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1
2월14일[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연중 제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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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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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tpHi7BTvmQY (마호성 아브라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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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이토록 가련하고 가난한 자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오늘 저를 향한 일침이요 외침같이 느껴집니다. 피부에 확 와닿으면서도 마치 폐부를 꽉 찌르는 듯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코 복음 8장 17~18절)
그토록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거듭해왔건만 저는 아직도 지상 것들에 촉각이 곤두서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보다 곧 썩어 없어질 세상의 빵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제 수도 생활의 연륜도 만만치 않건만, 아직도 마음이 열리지 못해 신앙의 진리, 주님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토록 많은 시간 동안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건만, 가장 본질적인 깨달음, 결정적 회심에 도달하지 못하고 겉으로만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정녕 영적 시각 장애, 영적 청각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합니다. 부르시고 외치시는 간절한 주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보십시오. 저는 이토록 가련하고 가난한 자입니다. 당신 자비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부디 제 눈을 열어주십시오. 제 귀를 열어 주십시오. 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시오.
그리하여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보게 하시고, 진정한 인생의 결론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참된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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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B3Qqr9iC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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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전하는 이가 빵 걱정을 할 필요 없는 이유>
만약 달리기 경주에서 출발선이 앞서있다면 그만한 이점이 있습니다. 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대부분 거부는 유산상속을 통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흑수저, 금수저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지원을 잘 받은 아이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그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볼까요? 세계 대부호들은 대부분 상속이 아닌 자수성가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참 특이합니다. 그들은 모두 어릴 적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들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특별히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는 전 세계 최고 부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둘 다 우주 산업에 큰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릴 적 경험이 나를 우주로 이끌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SF소설인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어려서부터 좋아했고 ‘장차 인류의 미래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화성 이주계획을 생각했습니다.
제프 베조스 역시 어려서부터 우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을 우주에 만드는 것을 꿈꿨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진 것이 하나 없었어도 어릴 적부터 말도 안 되는 꿈을 위해 달려온 이들입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는 지구촌 10억 인구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세상을 연결하겠다”라는 꿈을 품었다고 합니다. 그는 페이스북 지분의 99%를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 친부모에게 버림받고 입양아로 자라면서 따돌림당하고, 대학교를 중퇴했으며, 괴팍한 성격으로 인해 애플사에서 퇴사를 당하고 췌장암 진단을 받는 등 전혀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도 황당한 꿈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는 꿈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모든 여자 연예인 중 가장 재산이 많습니다. 재산 27억 달러(3조5천억원) 소유자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무일푼에서 시작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꿈이 있었습니다. 25년간 쇼를 진행한 ‘오프라 윈프리’ 그가 살아가는 삶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은 “포기하지 마라”입니다.
그녀의 꿈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연예인이 되어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그녀는 결국,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변화를 이끌려 꿈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인가?’, ‘정말 기분 나쁘네!’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도 저런 사람들처럼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법칙만 알면 말입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꿈을 가지되 세상에 유익이 되는 엄청난 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가능한 환경에서도 희망과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고 기대를 받는 사람들이라면 그 꿈에 대한 믿음이 작아도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엄청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은 증거는 그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뤄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빵이 없다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7-21)
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빵의 기적을 이야기하셨을까요? 또 왜 더 적은 양의 빵으로 더 많은 군중을 먹였을 때 더 많은 양으로 더 적은 군중을 먹였을 때보다 많이 남았을까요? 우리는 과연 이런 진리를 깨닫고 있나요? 아니면 무엇이 부족할까 봐 제자들처럼 걱정인가요? 예수님은 오늘 어떻게 재물이 풍족하여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지 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더 가진 것이 없을 때 더 하느님께 감사하고 더 나누어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꿈을 꾸면 가지고 있는 것의 수백 배가 넘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큰 꿈을 품는 이들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가졌다고 믿는 것을 없애버리시기도 하십니다. 구약의 기드온 같은 경우입니다. 주님은 싸움에 나가기 직전 기드온의 군사를 아주 적게만 남겨서 기드온의 믿음을 극대화합니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 힘이 아닌 당신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시기 좋아하십니다. 