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물 /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만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이 시의 샘물은 우주적 총체를 상징하며 일체 존재의 가능성의 원천이다. 시적화자는 숲 속에 존재하는 맑은 샘물과 하늘과 바람을 통해 삼라만상을 느낀다. 화자는 물에 비친 자신의 존재를 통해 스스로가 물에 잠긴다. 이것은 우주와 나,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시적 화자가 느끼는 절대 순수, 절대고독을 샘물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 안에는 우주에 대한 화합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청시(靑枾 )/ 김달진
유월의 꿈이 빛나는 작은 뜰은
이제 미풍이 지나간 뒤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살찐 암록색 잎새 속으로
보이는 열매는 아직 푸르다
청시(靑枾)는 푸른 감이라는 뜻이다.이 시의 시간적 ㆍ공간적 배경은 각각 유월과 작은 뜰이다. 숨은 1인칭 화자 '나'는 미풍이 지나간 뒤 작은 뜰 안에 있는 식물기호 감나무 가지, 잎새, 열매를 바라본다. 그런데 작은 뜰에 있는 식물기호들은 배경의 피사체로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즉 감나무 가지에 붙은 잎새가 흔들리고 잎새 속으로 열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각각의 식물기호들은 개체 생명의 자기 조직화 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리고 마지막 행 '열매는 아직 푸르다'는 "사물의 질서로부터 쓰임새를 결정적으로 제거해 놓은 것"으로 열매의 수확이 아닌 식물 생명력 자체에 시선을 두게 한다. 또한 생명체의 원형이며 결실을 나타내는 식물기호 열매'를 동해 생명진행 과정을 유추할 수 있으며 시각적 색채 이미지 '암록색'과 푸르다'를 통해 식물의 생명력을 한결 도드라지게 드러낸다.
(청시/백석 별 많은 밤/하늬바람이 불어서/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
목련꽃 / 김달진
봄이 깊었구나
창밖에 밤비 소리 잦아지고
나는 언제부터인가
잠 못 자는 병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난밤 목련꽃 세 송이 중
한 송이 떨어졌다 이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 줄었구나
이 우주에서 목련꽃이라는 존재는 하찮은 존재이다. 무한한 우주에서 목련꽃 하나가 사라진다고 해서 해 될 것도 없고 표시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화자는 그것을 느낀다. 목련꽃 이 떨어진 것을 보고 우주 한 모퉁이에 꽃 한 송이가 줄었다는 것에서 우리는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다. 자연현상에서 우주적 생명감각을 일깨우는 그의 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시라 하겠다. 그는 불가에 입문하여 승려의 신분에서 시작활 동을 했으며 파계 후에도 많은 불교경전과 선시, 동양고전 등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불교사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그는 동양적 정밀과 달관에서 오는 청정한 직관, 무용의 정식에 정신에 기초하여 종교적 신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실적 좌절이나 번민을 뛰어 넘을 지순한 시선을 획득하고 있기에 불교사상적 측면에서만 평가될 수 없다
김달진 시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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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김달진(金達鎭, 1907년 2월 4일~1989년 6월 5일)은 시인이자 한학자이다. 호는 월하(月下)이며, 경상남도 창원 출생이다. 1932년 조선일보에 현상 당선하여 시단에 등장. 1934년 《시원》 등에 〈모란〉(牧丹) 등을 발표했다. 동양적인 인생관을 가진 시인으로 1939년 시집 《청시》(靑枾)를 냈고, 《장자》(莊子)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수학했고, 광복 후에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선린상업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1954년 해군사관학교 교관, 1973년 동국역경원 위원을 역임했다.
생애
월하(月下) 김달진은 무위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한국 시의 정신주의적 세계를 확고히 한 시인이다. 1929년 ≪문예공론(文藝公論)≫ 7월호에 양주동의 추천으로 <잡영수곡(雜詠數曲)>이 실리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뒤로 줄곧 사상과 관념과는 거리가 먼 시를 썼다. 민족의 현실 앞에 절망하다가 우연히 찢어진 벽지 사이의 초벌 신문지에서 ‘불(佛)’ 자를 발견하고 입산을 결심, 1934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김운악(金雲岳) 스님을 은사로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그해 <유점사 찾는 길에>를 ≪동아일보≫에 발표하고, 1935년 시 전문지 ≪시원(詩苑)≫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같은 해 <나의 뜰> 외 여러 작품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1935년 백용성(白龍城) 스님을 모시고 함양 백운산 화과원(華果院)에서 수도생활을 했으며, 이듬해 1936년에는 유점사 공비생(公費生)으로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詩人部落)≫ 동인으로 참가해 11월 창간호에 <황혼>을 발표하고, 1938년에는 <샘물>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는 등 작품 활동을 이어 갔다. 1940년 9월에는 관념이나 이념을 내세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서정의 세계를 담은 첫 시집 ≪청시(靑柿)≫를 청색지사에서 발간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은 그는 이광수의 권유로 잠시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했다. 1954년에는 해군사관학교에 출강하면서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출간했고, 이때부터 30여 년간 고전과 불경 번역 사업에 전력을 기울이다 1989년 6월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한국한시≫ 1∼3권과 ≪한산시≫가 나란히 출간되었으며, 1990년부터 인간이 구현해야 할 정신주의 영역을 일관되게 추구했던 시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김달진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https://m.blog.naver.com/kwank99/30025883591
<청시(靑柹)>
(1907∼1989)의 처녀시집. 1940년 9월 28일 [청색지사(靑色紙社)]에서 4․6판 127면으로 발간. 동양적인 관조의 세계가 고아(高雅)한 차원으로 승화․응축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비시(扉詩) 다음의 제1부 <꿈꾸는 비둘기>에 22편, 제2부 <토련(土蓮)>에 16편, 제3부 <그 여자의 눈동자>에 12편, 제4부 <물 속에 빠지는 새>에 28편, 제5부 <풍경초(風景抄)>에 6편, 도합 84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이 [시인부락] [시원] 등의 동인으로 활약한 초기의 시편이 모두 수록되어 있어 중요한 시집이기도 하다. 특히 저자는 동양정신의 차원 높은 경지를 이 시집 가운데 순화․융해(融解)하면서도 한국적인 일면에 치우치지 않고, 범동양적(凡東洋的)인 경지를 개척했다.
