서리집사가 너무 많습니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③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주의 도에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의 도에 복종하는 신앙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의 일군이 세워진 후에 일어난 부흥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회심하였습니다. 주님이 그를 직접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정오의 빛 보다 더 밝은 빛으로 바울을 만나주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빛을 보고는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그때 바울은 너무나 강력한 빛을 봤기 때문에 눈이 멀었습니다. 바울은 시내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안수하자 앞을 볼 수 없었던 바울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즉시 세례를 받고 강건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며 사도로써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행 9:31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 바울이 세워진 후에 단기적으로는 다메섹에 부흥이 일어났고 장기적으로는 바울을 통해서 이방인의 세계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고 로마제국이 복음 앞에 굴복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일군이 세워지니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는데 왜 세우는 것일까요? 교회의 부흥과 평안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받았으나 교회의 부흥과 평안에 전혀 관심이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오히려 교회의 부흥을 가로막는 직분자도 있습니다. 제 지인 목사님 교회의 한 사람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으나 술을 끊지 못했습니다. 그는 술에 취하면 교인들의 사업장을 찾아가서 술주정을 합니다. 그는 교인을 향해서 쌍욕도 하고 심지어 장사하는 사람에게 “너! 왜 우리 교회에 나왔냐? 장사하려고 나온거지!”라고 하며 교인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고 합니다. 또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일조 할 필요 없다. 안 해도 괜찮다.”라며 주님께서도 하라고 하신 십일조를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부흥 시키는 일군은 어떤 사람일까요? 세 가지만 살펴봅니다.
1.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으로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지혜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진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 11:2입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실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성령님이 어떤 영인지 여섯 가지를 말합니다. 성령님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십니다. 이 여섯 가지 성령님이 가지신 특징 중에 첫 번째가 지혜입니다.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입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신 4:7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해주십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누구든지 자주 만나면 가까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로 하나님을 자꾸 만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대만에서 한 청년이 연모하는 자매에게 2년 간 약 700통의 연애편지를 보냈습니다. 대단하지요. 2년 간 700통이면 연애편지 역사상 세계 신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우편배달부와 결혼했습니다. 글보다 몸으로 날마다 만나다보니 둘이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자꾸 만나야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편안한 생활만 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힘들고, 어떤 때는 병들고, 어떤 때는 속상하고, 어떤 때는 불편하고, 어떤 때는 억울하고, 어떤 때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납니다. 저는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은 축복이라고 봅니다. 인생에서 문제는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메가폰 소리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를 기도로 바꾸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1887년 미국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에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물건을 팔러 다니는 행상 노릇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장사를 했습니다. 문제는 잠자리였습니다. 노숙할 때도 있었습니다. 연기가 가득한 헛간에서 잘 때도 있었습니다. 차에서 잘 때도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과 쪼그리고 좁은 공간에서 같이 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잠자리를 얻지 못해서 어느 가게 귀퉁이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쪼그리고 자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춥니?”, “조금요”, “조금만 견디면 좋은 날이 오겠지?”, “그래요. 아빠! 그런데 저에게는 멋진 꿈이 있어요”, “무슨 꿈인 데?”, “이 다음에 내가 크면 호텔을 지을 거예요. 그리고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자게 만들어 줄 거예요”, “자식! 잠자리가 불편하니까 호텔 꿈을 갖게 되었구나. 서슴치 말고 어서 해봐라.” 아빠와 대화를 하면서 아들은 꼭 호텔을 지으리라는 꿈을 꾸었고, 하나님이 축복하여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불편하게 자는 자리에서 기도한 것이 그의 일생을 바꾸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말씀이 늘 맴돌았습니다. “서슴치 말고 어서 해봐라.” 아들은 계속 기도했습니다. 1924년 드디어 달라스에 큰 호텔을 지었습니다. 1939년에는 캘리포니아에, 뉴욕에, 일리노이에 호텔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2023년 9월에 전 세계에 7,399개의 호텔에 객실만 약 116만개가 되었습니다. 고용인원은 약 16만 명입니다. 기도로 시작 된 이 호텔의 이름은 힐튼 호텔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십니다.
