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버리고도 남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는 어디서 죽을 것인가 저렇게 흐르고도 지치지 않는 것이 희망이라면 우리는 언제 절망할 것인가
해도 달도 숨은 흐린 날 인기척 없는 강가에 서면, 물결 위에 실려가는 조그만 마분지 조각이 미지의 중심에 아픈 배를 비빈다 ☆★☆★☆★☆★☆★☆★☆★☆★☆★☆★☆★☆★ 《2》 겨울 산
이성복
1 그 뿔과 갑주의 등허리에 흰 눈 뒤집어쓰고 산은 쓰러져 있다 아무도 달랠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산, 제 굶주림과 성(性)과 광기를 못 이겨 헐떡거리는 산, 홀연히 눈보라 일면 꼭대기 레이더 기지 첨탑은 경련하는 짐승의 목덜미를 더 깊이 후벼팠다
2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눈이 쌓여 있다는 것 지금 바라보는 먼 산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굳이 못 갈 것도 없지만 끝내 못 가리라는 것 나 없이 눈은 녹고 나 없이 봄은 오리라는 것 슬퍼할 수 없는 것, 슬퍼할 수조차 없는 것 ☆★☆★☆★☆★☆★☆★☆★☆★☆★☆★☆★☆★ 《3》 귀에는 세상 것들이
이성복
귀에는 세상 것들이 가득하여 구르는 홍 방울새 소리 못 듣겠네
아하, 못 듣겠네 자지러지는 저 홍 방울새 소리나는 못 듣겠네 귀에는 흐리고 흐린 날 개가 짖고 그가 가면서 팔로 노를 저어도 내 그를 부르지 못하네 내 그를 붙잡지 못하네 아하, 자지러지는 저 홍 방울새 소리나는 더 못 듣겠네 ☆★☆★☆★☆★☆★☆★☆★☆★☆★☆★☆★☆★ 《4》 귓속의 환청같이
이성복
꽃이 진다 신경즉적 야심도 없이 꽃이 진다 서럽다고 하지 마라 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꽃이 진다 귓속의 환청같이 꽃이 진다 쭈그러진 귓바퀴같이 꽃이 진다고 과장하지 마라 지는 꽃이 맥반석 위에 타들어가는 마른 오징어 같다고 착각하지 마라 넌 분명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 《5》 그 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김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편통의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 《6》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7》 그렇게 속삭이다가
이성복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 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나올 때까지 ☆★☆★☆★☆★☆★☆★☆★☆★☆★☆★☆★☆★ 《8》 극지에서
이성복
무언가 안 될 때가 있다 끝없는, 끝도 없는 얼어붙은 호수를 절룩거리며 가는 흰, 흰 북극곰 새끼
그저, 녀석이 뜯어먹는 한두 잎 푸른 잎새기 보고싶을 때가 있다
소리라도 질러서, 목쉰 소리라도 질러 나를, 나만이라도 깨우고 싶을 때가 있다
얼어붙은 호수의 빙판을 내리찍을 거뭇거뭇한 돌덩어리 하나 없고
그저, 저 웅크린 흰 북극곰 새끼라도 쫓을 마른 나무 작대기 하나 없고
얼어붙은 발가락 마디마디가 툭, 툭 부러지는 가도가도 끝없는 빙판 위로
아까 지나쳤던 흰, 흰 북극곰 새끼가 또다시 저만치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내 몸은, 발걸음은 점점 더 눈에 묻혀 가고 무언가 안되고 있다
무언가, 무언가 안 되고 있다 ☆★☆★☆★☆★☆★☆★☆★☆★☆★☆★☆★☆★ 《9》 금기
이성복
아직 저는 자유롭지 못합니다 제 마음 속에는 많은 금기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될 일도 우선 안 된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은 저의 금기가 아니신지요 당신은 저에게 금기를 주시고 홀로 자유로우신가요
휘어진 느티나무 가지가 저의 집 지붕 위에 드리우듯이 저로부터 당신은 떠나지 않습니다 ☆★☆★☆★☆★☆★☆★☆★☆★☆★☆★☆★☆★ 《10》 기다림
