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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1,2등 인생은 돼도 3,4등 인생은 절대 안 됩니다./ 누가복음 16:19-31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oY5CKmLcZ0k
본문에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는 왕같이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 옷은 당시 왕이나 귀족들만이 입던 매우 비싼 옷이었습니다. 고운 베옷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두 배나 더 비쌌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명품으로 칭칭 감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매일 잔치를 벌여 세상 연락을 즐기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의 대문 앞에는 부자와 대조 되는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찌꺼기를 먹으려고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몸은 헌데 투성이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헌대를 핥는 것을 볼 때 그는 꼼작도 못하는 장애인이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펠드(Liefeld)라는 사람은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는 것은 나사로가 ‘개’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것을 뜻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부자와 대조적으로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먼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감사하게도 나사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돕다’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나사로는 그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너는 이름이 잘 못 됐다. 어떻게 네 이름이 하나님이 돕다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데 그 모양 그 꼴로 사냐? 나는 하나님이 돕지 않아도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데, 하나님 믿어도 별 소용없네! 차라리 이름을 바꿔라!” 그런데 이 세상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나사로가 죽자 천사들은 나사로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라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한 번은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장사된 후에 나사로처럼 낙원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음부에 들어갔습니다. 음부는 지옥으로 보면 됩니다. 부자는 그곳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비유이냐? 역사적인 사실이냐?”는 주제를 가지고 논쟁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부자와 나사로는 실존인물이었고, 그들이 죽어 천국과 지옥에 간 것, 그리고 아브라함과 부자 사이에 있었던 대화도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부자와 나사로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사건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도 이 이야기 전체는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을 가지고 비유를 쓰게 되면 영적인 진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부자와 나사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겠습니다. 이 설교는 피영민 목사님의 설교와 저의 과거 설교를 재정리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1. 사람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의 영혼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지 영혼이 어디 있어”라고 말합니다. 영혼이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사라지거나 영혼이 잠든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영혼도 사라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단자들은 ‘영혼멸절설’, ‘영혼수면설’ 등의 이론을 취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 의식을 가지고 죽음 후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거지가 죽었을 때는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천국으로 받들어 올라갔습니다.
피영민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 집사님 중 한 분이 돌아가실 뻔 했었는데, 그 때 있었던 일입니다. 천사 둘이 와서 “네 영혼을 데리러 왔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집사님이 “교회 선교헌금 약정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 다 내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천사들이 잠시 회의를 하고 “헌금을 하는지 안 하는지 보겠다.”고 하며 “이번에는 데려가지 않겠다.”고 해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었을 때 천사가 그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 품에 안기게 되었는데,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죽은 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다른 세계가 반드시 있습니다.
히 9:27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한 번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도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과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모세는 죽었습니다. 신 34장에 보면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모압 땅에서 죽었고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다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죽었으나 그의 영혼이 사라졌거나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죽었던 모세가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별세에 대하여 대화를 한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2. 죽음 후에는 두 세계로 나눠진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 가는 세상은 둘로 구별되어 집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이 그 영혼을 받들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습니다. ‘품’이라고 하는 것은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아브라함의 품’을 천국을 대신해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의인은 오른쪽으로 인도함을 받되, 그곳을 맡은 천사들의 찬양을 들으면서 나아가, 창세로부터 의인들이 거하고 있는 빛의 지역에 이른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지역인 하늘에서 안식과 영원한 새 삶을 기다리는데, 그곳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품이라 부른다.” 요세푸스는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의인이 죽어서 들어가는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상상하는 곳 보다 더 좋은 곳입니다. 천국의 길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보통 금이 아니라 맑은 유리 같은 순금으로 되어있습니다. 천국의 벽들은 보석으로 꾸며졌습니다. 계21:18-20을 보면 벽옥, 남보석, 옥수, 녹보석, 홍마노, 홍보석, 황옥, 녹옥, 담황옥, 비취옥, 청옥, 자수정으로 되어있습니다. 천국에는 해나 달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구석구석 밝게 비춰줍니다. 수정 같은 맑은 생명수 강이 있는데 길 가운데로 흐릅니다.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열두 가지 실과가 열립니다. 그 실과는 달마다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열두 문이 있는데 열두 진주로 되어 있고 그 문은 닫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천국을 보여주면서 천국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있는 귀하고 비싼 보석들과 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보석들은 이 세상에서는 너무나 귀한 것들이지만 천국에서는 너무나 흔한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가치 있는 것들도 천국에서는 너무나 하찮은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천국에서는 가장 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귀하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잡으려는 사람에게 죽고 썩을 것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에 갔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황홀경을 경험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국에는 거룩한 황홀함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릴 일이 없고, 죽는 일도 없으며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는 그런 일들이 늘 있습니다. 신자들이 천국을 사모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가 또 여기 있습니다. 천국에는 슬픔의 눈물, 사망과 애통 그리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없습니다.
