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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시모음
시계 / 김남조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
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그대는 90살이 되었어
시계가 또 한 번 말한다
알고 있다니까,
내가 다시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시계는 즐겁게 한판 웃었다
그럴 테지 그럴 테지
그대는 속물 중의 속물이니
그쯤이 정답일 테지……
시계는 쉬지 않고 저만치 가 있었다
*2017년 제29회 정지용문학상 수상작
시계
권수진(1977~ )
오차 없이 정확하게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이별을 대면하는 순간만큼
사랑하는 사람의 반경 범위 내에서
째깍째깍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기다려 본 자들은 안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유리시계 속을 여덟 번 떨어져 내릴 때
이경림
나는 거실 모퉁이를 돌아 건너 방으로 들어가는 너와
화장실 문을 막 열고 나오는 너와
까만 손전화를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네가
한꺼번에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시계 / 백무산
저건 가기만 한다
오는 것은 알 수 없고
가는 것만 보이는 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숙명인 양 가는 뒷모습만 전부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열차의 맨 뒤 칸에서 뒤를 보고 있다
마치 기계노동의 습관처럼
도무지 누가 앞에서 운전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얼굴이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린
모든 걸 배웅하기에 바쁘다
가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부피에 가득 찬 실타래가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칠 뿐이다
그건 마치 그림자를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것
태양을 가리기만 하면 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시계는 뒷모습만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맞이하지 않고 보내기만 한다
사냥을 떠나지도 않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몸에 피를 바르지도 흙을 밟지도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내세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존재를 헌신하지도 않는다
순환의 절반을 버림으로써 얻은
이 엄청난 질주와 쾌락
우리는 어떤 재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숙명을 발견하지 않고 발명했을 뿐이다
숙명이라는 쏟아지는 별들의 시간을
시계는 진화 중
김 은
시계는 잡식성이다.
물시계는 물 마시느라 모래시계는 모래 삼키느라 기계식 시계는 톱니 씹느라 전자시계는 건전지 핥느라 시시각각 분절하여 밀고 끌면서 바쁘다.
초침 분침 시침들.
눈・코・귀도 없이 몸통뿐이지만 시계바늘의 노역으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 문명의 시발점이었던 저 둥근 수레바퀴를 잃는다면 카오스 속 시간의 밥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인디언들은 시계가 없었다. 나무 풀 바람이 맨살에 닿는 느낌과 마음의 움직임으로 계절을 읽고 달력을 만들어 시간으로 삼았다.
1월,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
4월, 머리맡에 씨앗을 두고 자는 달.
12월, 무소유의 달.
외부를 바라보면서 내면을 응시하는 인디언들의 서늘한 눈을 본다. 내 시간표도 시계의 틀을 벗어나고 싶다. 인디언 달력을 갖고 싶다.
7월, 사슴이 뿔을 갖는 달⸺옥수수 튀기는 달
