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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기조선족중견작가ㅡ김재국작품대계
한국은 없다(연재60)ㅡ잊지못할사람들
2. 대륙을 안아준 넓은품
한국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한지 석달이 다 되여가던 어느날, 중국 연변≪천지≫잡지사 부주간이며 서예가인 김호근선생님이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던 길에 우리 대학원에 들렸다. 그때 그는 서울역 전시관에서 한글서예전을 한창 펼치고있던 중이였다.그날 그는 함께 온 한국분 한사람을 나와 두 중국교포 녀학생에게 소개했는데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소개받은 한국사람이라 우리는 별로 반가와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례의적인 인사만을 깍듯이 올렸을 뿐이였다. 하나 담담하게 인사하는 우리와는 달리 그분은 ≪중국에서 우리 한국으로 류학왔단말이예요? 아하.≫하며 몹시 놀라는 기색을 지어보였고 ≪정말 생각밖인데…≫하며 혼자말처럼 되뇌이기도 햇다.
≪신세묵이라고 합니다. 일후 련락드리겠습니다.≫
헤여질 때 그는 우리에게 명함을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련락드리겠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누구에게나 책임성없이 마구 써대는, 어쩌면 이제는 약속하는 뜻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인사말이 되여버린 극히 평범한 말을 그날 그도 했다. 하나 신세묵사장님의 그 말씀은 인사말이 아니라 언약이였다. 이튿날 그에게서 정말로 전화련락이 왔다. 전화에서 그는 고국을오 류학을 온 중국교포를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면서 이런 일이 신문의 좋은 보도감이기도 하니 ≪경인일보≫의 취재를 받는것이 어떠냐는 제의를 해왔다.
중국교포들이 한국에 와 어렵게 류학하고잇다는것을 알면 많은 한국사람들이 여러모로 도와줄수도 잇다는 호의까지 약간 내비치였다. 생각해보겠습니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김영옥, 최미희 두 녀학생과 함께 그 일을 상의했다. 상의끝에 우리는 결국 기자의 취재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한국인의 동정을 받기 위해 신문에까지 난다는것을 우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이튿날 내가 우리의 뜻을 전했더니 신사장님은 ≪그래요? 그래도 취재를 받으면 좋겠는데…≫하며 아쉽다는 어조로 말하면서 ≪정 그렇다면 할수 없지. 그럼 후에 또 련락드리겠습니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년세가 60세를 바라보는 분이였음에도 신사장님은 말끝마다 ≪습니다≫를 덧붙였고 학생신분인 나를 ≪김선생≫이라고 늘 높여주었다. 한번의 만남과 두번의 전화련락을 통해 나는 신사장님에게 일반인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오후, 신사장님은 부러 우리를 만나러 대학원으로 찾아왔다. 그날 신사장님은 말씀보다도 우리들이 살고잇는 기숙사방을 더 열심히 빗질해보았다. 이말저말 나누는중 이따금 묻는 말씀이라면 무엇무엇 갖추고있는가? 리포트는 어떤 형식으로 써내고 식사는 어떻게 하며 평시 용돈은 어떤 식으로 마련하는가 하는 어버이와 같은 자상한 물음이였다.
생활의 어려움과 가난을 덮어감추려고 애썼으나 우리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있습니다.≫는 대답보다 ≪없습니다.≫는 대답이 더 많이 흘러나갔다. 없는것이 현실이였고 사실이였기때문이다. 신사장님은 다 같은 한민족인데 한국학생의 침대와 중국교포의 침대, 한국학생의 생활용품과 중국교포의 생활용품을 비교해보니 가슴아프다면서 깊은 한숨까지 내쉬였다. 조만간에 모든것이 갖추어질테니까 뭐 그런것들때문에 상심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씀도 하셨다.
