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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묵상글 ( 성 토마스 사도 축일. - 믿음의 씨름인 의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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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음의 씨름인 의심
제 생각에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의심의 존재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믿음의 존재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 완전한 불신의 존재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의심이란 불신과 다릅니다.
불신이란 믿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의심이란 믿지만 의심한다는 뜻입니다.
반신반의가 바로 의심의 정확한 뜻입니다.
반은 믿고 반은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란 반신반의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반신반의의 존재가 인간이지만 다름이 있다면
불신을 선택하고 불신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기로 하고 믿는 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 사도가 의심의 대명사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믿음을 고백하였으니 의심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간 사람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분명 그는 의심이 불신 쪽으로 쏠렸던 적이 있습니다.
여드레 동안 그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어디에 있었고 왜 다른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제자단을 떠난 제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만이 아니었을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그들처럼 제자단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믿었던 주님이 죽음으로 끝장나자
실망을 넘어 절망하였을 것이고,
주님께 대한 희망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니
더 이상 제자단 가운데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단을 떠났던 그가 여드레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러면 이 여드레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돌아와서 한 말을 보면 아직 믿음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의심하지만 의심이 불신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고
어떻게든지 믿어야겠다고, 적어도
믿음의 불씨를 꺼버리지는 않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불신의 그룹에는 속하지 않고 믿음의 그룹에 속하기로 마음을 바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확고하다면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믿어도 될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기로 마음먹고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단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도 반신반의하기는 마찬가지지만
믿음의 불씨를 끄지 않으려고 서로 의지하며 옹기종기 모여 있었던 것이고,
토마스 사도도 불신 쪽에서 믿음 쪽으로 마음을 바꾸고 돌아온 것뿐입니다.
아직도 의심이 믿음으로 온전히 바뀐 것은 아니었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의심은 믿고 싶은 의심이자 믿기 위한 과정의 의심입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자 의심은
의심을 거치지 않은 믿음보다 더 단단한 믿음으로 바뀝니다.
의심은 야곱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였듯이 믿음의 씨름이기 때문입니다.
씨름이 격렬할수록 믿음은 단련이 되고 단단해지겠지요?
우리도 믿음의 씨름인 의심을 시시하게 하지 말고 대단하게 하면 어떨까요?
토마스 사도의 반만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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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 나타나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토마스는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자리에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라고 말한 그를 환히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엠마오를 가던 제자들이 빵 쪼개는 만찬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본 것처럼, 토마스도 예수님의 옆구리의 상처를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것은 찢어지고 구멍 뚫린 당신 몸의 성찬이었습니다. 토마스는 그때서야 비로소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마침내 고백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그런데 대체, 무엇이 토마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한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토마스는 동료들 중 자신만 주님을 뵙지 못한 것이 마치 자신만이 부활하신 주님을 뵐 자격이 없는 자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료들이 뵌 주님을 자신은 뵙지 못한 슬픔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 뵙기를 더더욱 고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더욱 더 확인하고 싶었고,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실, 그가 보게 된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예수님을 뵌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앞에서 모든 의혹과 자책이 녹아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주님의 끝나지 않은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분의 상처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는 표시임과 동시에,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은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눈에 보이는 상처를 통에,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에게는 사랑의 성찬이 베풀어진 것처럼, 토마스에게는 사랑의 성혈이 베풀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그는 마음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시는 성찬을 통해, “우리의 주님, 우리의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 그분의 사랑을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사실, 보이는 것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히브리서>에서 말씀해주듯이,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그러니 토마스가 본 것(보고 인식한 것)은 상처였지만, 믿은 것은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보지 않고는 믿지 못했지만, 보고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또 보고 보지만,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여깁니다. 마치,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던 히브리인들이 보지 못해서 못 믿었던 것이 아니라, 보고도 목이 뻣뻣해져 하느님을 믿지 안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보고도, 특히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도 여전히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말합니다.
“모든 고뇌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 가까이 계신지를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깁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찢어진 가슴을 열고,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증거 해야 할 것도 역시 주님의 사랑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주님!