부자는 현세에서 쾌락과 만족을 누리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음부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24절 후반에 “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옥에서 고민하고 고통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지옥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장소입니다. 2008년도에 고 조용기목사님께서 본인이 체험한 지옥 간증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몸 안 인지 몸 밖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지옥은 마치 우주의 블랙홀 같았었습니다. 블랙홀은 주위에 있는 별들을 다 빨아 당겨서 삼켜 버리는데 지옥도 그렇더랍니다. 강력한 자석이 쇠붙를 끌어당기는데 지옥도 그렇더랍니다. 목사님이 보니까 사람들이 막 뒹굴면서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그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누구도 막을 수가 없더랍니다. 사람들이 캄캄한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조목사님도 회오리바람 같은 지옥의 인력에 의해서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조목사님이 지옥문에서 들어가자마자 느낀 것은 그곳은 시간이 중지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이었습니다. 영원한 곳에 급속한 속도로 떨어지는데 그 고통은 말로다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도저히 말로다 표현이 안 된답니다. 조목사님은 자신이 영원히 지옥에 떨어지고 못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겠다. 이런 고통의 세계에 올 바에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게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속에서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 예수님의 보혈을 부르짖으라.’라는 생각이 나더랍니다. 목사님이 아주 모기 소리 만하게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하니까 지옥으로 끌려 내려가던 목사님이 딱 멈추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수님의 보혈을 외치니까 지옥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어져 버리고 위로 떠올라 가기 시작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더 힘차게 외쳤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예수님의 보혈로” 목사님이 예수님의 보혈을 말할 때 마다 떠올라 오고 떠올라 오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지옥의 세력이 탁 끊어지고 세상으로 나와서 정신을 차렸답니다. 그때 조목사님이 알게 된 것은 지옥은 엄청난 고통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옥은 불타는 고통이 있는 곳입니다.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 중에 가장 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지옥은 불타는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유황불 붙는 못’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본문에서 부자는 자신은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지옥을 ‘풀무 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스렌지 불을 켜놓고 그 위에 여러분의 손바닥을 대고 1분을 참으면 1억을 준다고 하면 해보겠습니까? 돈 때문에 마음은 하고 싶어도 1분을 견디지 못해서 뜨거운 고통을 당하고 화상을 입고 돈도 못 받을 것입니다. 불속에서는 잠시 동안도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옥은 온몸이 불에 들어가 고통당하는 곳입니다.
무서운 것은 지옥의 고통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고, 둘째 사망은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둘째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셋째 사망은 없습니다. 둘째 사망을 당하여 지옥에 떨어지면 더 이상 죽음도 끝도 없다는 말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쓰레기를 모아놓고 불을 질러보면 다른 종이는 다 타는데 껌종이는 타지 않습니다. 지옥의 불은 모든 것을 태울 만큼 뜨겁지만 지옥에 떨어진 사람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토록 고통을 당합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의 길이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합니까? 어느 분이 영원을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지구만 한 쇳덩어리를 독수리 한 마리가 1000년에 한 번씩 와서 그 부리로 쪼고 가곤 하는데, 그 쇳덩어리가 다 닳아질 정도가 되려면 몇 년이나 걸리겠습니까? 답을 낼 수 없는 긴 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시간도 영원에 비하면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옥 고통은 영원합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때문에 잠시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할렐루야!
3.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결정 되면 번복할 수 없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 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넘어갈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서로를 볼 수도 있고 대화도 가능한데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26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결정 되면 번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이사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사 갈 수도 없습니다.
지옥은 아무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군대에서는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달아나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에서는 시간이 잘 안 갑니다. 특히 기합을 받을 때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갑니다. 제가 이등병 때 부대 자체에서 하는 돌격혼련을 받았습니다. 잠을 자는데 갑자기 조교가 기상시키더니 팬티만 입고 서라고 하더니 내무반 바닥에 물을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를 시켰습니다. 그러더니 팬티바람에 연병장에 나가서 서랍니다. 다리를 벌리고 두 팔을 들고 서있는데 얼마나 춥습니까? 그때가 2월 말이었습니다. 너문 추우니까 다리가 덜덜덜 떨렸습니다. 그런데 조교가 주전자에 찬물을 담아가지고 팔을 벌리고 있는 우리 등에다가 찬물을 뿌렸습니다. 그 시간이 얼차례를 받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제가 근무했던 부대는 군기가 세기로 유명했습니다. 청와대를 지키는 부대였기 때문에 군기가 약하면 사고가 나니까 일부러 군기를 세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산폭격’이라는 벌을 아세요. 머리를 박고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드는 벌입니다. 제 고참들은 벌로 원산폭격을 시킬 때, 그냥 바닥에 머리를 박게 하지 않습니다. 군번줄을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해서 그 위에 머리를 박게 했습니다. 아니면 치약 뚜껑을 놓고 그 위에 머리를 박게 했습니다. 그렇게 원산폭격을 하고 일어서면 군번줄이 머리에 박혀서 쭈~욱 딸려서 올라옵니다. 치약 뚜껑이 머리에 붙어있습니다. 3분 간 원산폭격을 하게 하면 그 3분이 너무나 천천히 갑니다. 이상하게 군대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릅니다.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때가 되면 전역을 하게 됩니다. 군인들은 전역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국방부의 시계는 천천히 돌아가지만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갑니다. 그 말은 전역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에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끝없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한 번 결정되면 변개할 수 없습니다. 사우나 안에서 뜨거우면 내가 문을 열고 나오면 되지만 지옥은 그럴 수 없습니다. 지옥 판결은 피해야 합니다. 일단 결정되면 영원토록 고통을 당합니다. 그곳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옥의 불 못은 잠시의 휴식도 없습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세세토록 불과 유황으로 고통 받습니다. 기간은 무한정이고, 단 한 사람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지옥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4. 