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여(67) 새누리당 대표는 정치권에서 ‘어당팔’로 불린다. ‘어당팔’은
‘어수룩해 보여도 당수(唐手·정치력)가 8단’이라는 표현의 줄임말이다. 황 대표가 겉으론 약해 보여도 정치력은 만만치 않은
고수라는 의미다. 그런데 최근 황 대표의 ‘어당팔 리더십’이 당내외 보수강경파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 여야가 각종 현안을 두고
장기간 대치할 때마다 황 대표가 나서 협상의 실마리를 푼 것이 화근이었다. 황 대표가 공격을 받으며 새누리당 내 온건파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지는 모습이다.
황우여 대표
황 대표를 향한 ‘아스팔트 우파’의 공격은 최근 정점으로 치달았다. 보수단체인 국민행동본부(대표 서정갑)는
지난 1월 2일 ‘황우여 세력을 몰아내자’는 언론광고를 내보냈다. 국민행동본부는 황 대표를 향해 “여당으로 만들어줬더니 야당
행세를 한다”며 ‘한국 민주주의의 적’ ‘용서할 수 없는 배신자’로 규정했다. 분노한 애국시민들은 궐기해 황 대표를 비롯한 일부
여당 인사를 정계에서 몰아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우익 논객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도 “2014년 보수운동의 제1목표는
민주주의와 보수적 가치를 배신한 황 대표 몰아내기”라고 선언했다.
이례적인 장면도 연출됐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등
‘아스팔트 우파’들은 지난해 12월 초부터 연일 서울 여의도에 있는 새누리당 당사 앞에 모여 규탄집회를 열고 있다. 이들은
새누리당 당사 진입을 시도하며 경찰과 격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이들은 황우여 화형(火刑)식까지 벌였다. 결국 황
대표는 보수단체 대표들에게 면담을 요청해 “국민이 걱정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데는
실패했다.
당내에서도 황 대표를 향한 ‘하극상’이 자주 목격됐다.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3선)은 지난 1월
5일 기자간담회에서 지방선거 계획을 설명하며 황 대표의 인천시장 출마설에 대해 “당에서 나가라면 누구든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3선에 불과한 당 사무총장이 자신을 지명했던 5선의 황 대표의 거취에 대해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참견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해 10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헌법의 다수결 원칙에 반하는 국회선진화법
개선 방안 마련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황 대표가 “국회선진화법은 국회에서 몸싸움이 사라지는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새 정치의 상징”이라고 밝힌 직후였다.
원내지도부의 황 대표에 대한 ‘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황 대표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제명안을 제출하자는 당내 요구에 대해 “원내지도부에서 검토한 후 최고위에
보고해 결정하자”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렸다. 부장판사 출신의 황 대표는 “수사 중인 사안에 대해 국회가 제명안을 처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원칙론을 내세우며 버텼다. 그러자 최경환 원내대표가 이끄는 원내지도부는 다음날 당최고위원회에 대한 보고를 생략하고
이석기 의원 제명안을 제출하며 항명했다.
당 안팎의 강경파 반발은 예견된 일이었다. 상대와의 협상을 중시하는 황
대표가 집권여당을 이끌게 됐을 때부터 예고됐다. ‘아스팔트 우파’의 반발은 최근 2014년 예산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협상에서
폭발했다. 우파에서 가장 민감한 안보 이슈인 ‘국정원 사건’에서 타협한 것이 기폭제로 작용했다. 예산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지루한
줄다리기를 벌일 당시 황 대표가 ‘여야 4자회담’에 나서 국가정보원 개혁안과 예산안의 동시 처리라는 협상안을 만들어냈다. 극우
논객인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는 “잽싸게 친노종북 세력에 달려가서 곶감 빼다 먹는 재미에 빠져 있다”고 혹평했다. 국민행동본부는
“국군과 함께 안보전선을 지키는 국정원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황우여 대표의 정치적
협상력은 여야 정국이 얼어붙었을 때마다 빛을 발했지만, 그럴수록 강경파의 불만은 쌓였다. 지난해 여야의 정치력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정부조직법 개편을 시작으로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 정기국회 일정 등을 놓고 사사건건 평행선을 달렸다. 특히 새누리당의
원내사령탑이 친박 일색으로 재편된 이후 청와대의 주장을 반영하다 보니 야당과의 제대로 된 협상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같은
요인으로 여야가 장기 대치를 이어갈 때면 황 대표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가 나서 야당과의 타협을 이뤄 왔다. 이때마다 당내외
강경파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도 제대로 된 여당의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황 대표의 온건한
스타일이 늘 보수강경파로부터 외면받아 왔던 것은 아니다. 황 대표가 2011년에 친이계 안경률 의원을 꺾고 원내대표에 선출된 것은
친박계와 쇄신파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존폐 위기까지 갔을 때 그의 온건한 스타일은 ‘박근혜
비상대책위원회’를 정상궤도로 올리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이를 인정받아 2012년 5월 전당대회에서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대표에
선출됐다. 대선후보 경선을 둘러싼 박근혜 당시 후보와 비박계 후보들과의 ‘룰의 전쟁’도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당내외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었다. 지금까지도 친박계 측근들을 제치고 박근혜 대통령과 가장 통화를 많이 하는 여권의 ‘실세’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참패가 예상됐던 19대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위기감이 높았던 대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했다. 위기의
순간에 절실했던 황 대표의 온건한 리더십은 효용가치가 떨어졌다. 박근혜정부의 개국공신들 사이에서 논공행상이 시작됐다. 자연스레 황
대표는 강경파에 의해 전방위로 포위당했다.