당신 옆구리에서 다시 탄생하게 하소서
당신 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받아들여, 옆구리에 간직하고 위로하게 하소서.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끌어안아, 옆구리에 품고 용서하게 하소서.
믿어주고 도와주며, 제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피를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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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주님을 깊이 만나는 체험이 없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전해주면 부러워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나 직접 체험하지 않았으니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토마스라는 사람은 주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깨우러 갈 때 거기에 있었고,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였으며 고별사를 할 때 ‘아버지께 가는 길을 가르쳐 달라’는 말을 한 용맹심과 충성심이 높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20,25)하고 말하였을 때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니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아주 솔직한 답변입니다. 한 편으로 생각하면, 토마스는 예수님의 손과 발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우리를 위한 사랑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라고 말하는 것보다 정직한 토마스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여드레 뒤에 토마스도 같이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는데 특별히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20,20,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힘과 능력에 믿음을 두지 않고, 주님의 사랑에 믿음을 둡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셨는데 그것은 토마스에 대한 특별한 배려입니다. 제자들이 공동으로 받은 은혜에 누락되어 실망할 수 있는 제자의 마음을 풀어주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보지 않고 증언만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한 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토마스 혼자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였다면 혼자만 왕따가 된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버려두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데 장애가 될 요소를 없애주시며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큰 사랑으로 함께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토마스는 감히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도 못하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사랑을 알아챘고 “네 손가락을 여기에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 말씀이 ‘못 자국을 직접 보고, 손가락을 넣어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토마스가 했던 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면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제자는 토마스가 처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으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20,29). 그렇다면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성전과 성경을 통해 전해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있으니 행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믿든, 믿지 않던 구애 받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음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믿고 또 믿어서 행복하기 바랍니다. 거짓으로 믿는 것보다는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편이 훨씬 더 주님 마음에 듭니다. 따라서 정직한 믿음을 더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안타깝게도 이름만 신자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토마스의 훌륭한 점은 형제들의 증언을 의심하면서도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심과 싸울 때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토마스는 공동체에 머물러 있었기에 믿음의 최종적 자리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도전받아야 합니다.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예수회 존포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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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지순례를 가면서 매일 반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침이면 짐을 다 정리해서 버스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버스에 탑승하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권, 스마트폰, 지갑’입니다. 다른 것들은 혹시 깜빡하고 놓고 나와도 되지만 ‘여권, 스마트폰, 지갑’은 반드시 챙겨야 하는 목록입니다. 저녁에 다음 숙소에 도착하면 호텔로비에서 ‘열쇠’를 받게 됩니다. 이때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WiFi’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순례자들은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료 인터넷에 접속하려고 합니다. 가이드는 호텔에서 제공하는 무선인터넷 비밀번호를 알려줍니다. 순례자들은 무선인터넷에 접속한 후에 방으로 들어갑니다. 가족들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중요한 메일을 확인하기도 하고, 낮에 들었던 성지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도 하고, 순례 중에 찍었던 사진을 단체 카톡 방에 올리기도 합니다. 문제는 ‘속도’입니다. 무선인터넷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접속이 되더라도 속도가 느리면 사진을 나누기도 어렵고, 메일을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천천히 하루를 돌아보고 다음 순례를 준비합니다. 느린 속도에 대해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직원에게 확인하기도 하고, 애꿎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탓하기도 합니다.
