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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글쓰기 스크랩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 공장의 침묵 / 강명관
한단인 추천 0 조회 75 09.05.17 07:08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 공장의 침묵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침묵하는 공장
공장은 거대하지만 기계음이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먼지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공기는 청정하게 관리되고, 노동자들은 제복, 혹은 방진복을 입고 일한다. 말도 필요 없다. 모든 것은 자동화되어 있다. ‘노동쟁의’는 고어사전에서 찾아볼 단어가 되었다. 청정하고 쾌적한 공장은 한때 우리의 이상이었던 바, 이제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공장을 지배하는 것은, 완벽한 침묵이다. 사내들의 노동의 노래에 섞여 있던 땀냄새와 손끝을 놀리던 아낙들의 자지러드는 웃음소리 또한 사라졌다. 나는 내가 만드는 물건의 용도를 모른다. 나는 다만 급여를 받기 위해 일할 뿐이다. 이 완벽한 노동공간은 컴퓨터에 의해 통제된다. 나는 이제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일과를 마치면 값싼 말초적 쾌락이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생은 즐겁다.


인문학담론모임이 1백 회를 맞았다. 어쩐 일인가. 생뚱맞게 나는 침묵이 지배하는 공장의 광경을 상상한다. 상상은 상상을 낳는다. 양계장과 총장 선거! 이 해괴한 이미지의 결합도 눈에 떠오른다. 왜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말이 조금 거칠더라도 양해를 바란다. 이건 무슨 거룩한 논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의 트라이앵글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이다. 우리의 삶은 이 삼각형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인문학 역시 이 트라이앵글 속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을 제외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것은 우스꽝스런 일이다. 황우석 사건을 보라. 황교수의 연구는 과학이 내셔널리즘과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인문학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어떤 순진한 사람은, 학문의 순수성, 중립성을 말하지만(유사 이래 그런 것은 없었다),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의 권력은 이미 인간의 삶을 완벽하게 관리, 지배하고 있기에 어떤 중립적 영역도 남아 있지 않다. 예컨대 이윤과 결합하지 않는 순수한 테크놀로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테크놀로지가 기반하고 있는 순수한 자연과학과 공학도 없다. 이 트라이앵글은 자본-국가, 자본-테크놀로지, 국가-테크놀로지, 자본-국가-테크놀로지의 관계로 현현한다. 이 결합 쌍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이미 황교수 사건이 확인해 주었다. 어느 하나를 공격하면, 배후의 둘은 메두사의 머리가 되어 격렬히 반발한다. 자본을 비판하면, 곧 내셔널리즘과 테크놀로지가 반격에 나서는 것이다. 아무도 페르세우스가 될 수 없다.


한국의 대학은 이 트라이앵글을 재생산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그것들이 곧 대학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국립이든, 사립이든, 서울이든 아니면 ‘지방’이든, 총장이 누가 되든, 대학은 국가와 자본과 테크놀로지의 무례할 수도 있는 요구를 거부할 수 없다. 아니 스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수평으로 눕힌 칼을 자신의 어깨에 눌러 줄 것을 간절히 바란다.


국가가 교육을 수단으로 일방적으로 국민을 제작해내고, 국민 제작을 통해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재생산하고 있는 이상, 국가는 교육과 대학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는다. 대학의 자율성이란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수사에 불과한 것이다. 자본은 어떤가. 한국의 대학은 자본의 밀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또 자본의 영원한 존속을 위해 차별화된 인간 개체의 생산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계화 된 대학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는 대학을 떠날 수가 없다. 테크놀로지 역시 대학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대학의 연구, 운영에서 디지털화 하지 않는 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21세기 자본은 오로지 테크놀로지의 발달을 통해 자신을 증식한다. 때문에 테크놀로지가 마치 인간을 해방시킬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誤認시키고, 자본은 대학에 테크놀로지를 개발할 방법과 인간-도구를 요구한다.


이 트라이앵글에 갇힌 대학은 자율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대학은 오직 ‘외부’에 의해서 작동하는 수동적 기계일 뿐이다. 예컨대 최근 수삼년 동안 진행된 부산대학교의 ‘발전’이라는 것을 보자. 부산대학의 발전 계획은 오로지 중앙일보의 대학 평가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구성된다. 중앙일보의 대학 평가는 한국 대학의 위계를 결정짓는 권력의 작동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대학은 이미 ‘외부’의 명령에 의해 작동하는 기계가 된 지 오래인 것이다. 중앙일보가 대학 평가에서 사용하는 측정 단위들, 예컨대 논문 생산율, SCI논문 등재율, 그리고 시설의 구비 비율 등을 향상시키는 수단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돈이고 하나는 국가의 지원이다. 즉 자본이 투자된 만큼 그 %가 높아지며, 국가 권력의 보호 정도가 높을수록 동시에 %가 높아진다. 대학 구성원의 자발적 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돈이거나 처벌이기 때문이다. 대학 간의 자발적 경쟁이 발전을 불러오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것도 허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결국 자본의 밀도와 국가의 보호가 등위를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정권은 이미 자본과 국가가 쥐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학은 자율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외부’에 의해 작동하는 장치가 되었다.


