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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의 겨울
최 일 남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누님이 보이지 않았다. 여느 때 같으면 내 점심상을 차려 놓고, 내가 들어오자마자 ‘왔냐?’ 하면서 반길 누님이 보이지 않자 조금 섭섭했다.
누님이라고는 하지만 나보다는 열 여섯 살이나 위여서, 더불어 놀이를 한다든가, 아닌 말로 숨바꼭질의 상대가 되어 주는 것 같은 시큰새큰한 차이는 아니지만 나는 누님이 우정 좋았다. 가는귀가 먹어서 때로는 내가 바락바락 악을 써야 알아듣기 때문에 신경질이 돋을 때도 있고, 어린 마음에도 누님이 두 번씩이나 소박을 맞고 쫓겨와서 친정살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괜한 미움으로 변하는 수도 있지만, 나를 한결같이 감싸고 도는 누님이 없으면 나는 못 살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나는 누님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나는 그 때 국민 학교 오 학년에 불과했으므로, 구체적으로 소박이라는 것이 어떤 모양의 것이며, 친정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 어째서 나쁜 것인지에 대해 많이 알지를 못했다. 허나 부자집 침모(針母)로 있는 어머니가 노상 누님을 쥐어박으며 이년 저년 욕을 해대고 어떤 때는 누님을 붙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서럽게 우는 겉 볼 때는, 마음이 심란하게 흔들리고 아팠다. 그것은 또 누님에 대한 연민으로 변했다.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한데다 가는귀까지 먹어 집 안에서조차 돌림뺑이를 당하고 있는 누님 이, 시집가선들 제 구실하고 살 수 있을까, 누가 그런 사람을 잘 보살피며 살 수 있을까, 나라도 어려울 거야 하면서도, 그러기 때문에 더욱 누님이 안스럽게만 보였다.
속마음으로야 안 그렇겠지만 어머니는 누님에게 몹시 모질게 대했다. 반찬 잘못 만든다고, 계집년이 칠칠맞게 바느질 하나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했다.
밤이었는데, 한번은 내가 누님의 비명 소리에 놀라 깬 일이 있었다. 아직 몽롱한 내 눈에 비친 방안 광경은 잠이 후다닥 달아날 만큼 섬뜩한 것이었다. 어 어 소리를 내지르며 손등을 감싸 쥐고 있는 누님 앞에서, 어머니는 노여움 반 눈물 반의 시선으로 누님을 쏘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동정을 달다 만 여자 저고리 가 펼쳐진 채였다. 나는 영문을 몰라서 두 사람 사이로 부지런히 눈을 돌렸다. 한참 만에야 나는 어머니가 누님에게 바느질을 가르치다 말고, 누님의 무딘 손 끝에 화가 치민 나머지 달아오른 인두로 누님의 손등을 찍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누님의 벌겋게 달아오른 손등이 내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눈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어머니는 입으로는 그러나 여전히 독한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이년아, 솜씨가 이 지경 이니까 번번이 못 살고 쫓겨 오지.”
“어 어.”
“아이구. 이놈의 팔자.”
어머니는 밖으로 나가더니 간장병을 들고 와서는 조심스럽게 한 방울을 누님의 손등에 말라 주었다. 간장을 바르자 더 아렸던지 누님은 펄적펄적 뛰었다. 어머니는 코맹녕이 소리로 말했다.
“이년을 어찌할꼬.”
이상한 것은, 누님은 그런 어머니에게 말대꾸 한 마디 않는 것이었다. 빛깔도 모양도 기묘한 낮은 비명을 지르기는 해도 그 자리를 피하는 일은 없었다,
옆방에서는 아버지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 왔다. 시장에서 거간(居間) 누릇을 하고 있는 아버지는 오늘도 알맞게 취해 돌아왔던 것이다.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아버지는 저녁이면 노상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그렇다고 대취(大醉)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다가 좀 벌이가 나은 날은 골목 밖에서 동네가 떠들썩하게 노래를 부르는 일만이 달랐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공주 고향을 보랴 하고 제주 어선 빌어 타고 해남으로 건너올제…….’ 이렇게 시작되는 아버지의 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보통 수준은 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게 자랑이었다. 어느 편이냐 하면, 서발 막대 휘둘러야 거칠 것 하나 없는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그다지 개의하지 않았다. 가난에 절은 사람들이 항용 보이기 마련인 음습함이나 구겨진 표정이 없이, 언제나 태평스런 모습이었다. 따라서 자기의 딸이 두 번씩이나 시집 살이를 못 하고 쫓겨온 데 대해서도 그다지 마음 아파하지 않는 눈치였다. 물론 이 대목은 내가 잘못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부모가 자식의 불행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라나 집안 돌아가는 일에는 도통한 사람 모양, 한 옆으로 비켜 서 있으면서 어지간만 하면 ‘함평 천지’를 읊조리는 그런 인상밖에 받을 것이 없었다.
어머니는 바느질감 위로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마침내 누님을 껴안고 딩굴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이고 괄자.”
그 말대로라면 어머니는 누님 팔자보다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고 있는 듯이도 보였다.