저녁이 되자 신사장님은 우리를 자가용차에 태우고 대학원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가든으로 가서 불고기를 사주셨다. 식사를 하면서 그는 중국교포들이 가난하기는 해도 우리 한국인이 잃은지 오랜 전통을 그대로 보유하고있더라면서 중국관광을 갔다가 교포들의 뜨거운 환대를 받은일, 그들과 가깝게 친한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셨다. 신사장님의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차츰 우리의 가슴을 열어젖히기 시작햇다. 우리는 한국으로 류학오게 된 경위와 한국에 와서 느꼇던바를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신사장님에게 말햇다. 신사장님은 우리의 글너 성실에 흡족한 기색을 지어보였다. 갈라질 때 신사장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그냥 친합시다. 난 늙기는 했지만 젊은이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합니다. 특히 중국교포 젊은이들과 말입니다. 내가 뭐 좀 어쩐다구 미안해할것 하나도 없습니다. 교포 젊은이들과 친한 대가를 지불하는것이니 세분은 그냥 저와 가까이 지내면 됩니다.≫
수원으로 가기전, 신사장님은 우리 셋에게 편지봉투 하나씩 안겨주었다. 차가 떠난 뒤 뒤져보니 봉투안에 한국돈 10만원씩 각각 들어있었다. 두번밖에 만난적이 없는 낯선(?)한국인에게서 문득 돈 10만원을 받고나니 우리는 즐거운 생각보다도 경계심부터 앞섰다.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 우리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신사장님은 이렇듯 가깝게 접근해오는것일가?과연 그이의 말씀대로 젊은이가 좋고 중국교포가 좋아서 이러는것일가?
두 녀학생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날 기숙사로 ㄷ로아와 이런 어이없는 생각까지 햇다. 혹시 신사장님이 진짜로 친하고싶은 사람은 내가 아니고 두 녀학생이 아닐가? 전에 나와 알고지내는 사람중에 녀자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정도 있엇기에 나는 더욱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말로는 나를 만나러 온다고 해놓고는 정작 와서는 중국녀학생에 대한 관심만 잔뜩 보여주었고 간혹 중국녀학생을 데리고 식사라도 하게 되는 때면 너 김재국 내가 언제 알았더냐 싶게 녀학생들에게 치근거렸다. 그리고 그 한번의 만남을 미끼로 이튿날부터 녀학생들에게 전화공세를 발동하기도 했다. 공부하러 온 녀학생들을 여느 술집 아가씨를 다루듯하는 그들의 교야없는 행위때문에 나는 언제인가 어느 녀학생의 오해까지 산적이 있었다.
하나 마음이 깨끗하기로 성자와도 같은 신사장님을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곡해하는 내자신이 외려 더 음험하고 징글스러운 존재였다. 대한민국에 녀자를 생각하지 않는 남자가 잇다면 선뜻 신사장님이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그이는 두 교포녀학생과 나의 앞에서 속된 말이나 저급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앞에 나타나 민족, 국가, 교포를 론하는 그이는 언제나 천사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불쌍한 자식때문에 항시 눈시울을 붉히는 자애로운 어버이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신사장님과 함께 앉아있을 때에는 우리는 교포가 아니였다. 당당한 대한민국의 일원이였고 행복한 대학원생이였다. 어렵게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에 혹 상처라도 입을가봐 그이는 언제나 중국교포가 된다고 햇고 우리가 된다고 했다.
≪이제 두고보세요. 멀지 않아 장래에 영옥씨, 계화씨, 김선생 모두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살 날이 올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멀게 느껴져도 그런 날이 금방 옵니다. 그때에 가서 혹 이 신세묵이 찾아가면 나 몰라요 하지 마세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이 어린 영옥씨와 계화씨는 너무도 행복해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물론 나도 례외는 아니였다. 신사장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웃음을 주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꿈과 환상을 심어주엇다. 그이는 두주일에 한번 혹은 한달에 한번씩 꼭꼭 우리를 찾아보군 했다. 일이 바빠 오래동안 오시지 못할 때면 전화로 우리의 정황을 묻기도 햇다.