대학은, ‘사회’가 아닌, ‘기업’에 인력을 공급하는 취업 준비기관일 뿐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결정하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자본과 국가를 영원히 재생산하는 장치인 것이다. 좀 더 야박하게 말하자면,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모기업의 하청업체이거나 기업에 ‘인적 자원’을 공급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자본과 인문학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의 학문은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학문일 뿐이다. 특정 학문의 중요성은, 자본과의 거리, 곧 자본을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의 거리에 따라 결정된다. 동일하게 말해서 학문의 위계는, 테크놀로지를 첨단적으로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 증식에 기여하거나, 아니면 자본의 영속적인 사회 지배, 곧 불평등한 사회의 영속화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 권력과의 거리에서 결정된다. 상대, 의대, 약대, 법대, 공대 등의 단과대학의 학문이 선호되는 것은 곧 자본․국가권력․테크놀로지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문학은 어떠한가. 인문학은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한 태생적으로 자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한)다. 근자 다수의 대학에서 철학과가 폐과의 대상이 된 것은, 철학이 자본과의 거리가 가장 멀고, 또 자본을 근저에서부터 비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문학 중에서도 선호되는 학문은 있다. 영어영문학과와 중어중문학과, 일어일문학과는 비교적 선호의 대상이 된다. 미국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센터이고, 중국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인접해 있으면서 급속도로 자본주의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 축출의 가능성이 적거나 축출에 대해 항변하여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도 있다. 사학과의 ‘국사학’이나 국어학, 국문학이 그것이다. 국사학은 집단의 과거를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내셔널리즘을 재생산하여 국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어학과 국문학 역시 국민을 강제적으로 구성하는 도구인 ‘국어’를 수호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인문학은 자본과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선호되지 않는다. 물론 영어영문학, 일어일문학, 중어중문학의 선호도 허위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기르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유에서 선호될 뿐이지, 결코 촘스키나 가라타니 코진이나, 루쉰이 견인장치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인문학은 자본의 이익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의 권력으로 인해 소외되고 주변화된다. 


국가 기구―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의 위기
한국에서 자본의 규모가 커질수록, 자본의 국가권력의 抱持度가 높아질수록, 학문의 위계화는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이미 식상한 어휘가 된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다. 자본이 학문의 위상을 다시 배치하고 있는 이상 정도의 차이일 뿐 자본과의 거리가 먼 학문들은, 동일하게 치유할 방법이 없는 루게릭병(Lou Gehrig's disease)을 앓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문학을 현실적으로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자본의 야수성을 완전히 드러낼 경우, 오히려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자본의 이미지를 해치기 때문이다(광고는 언제나 미소 짓는 자본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자본-국가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축출하면서 한편으로는 인문학을 관리한다. 그 관리는 흔히 ‘지원’이라고 말로 통용된다. 인문학은 이제 국가의 ‘관리’ 하에서만 살아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의 부탁을 받은 국가는 관리 기구를 작동시킨다. 교육부는 국가권력을 수단으로 교육과 대학을 강제하는 기관이고, 학술진흥재단은 ‘지원’을 통해 학문을 관리, 통제하는 기관이다. 실로 부끄러울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인문학은 훌륭히 관리, 통제될 수 있다.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규모가 팽창하면서부터, 대한민국 대학의 인문학은 ‘위기’를 맞았으니, 이후 인문학은 학술진흥재단의 사업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추측이지만, ‘인문학의 위기’론이 발생한 시점과 학술진흥재단의 ‘돈’이 지원되기 시작한 시점 사이에는 모종의 관계가 있을 터이다). 학술진흥재단은 궁극적으로 자본에서 나온 돈을 미끼로 인문학을 지원하면서 동시에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돈은 곧 권력이다.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은 곧 사실상의 국가기관에 의한 인문학의 권력적 지배다. 이미 자본의 지배를 받아 이윤의 재생산을 절대 가치로 삼고 있는 대학은 인문학 역시 학술진흥재단의 돈(아니, 그 거룩한 이름은 연구비!)을 받을 것을 종용한다. 수령액이 많을수록 대학의 평가는 상승하기 때문에, 대학은 연구비의 확보에 광적 상태에 돌입한 지 오래다. 따라서 태생적으로 자본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입장에 있는 인문학에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속출한다.


