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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겸전(剛柔兼全)
강하고 부드러운 것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뜻으로, 모든 것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것을 의미이다.
剛 : 굳셀 강
柔 : 부드러울 유
兼 : 겸할 겸
全 : 온전할 전
(유의어)
강약겸전(强弱兼全)
강유겸전(剛柔兼全)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글자 그대로 한 사람이 강함과 부드러움을 함께 갖췄다는 말로 언행의 기본 지침이다. 두 가지를 함께 갖출 수 있다는 것이 말로는 쉬울 것 같은데 인간의 속성상 모두가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은 덕목이다.
강하다는 것은 성격이 강직하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이거나, 큰 권력을 가졌거나, 체격이 크고 힘이 남달리 세거나, 무술의 고수이거나, 재력이 상당하거나, 학문의 깊이가 남다른 학자이거나 아무튼 보통의 사람들에 비하면 월등하고 막강한 실력을 가진 특출한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이런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그 틈에서 교만과 독선이 싹 틀 수 있다. 사람은 어차피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므로 아무리 권력이 있고 재력이 있고 강하고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여러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
인간은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잘났다 해도 많은 부분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숙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한데 어우러져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라고 해서 평범한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힘이 세다고 해서 남을 윽박지르고, 돈이 많다고 뻐기거나 으스대면서 없는 사람을 경멸하고, 학문이 높다고 해서 못 배우거나 학식이 낮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과연 잘살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왕이나 국가원수 또는 고위 공직자가 신하 또는 부하 직원이나 일반인을 대할 때 부드러운 미소와 정겨운 말씨를 사용하면 그를 대하는 모든 사람은 진한 감동과 함께 스스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위정자나 사회지도층이 꼭 새겨 들어야 할 금언이다.
일당백의 무술 고수가 그 강함은 전혀 내색하지 않고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꼭 필요한 경우에 약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되어준다면 그 무술과 인품은 함께 각광을 받을 것이다. 돈 많은 재력가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수전노가 아닌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나누고 함께한다면 존경과 아울러 널리 칭송받게 될 것이다.
학식이 높은 대학자가 본인의 학문이나 경륜을 많은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 공유하게 되면 훌륭한 석학이자 정신적인 스승으로서 널리 존경받게 될 것이다. 기술과 과학의 발달 속도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요즘, 더욱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도 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속으로는 강해야 한다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자신에게는 까다로울 정도로 엄격하고 남을 대할 때는 지극히 부드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유능제강(柔能制剛)이라는 말도 있다. 부드러움은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강한 태풍에 큰 나무들이 부러지고 쓰러져도 연약한 갈대나 억새는 강한 태풍에도 비록 심하게 흐느적거릴지언정 결코 부러지지는 않는 것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단 하루도 혼자서 살 수는 없다. 무수한 사람과 어울리고 또한 도움을 받아야 단 하루인들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가 있다. 거리의 청소, 가정으로 오는 상수도, 오, 폐수 등 쓰레기 및 분뇨 처리, 치안을 위한 수고나 교통정리 및 화재예방이나 진압을 위한 소방관, 전기 및 상하수도 등의 관리와 사고 시 점검 보수, 각종 건설 및 시설물의 보수 유지, 커피점 등 각종 가게 및 음식점, 편의점, 슈퍼, 마트 등의 편의 제공이나 택배원과 집배원의 수고, 온갖 음식점의 서비스와 배달, 각종 위락시설의 편리한 제공 등 이 세상에서 아무도 없이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 도달한다면 원시시대 허허벌판 속에서 나 혼자만 내버려진 것과 같은 처지일 것이다.
물론 살아가다보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어찌 다 좋은 사람, 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만 있을 수 있겠나. 어쩌면 나부터가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보통 이하의 수준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큰 틀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그저 고만고만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왕이면 좋은 얼굴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 바로 강유겸전(剛柔兼全)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강함도 부드러움도 전혀 개의치 않도록 그저 하루하루를 한데 어우러져 이해하고 웃으며 부드럽게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본인은 물론 우리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다.
도(度)를 넘는 이중성의 세계, 한국의 리더십
한국 리더십의 특징은 이중성이다. 문제는 얼마나 이중적인가 이다. 얼마나 이중성을 고유성으로 갖고 있으며, 얼마나 그 이중성을 우리의 정체성으로 내재화하고 있는가 이다. 결론부터 간추리면, 우리는 도를 넘는 이중성이다. 그 정도는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비교될 수 없이 크다.