이성복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봅니다 나는 팔도 다리도 없어 당신에게 가지 못하고 당신에게 드릴 말씀 전해 줄 친구도 없으니 오다가다 당신은 나를 잊으셨겠지요 당신을 보고 싶어도 나는 갈 수 없지만 당신이 원하시면 언제라도 오셔요 당신이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가셔요 나는 팔도 다리도 없으니 당신을 잡을 수 없고 잡을 힘도 마음도 내겐 없답니다 날 버리시면 어쩌나 생각진 않지만 이제나저제나 당신 오는 곳만 바라보니 첩첩 가로누운 산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집니다 ☆★☆★☆★☆★☆★☆★☆★☆★☆★☆★☆★☆★ 《11》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목 좁은 꽃병에 간신히 끼여 들어온 꽃대궁이 바닥의 퀘퀘한 냄새 속에 시들어가고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있다 ☆★☆★☆★☆★☆★☆★☆★☆★☆★☆★☆★☆★ 《12》 남해금산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13》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이성복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짝짝인 신발 벗어들고 산을 오르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보았니 한쪽 신발 벗어 하늘 높이 던지던 사내 내 마음아 너도 들었니 인플레가 민들레처럼 피던 시절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우우우, 어디에도 닿지 않는 길 갑자기 넓어지고 우우,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기억하니
오른손에 맞은 오른뺨이 왼뺨을 그리워하고 머뭇대던 왼손이 오른뺨을 서러워하던 시절 내 마음아 아직도 기억하니 우리 함께 개를 끌고 玉山에 갈 때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던 그의 웃음소리 내 마음아 아직도 너는 그리워하니 우리 함께 술에 밥을 말아먹어도 취하지 않던 시절을 ☆★☆★☆★☆★☆★☆★☆★☆★☆★☆★☆★☆★ 《14》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이성복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 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 오는 비행 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 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 《15》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이성복
너는 네가 무엇을 흔드는지 모르고 너는 그러나 머물러 흔들려 본 적 없고 돌이켜 보면 피가 되는 말 상처와 낙인을 찾아 고이는 말 지은 죄에서 지을 죄로 너는 끌려가고 또 구름을 생각하면 비로 떨어져 썩은 웅덩이에 고이고 베어먹어도 베어먹어도 자라나는 너의 죽음 너의 후광 너는 썩어 시가 될 테지만
또 네 몸은 울리고 네가 밟은 땅은 갈라진다 날으는 물고기와 용암처럼 가슴속을 떠돌아다니는 새들, 한 바다에서 서로 몸을 뜯어먹는 친척들(슬픔은 기쁨을 잘도 낚아채더라) 또 한 모금의 공기와 한 모금의 물을 들이켜고 너는 네가 되고 네 무덤이 되고
이제 가라, 가서 오래 물을 보고 네 입에서 물이 흘러나오거나 오래 물을 보고 네 가슴이 헤엄치도록 이제 가라, 불온한 도랑을 따라 예감을 만들며 흔적을 지우며 ☆★☆★☆★☆★☆★☆★☆★☆★☆★☆★☆★☆★ 《16》 네 살엔 흔적이 없다
이성복
누워 있는 네 눈을 들여다보면서 가만히 네 살에 손톱자국을 남긴다 거기 읽을 수 없는 글자를 써보거나, 하늘에 없는 별자리를 그려보거나 네 살엔 흔적이 없다 너는 벌써 받아 숨긴 것이다 가만히 손톱으로 네 살을 누르면서 몇 번의 겨울이 지나고 또 몇 점 눈꽃 송이 네 눈으로 내려앉고 ☆★☆★☆★☆★☆★☆★☆★☆★☆★☆★☆★☆★ 《17》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이성복
마라, 네가 왜 여기에, 어떻게 가로등 불빛에 떠는 희부연 길 위에, 기우는 수평선, 기우뚱거리는 하늘 위에 마라, 네가 어떻게, 왜 여기에, 대낮처럼 환한 갈치잡이 배 불빛, 불빛에 아, 내게 남은 사랑이 있다면 한밤에 네게로 몰려드는 갈치떼, 갈치떼 은빛 지느러미, 마라, 네가 왜, 어떻게 여기에 ☆★☆★☆★☆★☆★☆★☆★☆★☆★☆★☆★☆★ 《18》 눈
이성복
1 눈이 온다 더욱 뚜렷해지는 마음의 수레바퀴 자국 아이들은 찍힌 무 처럼 버려져 있고 전봇대는 크리스마스 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눈이 온다 산등성이 허름한 집들은 白旗(백기)를 날리고 한 떼의 검은 새들, 집을 찾지 못한다 마음의 수레바퀴 자국에서 들리는 수레바퀴 소리