저도 순례 중에 가능하면 ‘WiFi’에 접속을 합니다. 신문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기사를 점검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그다지 필요 없는 메일이지만 습관적으로 메일을 확인합니다. 순례 중에도 매일 묵상 강론을 나누려고 합니다. 순조롭게 무선인터넷에 접속이 되고 강론을 나누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하지만 어떤 호텔은 ‘WiFi’의 속도가 느리거나 아예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하루를 정리하고, 다음 순례를 준비하면 좋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가 있습니다.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애꿎은 컴퓨터를 탓하기도 합니다. 컴퓨터가 오래 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참에 컴퓨터를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큰 도시에서 ‘WiFi’에 접속하면 컴퓨터는 그동안 자신이 억울했음을 드러내듯이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접속합니다. 저도 아직은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를 보면서 입가에는 웃음이 퍼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10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빠른 속도로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정보를 찾아내고, 메일을 검색하듯이 예수님과 접속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의 얼굴에는 희망과 용기의 꽃이 활짝 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했던 토마사도는 여전히 두려움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동료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도 예수님과 접속하고 싶습니다. 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분처럼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옆구리에 난 상처를 만져보고 싶습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접속한 동료들이 부럽기도 했고, 예수님과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도 있었습니다. 토마사도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마치 컴퓨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WiFi’에 연결되지 못해서 정보를 검색할 수 없었던 것처럼 토마사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예수님과 접속하지 못해서 여전히 근심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내 옆구리를 만져보아라!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보아라!” 예수님과 접속한 토마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토마야!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참으로 복되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든지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를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능력, 재능, 업적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비밀번호로는 예수님과 접속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는 비밀번호가 있으면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골짜기에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접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 나의 믿음은 또 다른 ‘WiFi’가 되어서 다른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토마사도는 그 믿음으로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근심, 걱정, 불평, 불만이 있는 하루였다면 ‘믿음’의 ‘WiFi’를 다시 켜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희망과 기쁨의 하루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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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교회 공동체-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공동체입니다.”-2021.7.21.
2년전부터 제 집무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귀입니다. 갈수록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도 참 많습니다. 하느님이 참 좋은 선물이 공동체요 공동체를 통해 받는 축복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배우는 겸손입니다. 공동체 형제 하나하나도 ‘신의 한 수’와 같은 선물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는 제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선물이란 깨달음과 동시에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와 찬미입니다. 하루하루가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선물중의 선물이 공동체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활짝 열려 있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부단히 배우면서 참나를 형성해 갑니다. 공동체내에서 상처도 받지만 공동체로부터 받는 위로와 치유, 축복의 구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제 마침 구입했던 개신교 저명한 목사인 이정배 교수의 “스승의 손사래”라는 책을 독료했습니다. 신학 50년 여정에서 만난 선생님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으로 얼마나 많은 스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복된 존재인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훌륭한 스승들과의 만남의 부족을 간접적으로 끊임없는 독서를 통해 스승들을 만남으로 보완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고의 스승은 주 예수님이요 여기 공동체입니다.
오늘은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도 참 다양했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인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순교했다는 교회 전승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토마스가 있기에 얼마나 역동적인 주님의 제자 교회 공동체인지 깨닫습니다. 얼마나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토마스인지요!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일주전 전례모임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의 고백에 당시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의 답변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의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얼마나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인지, 바로 이것이 토마스의 장점입니다. 토마스 덕분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납니다.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서의 공동전례 모임시 나타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벽은 변하여 문이 된 기적입니다. 새삼 공동체의 중심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깨닫게 하는 장면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은 평화의 문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평화입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다해도 평화가 없다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지요. 아무도 앗아갈 수 없고 빼앗아 올 수도 없고 거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주님께로부터 받는 평화의 선물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평화를 찾아 수도원을 방문하는 이들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도 주님의 평화뿐입니다.
이어지는 토마스의 고백과 주님의 답변을 통해 제자들은 크게 배우니 그대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거룩한 미사 공동전례에 참석할 때 마다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토마스처럼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 귀한 고백을 배우겠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하며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 바랍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평생 지니고 살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참으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참으로 이런 믿음과 더불어 평화의 축복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날마다 이런 분위기에서 쓰는 강론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공동체를 통해 살아 활동하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지체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체가 그대로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체험입니다. 공동체 하나하나의 형제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님 얼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주시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며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인 교회 공동체라니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혈연을 뛰어넘어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회 성원들이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보다 고맙고 영예로운 축복도 없습니다. 광야 세상에 오아시스와 같은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멋진 고백을 통해 교회의 참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살아있는 교회공동체요 끊임없이 성장하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지어지는 교회공동체, 그대로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이런 교회공동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지요!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는 공동체요 하느님의 거처로 성장, 성숙 중인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생활 자체가 파스카 주님의 체험이요 하느님 체험임을 깨닫습니다. 밖에서가 아닌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교회공동체에서 만나야할 주님이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교회를, 교회 공동전례를 사랑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시어 공동체의 일치를 굳건히 하십니다. 아멘.
