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시모음 55편 ☆★☆★☆★☆★☆★☆★☆★☆★☆★☆★☆★☆★ 《1》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힘
김기택
다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뛰는 강아지 눈이 있는지도 모르고 쳐다보는 강아지 꼬리가 있는지도 모르고 흔드는 강아지
아직 이빨이 되지 않은 이빨은 순하고 아직 발톱이 되지 않은 발톱은 간지럽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강아지가 꼬리를 흔든다 멀리서 나무들도 덩달아 가지를 흔든다 머리에서 나무로 이어진 긴 등뼈가 보일 것 같다
뛰고 흔들고 달려드는 힘들이 솟아나 산에는 나무들이 가득하다 발톱 달린 뿌리들이 땅속에서 달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와 꼬리 사이 머리와 산 강 하늘 사이 등뼈들이 돌아다니는 모든 길이 내 다리를 타고 올라와 꼬리뼈를 흔든다
하늘이 와서 강아지 눈을 닦아준다 나뭇잎 바람이 와서 표정을 간질여 준다 햇살이 와서 발바닥을 드높이 올려 준다
출처 : 계간 《시인수첩》 (2020년 가을호) ☆★☆★☆★☆★☆★☆★☆★☆★☆★☆★☆★☆★ 《2》 개
김기택
먹을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개는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고 내 몸 뒤 끝없이 먼 곳을 철망과 담 산과 구름과 하늘 먹을 것이 아닌 모든 것들을 뚫고 아득하고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깨끗하다 고막이 제거된 개의 눈 속에서 먹은 것은 남김없이 영양분이 된 영양분은 남김없이 살이 된 살은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된 개의 눈 속에서 생로병사를 넘어 어디에선가 먹을 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개의 눈 속에서 ☆★☆★☆★☆★☆★☆★☆★☆★☆★☆★☆★☆★ 《3》 걸레질하는 여자
김기택
걸레질을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한다. 허리와 머리를 깊이 숙여야 한다. 엉덩이를 들어야 한다. 무릎걸음으로 공손하게 걸어야 한다. 큰절 올리는 몸으로 아기 몸의 때를 벗기는 마음으로 닦지 않으면 방과 마루는 좀처럼 맑아지지 않는다. 어디든 떠돌아다니고 기웃거리고 틈만 보이면 비집고 들어가 눌러앉는 먼지들: 오라는 곳 없어도 밤낮없이 찾아오고 누구와도 섞여 한 몸이 되는 먼지들: 하지만 정성이 지극하면 먼지들도 그만 승복하고 고분고분 걸레에 달라붙는다. 걸레 빤 물에 섞여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렇게 그녀는 방과 마루에게 먼지에게 매일 오체투지하듯 걸레질을 한다. ☆★☆★☆★☆★☆★☆★☆★☆★☆★☆★☆★☆★ 《4》 겨울을 기다림
김기택
두꺼운 털 같은 추위 둥글게 말아 웅크리면 따뜻해지는 추위 너무 껴입어서 무거운 추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추위 이빨도 발톱도 없는 꼬리를 흔드는 추위 배고프면 더 신나게 흔드는 추위 숨쉴 때마다 텅 빈 위장에 밥 대신 들어앉아 배고픈 배 흔들며 뛰어노는 추위 뱃가죽과 등뼈가 서로 얼어붙으면 저절로 허리가 공손하게 굽어지는 추위 정신통일하여 밥 생각을 하면 가만히 졸다가 따뜻해지는 추위 ☆★☆★☆★☆★☆★☆★☆★☆★☆★☆★☆★☆★ 《5》 계란 프라이
김기택
자궁처럼 둥글고 정액처럼 걸죽하고 투명한 액체인 병아리는 이윽고 납작해진다 후라이팬 위에서 점점 하얗게 굳어지면서 꿈틀거린다 뜨거운 식용유를 튀기며 꿈틀거린다 불투명한 방울을 들썩거리며 꿈틀거린다 고소한 비린내를 풍기며 꿈틀거린다 굳어버린 눈 굳어버린 날개로 꿈틀거린다 보이지 않는 등뼈와 핏줄을 오그라뜨리며
한 번도 떠보지 못한 눈과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심장과 아무 것도 먹어본 적이 없는 노란 부리와 아무 것도 싸본 적이 없는 똥구멍이 평등하게 뒤섞여 굳어버린 계란 후라이 흰 접시 위에 담겨진다 ☆★☆★☆★☆★☆★☆★☆★☆★☆★☆★☆★☆★ 《6》 고속도로
김기택
거무스름한 길이 뽑혀져 나온다. 지름이 십 미터도 넘을 것 같은 굵은 밧줄이 뽑혀져 나온다. 지평선에서 산허리에서 숲에서 쉴새없이 뽑혀져 나온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치지 않고 뽑혀져 나온다. 박찬호의 직구 같은 속도로 뽑혀져 나온다. 거칠 것 없이 뽑혀져 나오는 속도에 다치지 않으려고 논과 밭, 나무들과 건물들이 좌우로 재빠르게 비켜선다. 산과 부딪치면 산이 단숨에 두 쪽으로 갈라지고 절벽이 가로막으면 밑으로 가차없이 기다란 구멍이 뚫린다. 뽑혀져 나온 길이 가만히 서 있는 자동차 바퀴를 맹렬하게 굴린다. 자동차는 가만히 있는데 바퀴는 맹렬하게 굴러서 바람이 전기톱으로 베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삼겹살처럼 얇고 넓적하게 잘린 바람이 창 틈으로 들어와 눈을 후벼파고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긴다. 올챙이 다리 달리듯 가로수와 전봇대와 건물에 시간이 돋아난다. 풍경은 속도와 반죽되어 윤곽이 지워지며 흐려지고 시간은 엿처럼 찍찍 늘어지며 창 밖으로 지나간다. ☆★☆★☆★☆★☆★☆★☆★☆★☆★☆★☆★☆★ 《7》 고양이 죽이기