이제 같은 하늘 바깥을 떠돌고 亡者(망자)들은 무덤 위로 얼굴을 든다 -치욕이여, 치욕이여 언제 너도 白旗를 날리려나
2 그 겨울눈은 허벅지까지 쌓였다 창을 열면 아, 하고 복면한 산들이 솟아올랐다
잊혀진 祖上(조상)들이 일렬로 걸어왔다 끊임없이 그들은 흰 피를 흘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 온 몸에서 전깃줄이 울고, 얼음짱에 아가미를 부딪는 작은 물고기들이 보였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쌓였다 나무 십자가가 너무 부족했다 잘못, 시체를 밟을 때마다 나는 가슴속에 물고기를 그렸다
희생자들은 곳곳에 녹아 흘렀다 물고기 뼈가 공중에 떠올랐다
아 - 하고 누가 소리 질렀다 또 한 떼의 희생자들이 희생자들 위에 쓰러졌다 사슴뿔을 단 치욕이 썰매를 끌고 달려갔다 아 - 하고 뒷산이 대답했다 ☆★☆★☆★☆★☆★☆★☆★☆★☆★☆★☆★☆★ 《19》 느낌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 《20》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이성복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갔다 소년들의 성기(性器)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먹거나 이차 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 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 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 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春畵)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21》 때로는 울고 싶습니다
이성복
때로는 울고 싶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는지 잊었습니다
내 팔은 울고 싶어 합니다 내 어깨는 울고 싶어합니다
하루 종일 빠져나오지 못한 슬픔 하나 덜컥거립니다
한사코 그 슬픔을 밀어내려 애쓰지만 이내 포기하고 맙니다
그 슬픔이 당신 자신이라면 나는 또 무엇을 밀어내야 할까요
내게서 당신이 떠나가는 날 나는 처음 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22》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山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 《23》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이성복
바닷가 언덕 위 이름 모를 꽃들, 제 뺨을 잎새에 부비며 어두워진다 발 밑에 제 이름 묻고, 그림자를 묻고, 몸 버리려 몸부림하는 꽃들, 눈먼 파도에 시달리다 물거품이 되는 꽃들, 마라, 눈을 떠라, 지금 네가 내 얼굴을 보지 않으면 난 시들고 말 거야 아, 이 저녁엔 간지럼처럼 찾아오는 죽음, 베일 아닌 죽음이 따로 있을까 아, 눈시울에 떠는 한 아름의 꽃들, 폭풍 지나가면 곤소금 뒤집어쓰고 허연 뿌리 드러낼 저것들이 오늘 저녁 네게 던지는 빛은 얼마나 강한가 ☆★☆★☆★☆★☆★☆★☆★☆★☆★☆★☆★☆★ 《24》 무언가 아름다운 것
이성복
1 아침마다 꽃들은 피어났어요 밤새 옆구리가 결리거나 겨드랑이가 쑤시거나 밤새 아픈 것들은 뜬눈으로 잠 한숨 못 자고 아침엔 손를 뻗쳐 무심코 만져지는 것이 뭔가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지요
2 저녁이면 꽃들이 누워 있었어요 이마에 붉은 칠을 하고요 넘어져 다쳤는지 몰라요 어쩌면 더 먼 곳에서 다쳐 이곳까지 와서 쓰러졌는지도 엎드리면 꽃들의 울음소리 들렸어요 난 꽃들이 등물하는 줄만 알았지요 ☆★☆★☆★☆★☆★☆★☆★☆★☆★☆★☆★☆★ 《25》 바다
이성복
서러움이 내게 말 걸었지요 나는 아무 대답도 안 했어요
서러움이 날 따라왔어요 나는 달아나지 않고 그렇게 우리는 먼길을 갔어요
눈앞을 가린 소나무 숲가에서 서러움이 숨고 한순간 더 참고 나아가다 불현듯 나는 보았습니다
짙푸른 물굽이를 등지고 흰 물거품 입에 물고 서러움이, 서러움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엎어지고 무너지면서도 내게 손 흔들었습니다 ☆★☆★☆★☆★☆★☆★☆★☆★☆★☆★☆★☆★ 《26》 밤은 넓고 드높아