연구비를 미끼로 인문학을 지배하는 학술진흥재단은, 학문 행위에서의 ‘합리화’를 요구한다. 예컨대 등재지. 등재지를 만드는 순간, 등재지가 아닌 학술지는 모두 식물인간화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등재지를 향한 질주도 시작되었다. 예컨대 국문학계와 한문학계는 모두 등재지, 등재 후보지가 되었다. 상호 간격이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평균적으로 등재지화 하는 것은, 상호 우열을 없애버린다. 이전에는 자율적으로 그 등급이 결정되어 있었다.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이 시작되는 그 순간, 그 자연스러운 등급이 사라진 것이다. 그뿐인가. 학술진흥재단은 지원을 구실로 하여 학술대회의 형태, 참여인원수, 논문의 심사 과정, 학술지의 형태, 편집위원의 구성 등 ‘모든 것’을 간섭한다. 솔직히 말하자. 인문학자는 푼돈을 구걸하기 위해 자신의 존엄과 자유를 팔아먹은 ××××가 되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연구 내용까지 관리된다는 사실이다. 연구계획서는 돈-연구비를 얻기 위한 것이기에 오로지 돈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다. 해마다 학술진흥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연구보다 연구 계획서의 작성이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도 이제 아무도 기이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보다 많은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연구, 그리고 보다 수월하게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주제에 연구자가 몰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연구 주제가 변질되기 시작한 것이다. 연구사의 내재적 필요에 의해서 연구 주제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비를 받기 위한 연구주제의 설정을 나는 허다히 목도한 바 있다. 비유컨대 진리를 깨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지가 되기 위해 출가하는 스님들이 속출하는 것이다.


그 결과 연구보다는 연구비의 신청서가 더욱 화려해지고 두툼해지고 정교해지는 이상한 현상이 다반사로 발생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못 믿겠거든 연구결과가 발간된 책자와 연구비신청서와 비교해 보시라!) 연구 자체의 의미가 아닌, 돈을 얻기 위해 분칠하는 것이 보편화된 것이다. 그 엄청난, 무의미한 관료적 발상의 항목을 수치심을 눌러가면서 메워 넣는 행위의 이면에는 오로지 돈을 향한 욕망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또 다른 핵심이 있다. 곧 연구 주제가 ‘검열’된다는 것이다. 그 검열은 일반적으로 ‘심사’란 어휘로 대체된다. 검열은, 연구의 주제가 결과적으로 자본과 국가, 테크놀로지를 비판할 수는 없거나, 적어도 매우 약화된 형태가 되기를 원한다. 예컨대 자본의 증식과 테크놀로지, 내셔널리즘을 만족시키는 ‘컨텐츠’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가 쉽사리 채택되는 것과 비교해 보라. 학술진흥재단의 인문학 지배 하에서 나는 나의 학문적 화두를 풀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연구한다. 이럴진대 과연 자본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인가. 요컨대 지원은 사실상 간섭이 되고 연구의 내용까지 검열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말이 과격하다고? 지금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앞으로 그런 현상은 점점 강화될 것이다.


연구비를 신청하지 않으면 그만이라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제 나는 받은 연구비를 토해내는 치욕을 면하기 위해 논문을 쓴다.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프로젝트에 팔아, 거기서 연구력을 소진시킨다. 그것은 거대한 巖塊 위에서 돌을 깨어서 하루의 일당을 버는 파키스탄의 어린 노동자, 커피 농장에서 하루 종일 커피 열매를 훑는 콜롬비아의 여성 노동자와 다를 바 없다. 자본주의적 노동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듯 그는 자신의 연구물에서 소외된다. 어떤 사람들은,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 연구자들이,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때문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정신이 나갔는가. 학술진흥재단의 지원금을 향한 경쟁은 언제나 연구자들의 신분을 불안하게 만든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그들은 갈 곳이 없다. 바로 그것이 학술진흥재단이 집행하는 국가와 자본의 의도다. 항상 불안한 감시를 받고 수족을 두지 못해 안절부절 하게 만들어 자신들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간혹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이 대학에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지원하는 은혜로운 시스템이라 말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과연 그럴까. 국가가 그렇게 은혜롭다면, 현재 한국 대학의 존립 근거인, 시간강사의 착취 문제에는 왜 그리 태연한가.


이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파괴적 효과도 있다. ‘지원’은 학문적 주제를 위해 모이던 자율적 학문공동체를 소리 없이 파괴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돈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점차 자발적 연구는 사라지고, 돈을 위한 프로젝트에 골몰한다. 연구 주제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가 사람을 불러 모은다. 그 프로젝트를 묶는 접착력은 돈이다. 돈을 주지 않으면 프로젝트에 모이지 않는다. 이제 돈이 연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부수적인 이야기지만, 학술진흥재단이 해마다 뭔가 좋은 일을 한다고 오물이 묻은 떡을 던지면, 전국 대학 연구소가 이전투구를 벌이며 별별 희비극이 다 벌어진다. 인간관계까지 뒤틀어진다. 아니 홉스적인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만다. 이게 거룩한 ‘인문학’ 연구에 매진하던 교수님들의 모습인가.


