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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
1782년 1월 5일,
스코틀랜드 북부 노덤벌런드(Nothumberland) 주 모패드(Morpeth)라는 작은 읍 소재지에서
로버트 모리슨이 태어났다.
모리슨의 아버지는 장로로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노력했고,
교회와 가정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바른 신앙인이 되고자 가족을 이끌었다.
모리슨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모리슨의 어머니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르치고, 성경을 끊임없이 들려주었다.
모리슨은 외삼촌인 제임스 니콜슨이 경영하던 학교에 입학하여 초급과정을 교육받았다.
14세에 학교를 졸업한 모리슨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신발 가게에서 수습공으로 일했다.
사춘기에 이른 모리슨은 잠시나마 어두운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나 무분별한 생활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16세 때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다.
하나님 사랑과 예수 크리스토가 흘린 십자가 보혈을 믿고 받아들이며 거듭났다.
머나먼 선교지로
모리슨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업을 이어 갔다.
하지만 모리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대부분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로 채웠다.
모리슨은 인간이 죄지은 대가로 영원한 형벌인 지옥에 갈 수밖에 없지만,
예수가 쏟은 보혈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가득 차서 예수를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선교하기로 마음먹었다.
19세(1801년)가 된 모리슨은 뉴캐슬 장로교회 레이들로 목사에게 라틴어, 히브리어를 배우고,
조직신학과 속기술을 공부했다.
1803년에는 고스포트(Gosport)에 있는 선교사 아카데미(The Missionary Academy)에 전입했다.
여기서 모리슨은 중국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고,
중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모리슨은 죽음을 각오하고 중국에 뛰어들기로 작정했다.
1805년 23세 때, 모리슨은 런던선교회에 중국 선교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듬해 런던 선교회가 모리슨을 중국선교사로 내정하고 본격적인 선교사 훈련을 했다.
특히 대영 박물관에 있는 중국 서적들을 읽으며 현지훈련을 하고,
의학과 천문학 지식까지 교육했다.
1807년 1월 8일에 목사로 안수받고, 30일에 선교지로 향했다.
중국으로 가기 전, 미국에 들러 여러 선교 사역에 대해 정보를 입수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거대한 대륙, 중국 땅으로 들어가다
그러나 배의 목적지는 중국이 아니었다.
중국 땅에 들어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기에 모리슨은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으로 들어가고자 했다.
중국으로 가는 우회길은 멀고도 험했다.
약 7개월이 넘는 고생스러운 여정을 거쳐 모리슨은 중국 남쪽 포르투갈령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죽기를 각오한 땅에 힘 있게 첫 발을 내디뎠으나 모리슨을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 땅에 도착하는 것과 중국 땅에서 선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당시 중국 안에서의 합법적인 선교는 불가하였다.
또한 동인도회사(17세기 초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의 유럽인들이 동방 진출을 목적으로 세운 회사)
소속 상인 이외, 그 누구도 이곳에서 머물 수 없었으며,
이미 인도에서 선교 문제로 인해 크게 어려움을 겪었던 동인도회사는
모리슨의 동태를 감시하며 복음 전하는 일에 압력을 가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마카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은
모리슨이 마카오에 있는 것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래서 모리슨은 마카오에서 광저우(Guangzhou)로 거처를 옮겨
이관(중국에 밀입국하였거나 또 입국 목적이 분명치 않는 외국인들을 임시 수용하는 곳)에 머물렀는데,
거기서도 당국의 감시와 이관 규칙들로 인해 그 행동이 자유로울 수 없었다.
졸지에 모리슨은 오랑캐 신세가 되어 수용 생활을 시작한 것과 같았다.
동인도회사에 들어가다
수용소를 나와 중국인과 같이 행세한 것도 잠시, 모리슨은 잠시 쉴 곳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중국인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고독과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압박에 짓눌렸다. 그래서 그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동인도회사에 취직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809년 2월 20일,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통역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리슨의 취직 문제는 선교사가 식민사업과 결부되었다는 문제로 런던선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가져왔으나, 당시 선교회에서도 모리슨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모리슨은 동인도회사의 일원이 된 이후 중국에서 공인된 지위를 얻게 되어
거주의 권리조차 없어 불안하던 곤경을 벗어날 수 있었고,
동인도회사로부터 받는 500파운드의 봉급으로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여유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일을 하며 번 돈으로 비밀리에 중영사서(中英辭書)의 편찬,
성서의 중국어역 및 교의해설서 저작 등에 힘쓰기 시작했다.
번역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중국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의 인쇄 작업도 이루어져야 했다.
그리하여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부처와 협력하여 말라카에 대규모 인쇄소를 설립했다.
1818년 이후의 인쇄는 주로 이곳에서 행해졌으며
성경뿐 아니라 정기간행물도 발행하게 되었다. 거기서 인쇄된 성경은 주변 지역으로 배부됐다.
중국 선교의 기초를 설립하다
첫 번째 개종자는 그가 중국에 들어온 지 7년 만에 생겼다.
인내와 수고의 결실이었다.
모리슨은 17년간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우고,
성경 등의 문서작업과 광둥,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1824년, 건강 문제로 영국으로 귀국하였는데,
이때에도 중국 선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국어강좌 등을 개설하여 강연을 했다.
이곳의 학생 중 한 명이 새뮤얼 다이어(Samuel Dyer)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의 장인이다.