다시 말해서, 불교적․유교적 정신세계를 대담하게 시로 실험하여 1940년대의 우리 문단을 풍미하던 모더니즘운동을 배격하고, 자기 나름의 세계에 정착하여 동양정신의 발굴을 위한 노력의 일단으로 펴낸 것이 이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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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 문학상] 김달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세속 벗어나 세상을 관조한 시인-한학자
월하(月下) 김달진 시인은 생전 평생을 한결같이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을 관조하며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한 시인이요 한학자다. 세속의 명리를 깃털보다 가볍게 여긴 시인의 삶은 천민자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 사표(師表)가 되기에 충분하다.
1907년 2월 경남 창원군 웅동(현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난 월하는 항일 민족 기독학교인 계광보통학교를 졸업했다.1926년 서울 경신중학 재학중 일본인 영어교사 추방운동을 주도하다 퇴학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인간이 지향해야 할 숭고한 정신세계 추구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모교 계광보통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1929년 순수 문예지 ‘문예공론’에 시 ‘잡영수곡(雜詠數曲)’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시인은 ‘시원’‘시인부락’‘죽순’의 동인으로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당시 ‘유점사를 찾는 길에’‘나의 뜰’‘샘물’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러나 항일교육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계광보통학교가 폐교되자 민족 현실에 절망한 시인은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에 매진했다. 시인은 1936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 불경 연구의 길을 걸었다. 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40년 시집 ‘청시(靑枾)’를 발표했다. 유점사로 돌아간 시인은 1941년 ‘불령선인’이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을 때려 눕히고 중국 용정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소설가 안수길을 만나 그가 발간하던 잡지 ‘싹’에 ‘향수’ 등 시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미지 확대대표시집 ‘청시’
대표시집 ‘청시’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서울을 떠나 창원 남면중학교 교장, 해군사관학교 교관 등을 거쳐 1973년 동국대학교 역경원 역경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에 ‘한국선시’‘법구경’‘금강삼매경론’ 등 불교서적도 번역했고 ‘장자’‘한산시’ 등 동양고전을 우리말로 옮겼다. 이러다 보니 자연히 시작 활동은 뜸해져 문단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역경 작업에 몰두하던 시인은 1967년 ‘임의 모습’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재개한 이후 ‘벌레’‘속삭임’‘낙엽’‘포만’ 등을 발표했다.1983년 불교정신문화원에 의해 한국고승석덕(碩德)으로 추대된 시인은 시전집 ‘올빼미의 노래’와 장편 서사시집 ‘큰 연꽃 한 송이 피기까지’ 등을 펴냈다.1989년 6월 ‘한국 한시’(전 3권)의 완간을 앞두고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달진 시인은 일제시대부터 제도권 문단의 편입을 거부하고 고고한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이 시 속에도 오롯이 녹아들어 그만의 순수한 시적 영토를 지켰다.
시인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관념에도 편벽되지 않고 자연 본연의 모습을 질박한 언어로 담아냈다.“여기 한 자연아(自然兒)가/그대로 와서/그대로 살다가/자연으로 돌아갔다./ 물은 푸르라/해는 빛나라/자연 그대로./이승의 나뭇가지에서 우는 새여./빛나는 바람을 노래하라.”(‘비명(碑銘)’)
●동양고전·한시·불교서적 번역에도 힘써
시인의 시어는 평이하다. 하지만 청아한 정신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하는 시인의 도저한 시적 상상력은 끝간 데가 없다. 시인의 작품은 물질만능주의에 휘둘리는 이 시대에 인간 본연의 순정한 본성을 일깨워 주는 마력의 힘을 발휘한다.
시인의 작품은 자연에 대한 관조와 종교적 초월의 경계 속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곧 우리 시사(詩史)에 면면히 이어져온 순수 서정시와 동양적 미학을 접목,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려는 몸짓이다.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으로 대표되는 동양적 사유의 전개, 그것이 바로 월하 시의 요체다.
김달진문학상 운영위원인 오세영(서울대 명예교수) 시인은 “월하의 시세계는 서구의 이미지스트적 감각과 한국의 토속적인 자연, 동양사상의 합일로 요약된다.”면서 “시인의 작품들이 은둔생활에 가까운 생활로 대부분 묻혀 있는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려면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