학술진흥재단이 인문학을 지배한 이래, 대학은 개개 연구자들의 연구비 수주 실적을 계산하고, 모든 업적을 논문의 편수로 계량화한다. 얼마나 합리적인 시스템인가. 과연 그럴까. 오웰의 1984년은 이미 도래했다! 우리는 이미 관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지원이란 미명은 사실상 관리이며, 간섭이며, 지배이며, 통치이다. 그리고 노예화다. 우리는 해마다 바뀌는 주인―학술진흥재단의 정책과 연구비 규모에 일희일비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학술진흥재단의 배후는 당연히 국가이며, 국가의 배후는 자본이다. 자본주의 국가, 곧 현대의 모든 국가는 자본의 대리인이며, 사회적 총자본의 증식을 위해 기능할 뿐이다. 대학에 이 사태를 멈추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매한 소리다. 자본의 작동방식을 모르는 소치다. 대학의 총장과 보직자들, 그리고 대학의 관료적 기구는 자본의 말단적 대리인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본의 논리에 중독되어 있다. 들을 리가 없다.


관료적 지배와 官學化
학술진흥재단의 합리성은, 곧 자본의 이윤을 위한 합리성에서 산출된 것이다. 자본의 대리인인 대학은 자연스럽게 합리성을 명목으로 하여, 연구에서의 관료적 시스템을 강화한다. 관료적 시스템의 총아는 산단이다. 모든 연구비 관리는 산단으로 일원화되었다. 누구나 경험하겠지만, 연구비를 집행하는 과정에서의 산단의 관료적 통제는 끔찍할 정도가 되었다. 연구비의 정산 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하며, 거기서 생겨나는 잡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 관료적 시스템은 인간에 대한 불신감 위에서 구축된 것이다. 연구비를 횡령한 소수의 악사례를 들고, 그것이 마치 보편적 현상인 것처럼 생각하기에 관리시스템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야박해진다.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능력을 불신하면서 모든 것을 관료적 합리성으로 통제하려 한다. 연구자들은 오로지 구획되고 관리될 뿐이다. 이것은 자본이 작동하는 일반적 원리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작동하고부터 모든 중세적 관계가 끝장났던 것처럼, 인간 간의 신뢰 따위는 시스템에 들어올 수 없다. 가련한 인문학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그저 감내해야 할 뿐이다.


이제 자문해 보자. 국가 기관이 돈을 무기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대학의 인문학이 인문학일 수 있는가. 나는 대학 내부의 인문학은 이미 인문학의 속성이 변질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직 국가가 던지는 연구비를 열망하면서, 감격하는, 혹은 정당화하는 인문학을 인문학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것은 ‘官學’이다. 학술진흥재단과 여타 국가기관의 연구비에 목을 매는 인문학은 사실상 벌써 관학이 된 것이다. 인문학자들은 ‘관변학자’ 혹은 ‘관학자’라는 지목에 펄쩍 뛰며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분노하겠지만, 그럼 그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나는 조선 건국 때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었던 性理學이 17세기 이후 급속도로 官學化하여 마침내 인간을 질식시키는 학문이 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다. 국가권력과 자본이 자신을 순치시키고 관리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노예화하는 것을 모르는 인문학이 과연 인문학인가. 아니, 스스로 그런 책동에 맞장구를 치면서 그것이 인문학의 살 길인 것처럼 강변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적지 않으니, 실로 한심할 따름이다.


연구비의 저주
인문학에 지원하는 연구비, 곧 돈은 아니 투입된 비용은, 그에 상응하는 양적 생산을 요구한다. 질적 생산이 아니다. 이제 대학 내에서의 인문학은 오로지 연구비의 쟁취와 외적인 활동의 수치로 평가될 뿐이다. 화폐가 모든 것을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된 것처럼 나의 논문, 나의 저서는 내가 소속한 대학의 평가를 올리기 위한 숫자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학술진흥재단은, 대학은, 사회는, 그것이 얼마나 진지한 연구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각고의 노력의 결과인지 아닌지, 쓰레기인지는 묻지 않는다. 오직 등재지에 실리는가, 아닌가로 기억될 뿐이다. 그 뿐인가. 모든 상품이 화폐로 환원되듯이, 인간의 가치가 그가 보유하고 있는 화폐량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논문의 가치는 그 논문을 위해 수주한 연구비의 규모에 따라 환산된다. 연구는 그 내용, 곧 사용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교환가치로만 평가된다. 한 인문학 연구자 개인의 연구의 내용이 어떠한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등재지에 몇 편이 실렸는가를 통해, 곧 숫자, 화폐의 규모로 평가된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의 일상에서의 대화가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학문의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연구비, 학술진흥재단이 대화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또 이따금 어떤 연구자가 거창한 연구비를 수주했다(거창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수치감도 버린 지 오래다.