1826년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과 영국 간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에 힘썼고,
중국어사전 3권, 중국어 신구약성경인 ‘신천성서(神天聖書)’ 등을 남기고 1834년 52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모리슨은 평생을 중국에 헌신하며 중국 선교의 단단한 기초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가 번역한 중국어 한문성경을 들고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들어갔으며,
1866년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선교사는
이 한문성경을 가슴에 안고 조선 땅에 들어오자마자 대동강에서 순교함으로 성경이 한국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모리슨은 생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리슨의 중국 선교를 두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모리슨 씨, 중국에서 당신이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정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동인도 회사 직원으로 중국 내에 거주할 수 있는 신분보장과
약간의 경제적 보상을 받았지만,
모리슨은 본인에게 주어지는 전부를 쏟아부어 중국 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특히 중국어로 성경 번역과 출판 사역을 했다.
1812년, 크리스토교 서적을 출판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에 따라,
선교 거점을 광저우에서 말라카로 옮겼다.
특히 런던선교회에서 파송된 밀느 선교사와 함께 말라카에서,
1818년 외국인에 의한 최초의 신학문 학교인 영화학당(英華學堂)을 세워
크리스토교 정신을 보급하는 데 힘을 쏟았다.
영화학당은 중국인 최초 크리스토교 목사를 배출했다.
모리슨은 광저우, 말라카, 마카오를 왕래하며 중국인에게 복음을 전했고,
《중국어 사전》(3권, 1815~23)을 편찬했다. 1809년에 성경 번역을 시작해
1814년 출판한 중국어 신구약 성경인 ‘신천성서’가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중국에서 크리스토교가 깊이 뿌리내렸다.
모리슨은 중국 최초 크리스토교 선교사다.
사방에서 우겨싸는, 숨 쉴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며
자신에게 맡겨준 선교 사명을 감당했다.
1834년,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로버트 모리슨 목사는 마카오에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출처 : 양화진선교센타)선교사 열전 /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모리슨의 성경번역 사업]
모리슨의 공헌 중 하나는 성경 번역이었다.
물론 그의 번역본이 나오기 전에 윌리엄 캐리의 동역자 조슈아 마쉬맨의 중국어 성경 번역본이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하여 선교 열정과 문학적 노력의 기념물 정도로 여겨지고,
일반적으로 모리슨의 것이 중국어 번역의 첫 작품으로 인정된다……
모리슨이 선교를 시작할 당시 외국에 대한 중국의 태도는 배척의 자세였다……
모리슨은 중국에 인접한 마카오에 선교기지를 설립하고 인쇄소를 세워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의 주된 선교사역은 성서 및 성서와 관련된 소책자를 번역하고 편찬하는 데 있었다.
동인도회사의 반대와 중국 정부의 쇄국정책 속에서……
그의 주요 편찬사업으로는 「사도행전」, 「신천성서」, 스코틀랜드교회의 「영국교회의 기도문 번역」등이 있다……그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1818년 말라카에 영화서원을 창설한 것이다. 이 학교에서 1818년과 1883년 사이에 40여 명의 학생들이 과정을 이수했고 그중의 15명이 세례를 받았다.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의 어느 교회에 말썽꾸러기 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의 부모는 그 교회의 장로님 이었지만, 그 소년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했다. 성격도 무척 난폭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아이를 멀리하고 경계했다. 그런데 그 아이의 그런 모습을 아파하던 주일학교 여선생님이 어느 날 옷 한 벌 사들고 소년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 아이는선생님을 향해 난폭스러운 말을 하면서 그 옷을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이 일로 선생님은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우리들도 어린이들을 지도하거나, 전도현장에서 이와 유사한 일을 당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그 여선생님은주일학교 부장을 찾아가 ‘이제 더 이상 그 아이를 맡을 수 없다’ 말했다. 그러나 주일학교 부장은 오히려 그 선생님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선물들을 사들고 소년을 찾아갔지만, 그것들도 역시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은 여선생님에게 “저 아이는 구제불능이며, 더 이상 사랑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그 여선생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제자를 찾아가서 권면하면서 눈물로 호소했다. 그래서 결국 선생님의 헌신에 감동된 소년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성장해서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그 소년이 바로최초의 중국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다. 모리슨은 청나라 가경황제 12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33년 전, 크리스토교 선교사로서는 첫 번째로 중국 땅을 밟았다. 모리슨은 중국에서 27년 동안 사역하면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중국어 사전도 출판했다.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성경을 이용해서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중국에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할 수 있었다. 