나의 꽃시계는 진화 중이다.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류인서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그의 손목은 시간을 잡아당기는 무거운 구리 문고리
그의 손목에서는 숨가쁜 말굽소리가 났다
그의 손목에서는 매일 노오란 해바라기꽃이 피었다 졌다
신생의 아이들이 바구니 속에서 울어 보채는 동안
화분의 제라늄이 비릿한 비염의 코를 베어내는 동안
그는 얼룩진 매트리스를 창문으로 끌어내 마구 두들겨 패고 있다
여자보다 더 많은 수의 시계가 그의 손목 안팎으로 꽃피며 지나갔다
그는 참으로 많은 일을 겪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느닷없는 사랑의 복면도 만났다 여우와 신포도도 보았다 깨진 무릎으로 찾아가는 아주 낡고 오래된 모서리도 보았다
그는 흰 사슴도 보았다 날카로운 쇠꼬챙이가 그의 눈을 찌르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허공에 대고 정신없이 팔을 휘둘렀다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계들을 잠재우지 않으려
한때 그에게 단단히 손목 잡혀 있던 시간들이 이제 그의 손목을 되잡아 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시계를 먹는 고양이
홍일표
고양이는 너무 많은 시계를 먹었다
혹자는 인정 없는 주인 탓이라고도 한다
고양이는 시계와 함께
다량의 구름과 거친 바람도 복용하였다
때로는 고집 센 돌까지 깨물어먹기도 했다
고양이 배를 만져보면 초침과 분침이 만져진다
날카로운 슬픔을 용케 다스리고 있는 것
아무도 몰래 감추고 있다가
구석진 골목에 컥컥 뱉어놓기도 하는 것인데
그러다가 때론 혼자 눈물도 흘리는 것인데
마음에 박힌 가시뼈까지 소화시키던 고양이가
동그란 눈알의 불을 끄고 시계를 먹는다
적당히 우물거리다가 삼키는
동글동글 잘게 부서진 시계
시침 분침이 없는
손목시계보다 더 작은 시계
물렁물렁한 바람이 곧 고양이를 벗어놓고 달아날 것이라는 말이 있다
시계 수리공의 장례식 / 박서영
모든 죽음은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남은 사람들은 시계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흰 벽에 걸린 시계가 물고기처럼 가고 있다
저 부드러운 지느러미
한 번도 만진 적 없어서 아름다운 지느러미
한 번도 본 적 없어서 더 아름다운 지느러미
나는 시계 속의 무량한 구멍으로 당신을 느낀다
장례식에서도 시간의 주유소는 번창하고 있다
울음을 뒤덮고 남은 웃음으로 지폐를 세는 손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뻔뻔함으로
시계를 본다
플라스틱 그릇에 담긴 국밥 한 그릇씩 앞에 놓고
심각하게 앉아있는 시간의 덩어리들
당신은 두려운 이미지만 남긴 채 웃고 있구나
평생 시계 속의 파닥거림에 몰두한 당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고단함으로
몸 안의 건전지를 갈아끼운다
심장을 너무 많이 찌른 바늘이
마음의 귀신을 파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있다
시계악기벌레심장 / 이수정
부서진 첼로에서 살아남은 음악은
상체를 내민 채 구조되었다
첼로는 음악을 감싸 안고 있었다고 한다
음악은 뿌리내려
여름 나무가 되었다
두근두근
나무에겐
시계이자 악기인 심장이 있어
두근두근
6시를 가리키면
반으로 갈라진 시간의 양쪽에서
여명과 황혼이 일시에
하늘을 물들였다
눈뜨는 감각, 눈감는 생각
탈출하는 빛, 감도는 어둠
구체적이고 추상적인 감정이
일시에 튀어 올라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하늘은 부드러운 금속으로 빛났다
검고 큰 뿔, 자이언트 장수하늘소 한 마리
첼로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시계 / 이용임
돌아보자
내 의자 위에
시계가 앉아 있었다
하늘이 검은 왼 눈을 감고 붉은 오른 눈을 뜰 때마다
시계는 느리게 뚝, 혹은 딱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가장자리가 상한 잠이 쏟아졌다
창밑으로
키 작은 구름들이 지나갔다
꽃잎을 이마에 얹은 저녁이
까르륵거리며 뛰어갔다
갈래갈래 풀어진 손가락으로 얼굴을 쥐어뜯으며
바람이 불었다
휘어진 그림자에 기대어
나는 잠이 들었다
졸다가 깨어날 때마다
야윈 손가락으로 왼뺨을 긁는
시계의 맨발이 보였다
마침내 사람들은 낡은 문을 비틀어 열고 들어왔다
발목이 긴 그림자가 엎드린 내 오래된 부엌에서
놀란 목소리들이 부스러지는 내 몸을 들고 나갔다
홀로 남은,
의자 위에는
싱싱하게 푸른 내 얼굴이