연구비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 선택조차 제한되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을 자유는 주어져 있지만, 노동하지 않을 경우 굶어죽는 선택지 밖에 없듯이 말이다(물론 노숙자가 있기는 하다). 대학에서 연구비 수주 실적은 연구자를 평가하는 중요한 항목이며, 나아가 대학을 평가하는 중요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연구비 수주의 규모에 따라 연구자의 위상과 권력은 비례하여 증가한다. 연구보다 연구비의 획득에 골몰하는 연구자가 생긴다. 대학 당국도 물론 열심이다. 대학의 평가등급을 올리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연구비 신청을 독려하고, 논문 생산을 강요하는 제도가 만들어진다. 그 가혹한 제도가 약자인 신임 교수, 젊은 연구자들의 목을 죄어도 나의 일이 아니기에 모두 침묵할 뿐이다. 학문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억압하는 것일지라도 ‘연구의 생산성’이란 미명 하에 그 억압에 대해서 침묵한다. 아니 도리어 억압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궤변을 늘어놓고, 억압을 더 강화하기 위한 장치―학내 관직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도 적지 않다.


그런 고로 연구비를 받지 않은 연구자는 객관적으로 허접한 교수로 평가된다. 대학의 평가를 저해하여 ‘위대한’ 부산대학을 낙후하게 만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해마다 연구비를 신청하는 유혹의 계절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성감대가 부풀어 올라, 짝의 성기―를 찾아 길을 나선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간혹 설핏 들기는 하지만, 당장의 연구비 신청이 그를 유혹하기에 자신의 행위와 그 행위를 둘러싼 컨텍스트를 메타적으로 사유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의 결과로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자는 사라지고, 오로지 논문의 숫자와 연구비에 골몰하는 연구자가 증산된다. 그들은 오로지 논문의 편수를 늘리는 데 집중한다. 학문적 화두를 풀기 위해 나의 연구의 현단계에 대한 自問은 사라지고, 나의 대뇌를 지배하는 것은, “나는 올해 논문을 몇 편 썼어”라는 센텐스다. 연구비를 받을 수 없거나, 업적용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 연구는 ‘적극’ 회피한다. 이것이 최근 우리 대학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니 그런가. 더 웃기는 것은,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를 받기 위해 연구비 신청서를 쓰면서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주장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탈락한 경우, 그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한 순간에 증발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중요한 연구라면 연구비를 받지 않고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연구비를 받지 않으면 그런 연구 주제가 언제 있었냐는 것처럼 연구를 포기하는가?


가증스러운 일은, 이런 연구비의 저주를 당연시 하면서, 연구비로 연구를 통제하고 연구자를 노예화하는 외적 강제를 열렬히 찬양하는 走狗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풀어서 말하자면, 자본의 논리를 찬양하고 국가의 학문 관리, 지배를 열렬히 수용하는 인문학자도 속속 출현 중인 것이다. 그는 자본의 논리에 의식화되어 자본의 증식을 지고의 가치관으로 삼는다. 내셔널리즘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국가를 그의 부모로 생각하여 국가의 명령을 진리로 수용하고,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사유에는 국가를 객관화하여 인식 대상으로 삼는 사유가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런가 하면, 테크놀로지의 발달, 그리고 테크놀로지를 응용한 상품 소비의 증가를 인간의 해방, 인류의 진보인 찬양하는 인문학자의 존재도 결코 드문 사례가 아니다. 이들은 인문학을 하지만, 격리된 전공의 칸막이 속에서 좁은 하늘의 ‘삼각형 별자리’만이 天球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가 집행하는 연구비로, 연구비의 증액으로 인문학이 소외되지 않고, 부흥할 것이라는 것은 기만일 뿐이다. 국가가 집행하는 연구비는 자유가 아니라 저주다. 부디 착각에서 깨어나시라.


컨텐츠론의 허구성
어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개탄한다. 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서울의 대학에서 말해야만 위기다. 알 만한 대학들이다. 대학 앞에 ‘군소’ 혹은 ‘지방’이란 수식어가 붙으면 위기란 목소리는 전혀 밖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분들이 왜 서울과 지방의 이분화, 곧 인간에 대한 근원적 차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지 알 길이 없다. 말이 약간 옆으로 샜다. 다시 돌아가자.


