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8,1-6 마태오 13,47-53
하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던져진 그물과 같습니다. 고기잡이를 생각해 보면,
그물은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능한 많은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이 그물의 역할입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골라내는 것처럼, 하늘 나라는 충만해질 때까지 사람들을 모아들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을 초대합니다.아직 심판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이 오면, 그때에 비로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종말에 있게 될 심판을 언급하여 우리에게 의로운 삶을 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먼저 하늘 나라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가 의인이고 누가 악인인지 지금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주어진 셈입니다.
왜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살고,악을 저지르는 이들이 편하고
행복해 보이는지,하느님의 심판은 어디에 있는지,왜 하느님께서는 악한 사람들을
그냥 두시는지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그 답은 하느님이 아닌, 내 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도 죄를 짓고 실수를 하지만
지금 심판받지 않고 용서를 체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비유의 장점은 그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게 유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나의 삶 속에서 말씀의 뜻을 고민하고 그 의미를 찾게 합니다.
이렇게 하나씩 의미를 깨달아 가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늘 나라를 경험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
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8,1-6 마태오 13,47-53
마태오 복음서 13장에는 하늘 나라에 관한 여러 비유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 나라의 모습과, 마지막 날 하느님 나라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시작된 하늘 나라는 씨앗이며 새싹입니다.
그 하늘 나라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누룩처럼 이 세상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 나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때로 이 나라가
너무 미약하다고, 하늘 나라가 과연 우리 가운데 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답답해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늘 나라의 그 무력함은 하느님 자비의 표지이기도 합니다.
하늘 나라가 완성되는 날에 가라지는 불태워지고, 나쁜 물고기는 밖으로 던져집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마태 13,47)가 모여 있는 그물은 아직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직 기회를 주시는 때이고, 하느님께 돌아가도록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18장에서는 옹기장이가 그릇을
빚으면서 잘못된 그릇을 다시 고쳐 빚지만, 19장에서 이미 그릇을 구운 다음에는
잘못된 그릇을 깨뜨립니다. 구워진 그릇은 다시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18장은 아직 하느님께 돌아갈 여지가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19장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를 나타냅니다.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시간, 하늘 나라가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있도록 두시는 하느님께서는 가라지를
불태우시는 하느님이시고, 온갖 고기를 모아들이시는 하느님 또한 나쁜 물고기를 버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18,1-6 마태오 13,47-53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신학교 2학년 때입니다. 중세철학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의 범위가 많았고,
공부할 내용도 많았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종이에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험을 보자,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뜻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제 자리에 오셔서 시험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부정한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시고 웃으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잠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시편은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었는데 순간 영감이 떠올랐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중세철학사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거절을 잘못하는 성격 인데다가, 맡은 일은 잘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엉키고 복잡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주님께서 일을 말끔하게 해결 주곤 하셨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확진되어서 일정이 연기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은 없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했을 일들도
하느님께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렸을 때는 소달구지를 종종 보았습니다.
덩치가 큰 소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따르는 것은 ‘코뚜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에게는 멍에가 될 수 있지만 주인에게는 소를 다스리는 도구가 됩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주고, 안전한 집을 마련해 줍니다.
코뚜레는 주인과 소를 이어주는 안전핀과 같습니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지면 연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맞습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소위 ‘386’세대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부모를 결정하지 않았고,
저의 성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양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제가 선택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위 ‘뺑뺑이’ 세대였습니다.
마치 옹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저를 오늘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 제가 태어난 집안, 제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오늘까지 감사드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감사드리면서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공간과 시간으로 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서 3, 20)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는 겸손한 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