당신이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으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믿는 이들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랑이시기에 사랑으로 믿는 이들, 곧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세상에 이로운 업적을 이루겠다는 이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들은 엄청난 재물까지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는 이들은 먹고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일곱 번의 실패를 딛고 도시락을 팔아 엄청난 부를 얻은 김승호 회장도 같은 말을 합니다. 돈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잡아놓으려 하면 터지거나 썩습니다. 흘려보내야 하는데 그 흘려보내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자리가 우리가 소유한 돈의 액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상한 말 같기도 하겠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돈 걱정하며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러려면 세상에 유익이 되기 위해, 세상을 행복하게 하도록 그것들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몇 배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빵이 남게 되는지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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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여행을 가거나,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자주 ‘짐’을 싸게 됩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면도구, 속옷, 책, 노트북, 필기구, 바람막이, 사제복을 주로 가지고 다닙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저는 깜빡했는데 신부님 한분은 본인의 제의를 가져왔습니다. 성지에서 제의를 빌려 입었지만 본인만의 제의를 가지고 온 신부님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 편이라서 공동 제의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여행을 갈 때나, 성지순례를 가면 저의 제의를 꼭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에 엘파소에 갔을 때도 저의 제의를 가져갔기에 저에게 맞는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서울대교구에서 좋은 사제를 보냈으니 신부님을 잘 도와주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제에게는 사제복과 제의가 구원의 방주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는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곳은 말이나 소가 여물을 먹던 ‘구유’였습니다. 부유한 집의 안방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살던 화려한 궁궐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렇게 누추하고, 겸손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모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구유와 방주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는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수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선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간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한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다른 방주를 구원의 방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입니다. 비록 화려해 보이지만, 비록 부러워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쉽게 가라앉는 방주를 어렵게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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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14-21: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15절) 하신다. 유다인들에게 누룩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악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들이 사용하던 누룩이란 오늘날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들이 사용하는 누룩은 바로 빵을 구울 때 다음에 빵을 굽기 위하여, 밀가루 반죽을 조금 떼어놓아 발효되게 한다. 즉 썩힌다. 이것을 또 빵을 구울 때 사용하는 것이다. 썩는다는 의미에서 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조심하라는 누룩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방해되는 인간성의 병폐, 부패의 요소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이란, 예수님께 어제 복음에서 요구한 메시아적인 징표이다. 그것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현세적인 태평성대를 바라는 것이다. 헤로데의 누룩이란 권력과 부귀를 통한 자신의 영달을 말한다. 즉 지상에서의 권세와 재력과 무력으로 획득할 수 있는 현세적인 승리, 현세적인 안락이었다. 이러한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끼치는 악영향을 의미하지만, 복음에서는 밝히지 않는다. 이것도 모르고 제자들은 빵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 빵이 없으면 굶주린다는 생각밖에 못 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그들을 깨우쳐 주신다. 몇 번이나 빵의 기적을 상기시켜 주신다. 즉 당신과 함께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것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보여주셨으나 백성도(6,14-15), 종교와 정계의 지도자들도(2,6.16.24; 3,6.22; 6,16; 7,5) 친척들도(3,21.31-35), 고향 사람들도(6,1-6), 그리고 제자들도(4,13.40; 6,52; 7,18; 8,17-21) 이해하지 못하였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시는 뜻으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다.(8,22-26) 그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게 된다.(8,27-30)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그 체험을 통해서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고 의지하여야 할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그것으로 지금의 자신이 있음을 생각하며, 의욕을 가지고 현세적인 누룩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나는 지금 어떠한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가? 아니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깊이 느끼며, 자신과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켜나가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의 누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악표양의 누룩을 모두 버리고 진정으로 삶의 질을 높여갈 수 있는 누룩의 모습을 갖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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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15-19)
이 말씀은 산상 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이 말씀은, “배고파도 그냥 참아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너희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신다.”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하고,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까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마라.”라는 가르침과 “세속의 물질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버려라.”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만 보고서 “먹고사는 일이 너무 힘들고 늘 걱정스러운 상황인데, 어떻게 걱정을 안 할 수 있나?”라고 반박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 세상의 경제활동을 부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하고 저축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남들보다 더 부유하게 살고 싶어서 탐욕을 부리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남들보다 더’ 라는 생각 자체가 악입니다.)