거멓게 졸아붙은 심장을 안고
경쾌한 소리로 뚝, 딱거리고 있었다
안으로 잠긴 방의
몽상하는 당신의 의자 위에
어쩌면 시계가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관절이 모두 꺾인 까마귀처럼 울부짖으며
하루, 혹은
몇천 년 동안
모래시계의 구조 / 최금진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 이 대립구조가
당신과 나의 육체의 골격을 이룬다
불투명한 유리를 텁텁, 씹으며
서로가 내연의 사막을 견디고 있을 때
벗은 몸으로 증오의 더께를 가늠할 때
이 싸움은 누구든 패한다
낙타 위에서 낙타가 된 사막의 전사들
그 전쟁 같은
관계,
핥아 먹을 수 없는 성기와 등의 관계
두 개의 유방과 브래지어의 관계
당신과 나는 합장하고 죄를 비빈다
육체는 모래의 성분과 동일하며
뼛가루가 흘러내린다
털 빠진 노인의 가랑이가 흘러내린다
여자들과 남자들이 알몸으로 뒤엉겨 싸운다
당신과 나는 양극단에서 만나
증거를 지우기 위해 서로를 매립한다
당신의 얼굴이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내가 한 개의 무덤이 되는 구조
그 대칭의 병목에
당신과 내가 살아 있다는 추문만 가득 몰려온다
모래시계 / 이규리
뒤집어지지 않으면 나는 그를 읽을 수 없어
뒤집어지지 않으면 노을은 수평선을 그을 수 없어
그리고 무덤은 이름들을 몰라
폭우가 유리지붕을 딛고 지나가면
장면들은 뒤집어지지
편견은 다시 뒤집어지지
간곡히 전심으로, 이런 건 더욱더 뒤집어지지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밤이 많았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걸 열 번 더 해도
그냥 문을 열 수는 없었지
혁명은 문이 아니었지
설명을 길게 하고 온 날은 몸이 아팠다
애인들은 더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무사하지 않아야 한다
뒤집어진 이후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멀리 두기로 한다
때가 되기도 전에 누군가는 성급히 몸을 뒤집었고
또 누군가는 습관처럼 그걸 다시 뒤집고
이후는 늘 무심하니까
모래가 입을 채우고 나면
조금은 다른 걸 생각할지 모르니까
제 위치를 몰라
우리는 슬프게도 늘 뒤집어지는 중이니까
애도 시계 / 김승희
애도의 시계는 시계 방향으로 돌지 않는다
시계 방향으로 돌다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다가 자기 맘대로 돌아간다
애도의 시계에 시간은 없다
콩가루도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콩가루가 기도를 한다면
어떤 기도를 할까
콩가루는 자기를 복원해 달라고 기도를 할까
콩가루가 복원될 수 있을까
콩가루에게 어떤 기도가 가능할까
애도의 시계는 그런 기도를 한다
가루가루 빻아져 콩가루들은 날아갔는데
콩가루는 콩가루의 소식을 모르고
콩가루는 콩가루의 주소를 모르고
콩가루는 향수를 모르고
콩가루는 다만 바람 속의 근심으로 바람의 애도를 한다
회오리를 타고 시시때때
애도의 시계는 꿈에서 거꾸로 나온다
오리엔트 금장손목시계 / 정끝별
11시 39분 28초에 아버지가 다녀가셨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지 오래인 아버지가
큰오빠 부축에 기별 없이 들이닥치셨는데
자고 갈란다, 막내딸 출가 십오년에 처음 일이었는데
숟가락 하나 더 놓은 저녁상을 달게 물리시고는
사진 한 장 찍어둬라, 양품에 손녀딸 안으셨는데
백세주 한병에 겨우신 듯 잠자리에 드셨는데
해소 천식에 밤새 누우셨다 앉으셨다
보타진 뒷목줄기를 어둠에 꺾어 묻고 하셨는데
무량타 한 장 더 찍어둬라, 아침을 드시고는
손녀딸 인사에 자욱이 말씀 잇지 못하셨는데
아버지가 11시 39분 28초를 풀어놓고 가셨다
막내오빠가 첫월급 기념으로 사드렸던
이제는 아침이 되어도 해가 뜨지 않는
오래된 오리엔트의 시계(視界)
하루 두번 11시 39분 28초를 밥먹듯 돌았던
오매불망 오리엔트의 금도금
그냥 둬라, 방향 잃고 두루 두절된
아버지의 고장 난 유산
한밤이면 들이닥치는 천식의 유전
사진 속 아버지는 11시 39분 28초중이시다
추가 서면 시계도 선다 / 구재기
길이 길로 이어져
끝을 보이지 않는다고
어찌 가던 길을
멈출 수 있으랴
하나의 나뭇잎은
바람결에 날리더라도
굳센 대지 위에
결국 몸을 낮추어 자리하고
눈부신
하늘의 햇살도
잠시 구름 아래
얼굴이 가려지는 걸 보아라
두텁고
단단한 씨알이
껍질 속 깊이
초록을 키우는 걸 보아라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아 나서면
길은 언제나
다시 뻗는 새로운 길
그렇다!