강유겸전(剛柔兼全), 화실겸전(華實兼全) 말고도, 항상 쓰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는 말처럼 이중적이어야 하고, 인단겸전(仁斷兼全)이라는 말처럼 또한 이중적이어야 한다. 칼과 붓을 함께 들고 있어야 한다는 것, 자애로움과 냉혹함을 함께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은 불경에도 없고 성경에도 찾을 수 없는 이중성이다.
유가(儒家)에서도 인(仁)은 강조하지만 단(斷)을 찾지 않는다. 그 칼로 끊는 듯한 냉혹성, 잔혹성과 함께
인을 찬양하는 구절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함께 있어야 하는, 겸전(兼全)이라는 말을 보통 쓰고, 또 항용(恒用) 바라고 있다.
강약(强弱)을 함께하는 것도 우리 특유의 이중성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강자가 늘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강자가 약자에게 이기는 것은 자연이고, 오히려 순리이고, 더 따질 것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약능승강(弱能勝强)이라는 말을 더 자주, 더 즐겨 쓴다. 약한 것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발상은 아마도 세계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는, 미상불 우리만의 것이랄 수도 있다. 만일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해도우리가 가장 많이 말하는,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사고방식, 또는 생각의 버릇이라 할 수도 있다.
유능제강(柔能制强)이라는 말도 우리의 그 도를 넘는 이중성 입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제압한다. 이것은 어느 나라 사전에도 찾을 수 없는 비상식이고 몰상식이다.
굳센 칼로 부드러운 풀을 벤다. 부드럽기 한량없는 풀잎으로 굳센 칼날을 막아낼 수는 없다. 그런데 거꾸로 그 풀이 그 칼날을 능히 제압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칼로서 아무리 베어도 풀은 자라나고, 마침내 칼날은 무뎌지고 망가져서 풀을 더 베어낼 수 없게 된다. 풀은 무성한데 칼은 그만 효능을 잃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이른바 유능제강이다.
장롱- 앞은 강하고 뒤는 유함(오동나무)
우리의 겨울은 너무 춥고 우리의 여름은 너무 덥다. 사철의 한서가 너무 심하다. 하루 중에도 일교차가 너무 크다. 거기에 메마를 때 너무 메마르고, 습할 때 너무 습하다. 건습(乾濕)의 폭이 너무 넓은 것이다. 이럴 때 굳셈과 부드러움, 강과 유가 같이 있지 않으면 어떤 물건, 어떤 작품이든 트집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 트집을 중화시키고 습기를 갊아 건습의 변덕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강유겸전(剛柔兼全)이다. 우리 선조들이 그 지혜를 터득한 것이다.
강유겸전 못지않게 덕능겸비(德能兼備)에 대한 요구도 우리 이중성의 전형을 구성한다. 강유처럼 덕능도 서로 반대 지향적이다. 부드러우면 굳세기 어렵고, 능하면 덕스럽기 힘들다.
덕(德)은 무엇이고 능(能)은 무엇인가. 덕과 능의 대비는 사람과 과업의 대비로 요약된다. 덕은 사람에 초점을 두고, 능은 곧 일에 초점을 둔다.
덕(德)은 지도자(指導者) 또는 한 집단의 장(長)이 사람관계에 주력해서 인화로 그 집단을 이끌어 갈 때를 말하고, 능(能)은 지도자 또는 장이 과업성취에 주력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그 집단의 목적을 달성해 갈 때를 이른다. 전자의 경우 그 사람의 덕이 크다고 말하고, 후자의 경우 그 사람이 능력이 출중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덕이 있는 사람은 무능력(無能力)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무덕(無德)한가. 그러한 대비가 과하다면 덕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좀 모자라고, 능력이 있는 사람은 덕이 좀 얕은가. 그 둘을 함께 겸비할 수는 없는가.
덕은 집단 속에서 남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그 정도가 드러난다. 그 만큼 남보다 너무 앞서도 안 되고, 너무 뒤져도 안 된다. 남보다 너무 앞서도 덕이 없는 사람이 되고, 남보다 너무 뒤져도 덕이 없는 사람이 된다.
