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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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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와 징조 스크랩 황장엽 망명, 7년간 숨겨졌던 충격비화. |
아이린 추천 0 조회 1,007 17.09.05 05:5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황장엽 망명, 7년간 숨겨졌던 충격비화 ▼

클릭 실행▶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detailpage&v=JE0VjtP_xvY

 

김일성이 요르단의 국가자문평의회 대표단과 회견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할때의 황장엽(왼쪽에서 2번째).

 

소련을 방문하기위해 평양역을 출발하는 김일성을 환송하기위해 나온 김정일과 황장엽(김일성으로부터 오른쪽 2번째).

 

지난 1997년 7월10일 안기부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황장엽, 김덕홍씨.

 

서울도착 3일째를 맞은 황장엽씨가 안가에서 TV 보는 모습.

 

 

 

이명산, "황장엽의 망명과 숨은 이야기"
송두율=노동당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
올인코리아 편집인/이명산 북한전문가


아래의 글은 김현희, 김신조, 최은희, 황장엽, 김덕홍 등을 심문했던 수사관의 황장엽에 대한 증언이다. 이명산 선생의 송두율에 관한 다음의 주장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국내에서는 황장엽이 재독학자 송두율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폭로하였는데 노무현정권과 친북단체들이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반발하였고, 노무현정권은 송두율 (1944년 10월 12일생)을 서울에 불러들여 친북세력의 이론적 정신적 지도자로 심어두려고 의도했으나 법원의 조사에서 황장엽의 진술이 사실로 드러나니까 노무현은 송두율을 관대히 처분해달라고 호소하였고, 그 당시 법원은 그가 독일시민인고로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면서 북한을 드나들며 이적행위를 하였다 할지라도 국가보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며 2004년 8월에 그를 서둘러서 독일로 돌려보냈다.

송두율이 법원조사를 받고 있을 때 나는 은퇴 후 서울을 잠시 방문하고 있었는데 송두율 담당 검사들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1998년 후반기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근무하면서 베를린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익대표부>에 배치되어있는 북한의 통일전선부 소속 대남공작원 <김00>의 활동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때 북한은 독일과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재독공관을 <이익대표부>라고 불렀다. 대남공작원 <김00>은 독일과 주변국가에 거주하는 30여명의 교포들을 포섭하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치밀한 공작활동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두율에 관해서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그를 만났고 북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8년 말에 그가 기밀문서 관리를 소홀히 하여 컴퓨터에 입력된 그의 공작활동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은 채 한국의 안기부 조직망에 노출된 사실이 발각되어, 갑자기 평양에서 임기만료 전에 본국소환명령이 떨어지자 중형을 예감하고, 북에 어린 아들과 딸을 남겨둔 채로 유럽의 제3국을 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미국에 온 직후 내가 그를 약 3개월간 심문하였는데 그때 그는 송두율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는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었다.



(새로운 중언)
한 지성인의 고독한 최후, 황장엽의 망명과 숨은 이야기(북한전문가 이명산)

1997년 2월 12일 북한노동당비서 황장엽이 남한으로 망명한 사건은 1986년의 신상옥-최은희의 북한탈출과, 1987년의 대한항공-858기 폭파사건과, 1994년의 김일성 사망에 버금가는 대형뉴스였다. 황장엽과 같은 거물급 인사의 망명은 김일성 사망 후 김정일체제하의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치르면서 국내사정이 극도로 혼란스러울 때의 일 이였기 때문에 북한의 체제유지에 심각한 타격이었다. 그해 여름에 나는 미국정부를 대표하는 4인조 조사관의 한사람으로 서울에 가서 황장엽과 그의 동반자 김덕홍을 심문하였다.

그때 4인조 조사관은 국무성에서 한사람, 국방정보국에서 한사람, CIA의 분석국에서 한사람, 그리고 내가 CIA의 공작국을 대표하는 심문관이었다. 그러면 나는 지금부터 황장엽이 어떠한 사람이었으며 무슨이유로 망명을 단행하였는지, 지금까지 많은 추측기사와 비약적인 평가들이 있었으나, 그를 직접만나고 심문한 심문관의 한사람으로 숨은 이야기들을 공개하겠다.

