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0 나해 연중29주일
욥기 38:1-7, 34-41 / 히브 5:1-10 / 마르 10:35-45
욥기를 통해 고통을 사색하다
몇 년 전 젊은이들 사이에서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이 뭔 지 몰랐는데, 알고 보니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으로, 취직이 어려운 문과생들이 자조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것을 알고서 철학과 신학 그리고 역사학을 전공한 문과생 출신인 저로서 그런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세태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대학교육의 중추학문은 문학, 역사, 철학이었습니다. 이것은 학위를 표시하는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B.A.라고 표시하는 학사학위는 Bachelor of Arts, 즉 문학사를 뜻하고, M.A.라고 표시하는 석사학위인 Master of Arts는 문학석사라는 의미로, 그리고 박사학위인 Ph.D.는 Philosophiæ Doctor라는 뜻인데 이것은 전통적으로 모든 인문학의 최고봉을 철학으로 여기는 서구학문전통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문학을 중시 여기는 것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도 그러했습니다. 특별히 동아시아에서는 문학, 역사, 철학(사상)을 ‘문사철(文史哲)’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을 관찰하고, 철학은 그렇게 관찰한 삶을 성찰하며, 문학은 성찰한 것을 언어를 통해 표현해야 한다는 통합된 정신이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얼마전 한국인으로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으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韓江)작가는 문사철 정신을 잘 구현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송합니다”가 유행하는 각박한 현세태에 이 소식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인간에 대한 삶과 그에 대한 사색 그리고 이를 우리들 마음에 호소하는 언어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의 문제를 다시한번 성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현실, 특별히 고통에 대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성서에서 이 고통에 대한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책이 우리가 10월 한달 동안 전례에서 듣고 있는 욥기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욥기를 시편, 지혜서, 잠언서, 전도서 등과 함께 ‘성문서(Sacred Writing)’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거룩한 문학작품입니다.
시와 산문 등 여러 문학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욥기에서 주인공 욥은 성공과 번영을 누리던 사람이었으나 한순간에 철저히 나락으로 떨어져 부와 힘, 그리고 가족을 모두 잃고 맙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 자신마저 병으로 고통스럽게 됩니다. 욥의 아내가 이러한 불행을 주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자, 욥은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요? (욥 2:10)”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의연하게 지킵니다. 한편 욥의 불행을 위로하기 위해 온 친구들은 그의 몰골을 보고 7일 동안 곁에 앉아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욥의 신세 한탄을 듣고서 그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부정한 행위를 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라는 인과응보적 사고에 젖은 그들은 욥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심지어 욥이 의식하지 못한 죄와 자녀들이 지은 죄라도 고백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에 자신의 결백을 믿어 주지 않는 친구들에 대하여 욥은 혼란스러워하고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분노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마치 법정소송을 연상케 하는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친구들과 욥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이야기는 점차 절정으로 치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 간의 논쟁은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엘리후라는 젊은이가 등장하면서 작금의 사태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종종 하느님은 의인을 시험하시지만 동시에 언제나 그들을 도울 방편을 마련하신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욥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제 욥기 38장부터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욥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 치고는 생뚱맞은 느낌을 줍니다. 욥의 삶,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불의한 일과 관련된 질문을 다루지 않고 자연과 피조세계가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잘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욥에 대해서 질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충고했던 세 친구들을 향하여 그들이 욥처럼 올바르지 않았다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욥에게 번제물을 바치라고 명하십니다. 마침내 욥은 회복하고, 새로운 자녀들이 태어나고, 재산은 전보다 더 불어났으며, 욥은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나는 행복한 결말로 이야기가 끝나게 됩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의 많은 책들 중 가장 난해한 책 중 하나라고 불리는 욥기를 통해 저는 여러분과 함께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고통의 불분명함입니다. 만일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이 왜 일어났으며, 언제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것은 ‘정해진’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이지 원인과 목적,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다시 말해 미래에 대한 분명한 앎에 바탕을 둔 인내는 믿음이나 희망이라기 보다는 참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의 문제제기는 무고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목적을 알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러기에 절망에 사로잡힌 채 울부짖는 욥의 말, 그의 분노 어린 말들은 욥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함하여 성서 전체 안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 이들의 것일지도 모릅니다.
둘째, 신의 부재(不在) 속에서 신을 감지하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입니다. 욥기는 신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일 때, 세계가 윤리적으로 불합리해 보일 때, 특히 정의가 실추되고 의미가 부정되어 상실과 고통을 겪을 때 오히려 하느님의 존재를 가장 예리하게 감지할 수 있다는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깨달음을 기록한 책입니다. 욥기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저는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엘리위젤(Elie Wiesel 1928-2016)작가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유대인인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족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소용소에 갇혔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를 비롯하여 가족, 친지, 친구, 이웃들이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그는 자신과 가족들이 믿었던 분, 즉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하였습니다. 1958년 《흑야(Night)》라는 소설은 칠흑 같은 어둔 밤으로 상징되는 수용소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느님께 절규한 그의 내면의 소리를 기록한 책입니다. 마치 고통속에 울부짖은 욥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1986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에서 엘리위젤은 욥의 새로운 면모를 언급하며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욥을 기억합시다. 그는 모든 것을, 자녀들, 친구들, 재산을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과의 논쟁에서도 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작할 힘을, 삶을 재건할 힘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자신이 속한 세계가 불완전할지라도, 욥은 하느님이 그에게 일임한 이 세계를 거부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말한 욥이 하느님과의 논쟁에서 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인생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동족들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겪고 하느님과 끊임없이 논쟁했던 그는 어쩌면 그 어둠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드러내심(Epiphany)라는 신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것이 아닐까요? 마치 욥기에서 욥이 하느님이 보여주신 대자연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느꼈듯이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한 욥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한 것은 하느님의 잘못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친구들과 논쟁으로 오히려 차갑고 냉소적인 된 욥은 하느님의 신비를 접하고 다시 하느님과 연결되어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10월 한달 우리는 욥기를 읽으면서 욥이 소리치는 고통의 절규가 우리의 절규가 되기도 하고, 욥이 느끼는 하느님이 안계시는 것만 같은 고통이 때론 우리가 겪고 있는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은 심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비록 그런 깊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헤매더라도 어둠을 능가하는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를 감싸고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신비를 계시하신 분이십니다. 이 전례를 통해 그런 하느님의 신비를 영접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시고, 함께 하시고, 구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