추가 서면
시계는 멈추고 만다
비록 낯설고
어둡다 하더라도
추의 흔들림은 멈출 수 없다
길의 시각을 멈출 수는 없다
수탉시계가 우는 저녁 / 최윤정
자작나무 숲속
체첵의 머리에서 쇳가루가 쏟아진다
새울음 소릴 내며 굴러가는 흰 빛을 따라갔지만
수탉시계 앞에서 시를 쓰면
비밀이 완성될 거라고 했니?
새울음이 나와 나무와 나무 그늘을 초대하는 저녁
체첵의 눈동자 닮은 검지손톱만한 갈빛 사마귀 하나
앞머리칼 속 물방울처럼 맺혀 부르는 노랫소리
각설탕이 부서지는 시를 쓰죠
굳어버린 식빵처럼
엄마 아빤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쿠크두들두 수탉시계가 두들두 울 때마다
수프를 엎지르죠
수프는 미지근한 쇳가루의 잠 부르곤 하죠
바람이 게워낸 초원의 구름들
무성한 숲속, 발뒤꿈치 들고 살강살강
손짓하며 떠가는 흰 빛 따라갔지만
비밀이 완성되지 않아도
잠 잘 자는 겨울
체첵의 사과빛 심장처럼 깜빡거리며
시계 울음에 맞춰 접시가 울곤 해, 두들두들
쓰다 말고 두드리다 말고
곤히 잠든 머리칼
넘어진 시계의 마지막 초침소리, 춤을 춘다
나무와 나무그늘이 머물다 간 바람
새울음 소릴 내며 손 맞잡고
쇳가루춤 춘다
모래시계 / 김중식
흑해黑海 수평선이 역삼각형으로 좁아지다가
백사장에서 다시 치마폭처럼 넓어지는
석양의 모래시계 속에서
축척 1만분의 1
비율의 모래시계 여인이
한 줌 허리를 물결치며 걸어 나오는데
하체부터 파도에 녹아 내 곁을 스쳐갈 땐 입술만 남았습니다
모래로 만든 부처님이 자기 키를 줄이면서
오아시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중생衆生아
지옥으로 새고 있는 모래야
내 입술이 뭘 말하고 있는지 똑똑히 봐라, 혀 차면서
시계저울 / 정익진
그는 정오
나는 밤이었다.
그녀의 체중이 자정이 될 때까지
남은 1시간 35분, 마지막 마술공연이 진행 중인 옥상정원에선
아직도 새들이 날아다닌다.
저녁 7시, 가벼운 키스를 하기 적당한 때였지.
앵무새 횃대 위의 시각을 위해
욕망을 줄여 나갈 수 있겠는가. 거대한 외투를 벗어버려라.
나는 동식물 애호가, 세계적 조류학자다.
푸에블로 족의 추장이 될 것이다.
바람을 흔들어 마시고 안개를 내뿜는다.
저울 위에 다시 오른다.
아침 7시 25분이다.
그동안 35분이 줄었다.
더 젊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잡념을 줄였을 뿐이다. 사랑이 깊어진다.
계체량에 따라 색깔이 결정된다.
오전 8시. 3.5킬로. 나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초록색이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던 나의 삶은 정각 6시.
비 오는 날 오후 6시마다 용서했다. 유일한 자랑이다.
온몸을 소금으로 가득 채워 저울 위에 올라섰는가.
겨우 두 달이 지났을 뿐이야.
내가 달콤해질 때까지 십 년 하고 팔 개월 남았어.
뒤통수에서 독수리 부리가 튀어나오고
사자 갈기 휘날리고 고래의 지느러미가 자라난 뒤에도
혼란을 멈출 수가 없어.
협박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마다 몸피가 불어난다.
사회적 중압감을 느낄 때마다 벽시계를 끌어안는다.
형량은 줄지 않았고 장기 하나씩 증발했다.