또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몸의 쾌락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도 ‘악한 일’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버리고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라는 말씀은,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공부하고, 취직하고, 노동하고, 저축하고...... 인간 세상의 일상적인 일들은 신앙인들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이 너무 막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공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7ㄴ-12)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2월 14일의 복음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세속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루카복음 16장에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4)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라는 말씀의 바로 뒤에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비웃은 바리사이들은 아마도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면서 ‘하느님의 복’을 ‘물질적인 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그런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라고 말씀하시자, 사도들은 놀라면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르 10,26)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도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면 어떤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뜻입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루카 16장) 만일에 부자가 살아서 복을 많이 누렸다는 이유만으로 저쪽 세상 어딘가에 들어가고, 라자로는 복을 누리지 못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못 들어간다면, 그곳은 절대로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말씀하신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도 너희는 왜 빵이 없다고 걱정하느냐?”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하신 분입니다.(마르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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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창세기 저자가 아담의 후손들(5장 참조) 가운데에서 특별히 주목한 사람은 두 명, 곧 ‘에녹’과 ‘노아’입니다. 에녹은 이 족보의 인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완전한 사람으로 평가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설명할 때 창세기 저자가 쓴 “-가 살았다.”라는 표현 대신에 에녹을 위해서는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창세 5,24 직역)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입니다. 또 에녹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쓰였던 “(살다가) 죽었다.”라는 표현 대신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5,24)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에녹과 노아의 연관성입니다. 학자들은 ‘에녹’이라는 이름에서 ‘노아’라는 이름이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노아(nôaḥ)의 이름에서 자음을 거꾸로 배치하면 에녹(hanôkh)에 가까와집니다.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의롭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에녹의 경우처럼 노아도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6,9 참조)고 묘사합니다. 노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홍수를 피하고 죽음을 건너갔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저자는 에녹과 노아를 소개하며 하느님의 길 위에서 걸어간 사람들은 죽음을 알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노아를 눈여겨보신 하느님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그들 마음의 생각을 따라 살며 세상을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들고 있을 때 노아만은 하느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의 건설과, 그다음에 할 일을 지시하시는 두 번의 말씀은 무척 깁니다.(6,12-21; 7,1-13 참조) 이것은 마치 홍수가 하느님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폭력과 악으로 세상이 다시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과는 정반대로 방주는 아주 잘 지어진 또 다른 세상입니다. 방주는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의인과 함께 세상을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또한 의로운 목자의 지도 아래 세상을 새롭게 하고 이어지게 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장소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노아와 같은 사람으로 살아갈 꿈을 접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에녹과 노아처럼 하느님과 함께 걸으며 하느님 나라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실현하는 우리의 작은 ‘방주’를 지으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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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주교님]
<완덕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지루한 논쟁 속에 당신을 시험하며 표징만을 요구했던 바리사이들을 탄식하며 떠나오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완고한 마음에 사로잡혀 놀라운 기적 체험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한 답답한 제자들 앞에 서십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 즉 그들의 허세와 허영, 속빈 강정과도 같은 모습을 주의하라시는데, 딴청을 피우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순수하지 못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시험하였던 그들의 태도를 경계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자꾸만 ‘빵’을 가져오지 않았음에 대해서만 수군거리며 집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승은 달을 가리키는데 제자들은 스승의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축적되어 온 과거의 기억들을 상기시켜 주시고, 제자들이 살아갈 미래의 삶을 예비하게 하시며, 이를 위해 현재를 다시금 깨우쳐 주십니다.