모리슨이 번역한한문성경은 우리나라 선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866년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는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을 들고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군에 의해서 배는 불타고 토마스 선교사는 “(한자로)야소(헬라어로 예수) 야소”를 외치면서, 모리슨이 번역한 한문 성경을 대동강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던지고 순교를 당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성경책을 회수하는 일을 맡았던 평양 안주골의 주사였던 박영식은 한문으로 된 성경책을 모조리 뜯어서 자기 집의 도배지로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의 방에 누워있을 때 온통 방안에 도배된 성경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감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였는데, 이 교회가 바로 평양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교회이다. 바로 이 널다리골 교회가 부흥이 되면서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명하였는데, 이 교회에서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세계 크리스토(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1907년 대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 중국에 파견한 최초의 선교사이다. 모리슨은 중국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는데, 신학과 중국어를 공부한 뒤 1807년에 목사 안수를 받고 곧바로 선교회에 의해 광저우로 파송되었다. 1809년 동인도회사의 통역관이 되어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중국에서 27년간 선교활동을 하면서 겨우 10명을 개종시켜 세례를 주었지만, 그들은 모두 신실한 사람이었다. 개종자인 량아파를 복음전도자로 받아들여 개신교는 최초로 중국인을 성직자로 임명했다. 동료 윌리엄 밀른과 함께 앵글로차이니스 칼리지를 말라카에서 설립했으며(1843년 홍콩으로 이전) 〈신약성서〉를 중국어로 번역했다(1813). 그들의 성서 완역본은 1821년에 나왔다. 모리슨은 〈중국어 문법 Grammar of the Chinese Language〉(1815)· 〈3부로 된 중국어 사전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in Three Parts〉(1815~23)도 서술했다. 그가 죽은 뒤 신설된 모리슨 교육협회(Morrison Education Society)에 의해 중국 청소년들을 위한 또 하나의 학교가 설립되어 처음에는 마카오에 있다가(1838) 나중에 홍콩으로 옮겨졌다(1842). “오, 위대하신 일 이루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것입니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馬禮遜, 1782–1834)과 윌리암 밀른(William Milne,米憐, 1785-1822)은 1810년부터9년 동안 긴밀한 선교 협력(Co-Operated)을 이룬 선교 동반자(Missionary Partner)이다. 이 두 분은 “간지스 강 넘어 선교회“(Ultra-Ganges Mission)를 조직하여 선교 계획을 함께 구상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수고하고, 함께 고난을 헤쳐 중국 선교와 동남아시아 선교를 확장시킨 분들이다. 성서번역도 분담하여 완역하였고, 말라카에 선교기지를 두어 선교사 양성을 위한 학교(Anglo -Chinese College)을 설립하고, 성경과 전도책자 인쇄를 위해 출판사역, 복음전도 사역을 함께 이루어 간 분들이다.(B.p10-11) 18세기 당시 서구는 "동남아시아"란 지역분류가 없었고 몰랐다. 아시아라 함은 "인도와 중국"을 알았고, 동남아시아를 "인도 긴지스 강과 중국 황하 강 사이"로 알았다. 동남아시아를 "Ultra-Ganges"라 하였다. 밀른은 다인종 다문화의 말라카를 선교기지로 정하고, 말레이인(Malay)과 인도인(Malabar)을 위한 “교회와 학교”를 세웠고, “말레이어 성서와 전도문서 출판 사역”도 추진하였다. 또한 선교지를 Batavia(Jakarta), 싱가폴(Singapore), 페낭(Penang)으로 확장하여 선교지부도 설치하고 교육과 선교, 문서사역을 곳곳에서 실시하였다. 밀른은 1817-8년 겨울 동안에 광동을 방문하여 모리슨과 College 설립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1817년 9-10월 서로 손 잡고 일할 사역을 논의하는 중 광동과 말라카를 공식 기지로(Formal basis) 정하고, 협력활동(Joint Operations)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들 스스로 “울트라 간지 임시 위원회”(Provisional Committee of the Ultra-Ganges Missions)를 조직하였다.(B.p33). 11월2일에 다시 모여 선교기지를 말라카에 두며 말라카에 College를 세워 “중국인과 유럽인 선교사를 양성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삼는다고 결의”하였다. 1818년1월일, 임시위원회를 열어 말라카의 선교 재산을 Anglo-Chinese College 대지로 사용할 것과 교사신축을 결의하였고, 모리슨은 건물 건축비로 1,000파운드를 헌금하였다.(b.p35) 1. 말라카의 Ultra-Ganges Mission 설립과 사역계획 밀른은 학교 교사, 도서관, 출판인쇄소, 문서전도, 예배실, 선교사 및 교사 주택 등의 종합 선교센타 필요성을 느꼈으며 다양한 전문 분야의 선교사 및 사역자 간에 긴밀한 협력과 질서의 필요성을 생각하였다. 밀른은 이러한 복합 건물을 위해서 대지가 우선 필요로 하였다. 1816년 1월 페낭을 방문하여 영국정부 관리인 윌리암 페트리(Hon William Petrie)와 페낭힐(Penang Hill)에서 아침을 함께하며 말라카 선교센타 계획을 전하고 이에 필요한 대지 구입 협조를 요청하였다. 말라카는 네델란드 관할 지역이므로 대지구입이 거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관리와 새로 부임한 네델란드 행정관(Administration)의 협조로 “선교 인쇄소(Mission Printing-Press) 설립” 조건으로 허락을 주선해 주어 2월초 도시에서 좀 떨어진 성 죤힐(St.John's Hill)의 황폐한 대지를 허락 받았고, 한 달 후 이보다 작은 대지이지만 남 인디아 상인 탐비(Tamby Ahmad Sahid)의 더 좋은 대지와 교환 할 수 있었다. 이곳은 해변 길 서부지역으로 도시의 관문(Gate of the Town)으로 트랜꾸에라(Tranquerah) 지역이다.(B.p28) 밀른은 1816년 8월 도시외각에 밀른과 톰슨의 주택과 선교관(Mission House)으로 사용할 건물과 대지를 허가 받아 이전하였고, 1817년 1월 해변을 따라 석벽을 쌓고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인쇄소, 출판소, 창고, 인쇄공 숙소 등 4등분하여 완공하였다. 