저울 위에서 떠나야 할 순서를 기다린다.
구름 위로 뛰어내린다.
태양이 차가워졌다.
벽장 속의 수직과 바다를 합한 무게라든지
그리하여 시간이여
새벽 3시 25분 35초, 그 여자가 죽었다.
얼마나 가벼웠던지 하늘을 날기에 충분했다.
미완의 모래시계
이순현
내 책상 위에도 모래시계
파란 모래
노란 모래
물들인 모래
어느 것을 뒤집든 모래가 흘러내리고
뒤집는 손이 시간의 주인이다
동어반복에 빠져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고
문장을 세 줄씩 쓰기로 한다
피라미드와 역피라미드 사이
탈출구가 아래로 뚫려 있다
앞다투어 빠져나가는 모래들 다시 갇힌다
피라미드 위에 역피라미드
아귀의 목구멍처럼 좁고 가파른 통로
세상도 나도 비좁은 지금을 통과한다
피라미드 그리고 역피라미드
텅 빔이 그들을 하나로 이어준다
빈 곳에서 빈 곳으로 텅 빈 것이 몰려간다
분홍은 3분
노랑은 10분
파랑으로는 30분
물들인 모래가 쏟아지는 시간
평온한 마음도 깊이 들어가면
산악 랠리처럼 코스가 험난해진다
시간이 빠져나간 내 눈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역피라미드로 꽂힌 허공이
내 눈에 파랑을 쏟아붓는다
불벼락과 우레가 섞여 있다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된 바닥
내 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흘러내린 모래처럼
가만히 쌓여 있는 나는
창을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따라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새어나간다
멈춰버린 시계를 차고 나왔다 / 임솔아
잊고 있던 꽃무늬 원피스가 잡혔다
어떻게 이런 걸 입고 다녔을까 의아해하다
의아한 옷들을 꺼내 입어봤다
죽어버리겠다며 식칼을 찾아 들었는데
내 손에 주걱이 잡혀 있던 것처럼
그 주걱으로 밥을 퍼먹던 것처럼
밥 먹었냐, 엄마의 안부전화를 끊고 나면
밥 말고 다른 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나는 이제 아무거나 잘 먹는다
잊지 않으려고 포스트잇에 적었지만
검은콩, 면봉, 펑크린, 8일 3시 새절역, 33만원 월세 입금
포스트잇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렸다
까맣게 잊어버린 검은콩이 냉장고에 있었다
썩은 내를 풍기는 검은콩엔 왜 싹이 돋아 있는지
이렇게 달콤한데, 중얼거리며
곰팡이 낀 잼을 식빵에 발라먹던 엄마처럼
이렇게 멀쩡한데, 중얼거리며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던 엄마처럼
죽고 싶다는 말이 솟구칠 때마다
밥을 퍼서 입에 넣었다
엄마도 나처럼 주걱을 잡았을 것이다
눈을 뜨자마자 엄마는 매일 주걱부터 찾아야 했을 것이다
밥맛은 어째서 잊힌 적이 없는지
꽃들의 모가지가 일제히
햇빛을 향해 비틀리고 있었는지
경이로움은 어째서 징그러운지
멈춰버린 시계를 또 차고 나왔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꽃 없는 꽃밭에 철퍼덕 앉아 보았다
[2014년 1차 차세대예술인력육성 문학분야 선정작]
벽시계
마경덕
벽에 목을 걸고 살던
그가 죽었다
벽은 배경이었을 뿐, 뒷덜미를 물고 있던 녹슨 못 하나가
그의 목숨이었던 것