곧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는 물음에 제자들 스스로 “열둘입니다.”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게 인도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이나 헤로데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 아버지의 진실성과 진정성으로 안내하고 계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빵의 기적은 단순히 빵이 많아진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완전성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과 감동스런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완덕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충실히 걷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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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코8,21)
깨닫는다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지만 저마다 가지고 있는 느낌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적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창조적 개념이 아닙니다. 즉, 없었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을 새롭게 알아내는 것도 아닙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이미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 즉 삶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관계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감정의 세계들, 생로병사와 같은 예외 없는 인간의 조건들,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마음으로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제대로 보고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확신임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말한다면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우리의 모든 부조리는 이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듣지 못하기에 생겨난 아픔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이라도 하느님께서 불러가실 삶인지도 모르고, 온갖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쏟고 있는 우리인지도 모릅니다.
청하십시오. 이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제대로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이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아름답게 살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우리의 올바른 태도에 대해 응답해주시는 지혜의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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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들>
주님께서는 가끔 제자들에게 조심하여라는 말씀을 하신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주 메시지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이다.
유혹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빠져드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아니면 나의 욕심에서 오는 것인지를 잘 식별해야 한다. 아무리 좋아보이는 것도 때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 아니라 내 욕심을 이용해서 나를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떼어 놓으려는 마귀의 유혹일 수 있다.
따라서 나에게 좋게, 멋있게 다가오는 그것이 나를 하느님께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선물일 것이다. 반대로 그것이 나를 하느님과 더욱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마귀의 유혹이요 장난일 것이다.
두번째로 주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말과 행동이 다른 그들의 위선과 가르침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도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실상 우리는 이 지상의 나라를 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적인 양식, 즉 말씀과 성체로 양육되기보다는 먹고사는 데 급급하다면 그것이 바로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 삶이 되지 않겠는가!
오늘 나의 선택이 하느님을 더 가까이 만나게 하는것인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나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지 한번 돌아보자.
우리 육이 늘 그 반대로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늘 깨어있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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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플간치스코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창세 6,5-6)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존재로 창조되고 축복받은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의 선물을 거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예수님께서 탄식하신 것은, 나와 우리의 죄와 무관심과 게으름과 교만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얼굴을 외면하고, 현세 걱정과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 ‘주님과의 관계단절’이 원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단절, 죄에 떨어지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큰 틈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작은 허물과 잘못, 무감각들이 차츰 자라나 관계를 단절시키고 내 존재 전체를 어둠으로 내몰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잠시만 딴데 눈을 돌리면, 저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보는 눈과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를 막아버리는, 이기심과 탐욕과 허영이 독버섯처럼 자랄 수 있지요.
따라서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무심코 내뱉는 말, 평범한 행동들 하나하나에 주의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무관한 말과 생각과 행동의 누룩들이, 죄악과 어둠을 부르고, 하느님을 슬프게 해드리기 때문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듯, 영성생활에 있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다음부터 잘 하지’ 하는 안이함과 자기합리화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불행으로 내몰게 됨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나아가 현세 걱정과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여,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아처럼 하느님을 알아 뵙고 모셔, 올바르고 흠 없이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소한 일을 행할 때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들을, 하느님의 영과 사랑을 담아 행하고 대할 때, 주님의 후회와 예수님의 탄식은 우리를 향한 축복으로 바뀌겠지요.
또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수용할 때, 하느님의 후회와 주님의 탄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고착된 신념과 습관, 부정적 시각과 왜곡된 사고의 틀을 버리고, 창조의 새로움과 자유와 해방의 시선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눈길로 일상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순종하고 사랑하며 견뎌내는 자체가 참 기적이요, 주님을 춤추게 하는 계기가 되겠지요.
