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집회서의 말씀 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입니다.
그런데 성가정이란 대체 어떤 가정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성가정’이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요, ‘말씀’이 성취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말씀이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이 주인 되게 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말씀의 성취를 전해줍니다.
하나는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마태 2,25)라는 말씀의 성취요, 또 하나는 “그는 나자렛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2,23)라는 말씀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의 성취 안에는 모진 고통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곧 이 가정은 이집트에서 불려나오기까지, 또 나자렛 사람으로 불리기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쫓겨다녀야 했고, 변방의 거류민으로 살아야 했고, 숨어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고통이 없는 가정이 ‘성가정’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아니 어쩌면 ‘성가정’에는 고통이 필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성취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란 고통이 없고 편안하고 안정된 단란한 가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자리가 되는 가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이루는 사람이기에 앞서,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는 장소요 공간’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활동하고 성취되는 모습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무엇보다도 신비로운 것은 ‘말씀이신 분’께서 말을 하지도 못하는 아기 모습으로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면서도 우리를 이끄십니다.
참으로 묘한 신비입니다.
‘말씀이시면서 말을 못하는’ 이 아기는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고통으로, 때로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때로는 보이지도 않은 빈자리가 되어 우리네 가정, 우리네 공동체를 이끄십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우리 가정과 공동체의 주인이면서도 우리 모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빈자리’로 계십니다.
마치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빈자리’로 있는 신부처럼, 우리 가정 안에서도 ‘빈자리’로 계시면서 우리 모두를 품으시고 끌어안으십니다.
그러면서도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공동체의 빈자리’, 그곳이 바로 중심임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중심이 아님’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 안에 말씀이 살아있는지 들여다볼 일입니다.
곧 ‘말씀이신 분’이 우리 안에 작고 낮고 무력하게 말 못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살아계심을 볼 일입니다.
‘말씀’은 사랑하는 이 앞에서 항상 작고 낮은 이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교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관상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보다 작고 나약한 예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보다 작고 무력한 예수님을 만났는가?
나를 사랑하기에 언제나 나보다 작은 모습으로 내 앞에 무력하게 낮아져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심지어는 ‘없는 자’, ‘빈지리’가 되어 있는 그분을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마태 2,20)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들은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살아있고 존중되는 말씀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이 항상 중심이요 주인이 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말씀 안에서 서로의 고통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함께 지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는 가정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 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 푸른잎새님 고맙습니다.
아멘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