같은 이치로, 남보다 너무 머리가 좋거나 너무 예리하거나 너무 통찰력이 뛰어나도 덕이 없고, 반대로 머리가 너무 나쁘거나 너무 둔하거나 너무 통찰력이 떨어져도 덕이 없는 얕은 사람이 된다. 덕은 중(中)이고, 평균이고, 보통인데서 찾아진다.
그러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은 다르다. 그는 절대로 남 같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서양인은 능(能)을 택하고, 동양인 특히 중국인들은 덕(德)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서구 최초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IIiad) 부터가 능의 세계다. 최고의 용장 아킬레스가 트로이의 용장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의 용장 팔리스는 또 아킬레스를 죽인다. 그리고 오디세이는 트로이를 점령하고 신의 유혹도 뿌리치며 고향 이타카로 돌아온다. 그것은 무용(武勇)과 웅비(雄飛)가 절정에 달하는 가장 적나라한 서구인의 시원의 능의 세계다.
오늘날 서구 경영자들이 같은 회사의 일반 종업원과 비교할 수 없는 1백배 내지 2백배 이상의 연봉을 챙기는 것도 이 바로 능(能)세계의 전통이다. 능력이 있으면 가지라는 메리트 시스템은 이 능(能)세계의 구현 자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즐겨 읽는 4대 기서의 하나인 수호지(水滸志)는 능(能)이 아니라 덕(德)의 세계다. 가장 능력 있는 주인공 조개를 죽이고, 가장 평범란 송강을 1백명이 넘는 호걸들, 최고 능력자 집단의 우두머리로 앉히는 것부터가 덕이 있는 사람만이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사고의 틀이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일본인은 능의 세계다. 무장 오다 노부나가가 그들 말로 전설적 부대를 거느렸다는 이마까와 요시모또 군단을 붕괴시켰다는 것부터가 능의 세계를 말해주는 것이고, 이어 도요또미 히데요시, 도구가와 이에야쓰로 이어 졌다는 것 또한 덕의 세계와는 무관한 능의 세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하나만을 중시한 일원성 일원주의 세계가 아니라, 덕능겸비의 이중의 세계다. 덕이 성해도 무능력하다고 지탄하고, 능이 성해도 독선 독단이라고 지탄하는 나라, 바로 그 나라 사람이 우리다.
회사마다 인화와 창조를 똑같이 사시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덕능겸비의 표시다. 인화는 덕의 세계이고, 창조는 능의 세계이다. 그 정반대되는 두 개의 세계를 우리는 조금도 거부감 없이 모순감 없이, 갈등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사시로 이 둘을 내세우지 않는 회사가 모순에 찬 회사, 발전이 어려운 조직으로 생각되고 있다.
강유겸전, 덕능겸비, 그 이중성의 세계가 전통한국, 현대 고유의 우리 세계라 말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그 도를 넘는 이중성의 세계일가? 흔히들 주장대로 추상열일(秋霜熱日)과도 같은 기후 때문일까? 아니면 흔히 주장하는 대로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 때문일까?
그러나 그 같은 기후의 차이는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같은 외세의 침략은 또 우리만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지리적 조건과 역사적 경험은 다른 나라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유독 우리는 왜 그 도를 넘는 이중성일까? 왜 그 도를 넘는 이중성의 리더와 리더십을 요구할까?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 剛(강)은 형성문자로 㓻(강)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岡(강; 단단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쉽게 굽거나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칼이, 전(轉)하여 강하다는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굳셀 간(侃), 굳셀 건(健),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드러울 유(柔)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곧고 뜻이 굳세며 건전함을 강건(剛健), 성품이 단단하고 빳빳함을 강견(剛堅), 성품이 단단하고 꿋꿋함을 강경(剛勁), 과단성 있게 결단하는 힘을 강단(剛斷), 금속성의 물질을 잡아당기어 끊으려 할 때 버티는 힘의 정도를 강도(剛度), 물체의 단단한 성질을 강성(剛性), 굳세고 용감함을 강용(剛勇), 굽히지 않는 굳센 의지를 강지(剛志), 성미가 깐깐하고 고집이 셈을 강퍅(剛愎), 스스로의 재능과 지혜만 믿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음을 강려자용(剛戾自用), 강하고 부드러움을 아울러 갖춤을 강유겸전(剛柔兼全),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을 비유하는 강의목눌(剛毅木訥),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는 강목수생(剛木水生), 굳센 창자의 뜻으로 굳세고 굽히지 않는 마음을 비유하는 강장(剛腸) 등에 쓰인다.
