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양 돌리의 탄생이 1997년의 세계 10대 뉴스가운데 하나로 꼽힌 작년 연말의 신문사진을 대하면서 우리는 많은 공상과학소설들이 그려본 미래를 예감한다.그것의 윤리성의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열띤 논쟁에도 불구하고,그리고 그 가운데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에도 불구하고 이 예감은 현실로 구체화될 지도 모른다.어느날 아침,복제된 인간의 사진을 크게 실은 조간신문이 우유 옆에 나란히 놓여 있을 지도 모른다.아폴로 우주선이 처음으로 달에 인간을 내려놓을 때처럼,떨리는 흥분과 엄청난 두려움속에서,신화가 진정 사라져 가는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아홉시 뉴스앞에 앉게 될지도 모른다.
1818년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혹은 현대판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소설 하나를 떠올려 보기로 한다.
시체를 끄집어내서 전기로 기운을 불어넣어 인간보다 ‘더 우수’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생명형태를 창조하려한 한 야심만만한 과학자의 몰락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당시 작가는 18세의 젊은 부인이었다.
당대 영국의 지식인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급진적인 사상가로서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던 윌리엄 고드윈 (William Godwin)과 역시 급진적 사상가이며 여성해방론자였던 메리 월스턴크라프트(Mary Wollstonecraft)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추종자중 한 사람이었으며 역시 급진적인 작가였던 유부남 쉘리(Percy Bysshe Shelley)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급기야는 그의 합법적인 아내가 된 메리 고드윈 쉘리(Mary Godwin Shelley)였다.
○완전한 생명체를 꿈꾸며
신성한 창조행위,오로지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생명창조에 관한 작품의 주제는 당대 독자들에게 도발적이고 불경스럽기까지 했을 터였다.이처럼 ‘불경스런’ 야망을 실현한 주인공인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유복하고 화목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젊은 과학도이다.
인간의 유한성에 슬픔을 느낀 그는 인간보다 더 오래 그 생명현상과 생명의 다른 권리들을 지속할 수 있는 ‘완벽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일에 골몰하고,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가족들과,그밖의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아홉달 남짓 연구에 파묻힌 결과 드디어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성공한다.
이 성공은 곧 그가 겪게될 비극의 씨앗이었다.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게 불을 훔쳐다 주는 대가를 치러야 하듯,인류에게 공헌하고 그 때문에 인류에게 추앙받고자 했던 프랑켄슈타인 역시 ‘불을 훔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흉칙한 외모를 보고 겁에 질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생명체를 유기하게 되고 이 생명체는 자신을 내버린 창조주에 대한 증오와,인간의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갈망속에서 자신의 창조주를 포함한 인간에 대한 복수의 행동을 전개한다.결국 주인공인 프랑켄슈타인과 피조물이 모두 죽으면서 소설은 끝난다.
○낭만주의적 자연관 질타
언뜻 보면,이 소설은 인간에게 지나친 욕심을 추구하지 말라고,더구나 창조주의 행위를 모방하거나 도전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도덕적인 훈계를 던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메리 쉘리의 소설은 단순히 이처럼 윤리적인 교훈을 포장한 소설은 아니다.뉴턴 이후 영국내의 자연과학은 과거에 비하여 급진전하고 있었고 당대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과학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생명의 근원,혹은 본질이 전기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증명하려는 실험도 시도되었다.메리 쉘리가 귀동냥할 수 있었던 과학적 지식들은 사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한다.
그러나 정작 쉘리의 작품은 당대의 낭만주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에게 말을 걸고 있다.자연을 이성,혹은 보편적인 법칙과 질서의 발현으로 이해하였던 18세기의 지식인들과는 달리,낭만주의 작가들은 자연을 자신들의 창조적 정신의 근원으로,혹은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터전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 상상력은,프랑스혁명이라는 한때의 유토피아적 꿈이 좌절된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기계적이거나 이성적인 법칙이 작용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의식과 교감할 수 있는 살아있는,그리고 역동적인 그 무엇,특히 상상력과 창조력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은 늘 여성이었다. 사회의 질서,주위환경과 담을 쌓고 개인적인 지식의 추구와 영웅심에 갇혀 있던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결여’하고 있는 그 무엇을 그의 친구인 클레발의 감수성을 통하여 보여주면서,작가는 동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의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자신 역시 공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인 자연의 신비를 ‘꿰뚫고자’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열망은 자연의 숭배속에 감추어진 남성의 정복욕과 지배욕의 한 표현임 또한 작가는 직시한다. 프랑켄슈타인의 몰락은 이런 점에서 작가의 신랄한 비판,특히 낭만주의적인 자연관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창조작업은 생물학적이고 육체적인 생산을 정신적이고 이성적인 생산으로 대치하는 작업이며,여성에게서 여성을(적어도 그 당시까지는)여성이게끔 하는 고유의 특질을 빼앗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가공할 모습의 피조물
여성을 통한 생명의 잉태가 삶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것이라면,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작업은 죽음에서 삶을 끌어내는 것이다.완전하고 유기적인 인간과의 교감이 철저히 배제된,즉 죽음을 삶의 먹이로 삼을 수 있는 창조라고 볼 수 있다.
이성에 의한 창조,정신에 의한 창조,아니 더 나아가서 상상력에 대한 과도한 신봉이 어떤 예기치 않은 형태로 구현되는가에 관한 쉘리의 통찰이 곧 피조물로써 구체화된다. 피조물의 가공할 만한 모습은 경계를 넘는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그 무엇이기도 하지만,그보다는 경계를 넘기위하여 억압하고 희생시킨 모든 것이 어떤 모습으로 회귀하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에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라기 보다는,과도한 상상력과 과도한 인간중심주의,과도한 남성적 지배욕구가 무엇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지를 통찰한 작가가 동시대의 지식인들과 작가들에게 말을 거는 한 방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