주님! 당신을 슬프게 해드리는 제 안의 미지근함과 무관심, 냉정함과 몰인정함, 게으름과 교만, 탐욕과 허영, 고착된 신념과 왜곡된 시선의 누룩을 성령의 불로 태워주소서! 깨어 기도하며, 당신 사랑의 영을 갈망함으로써,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당신을 흐뭇하게 해드리는, 참된 종이 되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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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누룩은 부풀리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트나 베이킹 파우더와 같은 일종의 발효제입니다. 그래서 빵과 술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누룩과 비슷하다. 어떤 부인이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고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 누룩이 좋은 것에 들어가서 부풀리면 그만큼 좋은 것으로 부풀려질 것이고, 반대로 나쁜 것에 부풀려지면 나쁜 것이 그만큼 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누룩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고,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마태 23장 참조)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율법준수에만 구원이 있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구원을 소유와 지배, 권력의 화려함 속에서 찾았습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은 그들의 사고방식, 삶의 양식에 물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4천 명이 넘는 많은 사람을 배부르게 먹게 해 주셨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빵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참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필리피서 3장 7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모두 버린 바오로 사도가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도 과한 욕심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과감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바리사이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 그리고 나의 누룩을 버려야 합니다.
나의 누룩이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삶의 자세, 잘못에 대해 벌주시고 나를 감시하시는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나의 시각, 재물에 대한 욕심, 부귀영화에 대한 동경,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도 자동차에 십자가나 묵주를 매달고 있으면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려니 생각하는 태도, 허영, 가식 등등이 내가 지닌 누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누룩은 버리고 하느님 말씀의 누룩, 사랑의 누룩을 부풀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줄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말씀하시고 결국에는 빵의 기적에 관한 얘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느냐?” 아니면 “때가 되면 알리라.” 어떻게 받아들이든 능력의 예수님, 구원자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근심, 걱정에 갇혀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웠으니 오늘 우리와 주님 사이의 통교는 오죽하겠습니까? 주님과 깊은 만남에 이르는 길이 아직도 멀기만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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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재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래서 늘 자신감이 넘치는 남자 10명을 세워두고 그 앞에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10명의 남자에게 앞의 여성이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모두 자신을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 남의 눈치 보는 것에 더 익숙한 남자 10명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성이 등장하면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하고는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미소를 짓고 윙크했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이들 모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보고 미소 짓고 윙크했다고 말합니다.
이 실험을 보면서, 주님의 시선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분명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지요. 주님께서 나를 외면하신다고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서 불평불만을 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차별하시는 주님이실까요? 아닙니다. 지금 내 마음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아서, 또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어서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신다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또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에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세상의 말과 행동에 흔들린다면, 나를 바라보시고 또 함께하시는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조심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고 분부하십니다. 누룩은 나중에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는 작고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옳게 보이지만 실상은 많은 악이 감추어져 있어서 사람들을 나쁜 쪽으로 이끌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이들의 위선을 조심하려는 것이 아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릴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물질적인 빵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통렬히 꾸짖습니다. 그래서 전에 행했던 빵의 기적을 다시 기억하게 하면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에만 집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어떤 것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용기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에 흔들리지 않고, 힘차게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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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마음이 흔들릴 때>
어제 야고보서는 시련과 시험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오늘은 유혹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두 공통점은 그것들이 우리를 흔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시련과 시험이 외부의 무엇이 나를 흔드는 것이라면 유혹은 유혹자가 있긴 하지만 엄밀히 얘기하면 내부의 무엇, 곧 욕망이 있기에 유혹자가 나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술을 싫어하면 술친구가 아무리 나를 유혹해도 유혹을 받지 않지요. 배가 이미 불러 식욕이 전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유혹이 되지 않고요.