이성복
밤은 넓고 드높아 수없이 깔린 별들 서로 싸운다 더는 싸울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낮게 내린다 더는 내릴 수 없는 순간에 별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다
이것은 돌아가는 길인가, 오는 길인가 더는 다가설 수 없는 순간에 너를 부른다 네 얼굴을 보여다오, 바늘을 입에 문 물고기처럼 ☆★☆★☆★☆★☆★☆★☆★☆★☆★☆★☆★☆★ 《27》 봄밤
이성복
바깥의 밤은 하염없는 등불 하나 애인으로 삼아서 우리는 밤 깊어가도록 사랑한다 우리 몸 속에 하염없는 등불 하나씩 빛나서 무르팍 사이로 너는 온 힘을 모은다 등불을 떠받치는 무쇠 지주에 차가운 이슬이 맺힐 때 나는 너의 머리를 쓰다듬어 저승으로 넘겨준다 이제 안심하고 꺼지거라 천도 복숭아 같은 밤의 등불이여 ☆★☆★☆★☆★☆★☆★☆★☆★☆★☆★☆★☆★ 《28》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이성복
불현 그리움이 물밀어 거기, 명산이 대덕이 이를 보이며 껄껄 웃고
너울거리는 강과, 강의 엉덩이를 핥는 바다의 넘실거리는 너울을 넘어 그가 나를 부르고, 반갑게 내가 대답하고
그가 나를 불러 낄낄거리는 名山과 대덕의 뜨거운 이마를 짚게 하고, 내가 소리쳐 태평가를 부르고
해가 지면 거기 가서 누울 수도 있으리라 나무들은 검은 둥치를 습기 찬 언덕에 비비고 풀숲으로 타닥타닥 겁 많은 벌레들이 튈 때
오, 해가 지면 거기 누워 죽을 수도 있으리라 이 몸, 거친 몸, 이 어이 거친 몸 ☆★☆★☆★☆★☆★☆★☆★☆★☆★☆★☆★☆★ 《29》 비단길
이성복
깊은 내륙에 먼바다가 밀려오듯이 그렇게 당신은 내게 오셨습니다. 깊은 밤 찾아온 낯선 꿈이 가듯이 그렇게 당신은 떠나가셨습니다
어느 날 몹시 파랑치던 물결이 멎고 그 아래 돋아난 고요한 나무 그림자처럼 당신을 닮은 그리움이 생겨났습니다 다시 바람 불고 물결 몹시 파랑 쳐도 여간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30》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성복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순간 순간 죄는 색깔을 바꾸었지만 우리는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아파트의 기저귀가 수의처럼 바람에 날릴 때 때로 우리 머릿속의 흔들리기도 하던 그네,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아파트의 기저귀가 壽衣처럼 바람에 날릴 때 길바닥 돌 틈의 풀은 목이 마르고 풀은 草綠의 고향으로 손 흔들며 가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풀은 몹시 목이 마르고
먼지 바람이 길 위를 휩쓸었다 황황히, 가슴 조이며 아이들은 도시로 가고 지친 사내들은 처진 어깨로 돌아오고 지금 빛이 안드는 골방에서 창녀들은 손금을 볼지 모른다
아무도 믿지 않는 허술한 기다림의 세월 물 밑 송사리떼는 말이 없고, 새들은 이곳에 집을 짓지 않는다 ☆★☆★☆★☆★☆★☆★☆★☆★☆★☆★☆★☆★ 《31》 샘 가에서
이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모른 체하십니까 당신은 제게 흐르는 몸을 주시고 당신은 제게 흐르지 않은 중심입니다 저의 흐름이 멎으면 당신의 중심은 흐려지겠지요 어찌 당신을 원망하는 일이 사랑이겠습니까 이제 낱낱이 저에게 스미는 것들을 찾아 저는 어두워질 것입니다 홀로 빛날 당신의 중심을 위해 저는 오래 더럽혀질 것입니다 ☆★☆★☆★☆★☆★☆★☆★☆★☆★☆★☆★☆★ 《32》 서시
이성복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 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 《33》 서해
이성복
아직 서해엔 가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거기 계실지 모르겠기에
그곳 바다인들 여느 바다와 다를까요 검은 개펄에 작은 게들이 구멍 속을 들락거리고 언제나 바다는 멀리서 진펄에 몸을 뒤척이겠지요
당신이 계실 자리를 위해 가보지 않은 곳을 남겨두어야 할까 봅니다 내 다 가보면 당신 계실 곳이 남지 않을 것이기에
내 가보지 않은 한쪽 바다는 늘 마음 속에서나 파도치고 있습니다 ☆★☆★☆★☆★☆★☆★☆★☆★☆★☆★☆★☆★ 《34》 숨길 수 없는 노래
이성복