서울과 지방의 차이는 자본의 밀도가 결정한다. ‘지방’대학이 열심히 하면 1등이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의 밀도는 자본의 이윤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서울과 지방의 경쟁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경쟁은, 차별을 구조화하는,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합리적 구실이다. 대학 문제에 관한 한 경쟁이란 어휘는 사실상 자본의 밀도가 높은 곳이 밀도가 낮은 곳에 대한 차별을 합리화할 때 쓰는 말일 뿐이다. 따라서 국가와 서울에서 대학 간의 ‘경쟁’을 주문할 때 그것은 사실상 서울 대학의 독점을 합리화하는 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인문학 위기론은 특정한 세력(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소수의 기득권을 보유한 인문학자), 혹은 대학이 국가-정부로부터 돈을 우려내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 국가는 사실 별 관심도 없으면서(사실 귀찮아한다) 체면치레로 현금을 건넨다. 인문학을 모르는 무식한 국가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것을 싫어해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의 몇몇 영악한 대학과 연구소들은 자본의 생리를 최대한 발휘하여, 연구비를 독식한다. 그들은 그들 상호간 돈의 분배가 부당하다는 것을 비판할지는 몰라도 돈으로 인문학을 통제하는 것을 비판하지는 않는다. 웃기는 일이다. 이들 대학은 대부분 서울에 있다. 이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들이 하는 행태는 인문학을 위기로 몰아넣은 자본의 행태와 동일하다. 즉 소수 대학에 연구비가 몰리는 것은, 자본의 집중과 동일한 현상이 아닌가. 이제 대학의 인문학은 자신의 위기를 포장하여 팔아먹는 처참한 타락에 이르렀다. 인문학을 소외시키는 국가-자본에 징징대며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불쌍히 보여 돈을 받아서 인문학을 육성시킨다는 것은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하긴 그들은 연구가 아닌, ‘프로젝트’를 할 뿐이니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자본이 인문학을 소외시킨다고 간혹 말하지만, 그들이 돈―연구비를 독점하는 행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소상인을 집어삼키는 행태와 동일하다.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인문학의 컨텐츠화가 인문학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도 들린다. 인문학의 컨텐츠화란 인문학의 비판적 기능을 박탈하고, 산업화할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라는 자본의 요구다. ‘문화컨텐츠’는 바로 인문학에서 짜낸 이윤을 낳을 상품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즉 문화컨텐츠론은 인문학의 비판성을 배반하고, 그것이 상품의 원료가 될 것에 대한 요구다. 이 외에는 의미가 없다. 현재 인문학 컨텐츠는 연구비란 형태로 국가가 구매하여 자본에 공여한다. 아직 자본이 직접 구매자로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현재 컨텐츠의 유일한 구매자는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는 상품의 내용을 지시한다. 인문학자는 이제 하청공장의 품팔이 노동자가 된 것이다. 컨텐츠화를 연구하기 위한 연구비를 얻기 위해 우리는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 대학에서 컨텐츠학과가 생기고, 문화컨텐츠란 말이 보편화되었다. 컨텐츠화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 인문학의 상품화다. 그것은 인문학이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속으로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컨텐츠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인문학자는 이제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존재의 바탕이 백화점에 진열되어 소비되기를 바라고 있는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자본주의는 소비이고, 소비는 쓰레기를 양산하는 과정이다. 대학의 인문학은 이제 자본의 주문을 받아 스스로 쓰레기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참이다.


컨텐츠의 내용은 실로 처참하다. 자본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술한 바와 같이 자본-국가로 존재하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의 충족을 동시에 요구한다. 아무리 비상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내셔널리즘을 충족시키면 대환영이다. 예컨대 고구려란 국가, 사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든, 보다 넓은 판도를 차지했다는 것만 입증한다면, 용인된다. 근대 영토국가의 개념으로 고대국가의 영토의 크기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 허망함에 따르는 어떤 비판도 소용이 닿지 않는다. 하여, 내셔널리즘은 제국주의적 욕망을 은밀히 깔면서 이를 반긴다. 민족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면 모두 환영이다(韓流에 열광한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런 컨텐츠화는 동시에 테크놀로지와 결합한다. 당연히 디지털화한 컨텐츠만이 컨텐츠화한 것이라고 정의될 것이다. 요컨대 문화를 상품으로 소비하게 하는 것, 그것에 인문학이 동원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컨텐츠화다. 컨텐츠화는 인간다움, 삶의 가치를 고민해야 하는 인문학 본연의 목적을 포기하게 유도한다. 예컨대 내셔널리즘이 사회적 불평등을 망각케 하는 환타지임을 지적하는 것은, 인문학의 소명이 아닌 것이다.