물론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고 아담과 하와도 뱀이라는 유혹자가 과일을 보라고 하지 않았으면, 또 봤더라도 과일이 탐스럽지 않았다면 따먹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욕구가 아예 없었으면 욕망이나 욕심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유혹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유혹을 받을 때 남 탓하지 말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탓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어쨋거나 우리 인간은 시련과 시험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욕망 때문에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는 존재이고, 저도 지난 주에 말씀드렸듯이 미풍에도 흔들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어제도 아침에 일어나니 왠지 모르는 불안과 뭔지 모르는 두려움에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성체가 모셔져 있지 않지만 기도방에 들어가 저의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께 그대로 열어 보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흔들리는 저를 붙잡아주신다는 느낌이 들고, 저도 주님을 꽉붙잡고 매달리게 되었으며 그래서 기도방을 나올 때는 주님과 제가 더 단단하게 하나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실 흔들리면 더 꽉 붙잡게 되지요. 나무에 올랐는데 밑에서 흔들면 떨어지지 않으려 오히려 더 꽉 붙잡잖아요?
시험과 시험이 나의 믿음을 흔들 때, 악마가 두려움과 불안을 이용하여 나의 마음을 흔들 때, 그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풍랑을 보다 물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주님만 보고 주님을 더 꽉 붙잡아야 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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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깨달음의 여정-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며 와닿는 첫 느낌은 주님의 인간에 대한 참 깊은 좌절감입니다. 창세기의 하느님이나 복음의 예수님이나 똑같습니다. 이는 때로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보면서도 때로 느끼는 좌절감이기도 합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참 구제 불능같다는 불경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는 광야인생 제대로 미쳐 살면 성인이 되고 그렇지 못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주저없이 단언하곤 합니다. 참 사람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평생공부가 사람되는 공부요, 평생공부해도 될까 말까한 참사람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인간 창조에 대해 후회하고 아파하는 마음이 실감있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내가 그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마음에 들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사람들같습니다. 그 장구한 세월이 지난 오늘에 주님께서 보셔도 똑같은 인간 현실에 깊은 좌절감을 지닐 듯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불끈 솟았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막연히 남탓 할 것 없이 나부터 참사람이 되고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평생 분투의 노력을 다해 보자는 결의입니다.
삶은 부단한 선택입니다. 참사람되고자 하는 선택보다 고귀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선택에 이어 부단한 의식적 훈련에 습관화입니다. 참 요즘 제가 많이도 강조한 선택-훈련-습관의 도식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반갑게 발견되는 모델, 한사람이 바로 노아입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8절에 이어 생략된 9절까지 내용입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Noah walked with God)’라는 영어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직역하면 평생 하느님과 함께 걸어갔다는 것이니 평생 도반, 평생 동반자 하느님입니다. 앞서 5장 24절에 나오는 에녹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소망이 담겨 있는 서품 상본의 성구이기도 합니다.
‘에녹은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longer here, for God took him)’
참 멋지고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죽음 없이 승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에서는 에녹, 모세, 엘리야 셋을 승천한 인물로 여깁니다. 에녹 역시 평생 도반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걷기의 도보 운동을 할 때는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저는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그렇게 합니다. 이 또한 복된 영성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가까이 있는 제자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시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악한 성향, 부패와 타락의 상징인 누룩에 견주어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주의를 시켰는데 동문서답식으로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며 현실적 걱정합니다. 제대로 경청하지 않고 기억하지 못하는 완고한 영혼들입니다.
창세기의 악한 사람들이나 복음의 완고한 제자들 대동소이 무지의 악에서, 무지의 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입니다. 참 고질적 인간 마음의 질병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완고함, 탐욕, 질투등 온갖 악의 원천이 무지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 동방영성에서 참 많이 강조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인간, 인간의 부정적 정의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무지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이어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4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상기시키며, 다시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로 끝맺습니다. 망각은 영성생활의 적입니다. 기억 없이는 영성생활도 없습니다. 영성생활은 기억입니다. 주님 은혜 잊지 말고 기억하라 얼마나 많이 강조합니까?
