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한 추억Ⅱ
시골에서 어릴 때 일이다. 소는 집집이 농사짓는데 소중한 짐승으로 가족처럼 여겼다. 우리 세대는 지금의 유치원 대신에 목동부터 시작하여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소를 몰고 들로 산으로 다니며 소가 먹이를 뜯게 했다. 일정한 시간도 정하지 않았는데 때가 되면 동구밖에 모여 소를 이끌고 산으로 갔다. 목동들은 예닐곱 살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마구간에 빗장을 풀고 소등에 타고 출발하여 목적지까지 간다. 소는 자유롭게 풀을 뜯게 하고 우리는 강에서 수영하거나 칡을 캐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도 했다. 정오가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소들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온다. 어린 나는 묘의 봉분을 이용하여 소등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온다. 때로는 소등에서 졸며 오기도 하고 지겨우면 소등에 서서 오기도 했다.
가끔은 자기 소가 힘이 세다며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소들도 매일 같이 다니니 서로 아는지라 싸움을 붙여도 뒷걸음치며 싸우기를 꺼리기도 한다. 겨우 붙여 놓으면 볼거리가 가관이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에 떨어질 줄 모른다. 소 주인의 응원에 소는 거품을 물고 헉헉거리며 싸운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무승부로 하고 소를 떼어놓는다.
한 번은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소등에 타고 산길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비에 젖어 미끄러져 소 목덜미에 걸렸으며 소의 두 뿔을 잡았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 길옆은 천 길 낭떠러지라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릴 지경이었다. 그 순간 소는 제자리에 서서 어린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려주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언어 소통은 안 되지만 서로 오가는 정과 교감은 있는가 보다.
그런가 하면 여름 어느 날 소등에 타고 고개를 넘어 동네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달려 나를 떨어뜨리고 도망갔다. 다행히 내가 미워도 주인인지라 밀짚 더미에 내동댕이치고 달아나 다치지는 않았다. 집에 와서 마구간에 빗장을 걸고 앙갚음했더니 소도 눈물을 글썽이며 잘못을 뉘우치는 듯했다. 소 목덜미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며 화해했다.
사람이 늙으면 추억을 곱씹는다고 하더니만 육십여 년 전의 기억이 새삼 뇌리를 스친다. 아름다운 추억은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가 보다. 그때를 회상하며 청도에 소싸움이라도 한번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넷플릭스에서 서부 영화를 보면 총잡이가 말을 타고 쌩쌩 달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하다. 가끔 소 대신 말을 타고 금호 강변을 신나게 달리는 환상에 젖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