그해 가을 신사장님은 우리를 수원으로 청해서 삼성전자를 견학시켰고 저녁에 돌아올 때에는 매 사람에게 각각 값 비싼 옷 한벌과 시계를 선물하셨다. 내 나름대로 값을 매겨보니 그날 신사장님께서 우리를 위해 쓴 돈이 150만원도 넘어되는것같았다. 큰 상점에 가서 우리의 몸에 맞는 옷들을 고를 때 사장님인듯한 분이 다가와서 웬 사람들에게 옷까지 사주느냐고 의아한 기색을 짓고 물어왔으나 신사장님은 그럴 일이 있다고 얼버무리기만 했다.
≪중국에서 온 교포학생들이 어렵게 생활하는것이 하도 보기가 안돼서 옷 한벌씩 사주는거예요.≫
그이는 그날 이런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였음에도 신사장님은 우리가 교포라는 말을 끝까지 입밖에 내지 않았다. 처음으로 한국의 새옷을 입고 거울앞에 마주선 우리를 보고 신사장님은 흡족한 미소까지 지으시며 멋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두 녀학생을 보니 정말 그녀들은 대한민국의 미녀들 못지 않게 예뻐보였다. 그날 신사장님은 우리에게 옷을 사주는 리유를 이런 식으로 간단히 설명했다.
≪절기가 바뀌니 옷도 계절에 맞추어 갈아입어야 될게 아닙니까?≫
그인 자신이 우리르 위해 하시는 모든 일들을 너무나 평범하게 그리고 너무나 응당하게 생각하시는듯햇다. 하나 그이가 평범하게, 응당하게 생각할수록 그이가 우리에게 베푸는 사랑이 백배, 천배로 확대되엿다. 세상에서 공짜란 없다고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하나 신사장님은 세상에 공짜도 있다는것을 자신의 행동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이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었다. 가깝게 친하자는것, 이것이 조건이라면 조건이겠다.
하나 가난한 중국교포와 친해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친하고 싶어해야 할 사람은 우리지 신사장님이 아니였다. 가을옷 한벌씩 사주고 시계까지 사주고도 무엇인가 못다한것이 있기라도 하듯 미안해하던 신사장님의 그 착한 마음을 중국식 자대로는 그 길이를 잴 방법이 없다. 그날 신사장님께서 직접 운전하는 자가용차에 앉아 대학원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저마다 숭엄해졌다.
신사장님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누구도 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하고있었다.
≪감사합니다.≫혹은 ≪영원히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들이 그날에는 너무나 힘이 없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보다 백배, 천배, 더 힘이 있는 말을 골랐으나 그런 한국말을 대한민국 교수님들은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으셨다.
같은 남자인데다가 나이도 두 녀학생에 비해 많고 해서 신사장님은 두 녀학생에 비해 나와 이야기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았다. 언제인가 신사장님과 함께 앉아 식사를 하면서 이 말 저말 하다가 나는 우리 대학원에 까자흐스탄과 우즈베크스탄에서 온 류학생들도 있다는 말을 했다. 까자흐스탄에서 온 유 콘스탄찐은 나와 한기숙사에 들고잇엇고 우즈베크스탄에서 온 안젤라씨는 영옥씨와 함께 한방을 쓰고있었다.
≪아하! 그렇다면 그들도 생활하기가 퍽 어려울텐데…≫
신사장님은 크게 놀라는 기색을 지어보이며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까자흐스탄에서 온 유 콘스탄찐과 우즈베크스탄에서 온 안젤라씨는 생활형편이 우리보다 우월하지 않았다. 본국에서의 생활이 우리보다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국에서의 생활은 되려 우리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였다. 중국과 한국이 다 같은 한문화권이여서 중국학생들은 한국생활에 쉽게 적응하고 아르바이트도 그런대로 잘 찾아하는데 까자흐스탄과우즈베크스탄에서 온 그들은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고 아르바이트도 쉽게 찾지 못햇다.