▶ 柔(유)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矛(모, 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柔(유)는 나무를 폈다 굽혔다 하는 일, 또는 쌍날창의 자루로 쓰는 탄력성 있는 나무의 뜻을 나타낸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약할 약(弱), 나약할 나(懦), 거둘 수(收), 연할 취(脆), 쇠할 쇠(衰), 연할 연(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굳셀 강(剛)이다. 용례로는 성질이 부드럽고 약하며 겁이 많음을 유나(柔懦), 양의 부드러운 털을 유모(柔毛), 연약하고 예쁨을 유미(柔媚), 부녀자에 대한 교훈을 유범(柔範), 어린 뽕잎을 유상(柔桑), 미인의 부드럽고 고운 손을 유악(柔握), 몸이나 마음이 약함을 유약(柔弱), 연하고 무르고 약함을 유취(柔脆), 부드럽고 연한 가죽을 유피(柔皮), 성질이 부드럽고 온화함을 유화(柔和), 부드럽고 매끈함을 유활(柔滑), 성질이 부드럽고 온순함을 유순(柔順), 부드럽고 연함 유연(柔然),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 등에 쓰인다.
▶ 兼(겸)은 회의문자로 禾(화; 벼), 秝(력; 많은 벼)와 又(우; 손)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벼를 손에 쥐다, 한번에 갖다, 겸하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兼(겸)은 두 명사 사이에 쓰이어, 그 명사들이 표시하는 내용이 서로 아우름을 뜻하거나, 두 가지 이상의 행위나 동작을 아울러 함을 뜻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우를 병(倂)이다. 용례로는 여러 가지가 겸하여 갖추어져 있음을 겸비(兼備), 여러 가지를 다 갖추어 완전함을 겸전(兼全), 두 가지 이상을 겸하여 얻음을 겸득(兼得), 마주 앉아서 서로 마주 보며 식사하는 일을 겸상(兼床), 모든 세상 사람을 똑같이 사랑함을 겸애(兼愛), 겹쳐서 포개 덮음을 겸복(兼覆),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직무를 겸함을 겸직(兼職), 혼자서 몇 사람을 당해 낼 만한 힘을 겸인지력(兼人之力), 혼자서 능히 몇 사람을 당해 낼 만한 용기를 겸인지용(兼人之勇), 한꺼번에 일을 겸하여 하는 모양을 겸지겸지(兼之兼之), 몇 가지를 겸한 위에 또 더욱 겸함을 겸지우겸(兼之又兼),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면 시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는 겸청즉명(兼聽則明) 등에 쓰인다.
▶ 全(전)은 회의문자로 㒰(전)은 본자(本字)이다. 많이 모은(入) 구슬(王, 玉) 중에서 가장 빼어나고 예쁜 구슬로 온전하다, 완전하다를 뜻한다. 여기서 모은(入)은 完(완)의 갓머리(宀; 집, 집 안)部와 같아서 모든 것을 덮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全(전)은 한자로 된 명사 앞에 붙어 온 모든 전체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용례로는 온몸 또는 전신을 전체(全體), 통틀어 모두를 전반(全般), 한 나라의 전체를 전국(全國), 어떤 범위의 전체를 전면(全面), 전체의 모양이나 형편을 전모(全貌), 사물의 모두를 전부(全部), 전체의 인원을 전원(全員), 액수의 전부를 전액(全額), 어떤 일의 전부를 맡는 것을 전담(全擔), 위임된 어떤 일을 처리하는 일체의 권한을 전권(全權), 온 마음과 온 힘을 다 기울임을 전심전력(全心全力), 어떤 일이나 다 알아 행하는 신불의 절대 지능을 전지전능(全知全能), 어떤 일에 모든 힘을 다 기울임을 전력투구(全力投球), 몸과 정신의 모든 것을 전신전령(全身全靈), 아주 돌보아 주지 아니함을 전불고견(全不顧見), 한 떼의 군사가 죄다 결단난다는 전군함몰(全軍陷沒)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