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서 4,7-16 요한 11,19-27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물이 어는 겨울에도 어느 한 곳에는 숨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야 공기가 통하고,
그래야 물고기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 사람들이 모이기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긴급조치가 있었고, 유신헌법이 있었고,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공권력을 피해서 찾아가던 곳이
있었습니다. 인권이 꽁꽁 얼어붙어 있던 시절에 숨구멍과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명동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에 쫓기던 학생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힘없던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입니다. 억울한 사람들이 찾아오던 곳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이 학생들을 잡아가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가시오,
그 뒤에는 사제들이 있고, 그 뒤에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숨구멍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에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면증 때문에 힘들어 하셨을 때 기도해 주시던 수녀님들이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던 신부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수녀님과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존경받는 이 시대의 어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께도 ‘숨구멍’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에 머물면서
식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숨구멍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니코데모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도 예수님께는 ‘숨구멍’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사이며,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 구원사업의 협력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마리아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있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도 예수님께 ‘숨구멍’같은 사람들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해서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게도 ‘숨구멍’같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언제나 저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늦은 밤에도 저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남들이 혹 저를 비난할 지라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제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저보다 더 잘 아셨습니다.
3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그곳에서도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머든지 미리 해야 하는 업무 스타일이기에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이 저를 도와주었기에 맡겨진 일들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뒤에서 저를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의를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고,
간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신문사의 창고 정리를 해 주시고,
음식을 챙겨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 있는 한국 신부님들도 제게는 ‘숨구멍’같은 분들입니다.
제가 뉴욕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팬데믹의 터널을 함께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출세, 성공, 권력의 패러다임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숨구멍’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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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서 4,7-16 요한 11,19-27 <또는 루카 10,38-42>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하느님도 사랑하지만 또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자식 사랑도 차이가 있다고 하지요? 흔히 손에다 비유를 하며 같은 자식이라도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같은 손이라도 손가락이 엄지, 집게, 검지, 약지의 길이가 차이가 있듯
같은 자식이라도 더 사랑이 가는 자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특징일 것입니다. 온전한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님께서도 모두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친하게 지내는 가정이 있었으니 바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의 마르타의 집입니다.
복음을 통해서도 그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습니다. 마르타의 오빠는 라자로이고 동생은
마리아라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마르타의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으실 때에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있는 마리아와 일에 분주한 마르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루카 10,40-42)
그래서 교회는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을 일컬어 ‘마르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며 영성적으로
깊이를 함께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대신 마리아를 일컬어 영성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도 활동이 필요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성숙한 신앙인은 이 둘을 합해서 영성적이면서도 활동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마다 서로 의견이 틀린 것은 마리아가 마리아 막달레나가 마리아와 같은 인물인가
대한 추측입니다. 만일 마리아가 막달레나의 인물이라면 십자가 밑에 서 있었고
또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가족을 끔찍이 사랑하신 것이 복음서에서도 나타납니다. 바로 오빠 라자로의 죽음의
대목에서 이 사랑이 나타납니다. (요한 11,35-36) 요한 복음은 마르타를 통하여 주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설명하도 있습니다. 마르타는 아빠가 죽은 다음에 오신 주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3)
요한 복음은 마르타를 통하여 현재 이루어지는 오빠의 부활과 종말론적인 의미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또한 그분을 사랑합니다.
요한 서간의 저자도 하느님과 그 아드님에 대한 우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요한 4,13-14)
예수님의 부활에서 우리가 새길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보다
우선 당신을 사랑했던 제자들과 여인에게 당신 부활을 보여주시고 또 증언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라 믿습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해야할 것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1-12)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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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요한 1서 4,7-16 요한 11,19-27
그치지 말라는 것이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까?(요한 11,19-27) 원래 마르타 축일이었던
것이 2021년부터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 삼 남매의 축일이 되었습니다.
왜 마르타의 축일이 삼 남매의 축일로 바뀌었는지 교황청 경신 성사성의 이유를 듣지
못해 알 수 없지만 그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사랑이 사랑을 북돋우고, 믿음이 믿음을 북돋우며, 성덕이 성덕을 북돋운 좋은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마르타, 마리아, 라자로 삼 남매는 서로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을 북돋우고 그래서 서로 성덕도 북돋워 서로 성인이 되게 한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삼 남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서로 그러했고,
클라라의 자매들도 서로 그러했습니다.
그것은 불길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은 불씨와 하나의 불꽃은 약한 바람에도
꺼지지만 작은 불씨와 불꽃이라도 여럿이 모이면 큰불이 되어 바람이 오히려
불꽃을 키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대한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커지게 한 또 다른 요소가 바로 라자로의 죽음입니다.
가족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을 통해서 큰 믿음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죽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으면 살릴 수 있었는데
늦게 오심으로 인해 죽게 되었어도 마르타는 주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았고,
주님의 능력 곧 죽은 자기 오빠도 살릴 수 있는 주님의 능력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은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안 것은 아무리 죽을병이라도 주님은 고치실 수 있다는 것과
주님의 청을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는 것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앎은 머리로 안 것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그가 한 경험으로 안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그동안 일으키신 수많은 기적을 그라고 모를 리 없지요.
그러니까 알기에 의심치 않는 정도의 믿음은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믿으라고 다그치십니다.
그치지 말라는 것이 다그치는 것이 아닙니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믿으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마르타는 주님을 믿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란 말이 있지요.
백 척이나 되는 장대 꼭대기에 서서 한 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백천간두에 서 있는 것만도 위태로운데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라니 죽으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야 진일보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날고 하늘로 오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것이 본래 그렇습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거는 것입니다.
백척간두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다그치심에
믿음이 한 걸음 올라선 마르타와 가족을 보고 본보기 삼는 우리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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