가. 망명동기

황장엽은 1923년 2월 17일 평안남도 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일본의 중앙대학교 법과에서 수학하였고 소련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유학하였다. 그는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교의 총장과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1984년 4월부터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비서를 역임했고, 1993년 12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말년에는 그가 창시한 주체사상의 창달과 국제보급에 전념을 다 하였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학자였고 김일성 생존 시에 그를 최대한으로 떠받드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는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으며 학자로서의 그의 위상과 정치적 권위에 아무도 도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었다. 1980년 10월 노동당 6차 전당대회에서 김용순이 중앙당 국제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84년 2월에 그는 당의 국제부 요원들도 외교일꾼이므로 사교춤정도는 알아야한다고 간부들과 젊은 여성들을 동원하여 매일 밤 난잡한 춤판을 벌였다가 당 조직부의 비판을 받고 해임되었다. 1년 6개월간 평남 덕천탄광에서 <혁명화교양>이란 명목으로 중노동을 하다가 김일성의 딸 김경희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1985년 8월에 당 국제부에 복직하고 1988년 12월에는 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는 1990년 5월에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발탁되고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되었다. 1990년 9월에는 북일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에서 조선노동당과 일본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공동선언을 이끌어낸 북한 측 주역을 했으며, 1992년 1월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아놀드 캔터 국무부차관과 미북수교를 위한 회담을 가졌다.

1992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이 되었고 1992년 12월에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면서, 1991년 5월에 허담이 사망해 공석으로 있던 노동당 대남담당비서가 되었다.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1994년 6월에는 김영삼 김일성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예비회담으로 남한의 통일부총리 이홍구와 만났다.

김용순은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고, 술 잘 마시는 사교적 인물이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친절하여 대인관계에서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다. 사생활에서는 김정일과 손발이 척척 맞는 패거리였고, 기쁨조 파티에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단골손님이었다. 김정일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사람들 중에 음주의 최강자를 뽑으라면 장성택, 김용순, 계응태, 김기남 등이 있었으나 춤과 노래에는 아무도 김용순을 따를 자가 없었다.

공무에서도 김정일의 비위를 아주 잘 맞추는 김용순을 간부들 사이에서는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그를 <아첨꾼>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황장엽과 김용순은 11세의 나이차이가 있었지만 둘 다 모스크바 유학생 출신이며, 당의 국제담당비서와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직을 역임한 일종의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학자풍의 황장엽은 김용순을 버릇없고 건방진 사람으로 취급했고, 김용순은 황장엽을 거만하고 융통성 없는 늙은이로 생각했다. 김용순은 체질적으로 바람기가 있었으며 숱한 염문을 퍼뜨린 사람이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남편 장성택 사이에 오랫동안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이혼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김용순은 김경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지냈으며 그 사실을 알게 된 황장엽은 김일성에게 고하여 김용순을 질책하고 근신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황장엽의 운명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김용순과 김경희는 황장엽에게 애를 먹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워낙 깔끔하고 빈틈이 없는 황장엽에게는 걸고넘어질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자 황장엽은 자기를 신임하던 김일성이 없는 북한은 공허했고 김정일의 통치스타일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낀 황장엽은 주체사상 창달과 전파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노력하던 중, 모스크바 주체사상 강연회에 가서 심혈을 기울인 강연과 토론에서 많은 교수와 학자와 학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고 위대한 주체사상 학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사실을 파악한 김용순은 김경희와 합세하여 김정일에게 황장엽을 거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가 제창한 철학이며 통치이론이지 어째서 황장엽의 학설이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일개 학자로서 우리아버지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한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위대한 수령을 모독했으며 그분의 명예를 가로챈 반역자이다>라고 하면서 황장엽을 비난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숙청하기위해 더 결정적인 약점을 노리고 있을 때, 황장엽은 위기감을 느껴 남한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고, 1997년 2월 12일에 그 결심을 결행하였다.

나. 서울에 와보니

남한에 온 황장엽은 너무나 실망이 컸다. 자기는 북한의 비참한 현실에 환멸을 느껴 목숨을 걸고 남으로 망명을 했지만, 남한에서는 그토록 놀라운 경제적 풍요와 자유분방한 세상에 살면서 어째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편들고 좌경종북세력들이 공개적으로 설치고 있는데 정부가 방심하고 방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망명 초기에는 안기부가 그를 보호하였으나 김대중 노무현 집권기간 (1998-2008) 10년 동안에는 국가정보원 (국정원) 안가에 연금되어 있었으며 모든 활동에 제한을 받았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강연과 논문과 출판을 통하여 북한의 실상을 폭로하는데 노력하였고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북한의 반인륜적 인권말살과 체제모순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국제사회가 협력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민감한 사항에 대하여는 그가 소신대로 말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유는 10년간 친북정권의 대북정책과 황장엽의 북한비판이 불협화음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햇볕정책에 대립각을 조성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황장엽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망명동반자인 김덕홍은 황장엽이 그 재갈을 뱉어버리고 목숨을 걸고 하고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일이 있었다.