하지만 모든 기도가 응답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해주시지 않는 것도 사실은 응답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구하는 것은 자기에게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도 많습니다. 어느 집에서 엄마가 외출을 하고 아빠가 세 살 난 딸을 데리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빠는 매운 것을 잘 먹어서 청량고추를 고추장에 찍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세 살 된 딸이 자기도 청량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빠는 장난으로 청량고추에 고추장을 찍어서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빠가 잠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그 아이가 청량고추를 씹어 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청량 고추의 매운 맛을 감당하지 못해서 기절했고 아이는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달라고 한다고 뭐든지 주는 아빠는 없습니다. 아이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무리 달라고 해도 줄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주고 보채도 안 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하는데 응답이 없다면 그것도 감사한 것입니다. 해로우니까 안 주시든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안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 응답을 손에 쥐지 못해도,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좋으려면 믿음이 좋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절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군은 믿음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5절에 보니 온 무리가 사도들의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왜 믿음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좋을까요? 히 11:6에 답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나를 믿지 못하는 사람과 나는 친해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친해지고 관계가 좋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고,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고 영원한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그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속의 믿음 다음으로 중요한 믿음은 좋으신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 7:11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자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하물며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땅의 어떤 아버지보다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이슬람교는 알라에 대한 이름이 99개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중에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답니다. 불교에도 부처, 석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유교에서도 공자나 맹자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2. 목회자와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
일곱 집사는 사도들을 위하여 세웠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곱 집사를 세웠고, 그들은 사도들의 구제와 접대의 짐을 대신 짊어졌습니다.
저는 86년에 전도사가 되었고 금년에 38년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38년 간 사역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목사와 사이가 좋은 사람은 반드시 은혜 받는다는 것입니다. 목사를 사랑하든지, 존경하든지, 목사에게 열린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받고, 믿음이 좋아지고, 교회에 유익이 됩니다. 반면에 목사를 불신하고 목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목사를 미워하는 사람은 절대로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저를 사랑해달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제 아내는 저의 설교를 약 17,000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자신은 제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설교자들은 누구나 자기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만들면 하나님이 감동을 하시지만 설교자의 스타일이 반영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설교를 17,000번 정도 들으면 어떤 본문에서는 무슨 대지가 나올 것인지 짐작합니다. 그 설교자가 대지를 정했다면 거기서 무슨 내용이 나올지 짐작합니다. 어떤 때는 이쯤에서는 이런 예화가 나오겠다고 까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언제나 제 설교에 은혜를 받는답니다. 언젠가는 자기는 제 설교를 듣고 있으면 영적으로 샤워하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왜 제 아내는 제 설교를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아직도 은혜를 받는 것일까요? 첫째는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저하고 사이가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부가 늘 부부싸움이나 한다면 제 아내가 어떻게 제 설교에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제가 설교하면 아내는 속으로 ‘너나 잘해라. 어휴, 이중인격자’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설교를 듣는데 어떻게 은혜가 되겠습니까?
목사를 통해서 은혜 받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사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남서울 비전교회 최요한목사님과 베트남 선교를 갔을 때 동행했던 안수집사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저에게 “저는 목사님이 도둑질을 하신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고 망을 봐줄 것입니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목사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못 받겠습니까?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아멘이죠.
