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들 / 천서봉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욕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07)
* 천서봉 시인(건축사)
1971년 서울 출생. 국민대 조형대학 졸업
2005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서봉氏의 가방』,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산문집 『있는 힘껏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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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은 늘 과잉상태에서 ‘과잉’과 더불어 살아간다.
지구는 인구과잉으로 포화상태이고, 시장에는 상품들이, 거리에는 자동차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지구는 이미 소음과 쓰레기와 먼지들로 포화상태에 있다.
인간은 이러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과잉’의 문제점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과잉’이 ‘결핍’만큼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서봉의 시 「과잉들」은 이처럼 ‘과잉’에 무감각한 우리네 삶을 꼬집고 있다.
1연에서 시인은 ‘폭설’이라는 과잉현상을 ‘속죄’와 연결시켜 내면화하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가로등이 켜진 밤거리를 걷는 행위와 어두워진 자신의 내면을 결부시키고 있다.
이것은 평소에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쳤던 외적 과잉의 현상들이 자신의 내면과 무관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잉’은 우리의 삶에 어긋난 결과를 가져온다.
3연에서 자신이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을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은 것으로 표현한 것은
화자가 명백히 ‘과잉’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천서봉 시인의 탁월한 언어 운용 능력이다.
4연에서 타인의 걱정을 들어주느라 자신은 저녁 밥 한 숟갈도 뜨지 못했다는 것을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로 제유한 것이나,
5연에서 글을 쓰려고 끙끙거리다가 마음에도 주름이 여럿이 생겼다는 것을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로 은유한 것은,
천서봉 시인의 말을 운용하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음을 잘 보여준다.
6연에서 화자는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는 표현을 통해서 울고 웃던 시인의 삶 속에
자신이 필요로 했던 엄마 같은 존재들이 무수히 많았음을 에둘러 증언하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엄마’는 단지 ‘랑그’로서의 문자적 ‘엄마’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빠롤’적 사랑의 세목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7연에서 시인은 ‘봄비’라는 자연현상을 ‘망상’과 ‘식욕’이라는 인간의 욕구와 결부시켜
‘참 많은 당신’으로 의인화 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아픔’을 동반하지만
욕망은“아픔을 몰라볼 만큼”무감각해지고 비대해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언급한 ‘과잉’ 현상들은 시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들은 아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시의 말미에서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여기서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이야말로 물질적으로 비대해져가는 현실과 이러한 과잉을
무감각적으로 수용하는 인간의 욕망을 함께 거부하는 시인다운 마음자세이다.
특히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는 고백은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십자가」)는 윤동주의 핍진한 마음과 닮아있다.
이처럼 겸허한 마음은 천서봉 시인에게 있어서 어지러운 ‘과잉’의 세상을 ‘결핍’이라는
역설적 무기로 헤쳐 나가는 참된 삶의 지혜인 것이다.
— 계간 《시인시대》 2023년 겨울호, 박남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