아직 내가 서러운 것은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 못했기 때문이다 봄 하늘 가득 황사가 내려 길도 마음도 어두워지면 먼지처럼 두터운 세월을 뚫고 나는 그대가 앉았던 자리로 간다 나의 사랑이 그대의 부재를 채우지 못하면 서러움 이 나의 사랑을 채우리라
서러움 아닌 사랑이 어디 있는가 너무 빠르거나 늦은 그대여, 나보다 먼저 그대보다 먼저 우리 사랑은 서러움이다 ☆★☆★☆★☆★☆★☆★☆★☆★☆★☆★☆★☆★ 《35》 슬픔
이성복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내가 그대에게 바랄까요 그대가 내지 않은 길을 그대가 나에게 바랄까요
그래도 내 가는 길이 그대를 향한 길이 아니라면 그 내는 내 속에서 나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나를 미워하고 그대를 사랑하거나 그대를 미워하고 나를 사랑하거나 갈래갈래 끊어진 길들은 그대의 슬픔입니다
나로 하여 그대는 시들어 갑니다 ☆★☆★☆★☆★☆★☆★☆★☆★☆★☆★☆★☆★ 《36》 어떤 싸움의 기록(記錄)
이성복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 《37》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이성복
어떻게 꽃은 잎과 섞여 잎을 핏물 들게 하는가 마라, 생각해 보라 비린내나는 네 살과 단내 나는 네 숨결 속에서 내숭 떠는 초록의 눈길을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초록 잎새들이 배반하는 황톳길에서 생각해 보라, 마라, 어떻게 네 붉은 댕기가 처음 나타났는지 그냥 침 한번 삼키듯이, 헛기침 한번 하듯이 네겐 쉬운 일이었던가 마라, 내게 어렵지 않은 시절은 없었다 배반 아닌 사랑은 없었다 솟구치는 것은 토하는 것이었다 마라, 나를 사랑하지 마라 ☆★☆★☆★☆★☆★☆★☆★☆★☆★☆★☆★☆★ 《38》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성복
1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구할 수 있을까 왼손이 왼손을 부러뜨릴 수 있을까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천국은 말속에 갇힘 천국의 벽과 자물쇠는 말속에 갇힘 감옥과 죄수와 죄수의 희망은 말속에 갇힘 말이 말속에 갇힘, 갇힌 말이 가둔 말과 흘레 붙음, 얼싸
돌이킬 수 없는 것도 돌이키고 내 아픈 마음은 잘 논다 놀아난다 얼싸
2
나는 <덧없이> 지리멸렬한 行動을 수식하기 위하여 내 나름으로 꿈꾼다 <덧없이> 나는 <어느 날> 돌 속에 바람 불고 사냥개가 천사가 되는 <어느 날> 다시 칠해지는 관청의 회색 담벽 나는 <집요하게> 한 번 젖은 것은 다시 적시고 한 번 껴안으면 안 떨어지는 나는 <집요하게>
내 詩에는 종지부가 없다 당대의 폐품들을 열거하기 위하여? 나날의 횡설수설을 기록하기 위하여?
언젠가, 언젠가 나는 <부패에 대한 연구>를 완성 못 하리라
3
숟가락은 밥상 위에 잘 놓여 있고 발가락은 발끝에 얌전히 달려 있고 담뱃재는 재떨이 속에서 미소짓고 기차는 기차답게 기적을 울리고 개는 이따금 개처럼 짖어 개임을 알리고 나는 요를 깔고 드러눕는다 완벽한 허위 완전 범죄 축축한 공포,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여러 번 흔들어도 깨지 않는 잠, 나는 잠이었다 자면서 고통과 불행의 정당성을 밝혀냈고 반복법과 기다림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나는 놀고 먹지 않았다 끊임없이 왜 사는지 물었고 끊임없이 희망을 접어 날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육교 위에 버섯이 자라고 버젓이 비둘기는 수박 껍데기를 핥는가 어째서 맨발로, 진흙 바닥에, 헝클어진 머리, 몸빼이 차림의 젊은 여인은 통곡하는가 어째서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의 표현은 통곡과 어리석음과 부질없음이 아닌가 어째서 시는 귀족적인가 어째서 귀족적이 아닌가
식은 밥, 식은 밥을 깨우지 못하는 호각 소리- ☆★☆★☆★☆★☆★☆★☆★☆★☆★☆★☆★☆★ 《39》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 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 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 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 《40》 음악
이성복