우습게도 누님은 그런 어머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멀뚱멀뚱한 눈으로 천정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밤중에 일어난 그 이상한 장면에서 이름할 수 없는 슬픔을 짓씹었다. 내가 슬픔을 알면 얼마나 알까마는, 밤이라든가 늙은 어머니의 울음이라든가, 항상 얻어터지고만 있는 누님이 불쌍하곤 불쌍해서 나오는 여린 한숨 따위가, 내 슬픔을 나름대로 짙게 색칠해 주었다.
집안에 누님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나 혼자 점심을 차려먹기르 작정하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나는 누님이 아니라도 그런 일에 익숙해 있었다. 누님이 시집가고 없을 때는 언제나 혼자서 밥을 차려 먹었으니까.
나는 우선 시렁 위에 매달와 놓은 밥바구니를 내렸다. 여름이었으므로 밥이 쉬지 않도록 식은 밥은 언제나 매달아 놓았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이미 살짝 간 상태였다. 나는 먹을 만큼의 양을 덜어 밥을 물에 빨기 시작했다. 세 번쯤 빨았나. 쉰내를 가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뚜막에 기대 앉아 시어빠져서 허옇게 고래기가 낀 열무 김치와 새우젓, 그리고 간장 한 종지로 밥을 깨질깨질 넘겼다.
밥을 먹고 나자 새삼스립게 누님이 어디로 갔을까가 궁금했다.
내가 학교에서 올 시간에 집을 비우는 일은 없었는데 이상하다 싶으면서, 막상 갔을 만한 곳이 잘 꼲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문득 집에서 반 마장 가량 떨어져 있는 계곡 쪽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님은 더위를 견디다 못하면 가끔 그 쪽으로 가서 미역을 감는 일이 있었다. 말이 계곡이지 가물 때는 바닥을 드러내다가, 물이 찬대야 무릎에나 닿을까말까 한 곳이지만, 보통 때는 사람이 없어서 누님은 심심하면 혼자서도 그 곳을 찾아가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도 처녀 때는 안 그랬는데 두 번씩이나 시집을 가고 나더니 통이 커졌는지 곧잘 찾아가는 곳이었다. 잘 모르기는 해도 내가 보기에 여자들은 시집가기 전과 시집간 후가 달랐다. 우리 동네에서도 처녀 때는 그렇게 수줍음을 잘 타던 처녀가, 이삼 년 후 아이를 안고 친정에 돌아오면 내가 보는 앞에서도 예사로 젖통을 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을 흔히 보았다. 내가 아직 아이라고 깔보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누님이 혼자 그런 곳에 가는 일을 적극 말렸다. 그러다가 못된 남자라도 만나면 어떡하려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때마다 누님은 어떠니 하고 웃고만 있었다.
날씨는 지독하게 쪄댔다. 이런 날은 누님이 아니라도 물 생각이 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의 열기가 더욱 그런 느낌을 보태 주었는지도 모른다 해방 얘기가 나왔지만 사람들은 모두들 들떠 있었다. 해방이 구체적으로는 자기들 삶의 어느 모서리에 직접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하던 일을 놓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새롭게 들려오는 소식 앞에 귀를 곤두세웠다. 읍내 네거리에는 소나무 가지로 얽어 만든 미군을 환영하는 솔문이 세워지고, 그 솔문의 이마빡에는 영어로 ‘웰컴!’이라는 간판을 붙여 놓았다. ‘웰컴!’이라는 말과 뜻은 내가 어떤 청년에게 물어서 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도 만나 보기를 갈망하는 미군은 끝내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보름이 지난 지금 그 솔문의 솔가지는 벌겋게 말락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소문만이 요란했다. 서울에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다는 둥, 읍내에도 그와 비슷한 단체가 생겼다는 둥, 들리는 소리는 하나같이 신기한 것들이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아무것도 변하거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집 안에 그런 일들에 관심을 가질 만한 인물도 없었거니와, 있다 해도 별반 변화가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침모로 나갔으며, 누님은 달라져 가고 있는 세상과는 무관하였다. 다만 아버지만이 조금 바빴다. 시장에는 일본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었다. 몸만 빠져 나가야 하는 일본 사람들이,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자진해서 가지고 나온 물건도 있었고, 개중에는 청년들이 일본 관리들의 집을 접수해서 뻬내 온 물건도 있어서 시장은 그런대로 바빴다. 그런 한편으로 아버지는 일찌감치 일복인 고수카이(심부름꾼)로 들어갈 걸 그랬다고 후회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일본 가마보코(생선북)집 종업원으로 있던 아무개는, 주인이 물러가면서 가게를 몽땅 물려주는 바람에 당장 벼락 부자가 되었다든가, 빵집 아무개는 역시 그런 식으로 점포 하나를 도리(차지)했다는 투의 소문에 근거한 것이었다. 요컨대 아버지를 비롯한 우리 집안 식구들은, 해방을 이런 식으로밖에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긴 긴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백의 민족이 주인이 되어 새롭게 나라를 건설한다는 따위, 그 오만한 왜놈 꼴을 보지 약아도 된다든가, 이제는 유기 그릇(없기두 했지만)이나 숟가락 몽댕이 같은 걸 공출하라고 지랄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든가 하는 등속의 시원한 해방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러나저러나 불어서 검불 밖에 나올 것이 없는 집안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점심을 끝내자 나는 슬슬 계곡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닳아빠진 고무신 바닥으로 전해 오는 땅의 열기가 대단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누님은 계곡의 그늘진 쪽에서 한참 물을 끼얹고 있는 중이었다. 옷을 임은 채 물을 맞고 있기 때문에, 홑가죽 옷이 달라붙어서 몸의 굴곡이 환히 드러나보였다. 나는 갑자기 그런 누님이 한심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끄럽고 누가 볼까 봐 겁이 났다. 아무리 덥기로 여자 혼자서 대낮에 미역을 감다니 당치나 한 일인가. 저러니까 소박을 맞고 어머니에게 당하고만 살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데다가 전체적으로 조금 모자라 보이는 누님은 어떤 때는 형편 없이 주눅 든 사람처럼 가장자리로만 돌다가도, 어떤 때는 당차게도 엉뚱한 일을 저질러 식구들을 놀라게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한낮에 으슥한 곳으로 나와 몸을 씻는 것도, 때로는 식구들의 눈을 놀라게 하는 그런 짓거리와도 통한다.