황 대표는 이 같은 상황에서도 ‘어수룩’했다.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황 대표의 사진을 놓고 화형식까지 벌였을 때 측근들은 황 대표의 충격을 걱정했다. 하지만 황 대표는 오히려 “나 요즘
힘들어”라며 익살스러운 반응으로 측근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화형식한 이들을 만나 국정원의 기본 역할인 대외적
안보 역량을 더욱 강화하는 법안을 추진할 것이라며 설득하는 정공법을 택했다. 협상 결과를 둘러싼 강경파의 불만에도 “국민은
협상의 정치를 원한다”는 말로 버텼다. 위기의 순간에서도 협상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의 면모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
는 ‘정치력 8단’이라는 내공을 결과로 증명했다. 당내외의 전방위적인 압력에도 불구하고 여야 대치정국이 끝날 때마다 그의 존재감이
증명됐다. 결과적으로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이후 수차례 고비를 맞이했지만 몸싸움은 재현되지 않았다. 새누리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익명을 전제, “강경파의 공격이 거세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모두 황 대표의 승리로 귀결됐다”며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도 가장
정치적인 황 대표는 이제 ‘당수 9단’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기자가 만난 황 대표는 자신의 정치
철학에 대해 “법을 바라볼 때 어떤 가치가 절대적으로 옳은지는 알 수 없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51%가 옳다고 여기고
49%가 그르다고 여기는 법안을 통과시킬 때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라는 점을 망각하지 않으려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강조했다.
황 대표의 이 같은 철학은 판사
시절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판결이 누군가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살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신만이 진리를 안다’는 생각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게 했다. 이
때문에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신중함이 정계 진출의 발판이 됐다. 판사 선배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그의 신중함과 꼼꼼함을 인정해 정계로 끌어들인 것이다.
황 대표는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를 오래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대쪽 판사’로서 자신이 존경했던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으로 만든 뒤 법조계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회창 전 총재가 두 차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시며 황 대표의 법조계 복귀도 미뤄졌다. 차기 공천에 대한 욕심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누구에게 줄을 서거나 계파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다. 이회창 총재가 당 주요 업무를 맡기려 할 때마다 도망쳤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역설적으로도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당권이나 대권을 둘러싼 암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자연스레 ‘중립’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커져만 갔다. 야당에서도 늘 ‘각시탈 웃음’을 보이며 상대에게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협상파에게, 2006년
사별한 아내의 사진을 들고 다니는 로맨티스트에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돌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2011년
원내대표를 맡으면서 그의 정치력은 정점에 올랐다. 여당의 원내대표를 맡은 그는 당선 직후 당내 소장파들과의 대화에 나섰다.
청와대에서 부담스러워하던 ‘저축은행 사태 국정조사’를 놓고 야당과 전격 합의하면서 자신의 온건한 색깔을 강하게 드러냈다. 특히
2012년 임기 막바지엔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한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다.
황 대표
앞에 놓인 온건파로서의 마지막 과제는 대화와 타협의 정치문화를 지향하는 국회선진화법을 제도적으로 안착시키는 일이다. 황 대표는
‘다수당의 족쇄’라는 국회선진화법에 대해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년 가까운 시간을 국회에 머물며 “망치나
쇠사슬이 나오고 최루탄이 터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큰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황 대표의 성과물인 국회선진화법을
‘원죄(原罪)’로 여기며 사문화시키려는 당내외 보수강경파의 움직임에 대해 황 대표는 과도기에 이 같은 분란이 발생할 것도
예상했다고 한다. 이 같은 시행착오를 거쳐 의원들이 익숙해질 때면 타협의 문화가 우리의 정치사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항변했다.
황
대표가 최후의 승자로 인정받기 위한 마지막 관문은 남아 있다. 그의 앞에는 19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과 인천시장 출마라는
‘자의 반 타의 반’ 성격의 선택지가 놓여 있다. 황우여 대표의 정치력이 9단으로 승격해 ‘어당구’라는 별칭을 얻을 수 있을지는
불과 서너 달 뒤면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4월에는 지방선거 후보군의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이며, 5월에는 하반기 국회의장
선출이 예정돼 있어서다.
황 대표는 아직 국회의장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적은 없다. 하지만 측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황 대표의 의중은 국회의장 쪽으로 쏠려 있는 것이 유력해 보인다. 의회주의자로 살아온 20여년의 정치인생을 ‘입법부의
수장’ 자리로 마무리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된다. 정치인생의 최대 성과물인 ‘국회선진화법’을 정착시키는 것 또한 자신의 마지막
책무로 여긴 듯하다. 다만 친박계의 ‘대부’와도 같은 서청원 의원(7선), 당내 교류 폭이 넓은 정의화 의원(5선) 등과 경합을
어떻게 뚫어내는지가 관건이다.
더욱 심상치 않은 것은 당내외 보수강경파의 움직임이다. 황 대표와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원내지도부는 황 대표의 의사와 무관하게 인천시장 출마설을 흘렸다. 이들은 황 대표가 국회의장을 맡을 경우 더더욱 국정
주도권을 쥐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황 대표는 측근들에게 ‘인천시장 출마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당내외 강경 보수파는 지방선거 위기론을 내세워 중진 차출설로 확대시키는 모양새다. 황 대표에게 중앙정치에서
그만 손을 떼라고 압박하는 모양새다.
또다시 정치적 시험대에 놓인 황 대표는 최근 기자에게 “국회의장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를 잘 이끌 수 있는 인물이 선출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