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초봄 서울 동작구 약수맨션을 찾은 두 남자가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캠프의 좌장 이재오와 그의 측근 이군현이었다.
전날 이재오는 이명박 후보로부터 짜증 섞인 질책을 들어야 했다. “너 땜에 서청원이 박근혜한테 간다는 데 어떻게 된거야. 데려오든지, 적어도 박근혜 한테는 못 가게 해.”
이
재오는 다음날 아침 서둘러 서청원의 자택을 찾았다. 하지만 미리 연락을 한 게 실수였다. 서청원은 집을 비움으로써 만날 의사가
없음을 확실히 보여줬다. 새벽밥을 지어먹고 나와 바람을 맞은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서청원과 이재오. 1996년 이래
정치적 인연을 맺어온 중앙대학교 2년 선후배가 금을 긋고 갈라서는 순간이었다.
서청원의 오른팔 이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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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8월 신한국당 대통령후보경선을 앞두고 이수성 후보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모여있다. 왼쪽부터 김동욱,손학규, 서청원, 이재오 의원.
1996년 15대 총선에서 집권여당 신한국당은 승리했다. 다양한 경력의 초선 의원들이 대거 입성했다. 정무장관을 지내고
당으로 돌아온 민주계의 실세 서청원은 그 가운데서도 두 명의 중앙대 출신 초선 의원들을 끔찍히 챙겼다. 이재오와
유용태(15,16대 의원ㆍ전 노동부장관)였다.
한 관계자는 “당시 서청원이 두 사람을 늘 끼고 다녀 ‘좌용태
우재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또 다른 관계자의 증언. “민중당 출신이 보수정당에 들어와
연착륙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실세 서청원이 이재오를 물심양면 도운 것으로 안다.”
세 사람은 죽이 잘 맞았다.
초선모임 ‘시월회’를 이끌었던 이재오와 유용태는 ‘정치발전협의회’의 핵심이 돼 1997년 대선까지 서청원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
했다. ‘반(反) 이회창, 친(親) 이수성’ 대열 가운데에 중앙대 출신 세 사람이 있었다.
1997년 한나라당의
대선 패배 이후 정치 지형이 출렁댔다. 유용태는 한나라당을 탈당해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에 투항했고, 서청원과 이재오는 이회창 전
총재가 주인인 한나라당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 반(反)이회창 노선을 함께 걸었던 서청원과 이재오는 수년간 인고의 세월도 같이
보내야 했다. 끌어주고 당겨주던 선후배에서 동지가 된 것이다.
“이재오가 이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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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6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 출마한 서청원과 이재오가 귓속말을 주고 받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청원은 이재오가 완주할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에서도 다시 실패했다. 절친했던 대학 선후배 사이에도 서서히 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재오도 이제
‘머리 굵은’ 재선 의원이었다. 2003년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전 총재 이후 새로 당을 끌고 갈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렸다.
서청원과 최병렬의 양강(兩强)대결. 이재오도 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서청원과 이재오의 지지층은 겹쳤다.
서청원
측은 ‘설마 이재오가 경선을 완주하겠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誤算)이었다. 이재오는 경선을 완주, 3,000표 가까이 얻어
5위를 기록했고, 서청원은 최병렬에게 3,000여표 차이로 석패했다. 당시 이재오의 출마에 대해 ‘서청원과 이재오 간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었다’는 해석과 ‘이재오가 사실은 최병렬을 밀어준 것’이란 분석이 엇갈렸다. 어쨌든 서청원측에선 “이재오
때문에 졌다”는 얘기가 나와다.