나는 아무 말 않고 누님 쪽으로 돌팔매질을 했다. 내가 던진 돌이 누님의 코앞에서 물을 튀겼다. 누님은 그제서야 깜짝 놀라는 눈치더니, 돌을 던진 사람이 나인 것을 확인하고는 벌죽 웃었다.
“왔냐?”
나는 더욱 화가 났다. 자기 신세나 처지에 철저하게 빠져들 줄 모르고, 울어야할 대목에서 곧잘 웃음을 피워 낼 줄 아는 누님의 그런 무신경이 때로는 무지무지하게 미웠다. 나는 같잖게도 언제나 누님 편에 서서 슬픔을 나누어 갖고, 그것을 핥아 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누님은 나의 이런 마음에 언제나 쐐기를 박고 번번이 도망쳐 갔다.
두 번째 소박을 맞은 때였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오십 리 가량 떨어진 시골 어떤 지주(地主)의 작은 각시로 들어간 때 였는데, 그 쪽에서 누님을 데려가라는 기별이 왔다. 도저히 꼴을 볼 수 없으니 와서 데려가 달라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쫓아냈으면 쫓아내었지 와서 데려가라는 건 또 무엇인고 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뜻밖에도 날더러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싫다고 우겼으나 나를 살살 달래려 들었다. 싫었으나 나는 도리 없이 따라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서 어머니는 연방 눈물을 흘렸다. 나는 누님도 그래 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나는 달래 줄 작정이었다. 누님 울지 마. 아직 나이가 창창하지 않아? 또 웃고 살 날이 있겠지 하고. 어린애답지 않은 징그러운 능청을 떨어 볼 작정 이었다. 그러나 누님은 안 그랬다. 물론 희희낙락하는 건 아니나, 그렇다고 그렇게 세상이 꺼지도록 슬프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웃었다. 지금 ‘왔냐’ 하면서 웃듯이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논배미를 걸어가다가 뱀을 만난 때였다. 앞서가던 내가 뱀을 발견하고 질겁을 해서 소리를 지르자, 뒤따라오던 누나는 치금처럼 웃으면서 말했던 것이다. ‘남자가 그까짓 뱀 하나 보고 뭐가 무서워서 그러냐.’ 하고 말이다. 그런가 하면 또 누님은 엉뚱한 대목에서 눈물 방울을 보였다. 가령 식구들이 밥 잘 먹고 잠자리에 들 무렵이라든가, 골목 밖에서 아버지의 ‘함평 천지’가 들려 올 때라든가 할 때, 갑자기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 내가 깜짝 놀라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그냥’ 하고 지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그런 때 말씀하셨다.
“미친 년 지랄하고 있네.”
나는 고무신을 신은 채 첨벙 물 속으로 들어서면서 누님 쪽에 대곤 악을 썼다.
“누가 보면 어쩔려고 그래.”
“어떠니. 아무도 없는데.”
누님은 여전히 웃음을 흘리면서 내가 다가가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잘 한다. 여자 혼자 대낮에 미역 감고!”
“어떠니. 더워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님은 내가 어지간히 낯은 목소리로 말할 때도 내 말은 잘 알아들었다.
“잔소리 말고 빨리 집으로 가.”
“너도 들어와. 아주 시원해.”
“누님도 미쳤어. 이게 무슨 짓이야.”
“뭐라고?”
“미쳤다고.”
“왜?”
“이런 데서 미역 감으니까 그렇지.”
“너도 참 별소리를 다하는구나. 나는 시원해서 좋기만 하다.”
누님의 웃음소리가 땡볕 속에서 귀신 소리처럼 퍼져 갔다.
나는 조금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바깥 세상에서는 해방이 되었다고 너나없이 얽혀 돌아가면서, 어디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고 일단은 대단한 열기들을 뿜어내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물가에 퍼질러 앉아 물장난이나 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안의 형편없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아닌 말로 이런 때 중국 상해나 만주 등지에서 독립 운동하다 돌아온 형이나 삼촌이 있다면, 나는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러울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까 말한 대로 우리 집은 하나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나 정도였다. 해방이 되고 며칠을 핀둥핀둥 놀다가 새롭게 시작한 학교에서는, 내 눈이 번쩍 띌 만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고 우리말을 배우고 애국가를 배웠다. 일본말을 줄줄 외며 여러분도 성전(聖戰)을 이기는 데 대단히 한 몫 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선생님의 입에서. 이번에는 갑자기 태극기가 어떻고 기역 니은이 어떻고 하는 따위의 말이 나오는 것은 좀 걸리기는 했으나, 엄청나게 달라진 상황 앞에서는 그런 일들에 오래 매달려 있을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하루하루가 달랐으며 새로운 귀동냥도 많이 했다. 우리 꼬맹이들 사이에 이 승만 박사니 검 구 선생이니 하는 말들이 오간 것도 그 때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새로운 지식들이나 소문을 풀어먹을 데가 없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누님은, 도대체 나의 그런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일 상대가 되지 못했으며, 그들은 처음부터 그런 데다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다.