한국이 중국어는 그런대로 중시하나 로씨야어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기때문이다. 하나 그날 나는 그 두 학생이 어렵게 생활하고잇다는 말을 감히 신사장님에게 할수 없었다. 우리때문에 이미 상당한 대가를 치른 그이에게 더 부담을 주고싶지 않았기때문이였다. 하나 신사장님은 그들의 생활ㅇ 대해 짐작하고 있기라도 하듯 단호히 말했다.
≪래일 오후 그 두 학생을 우리 수원으로 보내시오.≫
수원에 청해서 어찌하겠다는것인지에 대해서 그이는 말하지 않았다. 하나 나는 대충 짐작할수 있었다. 그 이튿날 유 콘스탄찐의 입이 원래 큰데다가 그날은 평시보다 두배정도 더 커보였다. 유 콘스탄찐의 오른손에 큼직한 비닐가방이 들려있었다. 나의 앞에서 그 비닐가방속에 들어잇는 물건을 꺼내보이는 유 콘스탄찐이 리해할수 없다는듯 말햇다.
≪세상에 어찌 이렇듯 좋은 분이 다 있단말인가!≫
그날 신사장님은 유 콘스탄찐과 안젤라씨에게 겨울옷 각각 한벌과 질좋은 구두 한컬레, 그리고 멋진 시계를 선물했다. 살아가는데 모두 필요한 물건이였으나 사회주의권에서 온 우리들에게는 그야말로 너무나 사치스러운 물건이여서 그대로 잘 보관해두었다가 본국으로 갖고가고싶은 욕심까지 들었다. 사실 신사장님께서 나에게 사준 양복을 나는 한국에서 거의 입지 않았다. 시계도 그대로 보관했다가 중국으로 갖고 왔다.
생활에 찌들어 고민하던 유 콘스탄찐은 신사장님을 만나고 난 뒤 마치 새로운 서광을 맞기라도 한듯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그날 저녁 신사장님께ㅐ서 사준 시계, 구두, 겨울옷을 전부 다 몸에 걸치고 마치 국제신사라도 된듯 쉼없이 방안을 거닐면서 ≪내가 어때? 멋있지?≫하고 몇번이나 나에게 물어왔다.
그날 밤 우리는 모두 아이처럼 흥분했다. 우리는 밤 깊도록 이야기하면서 장차 신사장님의 은혜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것인가에 대해서 의논했다. 중국의 산삼이나 로씨야의 보드카로써는 도저히 보답이 안되는 신사장님의 은혜때문에 우리는 나중에 고민하기까지 했다.
≪김선생, 저 , 말이야. 한국학생들은 거의다 컴퓨터가 있는데 교포학생들이 컴퓨터가 없는데 참 보기 안됐더라니까.≫
언제부터인가 신사장님은 나에게 자주 컴퓨터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햇다. 한국사람들이면 다 리해하겠지만 한국에서 대학원공부를 하자면 컴퓨터를 모르면 안된다. 우리 대학원만 보더라도 하루가 멀다 하게 교수님에게 바쳐야 하는 리포트를 타자해서 내지 않고 중국처럼 볼펜으로 써내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다. 나같은 컴맹도 울며 겨자먹기로 대학원에 입학한 첫날부터 컴퓨터를 배워야 했다. 처음에는 대학원에서 공동으로 쓰는 컴퓨터를 쓰다가 후에 한춘섭선생님께서 집에서 쓰지 않는 286컴퓨터를 줘서 그것으로 내내 글을 써왔다.
한국에 와서 가장 욕심이 나는 물건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 486정도의 컴퓨터를 갖는거이라고 말했을것이다. 하나 486정도의 컴퓨터를 갖고싶은 마음을 신사장님에게 내보여서는 안되는게 또한 나의 립장이였다. 나는 언제나 신사장님께서 컴퓨터에 대한 말을 꺼낼 때마다 한국학생들도 컴퓨터가 없는 학생이 있더라는 말을 했고 교학실에 공동으로 쓰는 컴퓨터가 있어 리포트를 쓰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말을 했다.