1817년6월에는 인쇄소도 확장 시켜 중국어와 말레이 인쇄소를 설치하였다. 밀른은 앞으로 도서관, 언어학교를 세워 종국에는 선교사양성 학교(Traning College)로 발전시킬 계획이었다.(B.p29). 이곳에서 모리슨의 신약성서 둘째 판을 사륙판(Duodecimo)으로 계획하여 1817년 모리슨이 보낸 인쇄공과 함께 영국성서공회 1,000파운드 지원으로 1만권을 인쇄하였다.(B.p29) 새로운 건물에서 1816년11월 벵갈에 주문한 영문자 및 아랍활자와 인쇄기와 절단기가 도착해 영어와 말레이어 인쇄도 감당하게 됐다. 이 소식을 모리슨이 듣고 6명의 인쇄공을 더 보내 주었다.(B.p30) 이 인쇄기로 전도책자를 출판하여 중국 선교 및 한국선교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중국어와 영문 정기 간행물도 출판하였다. 밀른이 학교 개교하던 날, 잡지를 발행하였고, 1817년5월에는 "The Indio-Chinese Gleaner"을 발행하고, 밀른이 편집장 및 주필을 맞아 출판 보급하였다. 이 잡지에는 선교활동 상황이 기록되어 있고, 종교, 철학, 문학, 역사 등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유럽에서 “우수한 출판물로” 기록되기도 했다.(B.p30) 런던선교회는 출판인쇄 기술 있는 선교사 매드허스트(W.H.Medhurst)를 파송하여 1817년 6월 말라카에 도착하였으며, 선교사양성학교에서 언어훈련 받으며 선교사역에 참여하였다.(B.p31) 톰슨은 쉴 수 없는 격무에 병이 들어 잠시 귀국하였다. 2. 중국어 신약성서 번역(1813.12.)-광동에서 출판(1814) 모리슨과 밀른의 최대 관심과 런던선교회로 부터의 임무는 중국어 성서번역이었고, 이는 선교의 문이 닫힌 중국선교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당시 외국인에게 글을 가르칠 수 도 없고 더욱이 외국인이 중국어로 출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리슨은 사도행전을 번역 인쇄하였으나 황제의 금지령으로 더 이상 중국내에서 인쇄출판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선교기지를 말라카로 옮겨 성서출판을 완성하려는 하였다. 1813년 9월 30일, 모리슨은 밀른과 신약성서 번역을 의논하였다. “나는 마카오를 떠나기 전 잠시 동안 신약성서 번역 완성에 관하여 말하였다”(1813.9.30.일기, L.p412). 모리슨은 신약성서 번역을 1813년 12월에 완성하고 다음과 같이 그 감격을 기록하였다. “신약성서가 중국어로 번역 완료 된 것은 주님의 축복으로, 즉시 모두 인쇄되었습니다. 오, 위대하신 일 이루신 주님! 당신의 말씀은 당신의 것입니다. 결코 무효한 것으로 돌리지 마옵소서.” “이 사역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보내 주심도 축복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이루신 줄 믿습니다. 주님, 그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축복하시 옵소서. 이방인들도 그로인해 당신의 축복을 받게 하소서.“ “이방인들이 그들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함을 애탄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함에 부족한 것도 두려워합니다. 주님, 나를 용서하시고 예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선포할 수 있도록 도우시옵소서. 아멘 또 아멘“(Amen and Amen) 영국성서공회는 모리슨의 성경번역에 큰 관심을 가졌고 풍족한 지원을 해 주었다. 모리슨이 성서공회 타이마우스(Teighmouth)경에게 보낸 1814년 1월 28일 감사의 편지에 “당신의 용기를 북돋아 주심에 힘입어 광동에서 인쇄되고 제작된 중국어 신약 성서 번역본을 드립니다”.(L.p413)고 했다. 1814년1월 11일에는 런던선교회 총무에게도 보고서를 보내었다. “영국과 외국성서공회의 두 번째 승인으로 준 500파운드는 중국어 성경 번역, 인쇄, 배포비로 사용 됩니다. 나는 선교회에 신약성서 번역이 중국어로 완성되었음을 알렸고, 번번이 인쇄소로부터 용지가 없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신약성서 2,000권을 인쇄에 넘겼으며 비용은 스페인 달러로 3,818불 듭니다. 이 번역이 완전할 것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내게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복음서, 서신, 계시록은 내 자신이 번역하였고 영국박물관에서 추천한 경건한 일꾼이 참여하였습니다.” (Life of Morrison, Vol i.p384, L.p414) 우리는 여기서 모리슨이 1815년 초, 아내가 자녀를 데리고 건강 검진 위해 영국 방문하고, 밀른도 떠나 있는 때, 4억 중국인들을 위한 개신교 선교 대표로 홀로 있는 외로움 속에서 수많은 어려움에도 굽힘없이 감당해 나가는 모습 볼 수 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번역 사역이 내 마지막 선교목표이다. 나의 임무는 주님의 날까지 될 것이나 내게 들려오는 소식들은 두렵다. 나는 공식적인 신앙고백 이루기를 바란다. 지난해(1815년) 말, 어려움이 수 없이 많았다. 사전 인쇄공들이 불안을 일으켰고, 많은 시간을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었다. 하나님, 나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옵소서.” 1817년 9월 4일 모리슨이 중국선교 10년을 정리하며 부르더 박사(Dr Burder)에 편지를 보냈다. “내가 선교사회 목적을 효과적으로 수행키 위해 모국 땅을 떠나 첫 발을 내디딘지 오늘로 10년 경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으며 그의 거룩한 이름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성서번역 사역 감당에 수많은 어려움이 계속 닥쳐왔지만 장애에도 굳게 서 나가도록 함께한 동료들을 생각하며 “우리가 염려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이 당연합니다.”고 하여 그의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L.p420) 3. 중국어 구약성경 번역(1819.11.)-말라카에서 인쇄, 출판(1823) 모리슨은 밀른과 성경을 분담하여 번역했으며 1818년 구약전서 번역이 완료 될 것이라 고 했으며, 1819년 11월 25일, 성경전서 번역이 12년 만에 이루어지게 되었다. 죠셉 성경번역 완역은 “런던선교회와 Ultra-Ganges Mission에 기록할 만한 일이다”고 말했다.(J.p123) 밀른이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에서 욥기 까지 번역하였고, 모리슨은 그 외 구약성경과 신약성서를 번역한 것이다. 이 성경은 말라카(Malacca)에서 인쇄 작업이 시작되어 1823년에 22권으로 출판되었다. 1823년 성서가 출판되는 동안 모리슨의 아내가 세상 떠 났고(1821.6), 그의 충실한 동료 밀른도 세상 떠 났다.