인문학 위기론 하에 있는 대학의인문학은 자본-국가, 국가-내셔널리즘, 자본-테크놀로지, 국가-테크놀로지란 자본-국가-테크놀로지가 빚어내는 관계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침묵한다. 대학의 인문학은 컨텐츠화에 대한 요구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지 반성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학문에 컨텐츠화 할 것이 있는가를 먼저 살필 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상실의 20년
610항쟁 20주년이다. 610항쟁으로 국민은 자유(절차적 민주주의)를 얻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것은, 국민들만이 아니다. 독재정권의 비호를 받아 성장한 자본 역시 자신의 보호자를 죽이고, ‘자유’를 얻었다(전형적 아비 살해!). 이후 한국의 자본주의는 제법 덩치를 키워 과거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흉내를 내는 새끼 제국주의가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세계화란 명사는, 이제 한국 자본이 동남아시아 등 후진 자본주의에 대해 제국주의의 행세를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선언의 뜻을 갖는다. 못 믿겠거든, 한국 자본이 투자된 국가의 노동자와 한국 내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하는 짓거리를 한 번 떠올려 보라.
오늘날 인문학이 당면한 문제는, 바로 아비까지 죽인, 덩치 커진 자본이 능숙하게 구가하는 그의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과거 국가권력을 군사독재가 농단했다면, 이제 자본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손쉬운 예로, 수많은 반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맺은 ‘FTA협정’이 있다. 이 협정은 바로 한국의 자본이 이윤률이 높지 않은 사업 분야를 정리한 것이라 보면 된다. 협정은, 자본의 의도와 욕망을 국가란 기구가 대리하여 처리한 것일 뿐이다. 갑자기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튀어서 미안하지만, 대학의 구성원들에게 ‘경쟁’이 강요된 것도 자본의 요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요구는 국가 기구-교육부를 통해서 집행되었을 뿐이다. 인문학의 위기, 소외 역시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자본은 인문학의 유용성을 묻는다. 그것은 인문학으로 돈을 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윤을 낳을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며, 좀 더 거룩하게 말하자면, 자본의 증식에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어떤가, 후자로 갈수록 뭔가 ‘학문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앞서 말한 인문학의 컨텐츠화란 바로 그 질문에 대해 궁지에 몰린 인문학이 내놓은 궁색한 답변이다. 과연 인문학은 돈을 벌 수 있는가.
아니, 인문학은 무용한 것이다. 무용성이야말로 인문학의 본령이다. 인문학은 존재론적 문제이거나 윤리론적 물음이다. 따라서 인문학에 유용성을 묻는 것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돈이 된다고 답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자본의 의도에 말려드는 것이다. 그 물음의 답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 질문의 의도를 되물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문학의 유용성을 추궁하는 자본의 질문은 정당한 것인가? 성장론자들이 힘주어 말하는 데서 간취할 수 있듯, 자본의 약속은 단 하나 ‘풍요한 소비’로 압축된다. 그러나 그 풍요는 성장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 성장은 차별적 사회관계를 전제해야만 성립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단 하나의 결론 ‘지구’란 한정된 자원의 무한한 소비로 귀착될 것이다. 그것이 최후의 단계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 바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니 자본이 인문학에 던지는 질문에 예스, 노로 대답할 필요가 없고, 다시 그 물음의 정당성을 캐물어야 할 것이다.


현재 자본의 논리는 대학을 본격적으로 접수하고 있다. 최후의 보루인 인문학까지 접근했다. 대학의 자본주의화는 곧 대학의 발전과 등치된다. 최근 부산대학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효원굿플러스와 발전기금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은 그 훌륭한 상징물이다. 하기야 러다이트 운동이 실패했듯 대학에 자본의 논리와 테크놀로지,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라고 무작정 주문하는 것 또한 말도 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들과의 관계는, 신중한 선택의 결과여야 하고, 또 통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대학이 스스로 통제의 대상이 되고, 앞장서서 나팔을 부는 격이니, 이건 자발적 노예화와 다르지 않다. 세상에!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집단도 있는가.


수공업적 인문학
12년 6개월 전 인문학담론모임이 탄생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담론모임은 조직을 갖지 않는다. 연구소처럼 특정한 공간도 없다. 어떤 교수님은 공간이 없음을 한탄했지만, 꼭 한탄할 일만도 아니다. 조직을 유지하려면 권력과 돈이 필요하고, 공간이 있으면 관리가 필요한 법 아니던가. 그것들은 모두 사람을 옭아매는 장치다. 어쨌거나 그런 무조직으로 우리는 12년 반 동안 한 차례로 거르지 않고 1백 회의 발표를 가졌다. 십진법이라는 것도 人爲의 산물이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시속의 관례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법. 1백 회를 休止 없이 자발적으로 끌고 나온 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대견한 일이다. 한데, 그 기념할 만한 1백 회를 끝으로 인문학담론모임은 끝을 맺는다. 하기야 조직이고 뭣이고 없었으니, 해산할 것도 없고, 끝낼 구체적인 그 무엇도 없지만, 그 동안 비교적 높은 참여도를 가진 사람들이 다음 번 담론모임을 기획하지 않기로 했으니, 사실상 끝인 셈이다. (물론 아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면, 계속 하시면 된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운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인문학담론 모임의 탄생 이면에는 (아마도 추측컨대) 국가와 대학이 내건 ‘개혁’이란 구실, 아니면 허울 좋은 ‘세계화’란 미명으로 자본이 가해 오는 압박을 피할 공간을 만들어보려는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그랬다. 연구비로 회유하는(아니 강요하는) 연구와, 관료적 시스템의 지배, 그리고 계량화의 저주에서 벗어난 공간이 확장되었으면 하였다(그 의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게 비치기도 하였다. 얼마 전 다른 몇몇 대학에서 나에게 인문학담론모임의 운영(?)에 대해서 문의해 온 적이 있다. 퍽 부러워하면서). 그리고 나는 이 공간이 새끼를 치기를 바랐다. 한데, 뜬금없이도 무슨 권력이랄 것도 없는 이 모임에 온갖 정치적 해석이 가해지고, 악의적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던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이 작은 자율적 소통의 공간조차도 마땅찮아 하는 것이, 언필칭 ‘지성의 전당’인 대학의 수준이다.