생전에 데면데면 바라본 바닥은 그를 받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시간의 실핏줄까지 환히 꿰더니
정작 벽과의 관계는 풀지 못하고
그는 추락했다
드러난 벽의 속살, 뒤편
직사각형 족적 하나가 필생의 흔적이었다
바닥은 허공을 받치는 기둥
조각조각 이어붙인 시간이 바닥으로 흩어지고
심장이 멎으려는 찰나, 시간은 뼈를 맞추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손목으로 옮겨와 태연히 흘러갔다
밤낮없이 분류하고 조합했던 하루들
심장을 관통하던 전율과 초를 다투던 치열함은
벽을 놓치는 순간 사라지고,
그가 평생을 섬겨온 시간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묵직한 추를 만져본다
시간이 빠져나간 빈 몸
한 번도 몸 밖으로 나온 적 없는 제 몸이 무덤이다
관처럼 기다란 나무상자가 죽은 몸을 담고 있다
아버지의 금시계
마경덕
아버지 모처럼 기분이 좋으시다 노란 금시계를 내밀며, 이거 봐라 오늘 집에 오다가 횡재했다 십만 원짜리를 삼만 원에 샀다 허어, 이 비싼 걸 그리 싸게 주다니 검게 그을린 팔뚝에 금시계 눈부시다 주름진 손에 금시계 반짝인다
싸구려 도금시계 조잡한 금시계를 아버진 도무지 모른다 술 한 잔에 보증 서주고 집 날리고 친구들에게 봉이라고 불리는 세상모르는 아버지 그러고도 남을 믿는다 칠이 다 벗어져 거뭇거뭇한 아버지 며칠 후 멈춰버린 시계를 믿는다 길에서 처음 본 시계장수를 믿는다 오늘 참 고마운 사람을 만났어, 어허, 이 비싼 걸…
모래시계 / 신용목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나무의 시계 / 이현경
숲을 열고 나온 나무
선명한 무늬로
커피숍 조명 아래 있다
생의 여정을 보듯 톱날에 잘린 살갗의 무늬
겉을 벗겨보면
아직 눈물이 남아있을까
초록의 탑이 멈추어버린 나무의 시계
아픔의 면적이 넓다
물을 부어도 푸르게 일어서지 못하고
숲으로 달려가고 싶었을 너는
길게 외로웠을 것이다
탁자와 나의 간격은 가까워지고
스며든다, 너에게
내 마음과 같아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바닥 온도로 교감하며
너의 거처에서 아픔을 어루만진다
차라리 세밀하게 보지 않았다면
이야기를 모으는 하나의 탁자였을 텐데
너는 끝나지 않은 물음표
과거에서 먼, 흙이 부른다
모래시계 / 최형심
아래로 향하는 것들은 쌓여간다.
일기예보를 따라 누군가 모래시계를 뒤집는다.
도마뱀이 차도로 뛰어들고 있다고 양손에 가득한 전언이 뚝뚝 떨어지면
버찌의 시절은 가고
핏빛의 바닥을 건너는 발꿈치가 젖는다.
이내 물러지는 살들이 녹아내리고 인적은 드물어진다.
부나비들 사르르 내리는 소리 듣는다.
불빛은 불친절한 안내자라고 책방 점원은 비스듬히 앉아 책의 낡은 깃털을 만진다.
바람이 때로 방향이 될 때 서쪽 주방에서 마리, 마리아, 마리사가 운다고 끄적인다.
가는 목을 가진 시간이 휘어지고
맨 처음의 얼굴들은 낱알이 되고 오른편으로 저만치 기우는 슬픔을 가진 꽃들에게서 미립자의 꽃말을 빌린다.
흐느끼는 목덜미들이 멀리 갈 것 같다.
유성우 쏟아질 때, 갈잎큰키나무는 거꾸로 서서 숲이 된다.
발아래 낱말을 묻기 위해 지루한 수염은 자란다.
얼룩을 따라 푸른 파열이 유랑의 무리들을 저만치 보내고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목각의 시계를 지나 한 시절이 오고 한 시절이 갔다.
녹색 군무를 빠져나오는 잎 하나 기억한다.
피곤한 마리와 천천히 잠드는 천체가 나란히 이별한다.
마지막 모래알이 바닥을 향한다.