“빨리 가.”
나는 주위를 살피며 누님을 재촉했다. 같이 물에 잠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쩐지 이럴 때는 내가 누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랬다. 나는 쥐뿔도 누님에게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도 항상 그런 마음새를 갖추고 있었다. 불쌍하고 모자라고 그러면서도 나를 지극히 아끼는 누님을 위해서, 나는 언제나 희생자가 되어도 괜찮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일어나.”
나는 누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다가 얼핏 물에 젖은 옷 때문에 동글납작하게 솟아오른 누님의 팽팽한 젖무덤을 보고,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외면해 버렸다. 얼굴을 붉혔다는 것은 다분히 남이 볼까 봐 그랬다는 뜻도 되지만, 그 사이 내 덩지가 좀 커진 데서 오는 지난 날에의 나의 철없음을, 뉘우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 나는 누님의 발가벗은 젖무덤을 수없이 보아왔으며 그 젖무덤에 코를 박고 잔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어머니는 나를 사십이 넘어서 낳은 데다가 먹고 살기 위해 항상 밖으로만 나돌았기 때문에 누님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며, 그만큼 누님의 몸뚱어리와 친숙했다. 어머니는 다 늦게 나를 낳은 것이 창피하기도 하려니와, 내가 잘 나오지도 않는 젖에 매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 젖에다 금계랍을 발랐다. 때문에 나는 누님에게 안겨 자는 날이 많았다. 국민 학교에 들어간 후도 한참을 그랬다.
누님은 특히 소박맞은 후 나를 더욱 물고 떨었다. 나를 자기 가슴에 안고 토닥거리며 증얼거릴 때도 있었다.
“너는 누구한테 장가 갈래?”
“안 가.”
“그럼 못써.”
“누님허고 살 거야:”
“안 된다니까.”
“그러면 어때?”
“그러지 말고 장가 가거라. 내가 이쁜 각시 얻어 줄게. 우리 정식이 각시는 참 이쁠 것이다.”
“어떻게 알아.”
“내가 다 알지.”
“장가 안 간다는데.”
“그런 소리 하는 놈이 더 빨리 가지. 너 장가 가서 네 각시한테만 빠지면 내가 가만 안 둔다.”
“빠지는 게 뭔데?”
“각시만 이뻐한다 그 말이다.”
“그렇지 않을걸.”
“요오시. 두고 보자.”
누님은 어디서 배웠는지 일본말도 한 마디 섞었다.
나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물에서 나온 누님은 언제 준비했던지 따로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나더러는 저만치 가 있으라는 말도 없었다. 나는 누님의 허연 엉덩짝이 드러나는 순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물론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할이만큼 목욕을 좋아하는 누님은, 여름밤이면 곧잘 우리 집 뒤꼍서 목욕을 했다. 어머니는 그것도 못마땅한지 그럴 때마다 ‘미친년 목욕 하나는 잘 하네.’ 하고 핀잔을 주었으나, 누님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주 목욕을 했다. 옹배기, 세숫대야 등을 있는 대로 동원해서 은밀하게 몸을 씻었다. 누님의 목욕은 시간이 오래 결렸다. 내 귀에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들릴 만큼 정성스레 몸을 닦았다. 비누가 없으니까 팥가루로 씻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럴 때, 나는 부끄럽게도 그 찰랑거리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수가 많았다. 그것이 나쁜 일이라거나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에 앞서 먼저 귀가 쏠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더러는 누님의 찰떡 같은 허연 엉덩짝을 보는 수도 있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없이 오줌을 누러 나왔다가 얼핏 보는 수가 있었다. 이런 표현은 참 유치할지 모르나, 어쩌다가 달이라도 덩그러니 떠 있는 밤이면 누님의 엉덩짝이 아주아주 아름답게도 비쳤다. 그럴 때 누님이 나를 돌아보는 수가 있었다. 그러나 누님은 전혀 놀라는 빛 없이, 나를 보고 찡긋 웃어 주는 것으로 그 자리를 끝냈다.
가을이 되기까지도 우리 집 안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가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세상이 뒤숭숭하더니 우리 집도 거기 휘말리었다. 해가 바뀔 무렵 에는 뒤수웃ㅇ할 정도가 아니라 시끌짝하게 번져나갔다. 신탁 통치 반대의 물결이 그것이었다. 물론 그 때까지도 나는 신탁 통치 자체가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왜 우리끼리 서로 반대하고 찬성하고 나서는지도 몰랐다. 지금 나는 우리 집이 그런 신탁 통치에 휘말렸다고·했는데, 지금까지 내가 얘기해 온 집안 형편으로 봐서는 눈곱만큼도 그런 일에 휩쓸릴 까닭이 없었다. 해가 뜨면 해가 뜨는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서 ‘함평 천지 ’나 읊조리고 바느질 품이나 팔고, 이따금 엉덩이짝이나 희번덕거리며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면 그만인 사람들이었다. 그런 우리 집 이 신탁 통치에 휘말려 그나마의 살림살이에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것은 누님 때문이었다. 그 얘기는 잠시 뒤로 돌리고 우선 그놈의 신탁 통치부터 풀어가 보자.