비 오는 날 차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본다 ☆★☆★☆★☆★☆★☆★☆★☆★☆★☆★☆★☆★ 《41》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이성복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찰랑이는 채석강 연안 바닷물이 쨍알쨍알 보채는 나를 달랜다 목까지, 눈까지 잠겨 작은 물결 물새떼 흉내를 내는지 물새떼 작은 물결 흉내를 내는지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마냥 발길 떨어지지 않는 나를 달래며 바다는 속이 탄다 검은 오지항아리 속 자글자글 끓는 바다는 나를 달랜다 이러면 어쩌나, 낸들 어쩌나 오늘도 난 바다에게 짐만 되었다 ☆★☆★☆★☆★☆★☆★☆★☆★☆★☆★☆★☆★ 《42》 정든 유곽에서
이성복
1 누이가 듣는 음악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내 음악은 죽음 이상으로 침침하게 발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잡초 돋아나는데, 그 남자는 누구일까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의심하는 가운데 잠이 들었다
목단이 시든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소녀의 반복되는 임종, 병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잠자는 동안 내 조국의 신체를 지키는 者는 누구인가 日本인가, 일식인가 나의 헤픈 입에서 욕이 나왔다 누이의 연애는 아름다와도 될까 파리가 잉잉거리는 하숙집의 아침에
2 엘리, 엘리 죽지말고 내 목마른 나신에 못박혀요 얼마든지 죽을 수 있어요 몸은 하나지만 참한 죽음 하나 당신이 가꾸어 꽃을 보여 주세요 엘리, 엘리 당신이 승천하면 나는 죽음으로 월경할 뿐 더럽힌 몸으로 죽어서도 시집 가는 당신의 딸, 당신의 어머니
3 그리고 나의 별이 무겁게 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혈관 마디마다 더욱 붉어지는 신음, 어두운 살의 하늘을 나는 방패연, 눈을 감고 쳐다보는 까마득한 별
그리고 나의 별이 파닥거리는 까닭을 말할 수 있다 봄밤의 노곤한 무르팍에 머리를 눕히고 달콤한 노래를 부를 때, 전쟁과 굶주림이 아주 멀리 있을 때 유순한 혁명처럼 깃발 날리며 새벽까지 행진하는 나의 별
그리고 별은 나의 조국에서만 별이라 불릴 것이다 별이라 불리기에 후세 찬란할 것이다 백설탕과 식빵처럼 구미를 바꾸고도 광대뼈에 반짝이는 나의 별, 우리 한족의 별 ☆★☆★☆★☆★☆★☆★☆★☆★☆★☆★☆★☆★ 《43》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이성복
지금 검은 산언덕을 오르는 사람들은 흘러내린다 옷만 있고 몸뚱이가 없다 마라, 나는 너의 허리를 감는다 살아 있느냐고, 살아 있었느냐고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눈먼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낮은 하늘 네 눈동자 속으로 빨려드는 것이다 마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검은 돌로 쌓은 장방형의 무덤에서 마지막 영생의 꿈에 붙들리는 것이다 눈먼 바람이 우리를 찢을 때까지 찢기는 그림자를 향해 절하는 것이다 ☆★☆★☆★☆★☆★☆★☆★☆★☆★☆★☆★☆★ 《44》 차라리 댓잎이라면
이성복
형은 바다에 눈 오는 거 본 적 있수? 그거 차마 못 봐요, 미쳐요
저리 넓은 바다에 빗방울 하나 앉을 데 없다니 차라리 댓잎이라면 떠돌기라도 하지
형, 백 년 뒤 미친 척하고 한번 와볼까요, 백 년 전 형은 또 어디 있었수?
백 년 전 바다에 백 년 뒤 비가 오고 있었다, 젖은 그의 눈에 내리다 마는 나는 빗줄기였다 ☆★☆★☆★☆★☆★☆★☆★☆★☆★☆★☆★☆★ 《45》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이성복
'수그리다'는 말이 '구부리다'는 말의 추억을 가지듯이 고개 숙인 양달개비 푸른 꽃은 어느 깨진 하늘의 사금파리일까
지금 이곳이 살아야 할 곳이 아니라는 표지처럼, 무한 경고처럼 양달개비 꽃은 푸르고,
이질 설사의 배설물 같은 흰 개 망초꽃 사이, 퍼질러앉은 오십대 여인들의 엉덩이가 유난히 커 보인다
첫댓글 정성것 시집 게재하여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힘찬 한주 되시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