제35회 방송대문학상 대상작
시계들의 소풍 / 우경주
달리*의 시계들이 소풍을 나온다
평생 기대어 서 있느라 허리 휜 시계들
오늘은 가벼운 차림으로 푸른 하늘 머리에 이고
창으로만 내다보던 세상으로 걸어나온다
납작한 몸 반쯤 꺾어본 후
넓은 바다를 눈 속에 넣으며 모래 위를 달리고
파도를 걷어차 하얗게 구겨 놓기도 한다
잎새 떨군 나무에 겉옷이 되어주고
출생을 짐작할 수 없는 물체위에 앉아보면
탁자위에서 눈 녹듯 흘러내리고 싶어진다
흘러 흘러 바다 끝까지 갈 수 있을까
애초부터 말랑말랑한,
연체동물이었는지 모른다
사각의 벽에 갇혀 다른 이의 일상을
끌어당기며 밀고 가던 고된 삶
나는 저 시계의 성화에 눈 부비며 일어나
얼마나 많은 아침을 쪼였을까
너울에 감겨 소리 아득하게 들려도
고집스런 저 목소리가 밉지 않다
이제는 파도소리 자장가삼아 푹 쉬고 싶다고,
기약할 수 없는 앞날을 향하여
마냥 달리기가 불안하다고,
시간 멈추어 놓고 월담한 시계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나뭇가지에 걸린 시간과 모서리에 접혔던 시간들이
고삐를 풀고 화폭 속에서 걸어나온다
*달리: (1904~89)초현실주의 대표화가. 대표작품<기억의 연속성>에 나오는 시계
고장난 시계 / 권운지
고장난 시계를 고치려고 시계점에 들렀더니 잃어버린 시간들이 그곳에 다 있었다. 그 집의 뻐꾸기시계가 뻐꾹 뻐꾹 크게 울었다. 어슴푸레 뻐꾸기 소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만다. 뻐꾸기 소리는 고장난 시계 속의 길, 그 길은 小路다. 나는 몸을 구부려 그길로 들어섰다. 긴긴 회랑 끝에서 한 아이가 걸어 나왔다. 산밭으로 가는 길에는 우윳빛 안개가 끼어 있고 아직은 찔레순이 여리다. 찔레순을 잡는 아이의 손등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주인은 웃으며 야구르트를 권한다. 야구르트 빨대 속으로 찔레꽃 향기가 빨려 나왔다. 주인은 가느다란 핀셋으로 낡은 내 시계 속에서 찔레꽃 한 잎을 들어냈다. 아이의 몸에는 찔레꽃이 피고 있었다. 꽃 피는 시간 속으로, 시간을 맞추어 드릴까요? 건전지를 교환한 내 시계를 건네줄 때, 뻐꾸기 소리 밖으로 문을 열고 나오지만 나는 다시 길을 잃는다.
부부시계
김종관
아담은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란 시를
인류 최초로 짓고
선악과 문제로 다퉜다
태초부터
부부는 맞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 보고 맞추라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맞추라 한다
큰 바늘 작은 바늘이
똑딱똑딱 초침을 낳고 살다
늙은 시계가 된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날이면
자녀들이 손님처럼 찾아와
건전지 밥을 넣어주고 간다
벽시계
전영모
휘영청 달 밝은 밤
자정이 훨씬 넘어
잠 이루지 못하니
분침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동분서주 하시던 어머니 같고
시침은 뒷짐 지고 양반걸음 걷던 아버지 같다
얘야, 무슨 생각에 잠을 못 자느냐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어머니 목소리가 벽에서 들린다
거꾸로 가는 시계
이희국
네 살 때 나는 가끔 오줌, 똥을 쌌다고 했다
별일 아닌 듯 그것을 치웠을 어머니
당신의 기억에 안개가 덮이고
나 몇 살이니?
백 살이니? 팔십 아홉이니?
아들에게 묻는다
어머니,
그때의 내 나이가 되셨다
잠시 기억도 슬쩍 지워버리는
저 지독한 지우개
깜빡 정신들 때,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 빨던 바지를 놓아두고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 방으로 갔다
거름 주던 배추밭처럼 화장실이 난장이다
가족이 잠든 밤
그 옛날 어머니처럼 지린내를 삼키며
문을 닫고 소리 죽여 바지를 빤다
어머니가 나의 네 살을 빨던 것처럼
천천히 가는 시계/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보았으니
나도 인제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 속에
기르고 싶다.