인문학담론모임이 버텨온 10년이 조금 넘는 세월 인문학의 지형은 완전히 바뀌었다. 적어도 8년 전 BK21에는 대학 구성원들이 저항의 목소리를 공유했지만, 이제는 저항의 목소리는 아주 들을 수 없고, 얼마나 많은 과제에 ‘당첨’되었는가를 자랑스럽게 말한다. 인문학의 위기를 오로지 국가로부터 돈을 얻어내어 해결하려는 모순적, 비렁뱅이적 근성만 깊이 박혔다. 아무도 이 모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도도한 침묵이 흐를 뿐이다. 레이첼 카슨은 종달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침묵하는 봄을 말했다. 이제는 종달새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침묵한다. 대학은 공장이 되었고, 첨단 테크놀로지로 관리되는 이 공장에는 인간의 침묵, 인문학자의 침묵이 흐르고 있다. 산업자본이 성립하자, 독립 장인들이 모두 설 곳을 잃고 산업노동자로 편입되었듯, 분업의 체제에서 노동이 소외되듯, 우리는 전공의 격자 속에서 연구에서 소외될 것이다. 양계장, 곧 닭공장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4년마다 한 번씩 양계장을 관리할 미스터 나폴레옹(Napoleon)을 뽑는 줄에 늘어설 것이다.


인문학은 위기인가, 아닌가라는 물음 자체는 잘못된 물음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문화가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쇠퇴한다면 그것은 제도권 내의 길들여진 인문학이며, 돈과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대학의 인문학일 뿐이다. 인문학은 자본과 국가, 그리고 테크놀로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도와주지 않으면 망한다면서 징징 울며, 인문학을 소외시킨 원흉인 국가와 자본의 치마꼬리를 쥐고 동전 한 푼의 적선을 원하는 것은, 이미 인문학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궁핍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자본>을 썼고,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시골’ 지식인들로 구성된 學團을 구성하여,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썼다. 다산의 學團을 움직인 것은 무엇이었던가. 학문적 자발성, 인간과 인간과의 깊은 신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고통스럽지만, 가능한 한 학술진흥재단과 외부 기관을 우습게 알면서 그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한 낮추고, 등재지를 경멸하면서 최소한의 논문을 내고, 어떻게 하던지 대학의 행정적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권력,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출할 것! 대학 내부에 연구비를 접착제로 하여 묶여지는 팀이 아니라, 연구자 개인의 자발성에 입각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팀을 조직하는 것,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문학의 총체성과 비판성을 회복할 것! 그리하여 다산의 학단처럼 대학 내부에서부터 자본, 국가, 테크놀로지로부터 해방된 공간을 만들고 증식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유일한 생존로다.


진정한 인문학은 수공업이다. 인간은 손으로 이루어지는 노동을 통해 자기의 최후의 근거인 자연과 교감한다. 우리는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지 않은가. 고로 수공업적 인문학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인문학의 유일한 생존로는 우리가 수공업자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제야 자동화된, 통제된 공장의 침묵을 걷어내고, 다시 사내들의 노래와 아낙들의 웃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당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건강한 아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단초가 인문학담론모임의 미약한 실험이라고 생각하였던 바, 이제 이것이 막을 내린다. 어떻게 할 것인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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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5.17 07:14

    첫댓글 2년 전에 쓰여진 글인데 오늘 아침에 아는 분 블로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읽고는 꽤 인상깊게 읽은 글이라 여기에도 스크랩해서 올립니다.

  • 09.05.17 10:53

    글쓴이의 결론에 동의합니다. 타인의 지원을 받으면서, 타인의 간섭은 받지 않겠다는 건 솔직히 어불성설입니다. 부모-자식간에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조건적 지원' 이라는 건 불가능한데, 국가나 자본이 인문학 연구자에게 '무조건적인 지원' 을 할 수 있을 리 없지요. 설사 무조건적인 지원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농땡이치며 돈만 받아먹는 연구자와 성실한 연구자를 같게 지원하면 역시 또 문제가 될 테니 어떤 식으로든 '평가' 는 이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평가의 방향은 역시 '지원하는 자' 의 의중이 밸 수 밖에 없지요.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자유에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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