여러분들이 목사에게 원하는 것은 이것이여야 합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것이요. 2절을 보세요.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접대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었습니다. 4절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구제는 집사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능력이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인간관계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두 가지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사역입니다. 잘하는 것은 아니고 열심히 합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기도와 말씀만 바라십시오. 인간적인 친밀함은 솔직히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가 좋은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처음 말씀드리는 것 같은데, 전에 저를 가까이 했던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부부가 매주일 마다 주일 사역이 끝나면 저와 아내를 기다렸다가 식사대접을 해주었습니다. 물론 저희도 대접을 받은 만큼 대접을 했습니다. 저를 좋아해주고 매주일 섬겨주니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인 친밀감이 오히려 영적인 면에서 마이너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친밀해진 만큼 인간적인 섭섭함도 컸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부부의 인간적인 요구를 채워줄 수 없었고 결국 그 부부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경우가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제가 그런 일을 두 번 경험하고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가 좋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위로가 좋은 것 같지만 영적인 면에서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저에게 다른 어떤 능력이나 인간적인 친밀함이나 인간적인 도움이나 위로를 찾지 마시고 오직 기도와 말씀만으로 만족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목회자와의 관계를 위해서 성경구절 하나를 보겠습니다. 대하 20:20입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견고합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신뢰하면 형통합니다. 선지자가 뭐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제가 여러분의 선지자가 맞습니까? 아멘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저를 신뢰하세요. 인간적인 신뢰가 아니라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때 신뢰하시고 아멘으로 받으세요. 그러면 이 말씀대로 형통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여러분의 선지자인 저를 신뢰하지 못하면 불통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설교 시간에 저를 신뢰하면 제가 선포하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역사할 것입니다. 살전 2:13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장점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신뢰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바울의 설교를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런 믿음 때문에 그 말씀이 그들 가운데 역사했던 것입니다. 목회자와의 좋은 관계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신뢰하며 목회자에게서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만 구하는 것입니다.
3.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
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일곱집사는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은 것은 첫째는 은혜가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충만하면 사람이 겸손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 것은 것입니다. 둘째는 섬김입니다. 대접만 받는 사람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가 불가능합니다. 겸손히 섬기는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것입니다.
일곱집사의 섬김은 1절에 보면 구제였고, 2절에 보면 접대였습니다. 그리고 집사라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봉사자였다는 것입니다. 집사는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는 '식사의 시중을 드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웨이터와 같은 뜻입니다. 식당에서 웨이터는 손님의 식사 시중을 듭니다. 손님을 주목하고 있다가 손님의 어떤 요구가 있으면 바로 응답해서 손님이 식사를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교회의 직분은 섬기는 직분, 봉사의 직분입니다.
알렌 크라이더가 쓴 ‘회심의 변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초대교회 때에는 기독교신자가 되기 퍽 힘들었습니다. 아주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습니다. 예컨대, 가난한 자를 돌보는지, 병든 자를 방문하는지, 나그네를 대접하고, 원수를 용서했는지를 점검했습니다. 본인에게 물을 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이웃에게 확인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시간도 꽤 걸렸습니다. 3년 동안, 성경과 교리문답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건 숫제 믿지 말라는 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데도 갈수록 기독교인이 늘어만 갔습니다. 4세기 초까지 매 10년마다 평균 40%씩 성장했고, 로마 인구 중 기독교인이 10%에 육박했습니다. 이것이 로마시민들에게 의문을 자아냈습니다. ‘도대체 뭐가 있길래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할까?’ 아무튼 ‘구제’ 즉 섬김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섬김은 십자가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죄 때문에 지신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대속의 사역을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자기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이고 타인 중심의 정신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손해를 감수하는 정신입니다.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는 정신입니다.
섬김는 자는 자기를 드러나게 하면 안 됩니다. 섬김을 통해서 주님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섬김을 받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코로스 가수 같습니다. 10여 년 전에 ‘가온차트’에서 진행한 K팝 어워드 시상식에서 독특한 부문에서 상을 받은 한 가수 이야기입니다. 가수라고 하면, 화려한 조명과 청중들의 환호가 쏟아지는 무대를 연상하겠지만 이 가수는 그것과는 거리가 먼 ‘코러스 가수’였습니다. 무대 뒤편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입니다. 그때 코러스 가수 부문에서 상을 받은 김효수씨는 18년 동안 무려 1만5천곡의 코러스를 했습니다. 한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코러스 가수의 제일 중요한 점은 일단 기본적으로 가수의 음색을 파악해서 거기에 가장 잘 묻는 목소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코로스 가수의 목소리가 튀면 안 되고, 악기와 목소리에 잘 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고, 누구나 자기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풍토 속에서 참으로 신선하게 들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코로스 가수와 같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섬김을 받는 사람의 유익이 중요합니다.
딤전 3:13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여기서는 집사의 직분을 말하지만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한다고 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의 큰 담력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의 큰 담력을 얻으면 언제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불의 앞에서 담대합니다. 영원한 세계의 확신이 충만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 요동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1. 하나님과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
2. 목회자와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
3. 다른 사람들과 관계가 좋은 일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