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4]아무래도 내가 늙은 것일까?
살면서 재밌는 것은, 생각지 않은, 잃어버린, 까마득히 잊혀진 자료(문건) 등을 우연히 찾아 옛 추억을 곰씹는 것이리라. 오늘 오후도 그랬다. 컨테이너 창고에서 작은 택배상자를 찾다가 기다란 까만 통을 발견했다. 이게 뭘까? 끄집어내보니, 왕년 나의 전성기 때의 몇 가지 물건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나의 전성기는 2008년이었던 것같다. 지금은 전성기가 아닌 황금기黃金期일 듯하고. 흐흐.
아무튼, 2008년 12월 29일(?)로 기억된다. 그날, 혜화동 단골식당 「빈대떡신사」에서 내 생애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출판기념회를 가졌었다. 성균관대 출판부에서 펴낸 『나는 휴머니스트다』라는 책의 출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식탁이 27개이니 4명씩 앉았다치면, 내가 좋아하는 108이라는 숫자가 아니던가. 중간쯤 삭힌 홍어회가 대표적인 안주였으나 낙지, 파전 등 몇 가지를 더 준비, 108명을 초대했는데, 20명쯤이 오지 않았던 듯. 솔직히 기억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잔치는 성황이었다. 그날 참석한 멤버 중에 가장 기억나는 사람은 단연 성우 권희덕(56년생)님이다. 최진실 배역의 ‘남편은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멘트로 유명한 보이스 탤런트voice talent, 유명을 달리 한 지 오래이다. 아까운 참된 친구였다.
그날 식당 벽에 스무 장쯤 연이어 붙여놓았던 포스터 한 장을 오늘 발견한 것이다. <오초남(50대 초반 남자)이 부르는 인생별곡>이라는 부제의 이 책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50대 아버지의 특별한 인생이야기인 셈이다. 아하-,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구나, 싶었다. 다음으로는 당시 지하철신문이 인기였는데 <포커스>라는 신문에 실린 나의 인터뷰기사를 스크랩하여 코팅한 것인데, 무엇보다 내가 반한 것은 인터뷰어 기자가 단 헤드라인 “글로써 나와 벗들을 위로하죠”였다. 그렇다. 내가 이런 졸문을 쓰고, 그런 졸문을 선별해 책으로 묶은 이유는 바로 "나와 내 친구들을 글로써 위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그 기사를 읽어봤는데, 지금 읽어도 약간은 재미있었다. 순전히 진솔하기 때문이다. 흐흐.
세 번째 코팅자료는, 정말로 생각조차 나지 않지만, 2002년 12월 14일자 날짜가 박힌 경향힌문 1면기사(실제 발간된 것이 아니고, 이벤트 공모에 당첨된 것)로, 큰 아들에게 쓴 편지와 가족사진이 실린 것이다. 이 역시 “사랑과 우애로 세상을 훈훈하게”라는 제목이 넘 멋있다. 사랑하는 큰아들에게 (남녀간의) 사랑, (형제와 친구간의) 우애에 대하여, 애비로서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쓴, 인생 최고의 조언助言이었던 것인데, 오늘날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은 ‘귀한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흐흐. 오늘 또 하나의 ‘수확’이었다.
네 번째 사진은, 2000년 가을 양양연어축제에 가족이 참여했는데, 당시 12살 둘째 아들이 손으로 잡은 연어의 탁본이었다. 오늘에사 어탁魚拓을 줄자로 재어보니 길이가 75cm, 너비가 20cm였다. 그때 직접 쓴 문구가 “어머니의 江을 기억하라!”였다. 연어는 모천母川으로 다시 돌아오는 '회귀 물고기'이니, 아이들이 자라 어디에서 살든지 항상 어머니(고향)를 잊지 말고 생각하라는 '깊은 뜻'으로 썼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축제는 태평양에서 고향인 남대천으로 올라오는 연어들을 일정한 구역 내에 방류해놓고, 아이들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마음대로 잡게 하는 행사인데, 고기들이 워낙 빠르고 미끄러워 놓치는 등 잡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둘째 아들이 막말로 대어大魚, 월척越尺을 손으로 잡았으니, 그때 우리 모두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을 정경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곧바로 사진을 찍어 호주에서 간호사를 하는 35세 둘째아들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그 녀석도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기록(사진 포함)은 이런 의미에서도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추억이나 기억을 일흔도 안된 나이(67세)에 곰씹는다는 게 왠지 모르게 찜찜하다. 내가 늙은 것인가? 이까짓 코팅사진 몇 장 가지고, 뭔가 뭉클하고, 기뻐하거나 또는 울적하는 게 이상하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까지 든다. 나만의 과민반응일까? 잘 모르겠다. 흘러간 과거를 말할 때 "그때가 좋았지" 이런 식의 나부랭이 말을 흔히 내뱉지 않던가.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젊지 않은가. 내 친구들은 대부분 '제2 취업'으로 일상의 노동을 하고 있는데, 연금도 시원찮으면서 과거의 문서 쪼가리나 읽으며 어쩌고저쩌고 하는 내 자신이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풍족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아내와 조금은 여유있는 노후생활을 위해선 뭔가 조금 더 일을 해야 할 때이지 않은가. 아니면 이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찬 활동이 뭐가 있을까? 목하, 연구중이다.
한편, 자료 뭉치통에는 동아일보 창간호(1920년 4월 1일) 전체 4면 지면을 영인해 놓은 것과 조선일보 창간기념호(1920년 3월 7일, 창간일은 3월 5일) 영인본도 있었다. 툇마루에서 동아일보 창간호 1면 설산 장덕수가 썼다는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라는 명칼럼을 읽었다. 그의 칼럼은 <민족의 표현기관. 민주주의 지지, 문화 제창>이라는 동아일보 사시社是가 되어 100년이 넘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2018년 지령 3만호가 넘었다), 지금, 오늘날, 여기 그 신문이 이 사회에 제대로 순기능적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곳에서 나의 쪽팔리는 내근기자 경력 20년. 그곳에서 정년퇴직 할 수도 없었겠지만, 할 생각도 추호도 없었지만, 중도포기한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래도 한때 내 청춘을 불사른 곳이건만. 흐흐. 또한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십보백보,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니, 더욱더 기승을 부리는 반민주적, 반역사적 반동신문의 대명사가 아닌가. 절대로 보수신문이 아니다. 더구나 보수신문의 상징이 될 수 없는 비극이 여기에 있다. 그들의 사시 <정의 옹호, 문화 건설, 산업 발달, 불편부당>를 보라. 그들이 과연 정의의 편인가? 그들이 과연 불편부당한가? 두 신문이 민족지이든, 친일신문이든 이제 와 무슨 소용이겠냐만, 그들이 만약 사시社是에 충실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록해왔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이 꼴이겠는가 싶은 게, 오직 한심할 뿐이다. 쓰레기같은 ‘보도일꾼 기레기’들의 행진이 오직 가소로울 뿐이다. 반동은 반동이다. 기억하라! 역사가 기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