처음 얘기한 대로 나는 신탁 통치가 뭐 말라 비틀어진 것인지도 통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선생 님이나 어른들의 이야기로 무엇보다도 술렁거리는 거리에서 그걸 느낄 뿐이었다.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해가 바뀌자 거세게 일어났다. 거리의 담벼락이란 담벼락에는 그것을 반대하는 벽보가 어지러울 정도로 나붙었다. ‘신탁 통치 결사 반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의를 철회하라!’ ‘우리는 목숨을 걸고 우리의 자주 독립을 지켜야 한다!’ 는 등의 문귀가 적혀 있었다. 그런가 하면 데모도 뻔질나게 일어났다. 피로 쓴 플래카드를 들고 머리에 ‘결사 반대’ 띠를 두른 사람들이 뻑하면 거리를 휩쓸었다. 당연히 나는 아직 어렸으므로 이런 광경들을 가만히 서서 구경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약간 흥분은 하고 있었다. 나쁜 놈들, 우리를 뭘로 보고 자기네들이 우리를 통치하겠다고 야단이야, 하는 정도로 새가슴을 두근거리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데모대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그들이 구호를 외치고 만세를 부르면 나도 따라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으나 그 이상의 행동은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일이 더 재미있게 된 것은 반대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찬성파도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찬성하는 쪽은 공산당들이었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들도 처음에는 반대를 하다가, 어쩐 일인지 하룻밤 사이에 찬성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반대 성명과 나란히 찬성 벽보가 벽을 떡 칠했다. '신탁 통치를 절대 지지한다!’ ‘소 미 영 삼상 회의를 지지하자!’ 이것은 물론 공산당 쪽에서 붙인 것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데모를 벌였다. 민족 진영에서 학교 운동장을 빌어 반대 군중대회를 열면, 이에 질세라 열흘이 못 가서 또 공산당 쪽의 찬성 군중대회가 열렸다. 우리가 살던 조그마한 도시는 신탁 통치 지지와 찬성으로 아우성을 쳤다. 어떤 때는 양쪽의 시위 군중이 맞붙는 일도 있었다. 한쪽이 시위를 벌이면, 다른 한 쪽 청년들이 돌팔매질을 하여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어느 한쪽이 상대파의 사무실을 습격하면 또 그 반대쪽이 그 사무실을 때려부수는 보복을 되풀이 했다.
누님의 세 번째 결혼 얘기가 나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상대는 이웃 동네에 사는 홀아비로,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딸린 아이가 셋이나 된다고 하였다. 일 년 전에 아내를 잃고 혼자 사는데 직업이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이라면 흠인 모양이었다.
이 얘기를 맨 처음 꺼낸 것은 우리 동네에 사는 방물 장수 아주머니였다. 그 여자와 우리 집과는 별반 거래가 없었다. 어머니와는 서로 하는 일이 다르니까 같이 어울리는 일도 없었거니와, 피차 마실을 다니는 일도 없어서 평소에는 그냥그냥 알고만 지내 오는 터였다. 나는 그 아주머니의 인상을 좋게 보지는 않았다. 여자인 텃수에 코가 어린애 주먹만큼 큰데다가, 메주를 떼어다 붙인 것 같은 볼때기가 욕심투정이로 보인 탓도 있으나, 어쩌다 겪게 되는 수다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 아주머니가 어느 날 혼담을 물고 온 것이다. 밤중이었다. 아마 어머니가 집에 있을 때를 겨냥하고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머니는 덤덤하게 그 여자를 맞았다. 여자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아주 가까이에서 새콤달콤하게 지내는 사이처럼, 보기와는 달리 아양을 있는 대로 떨었다.
“아이구. 어떻게 지내우, 성산댁.”
성 산댁 이란 ¡어머니의 택호였다.
“어쩐 일이우?”
어머니는 우선 경계하는 빛부터 보였다. 오다가다 만나면 눈인사나 나눌까, 생전가야 김치 한 조각 나누어 먹지 않은 여자가 찾아왔으니까 그럴 법도 하지만, 어머니의 천성이 그다지 살뜰하지는 못하니까 그런 반응을 보인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어머니의 이런 성미를 못마땅해해서, 저 여편네는 온몸에서 찬 바람이 돌 만큼 멋대가리 없다는 둥, 여우가 칵 물어갔으면 좋겠다는 둥 욕을 해댔다. 둘이 한참 싸울 때는 년자를 놓아 가면서 몰아붙였다. ‘야 이년아, 나나 허니까 너 같은 숭물을 데리고 사는 줄 알어.’ 또는 ‘야 이년아. 나나 허니까 너 같은 무지랭이를 안 버리고 데리고 사는 줄 알어.’ 따위의 막말이 그것이었다. 내가 듣기에도 아버지의 나중 말, ‘너 같은 무지랭이를 안 버리고 데리고 사는 줄 알어.’ 하는 대목은 매우 우스웠다. 일자 무식이기는 피차 마찬가지이면서 그런 욕을 해대다니 하는 생각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어머니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물고 늘어졌다.