(1822.6) 그러나 성경은 1823년 말라카에서 중국어 성경 전체가 처음 출판 된 것이다. 1823년 첫 출판 이후 1845년 까지 수천 권이 출판 되어 보급 되었다.(J.p124) 사무엘 다이어(Samuel Dyer)선교사는 1835년에 말라카에 도착하여 신형 인쇄기로 출판키도 하였다. 781년 네스토리안 기념비(Nestorian Monument)에 첫 중국 선교사인 알로펜(Alopen)과 로만 캐토릭 선교사들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번역하였지만 성경전체가 번역 출판되기는 처음인 것이다.(H.p113) 이 성경은 일본어 성경과 한글 성경의 대본이 되어 한글 성경의 제목에서부터 용어 사용이 이 성경에서 온 것임을 볼 때 한자문화권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리 p41). 모리슨의 성경 번역출판에 대해 비판과 항의도 있었다. 캐토릭 측에서는 배교행위라 하여 성서를 불태워 버렸다. 개신교측에서도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리슨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다. 모리슨의 일기에 그의 심정이 적혀 있다. “만약 나와 밀른의 중국어 역 성서가 장래 중국에 있어 위클리프와 틴들역이 오늘 성서에 대하여 갖는 위치를 갖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런던 선교회와 대영성서공회는 그들이 많은 재원을 투입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성서를 번역하였다는 이유로 위클리프의 무덤에서 뼈를 파내어 불사른 지가 5백년이 안 된다. 틴들도 같은 이유로 교수형을 당한 후 불살라진 것이 3백년이 안 된다..., 나는 번역에 있어 성실, 명쾌, 간결을 존중하였다. 또한 중국철학과 종교에 사용되는 말도 피하였다. 나는 어려운 말보다 오히려 평범한 말을 사용하였다. 이교도의 철학과 종교의 전문 술어도 피하였다. 어려운 말을 만나 번역할 수 없을 때는 경건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존경하는 사람들을 찾아 의견을 물었다“(M.Burshall: Robert Morrison, a marser-builder p119, 리 p42) 모리슨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옮기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운 책임감으로 경건하게 정확한 번역을 하려고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모리슨은 밀른과 함께 모든 일을 추진하였고 더 좋은 번역을 위해 교정 작업하였으나 밀른의 죽음으로 불가능해졌다.(H.p113). 모리슨은 1824년 3월 17년 만에 영국을 방문하여 모든 영국교회와 사회, 선교단체로 부터 관심과 대 환영을 받았다. 그는 개신교 첫 중국 선교사로써 왕실에서 King George IV세에게 말라카에서 밀른과 함께 발행한 중국어성서를 증정하였다.(B.p75). 또한 1824년5월 대영성서공회 총회에 참석하여 켄터베리 대주교와 수천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는 중국에서 출생한 아들 죤(John)을 단상에 데리고 올라가 회중들을 감격시키기도 했다. 중국어 성서는 대영성서공회 이사장인 타인마우스(Lord Teignmouth)경에게도 증정하였다. 모리슨역의 중국성경 이름은 “신천성서”(神天聖書)라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리.p45) 로버트 모리슨과 윌리암 밀른의 공동번역인 중국어 최초 성경전서(신천성서)는 최초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젼셔"(1887) 대본이 되어, 만주의 죤 로스, 맥킨타이어 선교사에 의해 번역 되었고, 밀른 저 “장원양우상론”(長遠兩友相論) 등 기독교 전도 소책자 출판물은 한국기독교 초기 전도문서이였고, 신학교 교재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한국기독교는 로버트와 밀른의 선교회로 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윌리암 밀른은 별세(1822.6.2.) 하였고, 성경번역 기념비는 “Christ Church Melaka" 교회 내 좌측 벽에 부착되어 있고, 웨스터민스터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가족은 말라카 크라이스트 쳐치(Christ Church) 뒤편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영국정부에서 밀른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장하였지만, 그의 부인 ” 레이첼”(Rachel Cowie Milnel, 1783 ~ 1819)선교사는 1819년3월 20일, 열대 풍토병으로 별세하였고, 묘지는 어린 자녀들과 함께 쓸쓸히 남겨져 있다. 묘비문 만이 알려주고 있다. &&&&&&&&&&&&& 1887년 출간된 한국 최초의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부터 2001년에 출간된 <표준새번역 개정판>에 이르기까지 한글 성경들의 번역과정을 고찰하고, “저본”(底本)(註 1)의 문제를 진단하여 바른 성경과 바른 신앙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1. “로스역”으로 불리는 한국 최초의 신약전서 <예수셩교젼셔>(1887년) 스코트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를 중심으로 매킨타이어(MacIntyre), 이응찬, 서상윤 등이 함께 번역, 출간한 한국 최초의 신약성경이 <예수셩교젼셔>(1887년)이다. 로스역으로 시작되는 한글 성경 번역의 역사와 문제점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중국어 성경에 대한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초기 한글 성경의 번역에는 중국어 성경이 저본이 되거나 참고자료로 폭넓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어 성경 가운데 주의해서 살펴야 할 것은 보통 <문리역, 文理譯>이라고 불리는 성경인데,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53-1834)이 1813년에 번역, 출간한 성경을 말한다. 이것이 후에 개정, 번역되어 1852년에 출간된 것이 <신약전서문리, 新約全書文理>이며 1854년에는 구약과 함께 출간되었는데, 이것을 <성경전서문리, 聖經全書文理>라고 하고, 통상적으로 “대표자역본”(Delegates’ Version)이라고 부른다. 이는 메드허스트(Medhurst), 귀츨라프(Gützlaff), 브리지만(Bridgman, 존 모리슨(John Morrison) 등의 선교사로 구성된 대표자회의에서 개정 및 번역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성경은 “침례”(浸禮, baptism)를 “세례”(洗禮, splinkling)로 번역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변개되어 있다. 그런데 로스역, 즉 <예수셩교젼셔>(1887년)의 저본으로 사용된 것이 중국어 성경인 <신약전서문리>였다. 