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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 채용 공고나 강단에서 최근 많이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를 고르자면 “동역자”일 것입니다.
신학교의 사역 게시판은 빠르면 10월 중순부터, 보통은 11월 무렵부터 교역자 모집 공고로 분주해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좋은 동역자를 모신다는 교역자 모집 공고는 꾸준히 올라옵니다.
얼마 전 한 목회자와 대화를 나누다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분이 생각하는 사역자 청빙 기준, 자신이 생각하는 “동역자”의 정의는 담임목사를 돕고 보필하는 비서 혹은 기능적 조력자라고요. 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한국 교회 강단과 채용 공고에서 흔히 그리고 거룩하게 쓰이는 “동역자”라는 단어의 민낯을 마주한 순간이었습니다.
“동역자”라는 단어의 헬라어 쉬네르고스(συνεργός)는 ‘함께’와 ‘일하다’의 합성어입니다. 사전은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함께 일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 “동역자”라는 단어를 사도 바울도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행 13:2-3)와 실라(행 15:40)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고, 그의 서신에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롬 16:3), 디도(고후 8:23), 디모데(살전 3:2), 에바브로디도(빌 2:25), 빌레몬(몬 1:1), 그리고 마가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몬 1:24) 등을 “동역자”로 불렀습니다. 신뢰할 만한 성경 텍스트 통계에 따르면,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13회 등장합니다. 바울 역시 이 단어를 아무에게나 남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함께 사역하는 이들을 향해 깊은 기쁨을 담아 신중하게 아껴서 사용했습니다.
성경에서 “동역자”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먼저는 “주님의 복음을 위해 함께 애쓰는 자"(골 4:11), 두 번째는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요삼 1:8), 세 번째로는 “하나님의 일꾼"(살전 3:2)입니다(성경문화배경 사전, '동역자' 참고). 이 세 구절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초점은 사람에게 맞추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복음, 진리,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중심 단어가 존재합니다. NICNT 주석 또한 이 점을 서술합니다. 일례로 고린도전서 3:5-9의 헬라어 본문은 이 단어의 강조점이 모두 하나님에게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체 문단이 모두 ‘하나님 아래서’ 동역자로서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강조점은 하나님의 소유권에 있으며 결코 하나님과 함께 고린도에서 일했던 바울과 아볼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야기는 현재 한국 교회에도 경종을 울립니다. NICNT 주석은 자신이 교회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목회자, 당회, 교구, 위원회, 심지어 매우 헌신적인 성도들조차 빈번히 교회를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태를 매섭게 비판합니다. 물론 바울은 교회를 귀히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교회 리더십을 포기하거나 모두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익히 잘 알고 강단에서 힘 있게 선포하듯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의 리더십을 본받아 사역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은 성경이 말하는 동역의 의미와 적잖이 동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기는커녕, 사역자를 수직적인 통제 아래 두고 소모하는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관련 조사 결과는 이 현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5년 발표한 “신대원생 생활과 사역 인식” 조사결과는 이 현실을 보여 줍니다. 조사한 신대원생의 68퍼센트가 자신의 목회자 소명에 대해 후회한 적이 있다고 대답하며, 이유에 대해 순서대로 ‘많은 사역과 업무량'(23%), ‘담임목사(선배목사)의 권위적인 태도'(22%), ‘경제적 어려움'(22%)을 꼽았습니다. 또한 ‘담임목사의 인격과 영성’이 사역지 선택 기준 1순위로 조사되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뽑을 만한 괜찮은 교역자가 없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사역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엄청난 업무량과 소모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수직적이고 강압적인 구조는 많은 부교역자들의 이탈 원인이 됩니다.
바울이 “동역자”라 부른 이들은 결코 그의 사적인 필요를 채우는 수동적인 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전문성(장막업과 같은 전문적인 직업, 사회적인 영향력 등)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등하게 일한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듯 동역의 중심은 한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비전을 수동적으로 돕는 보조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각자의 은사로 수평적으로 건강하게 연대하는 것이 진짜 성경적인 동역의 의미입니다.
성경적으로 건강한 목회철학을 기준으로 삼되, 누군가의 권위 안에 사역자들을 가두려는 사유화된 리더십을 버리고, 사역자 각각의 고유한 은사를 존중하며 보호하는 건강한 시스템을 구축할 때 ‘괜찮은 동역자’들이 한국 교회의 무너진 신뢰와 사역의 토대를 다시 세워 나갈 것입니다.
“괜찮은 교역자”를 원하는 교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찾고 계시는 사람이 교회의 빈틈을 메우고 누군가의 목회를 빛내 줄 ‘기능적 보조자’입니까? 아니면 각자의 은사와 전문성을 가지고 새로운 사역의 길을 함께 열어 갈 ‘진정한 동역자’입니까? 목사님, 정말 동역자를 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