‘아이고 아이고. 뭣이 육갑한다더니 유식 한 체하고 있네. 내 똥구멍 이 웃느만.’
나는 이런 싸움질을 보고 부끄럽고 또 부끄러웠다. 이왕 싸움을 한다 하디라도 유식한 부부는 이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그럴 듯하게 골라, 이웃이 들을까 봐 목구멍을 잔뜩 움츠리고, 때문에 약간 쉰 소리로 주고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러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아무데서나 방귀를 퐁퐁 뀌는 식으로 서슴없이 소리를 질러댔으며, 어머니는 또 있는 감정 없는 감정 다 보태서 장마철 하수 구멍처럼 자기 생각을 콸콸 쏟아부었다.
“아니 한동네서 놀러오지도 못하우.”
방물 장수는 어머니의 뻣뻣한 응대에 약간 기분이 상한다는 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좋아요. 내가 오늘. 온 것은 댁의 따님 일 때문이오.”
“……?”
방물 장수는 생각 탓인지 조금 기세가 올라섰고, 어머니는 거꾸로 더욱 의심스러운 빛을 보였다.
“아이고, 나도 딸 가진 년이지만 딸 때문에 얼마나 복장이 터지겠소.”
“그거야 뭐.”
“성산댁 심정 이해하고도 남아요. 그래서 얘긴데, 마침 마땅한 혼처가 하나 나왔어요.”
“혼처요?”
“그래요. 아주 안성마춤이라구요. 아이들이 딸린 것이 험 이기는 하지만.”
“몇이나 되는데요?”
“많지도 않아요. 셋 이니까.”
“셋이나? 그게 적어요?”
“그 쪽 보고 많다고만 할 게 아니라 이 쪽 처지도 생각해야지요.”
방물 장수의 말투에는, 두 번씩이나 소박을 맞은 처지에 더운 밥 식은 밥 가릴 형편이 되느냐는 핀잔이 섞여 있었다.
“뭣 하는 사람인데요. 신랑될 사람이.”,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속으로 웃었다. 애새끼가 셋이나 있는 사람더러 신랑이라고 하다니.
“일본 사람 회사에 다니다가 놀고 있는데 곧 한자리 할 겁니다. 그만한 사람이 해방까지 되었는데 놀고 먹을 리가 있나요.”
“회사? 그러면 학식깨나 있는 사람이게?”
어머니의 입에서 비로소 놀라는 눈치가 보였다.
“그럼요. 학식이 있다마다, 중학교까지 다녔는데요. 졸업은 못 했지만.”
이렇게 해서 누님의 세 번째 혼담은 익어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그 사이 누님에게는 한 마디도 가부를 물어 보지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에게만, 그것도 통고 비슷하게 말해 준 것뿐이었다. 누님의 첫번째 두 번째 혼사도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거니까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가면 될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어머니의 그런 처사가 못마땅했다. 그런데 더욱 놀랍게도 당사자인 누님 자신이 자기가 다시 시집 간다는 데 대해서 그다지 동요를 보이지 않는 일이었다. 방물 장수가 그 뒤에도 몇 번 발걸음을 했고, 집안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런 낌새쯤은 알아차렸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막판에는 어머니가 누님에게 그런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버지에게 그런 것처럼, 의견을 물어본다거나 하는 일 없이, 막바로 통고와 다름없는 방식을 취했다.
“이년아,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잘 살어. 애가 셋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너 하기에 달렸으니까.”
누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입을 약간 비죽거렸다. 누님 의 버릇이었다. 어색하거나 무슨 일이 좀 성에 차지 않을 때, 누님은 그런 모양으로 대응했다.
어머니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누님에게 핀잔을 주었다.
“어쩔려고 그래.”
“뭘?”
“왜 말이 없어.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하고 말을 해야지.”
“어차피 엄니 마음대로 될 건데.”
“그래도 누님 일이쟎아?”
“될 대로 되겠지.”
“애가 셋이나 있다는데도?”
“괜 찮아. 이번에는 삼시 세판이니까.”
얼래 얼래. 나는 하도 기가 막혀서 모가지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의 신세나 앞일에 대해서 도무지 계획이나 눈어림이 없고, 삼시 세판 같은 형편없는 아이들 말투나 흉내내고 있는 누님이 가당찮게 보인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할 수 없다 치고, 이래 가지고는 누님의 앞날이 어떤 지경으로 빠질 것인지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리고 저렇게 종이장처럼 희고 멀쩡한 누님이, 왜 번번이 시궁창 속에 처박히는 꼴만 당해야 하는지 우울하고 슬펐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새로 만나게 될 매부와 잘 살기나 빌 도리밖에 없었다.
나의 이런 우울하고 슬픈 감정을 한 옆으로 내몬 채, 일은 꽤 빠른 속도로 진전되었다. 저 쪽에서도 괜찮다는 반승낙이 오고 방물 장수가 다녀간 지 보름 만에, 그러면 당사자끼리 우선 대면이나 하자는 요청이 들어왔다. 대면 장소는 우리 집으로 정 해졌다.