또한 로스는 이와 함께 영어 <개역본, Revised Version>(1882년)과 이것의 저본이 된 변개된 헬라어 성경인 <개역 헬라어 신약 옥스퍼드판>(1881년)을 저본 및 참고자료로 사용함으로써 한글 성경의 역사 첫 페이지를 성경 변개로 채우게 되고 말았다. 1883년 1월에 쓴 로스의 편지에 번역 원칙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와 여섯 번째 항에서 번역 저본에 대한 언급이 이렇게 나온다. “둘째, 영어역본보다 <개역 그리스어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 여섯 째, <개역 그리스어 성경>을 그대로 따른다. 다만 요한복음 8:1-11 ‘간음한 여인 사건’과 마가복음 16:9-20은 사본상의 문제로 생략한다.”(註 2) 이 번역 원칙에서 헬라어 성경이 저본으로 제시되지만 실제로는 헬라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되지 못하고 참고하는 정도였으며, 당시 선교사들의 원어 및 한국어 실력에 따르면 영어 개역본과 문리역이 주된 저본이었다. 번역된 본문을 놓고 판단할 때에도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은 변개되어 있다. 요한복음 8:1-11과 마가복음 16:9-20은 통째로 삭제되었고, 현대의 변개된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들에서 삭제된 신약의 13개 구절들이 똑같이 없으며, 교리적으로 주요한 구절들과 표현 역시 동일하게 왜곡되어 있다. 이후의 한글 성경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 된 이유는 특히 19세기에 비평가들과 변개자들에 의해 성경의 권위가 격하되고 변개된 헬라어 성경과 영어 성경이 출간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한글 성경 번역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우리말 성경의 첫 페이지부터 성경 변개의 역사로 시작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2. “구역(舊譯)성경”(註 3)으로 불리는 <셩경젼셔>(1911년) 언더우드를 중심으로 한 국내의 미국계 선교사들은 로스의 <예수셩교젼셔>를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번역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로스역은 이들이 번역한 성경에게 자리를 점차 내어 주고 지속되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로스역의 여러 문제점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보다는 언더우드 개인의 욕망이 새로운 번역을 하게 한 실제적인 이유였다. 언더우드는 로스역을 무시하고 번역 사업을 독점하여 자금을 영입하고 번역의 명예를 차지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따라서 한국어를 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번역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이다.(註 4) 이렇게 시작한 성경 번역에서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국계 선교사들은 바른 성경을 번역하지 못했고, 이들의 후예들이 지금도 성경 변개를 반복하고 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 헤론 등의 선교사들이 상임성서위원회를 구성하는데서 시작한 구역성경 번역은 이후에 1893년 번역자회를 새롭게 조직하여 미 북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게일, 미 북감리회의 스크랜톤과 아펜젤러, 영국 성공회의 트롤로프, 미 남장로회의 레널즈 등이 번역에 참여하여 1900년에 <신약젼셔>가 출간되었는데 이것을 시험판이라고 불렀다. 1904년에는 1900년판을 개정하여 출간하였고, 1906년에는 이것을 다시 개정하여 소위 ‘공인역’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젼셔>를 출간하였다. 그러나 공인역(Authorized Version)이란 표현은 본래 <킹제임스성경>의 권위가 널리 인정되어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합당하게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구역성경 번역자들이 붙인 ‘공인역’이라는 표현은 그 명성을 흉내내고 자신들을 높인 나머지 자의적으로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구약의 경우 미 북감리회의 존스, 미 남감리회의 하디, 미 북감리회의 노블, 미 북장로회의 마펫, 캐나다 장로회의 그리어슨 등이 번역에 참여하였고, 또 언더우드, 게일, 레널즈, 크램, 한국인 이창직, 김정삼 등이 번역했다. 1911년 3월 6일에 <구약젼셔>가 상권(창세기~역대기하)과 하권(에스라~말라기)으로 출간되었고, 3월 15일에는 <구약젼셔>가 1906년판 <신약젼셔>의 개정본과 합본되어 <셩경젼셔>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는데, 이것이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신구약 성경이었다. 1893년에 전임번역자회를 구성할 때 성경 번역에 있어 6개항의 원칙이 제안되었다. 그 중에서 저본과 관련된 내용은 2항과 4항이다. “2. 하나의 그리스어 본문을 사용하기로 동의함. ‘표준원문’(Textus Recptus)과 일치되는 한도 내에서 일부 수정 권리를 가지면서 ‘영어성경 개역본의 저본이 된 그리스어 본문’이 번역에 가장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임... 4. 영어성경 개역본의 저본이 된 그리스어 본문과 ‘표준원문’ 간의 차이점이나 성경신학용어, 성경고유명사의 통일 번역과 통일된 맞춤법 등과 같은 주제를 다루기 위한 소위원회 임명의 적절성을 고려할 것.”(註 5) 이와 같은 원칙이 제안되었지만, 실제로 채택된 원칙은 다음과 같이 수정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어 성경과 개역판 성경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하고 한국인 조사들은 한문대표자역(文理譯)을 대본으로 번역하되 일본어 성경도 참고하며...”(註 6) 이 외에도 구역성경의 저본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밝혀주는 명시적인 자료는 영국성서공회(BFBS)의 연례보고서 부록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따라간 본문은 팔머의 헬라어 성경(Palmer’s edition of the Greek)인데, 그것은 영어 개역본의 저본이 된 것이다.”(註 7) 이와 같이 개역성경의 전신인 구역성경이 번역된 저본은, 로스역과 같이, 보존된 바른 성경인 <표준원문>을 변개하여 만든 헬라어 성경이었으며,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변개하여 만든 영어 <개역본>이었다. 