임수경이 탈북자들을 <배신자>라고 말한 것처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황장엽을 김정일에 대한 <배신자>라고 은근히 미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이목도 있고 황장엽의 정치적 비중 때문에 그를 함부로 압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황장엽은 미국방문을 희망하였고 미국정부도 그의 방미를 요청했으나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신변안전을 구실로 김대중이 그의 방미를 허락하지 안했으나, 노무현 시절에 원로정치인 소석 이철승과 미국의 북한인권운동가 디펜스포럼 회장 수잔 쏠티의 막후교섭으로 2003년 10월 27일부터 11월 4일까지 그가 워싱턴에 다녀왔다. 그러나 4명의 경호감사원이 밀착 동행하였고 그곳에 가서도 황장엽은 소신껏 하고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다만 노동당 군수공업담당 비서 전병호의 말을 근거로 북한의 핵개발수준과 비참한 인권탄압실태와 체제모순에 대하여 중언하였고 김정일의 제거를 국제사회에 강력히 호소하였다.

국내에서는 황장엽이 재독학자 송두율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사실을 폭로하였는데 노무현정권과 친북단체들이 사실무근이라고 강력히 반발하였고, 노무현정권은 송두율 (1944년 10월 12일생)을 서울에 불러들여 친북세력의 이론적 정신적 지도자로 심어두려고 의도했으나 법원의 조사에서 황장엽의 진술이 사실로 드러나니까 노무현은 송두율을 관대히 처분해달라고 호소하였고, 그 당시 법원은 그가 독일시민인고로 외국인으로 취급하고 외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면서 북한을 드나들며 이적행위를 하였다할지라도 국가보안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며 2004년 8월에 그를 서둘러서 독일로 돌려보냈다.

송두율이 법원조사를 받고 있을 때 나는 은퇴 후 서울을 잠시 방문하고 있었는데 송두율 담당 검사들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1998년 후반기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근무하면서 베를린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익대표부>에 배치되어있는 북한의 통일전선부 소속 대남공작원 <김00>의 활동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때 북한은 독일과 외교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재독공관을 <이익대표부>라고 불렀다. 대남공작원 <김00>은 독일과 주변국가에 거주하는 30여명의 교포들을 포섭하고 그들을 상대로 하는 치밀한 공작활동을 총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두율에 관해서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주기적으로 그를 만났고 북에서 내려오는 새로운 공작지령과 공작금을 전달하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8년 말에 그가 기밀문서 관리를 소홀히 하여 컴퓨터에 입력된 그의 공작활동 내용이 완전히 삭제되지 않은 채 한국의 안기부 조직망에 노출된 사실이 발각되어, 갑자기 평양에서 임기만료 전에 본국소환명령이 떨어지자 중형을 예감하고, 북에 어린 아들과 딸을 남겨둔 채로 유럽의 제3국을 통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그가 미국에 온 직후 내가 그를 약 3개월간 심문하였는데 그때 그는 송두율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는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여 주었다.

송두율은 그가 비록 독일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대한민국은 그의 조국인데 <한겨레신문>을 통하여 그가 전개한 이론이나 주장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논리는 소위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황당무계한 이론으로, 북한의 모든 문제는 북한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분석해야한다는 시궁창 냄새가 나는 학설이다. 그는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존경한다고 하였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체성을 극구 부정하였다. 다시 말하면 북한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북한이 말하는 그대로 믿어야하며 역사의 날조도 그대로 믿고 남한에 대해서는 북한이 말하는 그대로 부정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노무현 시절에 송두율의 <내재적 접근법>을 따르는 학자들이 우리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와 노무현 밑에서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이종석을 지적할 수 있다.

1998년 7월에 그 당시 잡지 월간조선의 김용삼 기자가 황장엽과 김덕홍을 면담하였는데 그들이 세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증언 하였다. 첫째는 1980년 5.18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실과, 둘째는 황장엽이 망명을 결행하기 전에 북한에서는 황장엽과 뜻을 같이하는 몇 사람 고위급 인사들이 김정일 제거음모를 구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몇 사람은 죽고 아직도 한사람이 생존해 있으며, 그 방법은 김정일의 해외망명을 유도하는 일이며, 민중봉기로 그를 타도하거나, 비밀결사조직을 통하여 그를 처단하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황장엽의 아들 황경모는 호위총국 인맥을 통하여 김정일 암살을 계획한 일도 있었으나, 그 계획을 실행할만한 여건과 시간이 없어서 황장엽이 다급하게 망명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는 남쪽의 권력 깊숙한 곳에 김일성이 심어놓은 김일성의 충복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용삼 기자가 TV 인터뷰에 나와서 말할 때에 암묵적으로 표현하였고 남북관계나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말을 삼가고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안 했으나, 필자는 북한의 그 사람과 남한의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내가 이미 발표한 여러 편의 글에서 간접적으로 언급을 하였지만 독자들이 이해를 하였는지 못 하였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때가 되면 모든 사실이 자연스럽게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다. 지성인의 고독한 최후