매부될 사람이 오는 날, 어머니는 아침부터 일도 하지 않고 설쳐 댔다. 설쳐 대봤자 콩나물이나 무치고 두부탕이나 마련하는 정도의 일이 고작이었지만, 하여튼 나이 든 사람답지 않게 설렁거렸다.
방물 장수와 함께 매부될 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온 건 해질 녘이었다. 약간 바랜 검정색 외투를 입고, 매운 날씨 탓인지 코가 빨갛게 언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듣던 이보다는 다소 젊고 씽씽해 보이는 것이 다소 마음이 놓였다. 나는 심부름이라도 하는 양 얼렁대면서, 누님이 앉아 있는 방과 매부될 사람이 있는 방을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장에서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아마 어머니가 늦게 들어오라고 이른 것임이 틀림없었다. 내 어림에도 이런 때는 당연히 장인 될 사람이 집에 있어 인사를 주고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체 이런 저런 격식을 까먹고 사는 우리 집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매사 어머니만 좋으면 되었으니까.
누님 이 안방으로 건너간 것은 손님과 어머니가 애써 어색 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화제로 한동안 시간을 메운 다음, 어머니가 갑자기 큰 소리로 ‘야 덕순아. 여기 물 좀 떠오너라.’ 하고 명령한 뒤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맞선 보는 사람들이 일쑤 써먹는 수법임을. 그리고 속으로 히히히 웃었다. 자기네들이 무슨 신랑 신부라고, 자기네들이 무슨 이팔 청춘이라고 할 짓 다하느냐는 그런 색각이었다.
나는 행여라도 누님이 어머니의 분부를 알아듣지 못했을까 봐 냉큼 누님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러나 솔찬히 우습게도 누님은 이미 자기가 나설 차례를 알고 있었던 듯, 부엌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분을 곱게 바른 누님이 그 날은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었다.
손님이 돌아간 다음 나는 누님의 마음을 떠보았다.
“어때?”
“그냥 그래.”
“마음에 들어?”
“몰라.”
누님의 볼때기가 약간 발그레해졌다고 생각되었다.
“모르면 어떡해. 자기 일인데.”
“내가 처음이니 뭐.”
누님의 이 말에 나는 잠시 섬뜩하였다. 아직 그럴 나이도 아닌데, 짙은 체념으로 물들여진 부님의 언행에 가슴이 실룩실룩 아팠다.
누님의 세 번째 혼사는 저런 저런 할 만큼 빨리 이루어졌다. 혼사랬자 우리 집에서 양쪽의 후줄그레한 손님 몇 사람을 모아 놓고 점심을 때우는 것으로 끝났지만, 맞선 본 지 보름 만에 그런 의식을 치러 낸 것이다.
누님은 그 날 밤으로 보따리 몇 개를 들고 어머니를 따라 시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쩐지 그 꼴이 보기 싫어 칙간 옆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도 누님은 일부러 나를 찾아 내어 가지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잘 있어.”
“……”
“가끔 올께.”
“그래, 잘 가.”
나는 누님 쪽은 쳐다보지두 않고 말끝으로 땅을 후비며 대답했다. 그것으로 누님과의 이별이 끝났다.
누님이 우리 집에 다시 나타난 건 그러나 시집간 지 한 달이 못 되어서였다. 나도 놀랐지만 어머니의 기겁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왜 왔어. 이년아.”
“아냐. 나 아주 온 것 아냐. 댕기러 왔어.”
누님은 아주 온 것이 아니라는 말부터 앞세웠다.
“김 서방은 어떡허고?”
“응 내일 온댔어.”
“아이고, 가슴이야.”
어머니는 말과 함께, 실지로 당신의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누님의 말대로 매부는 다음 날 누님을 쫓아왔다.
그런데, 매부도 누님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부는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잠을 자다가 밤에만 나갔다가 밤을 새우고 돌아오는 수도 있었고, 어떤 날은 하루에도 너댓 번 집을 들락거리는 수도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매부를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내가 비워 준 방에서 오래오래 속닥거리기도 하고, 등사판을 들여놓고 무언가를 부지런히 찍어 내기도 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런 일에 누님이 적극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등사판 미는 일을 거드는가 하면, 매부의 심부름으로 어딘가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한 번은 내가 그런 누님을 붙들고 다그쳤다.
“무슨 일로 그렇게 바빠?”
“너는 몰라도 돼.”
“매부는 뭘 하는 사람이야?”
“너는 몰라도 된다니까.”
“좀 알아야겠어. 나도.”
“얼래. 너같은 꼬맹이가 뭘 안다고.”
“혹시 공산당 아냐? 매부가.”
“얘는 ? 별소리를 다하네.”
“아냐 맞을 거야. 맞지?”
“너한테만 말해 줄께. 이건 비밀이다. 아무한테드 말하면 안 된다. 너 맹세하지?”
“할께. ”
“매부는 독립 운동하는 사람이란다.”
“해방이 되었으니까 독립은 다 된 거나 마찬가친데, 새삼스럽게 독립 운동은 또 뭐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몰라서 그래. 진짜 독립 운동은 지금부터라고.”