또한 번역에 이용하기 위한 자료를 살펴보면 이들의 번역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데, 1897년 영국성서공회의 켄뮤어 총무에게 요청한 비평서적목록에는 알포드의 헬라어 신약성경, 스웨트의 칠십인역, 메이어 신약 주석, 엘리코트 신약주석, 카일과 델리취의 주석 등과 같은 책들이 있다. 이것은 번역자들이 바른 저본은 물론 바른 참고자료에도 접근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의 저본에 대해 번역자들이 밝힌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신약의 경우와 같이 영어 <개역본>이 주된 저본이 되었을 것은 당연하고, 신약 번역 당시 구약인용을 위해 요구했던 스웨트의 칠십인역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구약의 번역에도 바른 원문에서 번역되지 못했음은 번역의 결과를 보더라도 분명하다. 3. 구역을 개정한 <성경개역>(1938년), 개역성경으로 불리는 <개역한글판>(1961년), 개역성경을 또 다시 개정한 <개역개정판>(1998년) 구역성경이 번역, 출간된 이후 개정작업이 시작되었다. 구약은 게일, 레널즈, 언더우드, 케이블, 스톡스, 베어드, 엥겔, 어드맨, 클라크, 하디, 피터즈 등의 선교사들과 한국인 김필수, 김인준, 정태홍, 김관식, 이원모, 김정삼, 박형용, 채필근 등이 참여하였으나 대부분은 죽거나, 탈퇴하거나, 극히 미미한 참여로 끝났으며, 게일, 레널즈, 베어드, 피터즈, 김인준, 이원모 등이 주로 개정하여 1937년에 개역이 마무리 되었다. 신약 개정은 1926년부터 1937년에 이루어졌는데, 스톡스, 로스, 윈, 컨닝햄, 베어드 2세, 크레인, 남궁혁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하여 구약과 신약의 개정이 완료되고 1938년에 <성경개역>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것이 현재 사용하는 개역성경의 출발점이었다. 이후에도 <성경개역>은 1939년에 개정되었고, 또 다시 1952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1948년)에 따라 개정되었기 때문에 한문이 병기된 판들과 구분하여 <개역한글판>이라고 불렀으며 이후의 판들도 모두 동일하게 불리게 되었다. 개역성경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개정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신약의 경우에 공개된 것만 1900년, 1904년, 1906년, 1911년, 1939년, 1952년, 1956년, 1957년, 1961년 등 여덟 번이고, 구약은 1939년부터 1961년까지 다섯 번이다. 그 러나 알려진 바로는 실제로 64번이나 개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1998년에는 1961년판 개역성경을 72,712곳이나 수정하여 내놓은 <개역개정판>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개역성경을 공동번역(1977년)이나 표준새번역(1993년)으로 대체하고자 한 대한성서공회의 여러 시도들이 실패하자 선택한 또 하나의 성경 변개였다. 7만군데 이상을 수정했으나 여전히 변개된 성경이 <개역개정판> 외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러한 일을 하고도 하나님의 사역이라고할 수 있는가! <성경개역>의 저본에 대한 자료는 1912년 1월 15일 한국성서위원회의 밀러 총무가 개역자들에게 준 영국성서공회의 번역지침서(Rules for the Guidance of Translators, Revisers & Editors, working in connection with the BFBS)에서 찾을 수 있는데, 저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성경번역과 개역은 히브리어 및 아람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어떤 언어권에 이미 사용되고 있던 역본들은 이용되어야 한다. 구약번역에서는 그 당시 영국성서공회(BFBS)가 마련한 최신판 히브리어 성경본을 저본으로 해야 한다. 원어에 익숙치 못한 번역자는 영어 AV나 RV, 1901년의 BFBS의 본문과 난외주를 따를 수 있다. 그런데 영어도 모른다면, 그 번역자는 BFBS가 이미 허가한 어떤한 역본을 사용해도 좋다.”(註 8) 이 지침에 따르면 당시의 개역자들은 반드시 히브리어나 헬라어에서 번역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 능력에 따라 저본을 사용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역되는 과정에서도 바른 히브리어 원문에서 번역된 것은 없었고, 구역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변개된 영어 <개역본>은 물론 <미국표준역본>(1901년)이 주된 참고자료가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편 사용된 저본에 대한 정보는 1922년에 엥겔이 “긴즈버그의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요구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어느 정도 참고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으나, 역시 구약성경의 본문 비교를 통해 본다면 변개된 성경이 저본이 되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 신약 개정에 사용된 저본은 1923년판 네슬(Nestle)의 헬라어 성경 14판이며, 신약의 구약인용은 미국에서 출간된 영어 개역본(RV)이 사용되었다. 네슬의 헬라어 성경은 1898년의 초판을 시작으로 현재 27판이 출간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변개된 헬라어 성경이다. 어찌 쭉정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4. 로마 카톨릭과 합작한 에큐메니칼 성경 <공동번역성서>(1977) 공동번역의 구약은 선종완 신부, 문익환 목사, 곽노순 목사 등이 번역하였고, 신약은 카톨릭 측에서 백민관, 허창덕 신부, 개신교측에서는 박창환, 정용섭, 김진만, 이근섭 등이 번역하여 신약은 1971년 부활절(4월 11일)에 출간되었고, 구약은 1977년 부활절(4월 10일)에 외경과 신약 개정판과 함께 출간되었다. 과연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공동번역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로마 카톨릭은 개신교와의 연합을 도모하게 되었고, 성경의 신구교 공동번역이 권장되었는데,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일환이었다. 교황청 기독교일치증진국의 1966년 보고서 가운데는 “성서공회와의 협력”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교황은 성서사업에 있어서 바티칸 제2공회가 정한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헌장에 따라서 비카톨릭계 성서공회와 협조하는 문제를 기독교일치증진국에 의뢰하였다.”(註 9) 그렇다. 