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좋아하는 12가지 말씀” 보은 창성교회(2018.3. 4) 시19:7-11, 눅11:28, 요 5:39, 딤후 3:15
저는 보은 창성교회를 아주 좋아하는데 함대붕 목사님과 김미자 사모님 부부가 목회 사역과 섬김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무슨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담임 목사님들에게 묻곤 하는데 함대붕 목사님이 이번에는 “내가 좋아하는 12가지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지난 2월 14일 저의 홈 페이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어버이 같으신 목사님 !! 설 명절을 맞이 하여 찾아 뵙고 세배를 드려야 하지만 이렇게 글로서나마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배를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목사님은 명절이 되어도 개의치 않으시고 전국의 작은 교회들이 초청 하면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고 우선 달려 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서도 3월 첫 주에 모시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흔쾌히 오시겠다는 목사님의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번에 오시면 ‘내가 좋아 하는12가지 말씀’을 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명절 잘 보내시고 오시면 세배 드리겠습니다. 보은에서 사랑에 빚진 종이 올립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은 답글을 올렸습니다. “사랑하는 함대붕 목사님 부부에게 !! 나는 충청도 보은 창성교회에서 목회 사역과 섬김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하고 있는 함대붕 목사님 부부를 아주 귀중하게 여기면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나는 2010년 6월 13일 주일부터 2017년 2월 19일 주일까지 매년 한 번씩(2011년에는 두 번)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갈 때마다 반가움과 감동과 은혜를 주고 받곤 합니다. 오는 3월 4일 주일 10번째로 보은 창성교회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12가지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함대붕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곧 반갑게 만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함대붕 목사님 부부와 보은 창성교회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설날 저녁 김명혁 목사”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12가지 말씀”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선 서론적인 말씀을 합니다.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모토 중 첫 번째 모토가 “오직 말씀” 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오직 믿음” 이었고 세 번째는 “오직 은혜” 였고 네 번째는 “오직 그리스도” 였고 다섯 번째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었습니다. 다섯 가지 모토 중 첫 번째 모토가 “오직 말씀” 이었습니다. “말씀”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가르치시고 또 가르치시면서 성경 말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 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5:1,2).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고 성경 말씀에 따라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 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4-17). 사도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진다는 권면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딤전4:5). 사도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사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섬기면서 다짐하고 선포한 것도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겠다고 다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6:4). 한국교회의 아버지들인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들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신 분들이었고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들도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는 대신 세상 유행에 따라서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우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전무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전무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어릴 때부터 신앙의 스승님들과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따라서 주일 성수와 함께 새벽기도 하는 것과 성경 말씀을 읽고 암송하고 배우고 따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사람들인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아오게 되었고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들을 사랑하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기도에 관한 말씀은 하지 않고 성경에 관한 말씀을 하려고 합니다. 다윗은 성경 말씀의 귀중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19:7-11).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시119:97).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3-105). 어떤 학자는 시 119편의 저자도 다윗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군대에 가서 군 생활을 하면서도 조그만 성경책을 제 가슴과 가까운 안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면서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곤 했습니다. 성경책을 손에 들고 다니든지 가방에 넣고 다니든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대신 스마트 폰을 가지고 다니면서 스마트 폰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너무 현대적인 사람들이고 너무 세속화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성경책을 가지고 다니며 줄을 치면서 읽고 줄을 친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순수하고 바람직한 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성경책에는 거의 모든 페이지가 빨간 줄로 줄 치어져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영혼을 소성케 하므로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능히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그러면 이제부터 제가 한 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저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 성경 말씀들 열 두 곳을 찾아보면서 간증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시편 23편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가져다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1-6).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안위하시고, 내게 상을 베푸시고,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게 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될 때, 저는 근심 걱정 원망 불평 염려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날마다 암송해서 읽으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둘째로, 시편 37편은 어릴 때부터 저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가져다 주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37:3-6). 이 말씀은 몇 가지 권면과 약속을 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권면하십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소원과 나의 일을 이루어주시고 나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향과 부모님을 떠나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너무너무 적절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들의 권면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내가 계획하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기뻐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시편37:23-25의 말씀도 저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저는 너무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 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37:23,24). 하나님께서 제가 걸어가는 인생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정하시고 인도하시고 제가 넘어질 때에도 붙들어주셔서 아주 엎드러지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너무너무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 도다”(시37:25,26).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의 아버지가 의인은 아닐 찌라도 순교의 피를 흘리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보시고 저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제가 걸식하지 않고 넉넉하게 한 평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부족한 제가 복을 받게 되었다고 생각하게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시편 37편을 “나의 시편” 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신명기 8장 2절부터의 말씀들은 어릴 때부터 고향과 부모를 떠나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저에게 큰 위로와 평안과 감사와 기쁨을 가져다 주는 말씀들이 되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 찌니라”(신8:2-6). 제가 11살 때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을 때부터 한 평생 나그네의 길을 걸은 것이 내가 걸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걷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 너무너무 감사하게 되었고 평안과 기쁨과 용기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를 낮추시기도 하시고, 나로 주리게도 하시고, 만나까지 먹게 하신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서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감사와 평안과 기쁨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되었고, 징계를 통해서도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 8:2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제가 40여세가 거의 되었을 때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은 바로 나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저는 욥기 23:10을 통해서 고난의 유익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어린 아들 철원이가 당한 극심한 고난의 유익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철원이는 극심한 고난을 통해서 정금 같은 귀중한 믿음을 소유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과 고통 중에서 탄식과 원망을 지니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서 호소했습니다.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욥23:2-5). 결국 욥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에 항복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자기가 걸어가는 인생 길을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아신다고 고백하면서 항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단련하신 후에는 자기가 정금같이 될 것을 믿음으로 내다보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단련은 욥은 물론 우리 죄인들에게는 필수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고난과 단련을 받으므로 조금은 낮아지게 되고 조금은 겸손하게 되고 조금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며 항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손에서 고난과 단련을 당한 다음 마지막에 이렇게 겸손히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욥 40:4).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난을 예찬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결국 저는 욥23:10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액자에 쓰여진 이 말씀이 저의 집 리빙 룸에 지금도 걸려 있습니다.