그 뒤 벌어진 일은 서청원으로선 더욱 기가 막혔다. 이재오는 최병렬 대표
체제의 실세 사무총장이 됐다. 그리고 총선을 앞두고 ‘당무 감사’ 파동이 터졌다. 사무총장 이재오가 서청원과 서청원 계보의원들에게
낮은 점수를 매긴 게 드러났다. 서청원 측은 “이재오가 어떻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이후는 서청원에게
불운의 연속이었다. 2004년 1월 서청원은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됐고, 2007년까지 정치 무대의 뒤켠으로 밀려났다. 한
관계자는 “의리를 중시하는 서청원으로선 자신이 아낀 이재오에게 인간적인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서청원과 이재오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2005년 중앙대총동문회장 추대 건이다. 동문회장직을 맡고 있던 서청원이 후임자를
찾았고, 유용태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이재오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다. 서청원이 이재오에게 동문회장을 물려줄 리 만무했다. 한
관계자는 “서청원이 이재오가 경선을 주장한다는 얘기에 격한 언사를 퍼붓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결국 총동문회장은 유용태 추대로
마무리됐다.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댄 두 사람 소원해질대로 소원해진 두 사람은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전에서 정면 충돌했다. 그해 봄, 이재오가 서청원 자택의 문을 두드렸지만 서청원이 자리를
피해버린 장면은 두 사람의 애증 10년이 도달한 종착지였다. 서청원은 이미 박근혜를 돕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어
떻게든 서청원을 데려와야 한다는 이명박 후보의 예감은 맞았다. 서청원은 경선 와중에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 땅’ 문제를 건드렸다.
막바지로 치닫던 경선전이 출렁댔다. 이명박 캠프에선 “서청원 때문에 다 이긴 경선을 지게 생겼다”는 장탄식이 나왔다. 서청원을
거명하며 이를 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서청원과 이재오는 소원한 관계를 넘어 적(敵)이 됐다. 양 진영 전위(前衛)에 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2007년 경선이 ‘이명박 승, 박근혜 패’로 끝난 뒤 이재오는 박근혜 쪽을 향해 이렇게 일갈한다. “그들이 경선 과정에서 얼마나 과하게 했나. 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러자 서청원이 바로 반격한다. “안하무인, 기고만장한 사람들은 절대 승리자가 될 수 없다. 국민의 마음을 달래고 하나가 되려 해도 시원찮은데 누구보고 건방지게 반성하라고 하나!”
두 사람의 칼날이 번득였고 불꽃이 튀었다. 두 사람은 상처를 입고, 입혔다.
“언제 점심이나 한번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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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12월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교도소에서 출소한 서청원이 지지자들 앞에 서 있다(왼쪽). 2009년 3월 망명 같은 미국 생활을 끝내고 이재오가 귀국해 자택에서 손녀를 안아보고 있다(오른쪽).
서청원은 2009년 친박연대 총선 차입금 건으로 기소돼 1년6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됐다. 고혈압에 시달리며 그는 형기를
다 채웠다. 이재오 역시 상처를 입었다. 이명박 정권의 2인자였지만 그는 2인자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 2008년 총선에서
친박계에 찍혀 낙선한 뒤 도피하듯 미국으로 떠나 망명객 아닌 망명객으로 2년을 보내야 했다.
2012년12월 대선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승리하면서 여당의 친박ㆍ친이 관계는 5년전과는 정반대가 됐다. 서청원과 이재오의 관계도 정반대가 됐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2013
년 1월,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 마지막 특사가 단행됐다. 서청원의 이름이 명단에 포함돼 있었다. 이 대통령도 마지막엔 서청원을
복권시킨 것이다. 한 관계자는 “이재오 장관이 이 대통령에게 서청원을 반드시 복권해줘야 한다고 간청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댄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13년 9월, 부산에서 정의화 의원의 모친상이 있었다.
제각각 부산행 비행기를 탔는데 두 사람은 앞뒤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칼을 내려놓고 있었다.
“언제
점심이나 한번 하지.” 서청원의 제의에 이재오가 호응했다. 두 사람은 거의 10년만에 밥자리에 마주 앉았다고 한다. 서청원은
“이번에 경기 화성 국회의원 재보선에 출마하려고 한다”며 도움을 청했고, 이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관계자는 “두 사람이 그
자리서 그간의 구원(舊怨)을 정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청원의 출마에 대해 당내 비주류 의원들 몇몇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비주류 수장 이재오는 침묵했다.
10월 재보선으로 국회에 돌아온 서청원은 이재오와 국회본회의장에 나란히 앉았다.
한동안 국회를 떠나 있던 서청원에게 정치 후배 이재오가 본회의장 컴퓨터 사용법을 알려주는 장면은 화제가 됐다. 사연 많고 굴곡졌던
1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두 사람은 일단 화해한 듯 보였다.
두 사람 관계의 끝장면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