≪한국에 와서 다른것은 몰라도 컴퓨터는 꼭 배워가야 합니다. 중국이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지만 조만간에 한국처럼 집집이 보급될것입니다. 김선생같이 작가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더욱 잘 배워두어야 합니다.≫
내가 컴큐터에대한 화제를 다른 화제로 바꾸어보려 할수록 신사장님은 더욱 컴퓨터에 대한 말씀을 많이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사장님께서 나더러 수원으로 왔다 가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물었으나 그저 무작정 왔다가라는 말씀이였다.
내가 신사장님의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사무실 한켠에 486컴퓨텨가 보라는듯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신사장님은 그날 나에게 486컴퓨터의 성능과 다루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상세히 가릋주셨다. 그다음 삼보 타자기까지 해서 나에게 컴퓨터를 주셨다. 그날 그 아름찬 컴퓨터를 받으면서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나에게 286컴퓨터가 있으니 필요없다고 햇고 컴퓨터가 없는 녀학생들을 우선 주라고 했다.
≪김선생님이 갖고있는 286컴퓨터가 중국으로 갖고 가기에는 좀 그렇더군요. 이 컴퓨터를 한국에 있는 동안 잘 익혀두셨다가 귀국할 때 그냥 갖고 가세요. 작가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되는 무기입니다.≫
신사장님은 그날 사양하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했따. 그다음 다른 녀학생들의 컴퓨터도 조만간에 해결할것이라는 뜻도 내비치였다.
나는 신사장님께서 나에게 선물한 그 컴퓨터로 지금 이 글을 쓰고있다. 한국에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말이다. 하나 내가 이 컴퓨터로 ≪한국은 없다≫를 쓰고있으니 나처럼 배은망덕한 인간도 이 세상에 많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신사장님께서 나의 마음에 인각시킨 한국은 있을뿐만아니라 영원히 빛나기도 할것이다.
신사장님의 이런 은혜에 어떻게 보답햇으면 좋을지 몰라 고민하고있다가 나는 그 일을 중국에 있는 안해에게 편지로 알렸다. 안해가 큰 충격을 받고 금방 신사장님앞으로 만장같은 편지와 함께 엽차, 실크로 만든 탁상보를 선물로 보내왔다. 신사장님이 나를 위해 치른 대가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 없는 선물이였다.
한데 그 일이 있고난 한달후 중국에 있는 안해에게서 또 놀라운 편지가 날아왔다. 수원에 계시는 신사장님께서 우리 집 앞으로 딸아이 학용품과 녀자화장품, 옷 해서 두박스나 보냈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안해의 편지를 받던 즉시 신사장님에게 전화를 했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도 ≪이럴수가 있습니까?≫는, 조금 억울하고 너무하다는 어조로 말이다.
≪남편과 떨어져있는 부인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중국에 계시는 부인이 김선생을 더욱 믿고 우러를게 아닙니까. 녀자들에게는 이런 힘이 필요되는겁니다.≫
그러는 신사장님에게 고맙다는 말외에 또 무슨 말을 더한단 말인가! 나는 그날 어처구니 없게 이런 생각까지 했다. ≪나에게 신사장님의 은혜에 보답할 힘이 지금, 진정으로 그이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이 혹시 그이와 멀어지는 방법이 아닐가?≫하고.
그외에도 신사장님은 나에게, 다른 교포학생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지금 컴퓨터로 이 글을 써내려가는 나의 눈앞에는 온통 신사장님의 그 인자한 모습만이 가득 차있다. 아마 이 밤 날을 새우면서 신사장님의 이야기를 쓴다 해도 못다 쓰리라. 우리 언어에 말을 줄이는 방법이 무엇이 있던가. 역시 그 한마디 말.
≪고맙습니다! 신사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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