다섯째로, 저는 다윗의 회개와 참회의 시편인 시편 51편과 103편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난 15,6 년 동안 시편 51편과 103편을 매일 암송하면서 읽습니다. 제가 죄인이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기도와 제사를 받으시고 죄와 허물을 사하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편51편의 고백은 다윗의 고백이었지만 사실은 저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 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 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 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시51:1-19). 다윗의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신 하나님께서 저의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판적이고 위선적인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실 것을 믿고 바라면서 저도 시51편을 매일 읽으며 회개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저는 시편103편도 매일 읽습니다. 그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 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103:1-14).
여섯째로, 저는 또한 다윗의 감사의 고백이 들어있는 시139편을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4,17,18). 다윗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인 것을 깨닫고 울면서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제가 35년 전인 1983년 7월 21일 밤 암스텔담에서 열린 빌리 그레함 국제전도대회를 마치고 카나다로 가는 길에 아이스랜드 리카벡의 어느 작은 호텔 방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시139:17,18 절을 읽다가 너무나 깊은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울면서 무릎을 꿇고 감사와 회개의 기도를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물론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와 긍휼과 사랑과 섭리의 조목 조목들이 모래알 보다 더 많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찌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라는 고백에 저는 깊은 충격을 받으면서 감사와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제가 이릴 때부터 그 때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일들을 너무너무 세밀하게 간섭하시면서 저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너무 감격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암스텔담에서 가방을 도둑맞은 일까지 모든 일들을 섬세하게 간섭하시면서 저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면서 너무 감격해서 울고 또 울고 또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입을 열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결국 부족한 저도 모든 것이 망극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일곱째로, 저는 사도 바울의 회개와 참회의 고백들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면서 그런 고백의 말씀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말씀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고전4:13).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저는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죄 고백들을 너무너무 좋아하며 매일 읽게 되었고 다음과 같은 역설적인 고백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제가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던 때인 2006년 9월 어느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롬 7:24 말씀을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의 상황을 글로 썼는데 그 글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제목으로 뉴스파워(06.9.14)와 국민일보(06.9.21)에 그대로 실렸습니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오늘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도들과 함께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읽으면서 가슴과 눈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오늘 아침 차를 타고 교회로 오는 시간에도 그 눈물은 계속해서 내 가슴과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자기 자신을 가리켜 “저주 받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처절한 죄 고백을 한 사람이 정말 사도 바울 자신이었을까? 그래서 일부 성서 학자들은 그 죄 고백이 사도 바울 자신의 죄 고백은 아니고 중생하지 못한 자나 죄인 일반의 죄 고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필자가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성서 학자 박윤선 목사님은 그것이 사도 바울의 죄 고백이라고 말하면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다”고 잘라서 말했다. 나는 오늘 새벽 사도 바울의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한 마디 한 마디 읽으면서 “어쩌면! 어쩌면!” 하면서 나 자신도 감동에 떨며 탄식하고 있었다. 삼층 천에 올라갈 정도로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사도가! 그의 손 수건이 닿기만 해도 불치의 병들이 물러갔던 가장 큰 능력을 지녔던 사도가! 어떻게? 어떻게? 그런 처절한 죄 고백의 탄식을 할 수가 있었다는 말인가! 나는 가슴과 목이 메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저는 회개를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기며 사모하게 되었고 회개를 가장 많이 한 다윗과 사도 바울을 가장 존경하게 되었고 길선주 목사님, 이기풍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박윤선 목사님 등 평생 울면서 기도하신 신앙의 선배님들을 가장 존경하며 본받고 싶게 되었습니다.