교황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신구교의 합작 성경을 만드는 일이었다. 또한 “성서공회와 카톨릭 전문가들이 1964년과 1967년 1월에 공동으로 회합하여 이 문제를 토의 연구한 결과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실행위원회와 교황에게 제출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밀한 내용은 공표되지 않고 있으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분야에 있어서 원칙적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註 10) 이와 같은 배경에서 소위 공동번역이 번역, 출간된 것이다. 이것은 성경 보존과는 전혀 상관 없는 목적에서 추진된 일이다. 공동번역의 구약 저본은 키텔의 히브리어 성경이며, 신약은 1966년에 출간된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헬라어 신약 성경(GNT) 1판인데, 이것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성경 번역자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변개된 신약성경이다. 키텔의 히브리서 성경은 1,2판까지는 바른 본문을 담고 있지만 3판(1937년)부터는 변개된 본문이다. 공동번역은 3판 이후의 판본이기 때문에 변개된 원문에서 번역된 것이며, 또한 히브리어 성경을 따르지 않고 변개된 <칠십인역>을 따라 번역된 부분들이 많으므로 본문의 정확성과 권위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5. <표준새번역>(1993년), <표준새번역 개정판>(2001년) 표준새번역은 대한성서공회가 개역성경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미 1967년에 <신약전서 새번역>을 출간한 바 있지만 수용되지 못했었다. <표준새번역>의 구약은 강사문, 김갑동, 김의원, 김이곤, 민영진, 박준서, 박철우, 손석태, 윤영탁, 이군호, 이양구, 임태수, 정규남 등이 번역했으며, 신약은 김창락, 박형용, 서중석 등이 번역했다. 소위 젊은 세대를 위해 현대어로 번역했다고 하지만 본래의 뜻을 저버리고 수많은 왜곡된 표현과 자유주의 신학의 전시장이 되어 그 변개의 정도는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자라나는 젊은 세대를 오히려 영적으로 죽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표준새번역과 표준새번역 개정판의 구약은 BHS(1967/1977), 신약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헬라어 신약 성경(GNT) 3판(1983년)을 사용했다. 이것은 판본의 연도만 다를 뿐 개역성경과 공동번역과 똑같이 변개된 원문에서 번역된 것을 보여준다. 이외의 성경들, 즉 <현대인의 성경>(1977년)은 네슬판과 영어 비링 바이블에서 번역되었으며, <현대어성경>(1978년/1991년)은 영어 리빙 바이블과 GNT 1판에서 번역되었고, <표준신약성서>(1983년)는 네슬 25판에서 번역되는 등 한글 성경들은 모두 변개된 성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이 한글 성경들의 번역 원문을 선정함에 있어서 로스역에서부터 가장 최근의 표준새번역 개정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변개된 뿌리에서 나온 썩은 열매들이다. 대한성서공회를 비롯해서 이 땅의 성경 번역자들과 관계자들은 바른 성경 원문을 분별하지 못한 채 소경이 되어 소경들을 인도해 온 것이다. 대한성서공회의 민영진 부총무는 이렇게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계성서공회연합회에 속한 각국 성서공회 번역실에서는 원본선정 문제를 독자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각국 성서공회는 신약번역의 대본으로서 당대에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GNT나 NTG와 같은 비평적 편집을 선택할 뿐입니다. 대한성서공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번역자들은 히브리어 본문의 비평적 편집에 관한 전문가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번역 원본 선정 문제에 관해서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가 번역자들에게 제공하는 참고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註 11) 성경 번역자들은 가장 우선적으로 어떤 원문이 바른 것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그것을 바르게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로마 카톡릭에 의해 관장되는 세계성서공회연합회(UBS)의 카톨릭 성경, 즉 헬라어 신약 성경(GNT) 1-4판이나 네슬-알란드 25,26,27판 등을 권위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 정작 카톨릭과의 합작품인 공동번역을 거부하는 이 땅의 소위 보수주의, 정통주의 학자들과 목사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한글로 된 카톨릭 성경들(개역성경,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은 거부하고 헬라어로 된 카톨릭 성경들은 수용하는 자신들의 모순에 대해 답변해 보라. 로마 카톨릭의 추기경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이 어떤 것인가? 카톨릭의 도시 독일 뮨스터에서 카톨릭 성경을 만들고 있는 변개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카를로 마티니, (커트 알란드), 바바라 알란드, 그리고 이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어깨를 나란히 한 학자들이다. 그들에게 배우고 세뇌되어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이 땅의 대한성서공회와 성경 번역자들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고 재를 뿌리며 회개하고 바른 성경으로 돌아 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 보존하신 히브리어 구약 성경은 야곱 벤 하임의 맛소라 원문(1524-1525)이며, 헬라어 신약 성경은 에라스무스부터 엘지버에 이르기까지 편수된 <표준원문>으로 현재 영국의 트리니테리안성경공회에서 출간하고 있다. 이 두 성경을 영어로 완전하게 전수한 <킹제임스성경>은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신 최고의 성경이다.(註 12) 이 땅에도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로 바른 성경이 번역된지 10여년이 되었다. 언제까지 무지와 완고함으로 반역하는 자들이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