*AMEN(아멘)이란 뜻풀이를 소개합니다.
Agree with God(하느님 말씀에 동의하고)
Move with God(하느님과 함께 움직이고)
End with God(하느님과 함께 끝내고)
Never doubt God(하느님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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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은 토마스 사도의 믿음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다른 사도들이 토마스 사도에게 주님을 만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토마스 사도는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사도들은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문을 잠그고 숨죽이며 모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제자인 것이 드러나 사도들도 십자가형을 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면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다는 공포가 사도들을 휘감고 있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는 말 자체가 사도들의 공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없었습니다. 어디 있었을까요? 토마스 사도는 그러한 공포를 뚫고 왜 밖에 나가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민심을 살펴야 하지 않았을까요? 누군가는 먹을 것을 구해와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유가 어떻든 간에 토마스는 사도 중에서도 용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돌아왔을 때 사도들은 주님을 만난 것을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때 토마스 사도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대들이 진정 주님을 만났다면 무엇이 두려워서 아직도 다락방에 머물려 공포에 질려있는 것입니까! 살아계신 그분을 만났다면 왜 아직도 어둠에 갇혀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더 이상 더움에 머물지 않고, 더 이상 공포나 두려움 혹은 자신 안에 갇혀 지내지 않습니다.
오늘 토마스 사도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그대는 주님을 만나고 따르는 사람입니까?
가끔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고해소, 저와 신자분 사이에 문을 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귀한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포기 말고, 너무 울지 말고
다시 한번
걸어가 보세요.
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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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처음으로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했을 때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꼭 해보고 싶은 여행이었지만, 자전거를 잘 타지도 못했고 또 자신도 없어서 마음만 먹고 있었지요. 그러나 더 나이 들어서는 할 수 없겠다 싶어서 30대 중반에 갑곶성지에서 부산까지의 자전거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워낙 튼튼해서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대전까지 갔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구를 지나면서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것입니다. 걷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이 밀려왔습니다. 자전거 여행을 자주 가는 선배 신부님께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의 정형외과에 들어가서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푹 쉬라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시골 읍내에 들어가니 허름한 정형외과가 눈에 보였습니다. 워낙 손님이 없다 보니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진찰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친절하셨습니다. 이 더운 날 고생한다면서 냉커피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근육 이완 주사를 맞고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았습니다. 약사 선생님 역시 이 뜨거운 여름날에 고생한다면서 약값을 깎아주십니다.
자전거 여행 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곧바로 ‘사람 만난 일’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사람을 만나면서 ‘참으로 살맛 나는 세상’임을 느끼게 된 사건들이 자전거 탄 것보다 더 기억에 남습니다. 그 만남으로 힘든 것도 잊고 목표했던 부산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계속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를 잊게 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 만남을 거부하면서 고통과 시련이 더 크게 보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그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고 해서 불신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는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면서 교회의 부활 신앙을 선포하였습니다. 어쩌면 불신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고통과 시련의 상황에서 곧바로 주님을 통해 힘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주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서,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끊임없이 표징만을 요구했을 것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보다는 어렵고 힘든 상황을 먼저 해결해달라며 불평불만 속에 빠질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 그 자체가 희망이 되어 자기 신앙을 고백했던 토마스 사도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주님과의 만남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면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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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생각, 멋진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커넬 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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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3.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나이다>
당신
나에게
보이지 않아
나
당신을
보지 못해도
당신
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나이다
당신
나에게
보여주지 않아
나
당신을
볼 수 없어도
당신
늘 나와
함께 계심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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