기억하여 현재화하여 살기 위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기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말그대로 기억의 훈련입니다. 이래서 본의 아니게 맞이하는 치매가 영성생활에 얼마나 큰 재앙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비관할 것도, 좌절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포크레인으로 뽑아놓은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을 보며 장구한 세월, 침묵중에 묵묵히, 살기위해, 뿌리내리기 위해, 하루하루 날마다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치열한 배나무들이었는지 생각하며 제 믿음의 뿌리를 연상했습니다. 이런 믿음의 뿌리를 상징하는 거대한 배나무 뿌리들은 참 좋은 희망의 표지가 되어 우리의 분발의 의욕을 북돋아 줍니다. 다음 시편 말씀과 찬미가의 기도도 참 좋은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시편40,9)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 주소서.”(월요일 3시경)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요, 우리 마음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목적 없는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무지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여정, 회개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에 따라 주님을 닮아감으로 무지에서 해방되어 겸손하고 지혜롭고 순수하고 의로운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슬라브인의 사도들이라 칭하는 데살로니카 출신 메테디오 주교와 치릴로 수도자 형제의 기념일입니다. 9세기 성인 형제들로 이들의 평생 분투의 노력도 감동적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존의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외에 슬라브의 사도들인 치릴과 메토디우스의 두 수도자와 함께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다 성녀와 스웨덴의 브리지따 성녀, 그리고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함으로 모두 6명 성인이 유럽 대륙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늘 생각하는바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은 평생 휴식이 없었다는 것, 평생 고통이 따랐다는 것, 고통중에도 내적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읽은 어느 베네딕도회 아빠스의 묵상글도 좋은 힘이, 격려가 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것입니다. 결국 아픔도 사라집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 인생경주에서 우리의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다리의 고통을 느낄 때 동료 경주자들도 똑같이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느긋해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통은 느긋하라(slow down)는 신호가 아니라 더욱 힘차게 달리라(speed up)는 신호입니다. 평범함과 위대함은 이런 순간들에 의해 결정됩니다."
영성생활은 경주와 같습니다. 유혹의 순간은 위기이자 기회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우리는 편안함을(for comfort)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위대함(for greatness)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는 복음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의로움(righteousness)이요, 이것이 아름답습니다(beautiful).” 프란치스코 교황도 신자들에게 “믿음은 최소한도(minimum)의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대한도(maximum) 열망하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부단히 위대함을 추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의로운 삶이요 아름다운 삶이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의롭고 아름다운 깨달음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끝으로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 한연을 나눕니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고 위대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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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21)
오늘 복음(마르8,14-21)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인 루카복음 12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그들의 위선을 조심하여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거짓과 위선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우매함을 보시고,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을 상기시키시면서,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도 하신다고 묵상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가 무엇을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일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아닐까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전례의 최고 등급으로 자리 잡고 있고, 성사 중의 성사인 성체성사(미사)를 통해서 매일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수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삶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는 변화, 내가 먼저 낮아지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죽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변화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들을 통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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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마르 8, 27)
빵이 넘쳐나도
빵은 늘
부족합니다.
빵을 먹으며
살아도 빵을
모릅니다.
빵의 정제성이
신앙인의
정체성입니다.
빵은 우리에게
그냥 오지
않습니다.
사랑과 정성
희생으로
우리에게 옵니다.
빵이 되는
빵의 여정이
사랑의
여정입니다.
빵이신
예수님을
새까맣게 잊고 사는
우리입니다.
빵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너무도 빨리
믿음이 식습니다.
우리의 믿음이자
빵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모르고
살아갑니다.
믿음에게서
멀수록 허기짐은
더욱 가깝습니다.
빵 같은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쓸데없이 커져버린
우리의 자아입니다.
별일 없는 일상이
사실은 빵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놀라운
일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빵을 통하여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너도나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너도나도
서로에게
빵 같은 사랑을
하라며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몸!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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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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