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배운 기억이 납니다. 서양문학을 알려면 성경을 읽어야 한답니다. 서구의 문화가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에 성경 속의 사상이나 내용이 은연중에 스며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신앙은 둘째 쳐도 성경의 내용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서구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으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가 사회와 문화를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긍정하든 부정하든 서구인들의 의식 속에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교와 유교 의식이 스며들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작품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삶이요 문화이니까요.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메시야’ 대망입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왔었고 또 다시 온다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실제 기독교 신자들은 메시야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으나 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가 오면 세상은 달라집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이 비로소 본래의 자리를 찾아 우리 모두가 바라는 이상세계, 신자의 표현으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전쟁도 없고 아픔도 슬픔도 없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도 없는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망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속되어 있으니 그렇게 이루어지리라 믿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사람이 존재한 이래 싸움과 전쟁이 있었고 살아남고자 하는 투쟁이 지속되었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로지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오래 살아남고자 그리고 조금 더 편하게, 아니면 좀 더 즐겁게 살고자 쌈질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지려고, 좀 더 나은 것을 가지려고 다툽니다. 개인들도 그렇고 나아가 국가들도 그렇습니다. 나라도 결국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조직이니까요. 개인들의 욕망의 집합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습니다. 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고 나라들이 서로 으르렁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는 서구사회가 대부분 봉건사회였습니다. 왕권이 좀 강해지면 전제군주국이 됩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제후들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굴복시켜야 합니다. 자신의 권익을 위해서 영주가 왕을 대적하여 싸우기도 합니다. 서로의 이익을 따져가며 제후들끼리도 연합하기도 합니다. 아니면 왕의 편에 서서 자기 이익을 추구합니다. 너무 강한 권력을 차지하고 있는 제후를 견제하고 그의 재산을 탐내면 왕은 그 제후를 제거하려고 노력합니다. 서로 자기 영역을 확장하고 유지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도 백성의 신망을 얻고 남다른 실력을 인정받은 왕이라면 나라를 통일하여 전제군주국으로 만들기도 수월할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을 움직이는 힘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물론 역사상 훌륭한 지도자들에게는 뛰어난 지도력과 더불어 남다른 성품이 있기도 합니다. 백성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품어주는 도량입니다. 그리고 편애 없이 공정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인간적인 품성에 더하여 뭔가 신탁을 받은 듯한 위엄을 지니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황제들이 등장하곤 했나봅니다. 따지고 보면 인간에 불과한데 자꾸 신이 되려고 스스로를 부채질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황제로도 모자라 ‘천황’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하늘이 정해준 지도자라는 의미이겠지요.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보다는 낫지요.
아무튼 신이 정해준 자라면, 그런 믿음이 심겨져 있다면, 사람들의 충성심이나 복종심은 특별해집니다. 그리고 때로 사람들은 그런 지도자를 원하고 기다립니다. 능력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성경에서 약속한 메시야와 세상이 바라는 구원자하고는 차이가 큽니다.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기다렸는데 그 메시야라는 존재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잡아 죽였습니다. 기막힐 일이지요. 반대로 생각하면 무슨 메시야가 그렇게 힘없이 당할 수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로서는 로마의 학정에서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전혀 다른 일을 한 것입니다.
사람 이름, 나라 이름 등등 알아듣기도 말하기도 힘든 용어들 속에서 복잡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충 땅 차지하기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황제가 자신의 왕권을 확장 유지하고자 다른 제후를 시켜 경쟁자인 공작의 가문을 멸절시킵니다. 다행히 모자가 목숨을 건져 도피합니다. 남의 땅으로. 완전 사막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산되는 ‘스파이스’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려 싸웁니다. 중세 유럽의 전쟁이 우주로 확장되어 벌어지는 느낌입니다. 그 규모가 그만큼 커집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에게는 메시야에 대한 신앙이 있습니다. 마치 메시야가 태어나서 애굽으로 피신한 듯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빗대어 기막히게 만들었다 싶습니다. 영화 ‘듄’(Dune)을 보았습니다. 2021년 작입니다. 2편을 기다리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