지옥에서는 어떤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옥에서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천국에 있는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세상에는 아직 죽지 않은 자기의 다섯 형제가 있는데,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서 그들에게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증거 하여 그들이 고통 받는 지옥에 오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의 두 가지 청은 다 거절당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그렇게 안 되면 지옥의 고통이 조금만 덜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지옥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옥은 영원한 절망의 장소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힘들어도 소망이 있으면 고통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톰 행크스가 주연입니다. 그는 극중 특급 우편배달 회사 직원이었습니다. 1분, 1초를 아껴가며 정확하고 빠른 배달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남태평양 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일상생활에서 겪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게 됩니다. 지켜야 할 약속 시간도, 배달 시간도 없습니다. 절대 고독의 시간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무인도에서 주인공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며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우선 물질입니다. 무인도에서도 필요한 음식과 의복 등이 필요했습니다. 다음으로 친구가 필요합니다. 물질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과 생각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희망과 사랑입니다. 주인공은 머리맡에 사랑하는 여인의 사진을 놓아두었습니다. 사진 속에 여인은 주인공이 더 이상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막아 주었고, 날마다 약해져만 가는 주인공에게 무인도를 탈출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주인공은 4년 만에 무인도를 탈출했습니다. 탈출 후에 그 동안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던 사진 속 연인을 찾아갔으나 그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떠나버렸습니다. 거기서 주인공은 자신을 살린 것은 여인을 사랑했던 사랑, 그리고 여인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일들, 즉 희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희망이 자신을 무인도로부터 건졌고, 희망이 자신을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일어서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에는 조금의 희망도 없습니다. 절대 절망의 장소가 지옥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이 있으면 살아 갈수 있지만 희망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고통은 더 큰 것입니다.
5.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신다.
부자는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자는 교회 다니는 사람을 핍박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있을 때에는 복음을 거부했는데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아, 그 때 그 복음이 진실이로구나! 지옥이 있구나! 천국이 있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가는구나!”하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남아 있는 다섯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들도 자기가 있는 지옥에 올 것 같아서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서 자기의 형제들에게 증언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무엇을 증언해달라는 말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 후에는 천국과 지옥이 있다. 나는 지금 지옥에서 고통당하고 있다. 지옥에 오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이다. 절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천국에 가든지 지옥에 간다.”라는 것을 증언해 달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지옥에 가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옥에 가면 불신자가 아무도 없다.” 지옥에 가면 복음을 다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미 지옥에 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자가 나사로를 세상에 보내서 자기 형제들에게 증언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합니다. 29절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부자가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31에서 아브라함이 확실하게 부자의 청을 자신이 거절하는 이유를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목적은 생명과 호흡이 있는 이 순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좋은 말로 하실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목사와 전도자들이 좋은 말로 이야기할 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가서 그 때 그 말이 진실이었다고 후회하지 말고 이 땅에서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확실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옥은 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벧전 1:9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구원 받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구원이요.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말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지옥은 죄를 처리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잖아요. 사망은 죄의 삯이며 지옥에서 영원히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은 지옥에서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인 또 다른 이유는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주신 메시지는 다섯 가지를 들었습니다. 1. 사람의 영혼은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2. 죽음 후에는 두 세계로 나눠진다. 3.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결정 되면 번복할 수 없다. 4. 지옥에서는 어떤 소원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5, 하나님은 전도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하신다.
성경은 인간이 살아가는 시대를 정확하게 둘로 나눕니다. 하나는 현세이고, 또 하나는 내세입니다. 전생은 없습니다. 요즘 전생과 관련된 tv 프로그램들이 많이 나오는데 전생은 없습니다. 현세와 내세를 통해서 인생의 등수를 매길 수 있습니다. 현세에서 복 받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는 것은 1등이겠죠. 그리고 현세에서 나사로처럼 고생하며 살지만 내세에 복을 받는 것이 2등일 것입니다. 3등부터는 비참합니다. 현세에서 복을 받지만 내세에 지옥 가는 것이 3등이고, 현세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복을 받지 못하는 4등입니다. 그런데 3등은 4등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현세는 짧고 내세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짧은 현세 속에 잠깐 복을 누리다가 영원한 내세에서 무한한 고통을 받으며 고민가운데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현세에 조금 고생스러워도 영원한 내세를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며 복을 누리며 살겠습니까? 오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당신은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 복을 누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오늘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그래서 영원한 복을 받으십시오. 예수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복된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