우스웠다. 누님의 입에서 독립 운동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다니 우습지 않은가. 그러나 누님희 다음 말을 듣고 나는 웃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너 내가 요즘 무슨 일로 왔다 갔다 하는지 아니? 모르지?”
누님은 큰 자랑을 숨긴 사람처럼 내 코앞으로 입을 바짝 대고 물었다.
“몰라.”
“레포를 전달하는 거야.”
“레포가 뭔데?”
“모를 거다. 말하자면 연락 문서 같은 거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너?”
“너는 몰라. 반동을 때려잡기 위해서야.”
“뭐 반동?”
“그래. 우리 나라는 반동 분자들을 때려잡지 않고는 진짜 독립이 안 되게 되어 있어.”
“그 따위 말들을 어디서 다 배웠어.”
나는 점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누님의 그런 급작스런 변화도 놀라왔거니와, 그 사이 그렇게 달라진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했다.
“느이 매부한테서 배웠지.”
“누님은 이용당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불쑥 나온 말이었다.
“그런 말 마. 그이는 나를 얼마나 위해 주는데. 그이뿐 아니라 동지라는 사람들이 날더러 동무의 활약은 눈부식대.”
“갈수록. 그게 다 누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수작이라고. 그 수단에 넘어가지 말라구. 말을 해 봐. 누님이 공산주의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어?”
“물론 자세히는 모르지.”
“그것 봐.”
“그러나 그이는 이제 남편 아니냐.”
“아무리 남편이라도 그렇지. 나쁜 건 나쁜 거야. 그렇게 누님을 위한다면 왜 친정살이를 시켜. 집에 데려다 놓고 잘 먹이고 잘 입힐 일이지.”
“그건 네가 몰라서 그래. 독립 운동을 하려면 남의 눈을 피해서 거처를 옮겨다녀야 하거든. 그러니까 그이가 우리 집에 와 있는 것은 임시야 임시.”
“아뭏든 잘 알아서 해. 나도 선생님한테 들었어.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것은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것과 다름없대.”
“모르는 소리 말아라: 신탁 통치는 찬성해야 돼.”
“식탁 통치가 뭔지나 알고 하는 소리야?”
“그야…….”
누님은 어물거렸다.
내 충고에도 불구하고 누님은 매부가 하는 일을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면서 거들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아주 못마땅하게 한 것은 밤중에 몰래 나가 벽보를 붙이고 오는 일이었다. 물론 신탁 통치를 찬성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매부네 패거리들이 쓰다 버린 비라나 벽보를 주워 읽었기 때문에, 그 내용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한문이 많아 잘은 몰라도, 소·미 공동 위원회는 조속히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분자들을 처단하는 방안을 강구하라든가, 백색 테러를 분쇄하라든가 하는 따위의 문귀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누님이 밤에 쥐새끼처럼 벽보를 붙이고 오는 일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좌익들이 몇이는 신탁 통치 지지 데모에 가담하고도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불행히도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나, 그 광경을 본 친구들이 틀림없이 보았노라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머니도 이 일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벽보를 붙이거나 데모에 뛰어드는 것은 천만 아니지만, 벽보를 붙이는 데 필요한 풀 같은 것을 쑤어 주는데 그다지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보다못해 어머니에게도 대들었다.
“매부 자기 집으로 가라고 그래.”
“너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매부는 공산당이라구. ”
“나는 그런 것 모른다. 제 계집 하나 지극히 위해 주고 사람 대접 해 주니까 그게 고마울 뿐이지.”
“그래서 풀도 쑤어 주고 그러는 거야?”
“그렇단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학식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을 가치고 내가 밤 놔라 배 놔라 할 처지가 못 된다.”
요컨대 어머니는 매부가 그전 사람들과는 달리, 누님을 제대로 위해 주고 대접을 하고 있다는 증거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가장자리로만 내몰려서 어디 가나 사람 구실을 못 한다고 믿고 있던 누님이 매부를 만나 마침내 제 몫을 하고 있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불안은 여전하였고 이런 불안은 어느 날 불행히도 적중하고 말았다.
누님이 경찰에게 붙잡힌 것이었다. 매부와 그 패거리들이 신탁 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의 사무실을 습격한 사건이 벌어졌었는데, 누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마 뒤에서 망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용케도 체포를 면한 매부는, 그러나 그 뒤부터 어디로 갔는지 우리 집에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내 짐작대로 누님은 완전히 이용만 당하고 만 것이다.
얼마 만에 풀려 나온 누님은 다시 외돌토리가 되었고 사오 년을 그렇게 살다가 신장병으로 죽었다. 누님이 죽기 일 년 전인가 나는 물은 일이 있었다.
“누나, 그 때는 왜 그렇게 열을 내었어?”
“내가 아니. 남편 안 놓칠라고 멋도 모르고 그랬는가?”
누님은 의문부를 보태서 대답했다.
나는 누님의 이 말을 듣고, 해방 직후 어떤 사람들의 행위 중에는 누님의 이런 말로 유추되는 일도 그다지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상이라는 걸 포함해서 말이다.
이래 저래 나는 그 해 겨울을 생각하면 신열이 날 만큼 우울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그런 누님을 가짐으로 해서 내가 정서적으로 올망졸망하게 커 오고, 지금 엉뚱하게도 그런 슬픈 기억들을 감미롭게 다독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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