아버지의 손목시계
박근수
곡기를 내려놓고
아들 오며 주라고
머리맡에 풀어놓은 손목시계
가느다란 의식으로
아들 손에 건너간 것 지켜보며
짧은 유언이라도 하고 싶건만
굳어가는 혀가 말문마저 닫아
눈빛으로 몇 마디 주고받다가
이승의 문턱을 넘어선 아버지
삼우제가 끝나도
취기는 사라지지 않는데
아버지의 시계는 여전히
내 손목에서 잘도 돌아간다
벽시계의 얼굴
/ 조성식
벽시계를 떼었다
동그란 얼굴이 벽에 새겨져 있다
파리똥도 안 묻은 얼굴로
똑딱이는 심장소리를 두근두근
얼마나 들었는지
금이 가있다
등 뒤에 서있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시계를 떼어낸 자리가
창백하다 영정사진
걸었던 곳처럼
슬프다
핏덩어리 시계 / 김혜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 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 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곗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네 가슴속에 귀를 대보면
핏덩어리 시계 저 혼자 쿵쿵 뛰어가는 소리
시간 맞춰 잘도 울린다
늙은 시계수리공 / 정희
남대문시장 시계골목
작은 시계 수리점 남일사
한 평 남짓한 골방에 개구리눈으로 툭 불거져 나온
돋보기 시계수리공 김씨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에 육순을 훌쩍 넘기고
고장난 시계를 오늘도 만진다
낡은 시계들이 꼬리표를 달고
먼지 속에 쌓여있다
시계줄이 그를 꼭 붙잡고 있다
시계의 방
김인숙
해시계는 힘들게 그림자를 끌고 가고
모래시계는 조금씩 자신을 허물고 있다
그의 손목에 시간이 갇혀있다. 작은 시계의 방
문을 열었을 때 꽉 찬 소리의 시간들이
해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일순에 헐거워진 팔
초침은 초조하게
분침은 분주하게
시침은 시들하게
남남이듯 바투 이어져 쳇바퀴처럼 벽을 핥고 있다
사람들은 하나씩의 시곗바늘이 되어 돌고 돌았다
둥근 시계 속으로 저마다의 하루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판화로 찍어낸 듯 똑같은 얼굴의 시간들
열쇠 구멍도 없는 방에서
한 입 사과를 베어 물듯 조금씩 자신의 몸을 조각조각 먹어 들어간다
갉아 먹히면서 돋아나는 뽕잎처럼
시간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반짝이는 명주실 한 올, 길게 뿜어져 나가는 시간의 줄기
살아있는 것들은 몸속에 시계 하나씩 넣고 산다
째깍째깍 살아있는 한, 생은 쉬지 않고 움직여야한다
야간행군까지 해야 한다
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창백한 얼굴의
꽃은 씨방을 부풀려 가장 화려했던 날들을 시간으로 저장한다
처음에도 그랬다. 시간의 방에는 표정이 없다
아무리 허물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시계 수리공 / 정대구
내가 고장난 시계를 고치러 갔을 때
시계점 주인은 졸고 있었다.
그의 유리를 깐 테이블 위에는
발이 묶여 서 있는 초침들
내가 그 옆에 서 있는 동안
나의 시간이 가혹하게 분해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걸려 있는 시계들이
그 때 대중없이 시간을 알리고
당혹한 나의 심장의 바늘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일각 일각 심지의
초침이 타들어가고
극장 벨을 울리고
나는 3시 반에 만날
그녀와의 약속을 생각해 내고
을지로에 있는 오늘로 내달려 갔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핀세트 하나로 죽은 초침을 집어 내어
다시 살리어 내는
그가 수리해 준 시간이
나와 그녀와의 약속을 적중시켰다.
주전자가 푸파거리며
끓고 있는 옆에서
나는 잠시 시간을 들여다보다가
초침과 초침 사이
정교한 시계 수리공의 손놀림과
돗수 높은 안경을 생각해 내고
나는 그녀의 팔을 끼고
그녀는 열심히 극한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들은 묶여 있던 발들이
일제히 풀려 나오는
오늘을 밀고 나왔다.
시계 밥 줘라 / 유안진
새 아가, 대청마루 시계에 밥 줘라
예 아바임!
숭늉대접 올립니다 아바임
오냐, 시계 밥은 줬냐?
예 아바임
아까 전에 진지상 올렸는데, 아직 수저도 아니 드셨사와요
이런 시절 이런 댁의
새아기가 되어봤으면
아니 아니 오히려 시아비가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