여덟째로, 저는 사도 바울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듭된 고백과 예찬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면서 그런 고백과 예찬의 말씀들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4,15).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그러나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결국 저는 부족한 죄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너무 많은 것을 되돌아보면서 강변교회에서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 라는 주제를 가지고 10여 번 간증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설교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죄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고백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보다 더 귀중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9:15). 그래서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Amazing Grace” “놀라운 은혜”가 되었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어거스틴과 프랜시스가 하나님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길선주, 이기풍,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들이 하나님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이성봉, 김치선, 한경직, 박윤선 목사님들이 하나님 은혜를 고백하며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무의식 중에 또는 의식 중에도 자신의 조그만 의로움을 들어내고 나타내려고 하는 못된 기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끄럽고 위태로운 기질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의인들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마9:13) 자칭 의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자신의 먼지보다 작은 “의로움”을 똥으로 여기면서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고백하고 예찬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들 중에 가장 부끄러운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악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만을 고백하며 예찬한 사도 바울의 고백과 예찬들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면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된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치게 하셨습니다.”
아홉째로, 제가 평소에 늘 좋아하는 말씀들 몇 곳을 소개합니다. 저는 요14장과 15장 말씀들을 아주 좋아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서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위로와 격려와 사랑의 말씀들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11).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고난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 때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평과 불만과 절망에 빠질 것을 미리 다 아시고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고 주님의 평안과 주님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위로와 격려의 말씀들을 너무너무 귀중하게 받으면서 평생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 없이 평안과 기쁨과 감사를 몸과 마음에 지니고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열째로, 제가 평소에 늘 좋아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빌4:4-7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일 사랑하던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4-7).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세 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거듭해서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이 편지를 섰는데 자기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같은 장에서 고백했습니다(빌4:10). 빌립보서 넉 장에서 “기쁨” 이라는 말을 17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저는 기쁨을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부어주시는 너무너무 귀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 평생 기쁨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둘째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과 착함과 도움의 손길을 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행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염려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말씀했는데,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평강을 주셔서 항상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열한째로, 제가 평소에 늘 좋아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고후12:10 말씀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니까 신학교 3학년 학생들이 졸업기념으로 이 말씀을 액자에 써서 저에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의 말씀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역설적인 고백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강함 대신 약함을, 칭찬 대신 능욕을, 풍요 대신 궁핍을, 평안 대신 핍박을, 쉬움 대신 곤란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은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지니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약함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의 길을 걸어가셨고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님들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삼았던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고, 고난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먹어야 할 밥이고 입어야 할 옷이라고 말씀하시던 박윤선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후12:10말씀과 함께 약함과 어리석음을 예찬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들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약함과 어리석음과 고난을 멀리하지 않고 귀하게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비롯했다고 생각합니다.
열두째로, 제가 평소에 늘 좋아하는 또 하나의 말씀은 살전5:16-18 말씀입니다. 사실 이 성경 말씀은 한경직 목사님께서 아주 좋아하시던 성경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입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1991년 1월 17일에 직접 쓰신 성구를 접시에 새겨서 선물로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저도 그 선물을 받아서 지금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고백했고 약한 것들과 능욕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기뻐한다고 고백했는데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쁨을 부족한 저에게도 채워주시는 것을 체험하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은 게을러서 기도하기를 힘들어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시고,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도와주심으로, 부족한 우리들이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사무엘과 다윗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기를 쉬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말씀이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인 우리들은 본성적으로 근심 걱정 불평 불만 염려 두려움에 쌓여서 살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신앙의 스승님들을 본받아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기 중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 드렸고,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거나 기도할 때나 고난을 당할 때에도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부족한 우리들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은 너무너무 귀중하고 놀라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으로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죄인들을 살리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을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자들과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면서 일곱 번 반복해서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2:7,11,17,28, 3:6,13,22).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 입니다.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지킬 수 있는 마음과 몸을 가진 사람들은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면서 복되게 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에 사람들이 귀가 가려워서 바른 교훈인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좇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추고 마음과 영혼을 쏟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말씀 한 곳을 읽어드리므로 설교를 마무리 합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7-11). 한 마디만 더 하고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저는 찬송을 부르면서도 깊은 감동을 받고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주암산 부흥회에 참석해서 찬송가 246장을 부르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 한국의 예레미아라고 불리던 김치선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김치선 목사님은 새벽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를 부르시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많이 받곤 했는데 삼각산 관악산은 물론 대구의 주암산까지 쫓아 다니면서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주암산 부흥회 어느 시간에 찬송가 246장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저는 1절을 부르고 나서 더 이상 찬송을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나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를 흘려서 교회를 사셨을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놀랍고 너무 감격해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늘 사랑합니다” 라고 찬송을 부를 때 “나는 늘 사랑하지 못하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제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우니까 옆에 있던 어른 한 사람이 “학생, 무슨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어?” 라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었습니다. 아마 20여분 동안을 계속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귀한 교회를 늘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라는 말씀을 귀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푸셔서 저와 여러분들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서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를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