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문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17주일
2열왕기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나의 소중한 빵과 물고기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빵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많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십니다.
그리고 모두 먹고도 남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안드레아의 태도에 주목해 봅시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이 말을 하는 안드레아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체념과 미련이 공존했을 것입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과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체념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뭐라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요한 6,12)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에 따라 뭐라도 한 제자들을 통해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덕분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
예수님께서는 체념을 넘어서 희망으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을 가장한 체념입니다. 체념은 믿음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부족해도 보리 빵
다섯 개보다는 많지 않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보다는 쓸만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얼마나 더 큰 기적을 일으키실까요?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나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답게 체념 그 너머로 가야 합니다.
내 부족한 빵과 물고기로 뭐라도 하다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의 도구로 써주실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의 소중한 빵과 물고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주교구 박성문 사도 요한 신부
2024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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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베드로 신부
연중 제17주일
2열왕기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생명력 넘치는 고목(古木)
와인의 역사가 오래된 지역에서는 사람들로부터 널리 사랑받는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늙은 포도나무’(Vieille Vigne)입니다. 수령이 최소 40년에서 길게는 100년이 훌쩍
넘어가는 고목에서 생산된 포도주가 고급스럽고 깊은 맛을 내기 때문입니다.
사실 포도 알갱이가 더 크고 풍성하게 열리는 쪽은 어린나무입니다. 하지만 어린나무에서
촘촘하게 열린 알갱이들은 인접한 큰 알갱이에 가려 햇볕을 제대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얕게 산발적으로 뻗은 뿌리로 양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도 없습니다. 이에 반해 오래된 나무는
몇 안 되는 자신의 작은 포도 알갱이들에 집중하며 충분한 볕을 쪼일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여러 지층으로부터 다양한 광물을 흡수합니다.
늙은 포도나무가 겉모습은 화려하지 않지만, 오히려 가치를 더 크게 인정받는 이유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치를 결정짓는 이와 같은 기준이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그렇지 못합니다. 외관상 남들보다 크고 많고 싱싱해 보이는
것을 더 선호하는 분위기, 내가 받아들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쉽게 외면하고
내 입맛에 맞고 편한 이들만을 적당하게 상대하며 살아도 괜찮다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사람이
외면당하고 세상의 주변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이미 고목이면서 또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거목이기도 한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약자들을 늘 초대하십니다.
특히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고자 2021년부터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셨습니다. 오늘로 네 번째를 맞는 이날을 통해 큰 위로의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늙어버린 때에 내던져지는 존재’(제4차 주제 성구, 시편 71[70],9 참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역사적 고목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수액이 많고 싱싱한 나무’(제2차, 시편 92[91],15 참조)로
우리를 맞아들이고 변모시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에(요한 8,58) 그 누구보다도 고목이신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살인 생명의 빵을 먹이신 뒤에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고 하신 말씀은 구약의 이집트 탈출과 바빌론 유배 때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의지의 연장입니다
(신명 30,3; 이사 11,12; 예레 31,10 참조).
이제 당신의 몸을 나누는 일에 참여한 모든 것들은 쓸모없이 버려지지 않고 그분께 붙어
가치를 보장받습니다. 이렇게 주님이라는 생명나무(창세 2,9)에 붙은 나무들은 저승 깊은 곳까지
모든 이들에게 뻗어 있는, 뿌리 깊은 십자가 고목으로부터 성체라는 양분과 성혈이라는
수액을 나눠 받으며 진정한 생명을 얻습니다.
오늘 세계 조부모와 노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과 우리 모두가 참포도나무의 가지
(요한 15,1-5)로 초대되어 좋은 소출을 낼 수 있길 바랍니다. 고목의 가치를 망각한 채
세상 사람들이 집착하는 어리고 화려한 모습으로 설익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빛과 생명을 주시는 분과 일치하여 가치 있는 열매를 맺고
제공할 줄 아는 좋은 포도나무가 될 수 있기를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이재호 베드로 신부
2024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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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토마스 신부
연중 제17주일
2열왕기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불가능을 넘어서는 믿음의 힘
배고픈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라고 하신다. ‘우리’보고 ‘나’더러….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다.
무려 오천 명에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 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신다. 수많은 군중에게 먹일 빵 걱정에 필립보에게
물으신 것이다. 필립보는 200 데나리온을 가지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말이 200데나리온이지 어마어마한 액수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포도원 일꾼의
하루치 일당(마태 20,1-16 참조)이니, 200데나리온은 200명분 일당으로 지금도 매우
큰 돈이다.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는 빵을 살 만한 그런 큰 돈도 없었지만 설령 돈이 있었어도
빵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주변에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대형 마트 또는 빵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필립보의 답변은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말로만 끝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하나, 혹시 ‘나’는 필립보처럼 상식이라는 핑계로 당연히 고민해야 할 사항을 회피하거나
지나치지는 않았나? 혹 해야 할 사항을 합리성으로 포장해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는 않았나?
과연 위기 탈출은?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고 말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먹이기에는 이것으로 불가능하다는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입장이
앞서 필립보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그나마 적지만 음식이 있다는 정도가 다를 뿐.
여기서 둘, 혹 ‘나’는 어떤 가능성에도 눈감은 채 안 된다고만 생각하고 고집 피우지는 않았나?
혹, ‘나’는 하기 싫어 핑계를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닌가? 하고자 하는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기 싫은 사람은 핑계를 찾는다는데, 나는 어디에 서 있나? 예수님은 그 적지만 소중한
음식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으로 장정만도 5천 명을 먹이셨다.
그리고 먹고 남은 음식 조각이 12 광주리에 가득 찼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인가?
필립보도 베드로와 안드레아도 불가능하다고 완곡히 말했던 일들을 차고
넘치도록 만들어 내심이 반전이다.
실증적 사고에 이미 익숙해 있고 현대 과학에 더 많은 것을 기대며 사는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가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신 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분임을 믿어 고백하는 우리는 이 상황을 다르게
대면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가능을 넘어 그것으로 완벽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임을 고백해야 한다.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희망의 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분은 불가능을 희망의
가능성으로 바꾸는 우리의 태도를 보시고 그분은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셨다.
우리는 일상에서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많다. 하고자 하는 방법을 찾기 보다 안 된다는
핑계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작은 희망이 있다면 그것을 내어 맡기고
그것으로 결과를 완벽하게 만드시는 분에게 의탁하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예수님은 바로 떠나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을 임금으로 삼으려 하자 혼자서 물러가신 것처럼….
인천교구 김현수 토마스 신부
2024년 7월 28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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