그는 고독한 지성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북한에서 존경받는 최고의 정치인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회의 체제모순에 불만을 품고 남한으로 온 것을 환영하였으며, 그가 김정일을 비판하고 북한의 참상을 폭로한 것은 어느 누구의 말 보다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특별히 많은 남한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 북한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였다. 반면에 언론일각에서는 황장엽이 40여 년간 북한의 최고 권력자 주변에서 영화를 누렸고 <주체사상> 이론으로 일당독재 일인독재의 기틀과 수령절대주의를 합리화하는데 봉사하였으며 자유민주주의 민족통일이나 평화통일을 위하여 꿈꾸거나 특별히 노력한일이 없으면서 김정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남한으로 도망쳐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2010년 10월 10일에 강남구 논현1동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숨을 거두었을 때 이명박정부가 그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뜻을 밝히자 그의 부당성을 지적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가 김정일을 비판한 것이 공로라고 인정을 한다면 남한에는 그보다 더 강도 높게 김정일을 비판한 인사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그들도 죽으면 현충원에 가야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면서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명박정부는 그 일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황장엽에게 1등급훈장인 무궁화훈장을 추서하였고 결국 2010년 10월 14일에 그를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

필자는 그 일을 아주 잘 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은 가슴이 넓은 나라이며, 황장엽이 과거에는 김일성을 위해 평생 충성을 다 하였다 할지라도 그 일을 뉘우치면서 일단은 대한민국의 품에 들어왔고 마지막 인생을 대한민국을 위해 수고하고 노력하다가 갔기 때문에 그의 최후를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실은, 과거에 북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한 고위급 간부라 할지라도 일단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면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 하면 죽어서 국립묘지에도 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북으로 전달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떠나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장엽은 마지막 마무리를 잘 하였다.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며 평생 독립투쟁을 한 김구선생을 우리 모두가 존경한다. 그러나 그분이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남북합작을 추진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었다. 그 때 남북합작이 성사 되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주영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헌신한 영웅 중에 한사람 이었으나, 그가 말년에 소떼를 몰고 북한에 간 일이나 김일성을 위하여 평양에 체육관을 지어준 일은 아름답게 평가할 수가 없다. 그의 대북선심은 김일성의 체면을 세워주고 남한의 친북종북세력에게는 고무적인 사건이었으나 남북관계 개선이나 남한의 대북전략에 역행하였다. 김대중이 시작한 햇볕정책의 한 단면에 불과하였다.

황장엽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북에 남겨두고 남으로 왔다. 가족의 안전보다 북한의 참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가 탈출하지 못하면 어차피 숙청당할 것을 예감하고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후일에 그가 출판한 회고록에서 황장엽은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애절한 사연과 <자신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피를 토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그의 가족은 부인 박승옥과 아들 황경모와, 장성택의 조카딸인 며느리와, 두 딸과 두 손자가 있었다. 그가 남으로 망명한 후에 당이 아들과 며느리를 강제 이혼시켰고, 남은 가족은 1998년 중반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그해여름에 부인과 아들이 미화 9만 8,000불을 소지하고 평양을 이탈하여 중국으로 도피하려다가 평북 용천 부근에서 체포되고 1999년에 처형 되었으며, 딸과 손자들은 제14호 수용소에 보내졌다.

남한에서는 그가 북에서 떠나올 때 지참한 상당한 액수의 돈과 남한에서의 강연비와 책 출판을 통하여 벌어드린 돈으로 그가 10년간의 연금 상태에서 풀려난 후에 강남 논현1동에 6층짜리 건물을 구입하였고 총 30억대의 재산은 갖고 있었으며, 사망당시에는 그의 호적에 입적된 수양딸 68세의 <김숙향>과, 국정원이 소개하여 비서로 데리고 있던 49세의 엄모씨가 있었는데 그녀가 호적에는 입적되어 있지 않았지만 황장엽과

사실혼관계를 (Common Law Wife) 유지하면서 그들사이에 11살 멱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은 현제 미국유학중이다. 황장엽이 사망한 후에 그의 유산은 가족들 사이에 원만하게 분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장엽은 비참하거나 비겁하게 떠나지 않고 고독하게 떠났다. 민족분단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반신욕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떠났다. (山)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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