김기택
그림자처럼 검고 발자국 소리 없는 물체 하나가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다. 급히 차를 잡아당겼지만 속도는 강제로 브레이크를 밀고 나아갔다. 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 밟는 것만큼도 덜컹거리지 않았으나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타이어에 스며든 것 같았다. 얼른 백미러를 보니 도로 한가운데에 털목도리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야생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호랑이나 사자의 이빨과 발톱이 아니라 잇몸처럼 부드러운 타이어라는 걸 알 리 없는 어린 고양이였다. 승차감 좋은 승용차 타이어의 완충장치는 물컹거리는 뭉개짐을 표 나지 않게 삼켜버렸던 것이다. 씹지 않아도 혀에서 살살 녹는다는 어느 소문난 고깃집의 생갈비처럼 부드러운 육질의 느낌이 잠깐 타이어를 통해 내 몸으로 올라왔다. 부드럽게 터진 죽음을 뚫고 그 느낌은 내 몸 구석구석을 핥으며 쫄깃쫄깃한 맛을 오랫동안 음미하고 있었다. 음각무늬 속에 낀 핏자국으로 입맛을 다시며 타이어는 식욕을 마저 채우려는 듯 더 속도를 내었다.
출처 : 《현대문학》 (2006년 12월호) ☆★☆★☆★☆★☆★☆★☆★☆★☆★☆★☆★☆★ 《8》 고요하다는 것
김기택
고요하다는 것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고요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당신은 곧 수많은 작은 소리 세포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숨소리…… 바람 소리 속에 숨어 있는 갖가지 떨리는 소리 스치는 소리 물소리 속에서 녹고 섞이고 씻기는 소리 온갖 깃털과 관절들 잎과 뿌리들이 음계와 음계 사이에서 서로 몸 비비며 움직이는 소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여운이 끝난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그 희미한 소리와 소리 사이에서 새로 생겨나고 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 촘촘해서 현미경 밖에서는 그저 한 덩이 커다란 돌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므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하답니다 하지만 한 모금 샘물처럼 이 고요를 깊이 들이켜보세요 즐겁게 폐 속으로 들어오는 음악을 들어보세요 고요는 가슴에 들어와 두근거리는 심장과 피의 화음을 엿듣고 허파의 리듬을 따라 온몸 가득 퍼져갈 것입니다 뜨겁고 시끄러운 몸의 소리들은 고요 속에 섞이자마자 이내 잔잔해질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흔들어도 마음은 돌인 양 꿈쩍도 않을 것입니다 ☆★☆★☆★☆★☆★☆★☆★☆★☆★☆★☆★☆★ 《9》 곱추
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 뿐이었다 가끔 등뼈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점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씹다 버린 껌.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껌. 이미 찍힌 이빨 자국 위에 다시 찍히고 직히고 무수히 직힌 이빨 자국들을 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 작은 몸 속에 겹겹이 구겨 넣어 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 그 많은 이빨 자국 속에서 지금은 고요히 화석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껌. 고기를 짓고 열매를 부수던 힘이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 다 짓이겨지지 않고 조금도 짖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은 껌. 살처럼 부드러운 촉감으로 고기처럼 쫄깃한 질감으로 이빨 밑에서 발버둥치는 팔다리 같은 물렁물렁한 탄력으로 이빨들이 잊고 있던 살육의 기억을 깨워 그 피와 살과 비린내와 함께 놀던 껌. 우주의 일생 동안 이빨에 각인된 살의와 적의를 제 한 몸에 고스란히 받고 있던 껌 마음껏 뭉개고 짓누르다 이빨이 먼저 지쳐 마지못해 놓아준 껌.
젓가락을 대보기도 전에 불길이 먼저 부드러운 혀로 구석구석 꽁치 맛을 본다. 꽁치는 불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위협적으로 입을 벌려 보지만 불은 아랑곳하지 않고 눈과 입까지 핥는다. 간지러운 듯 지느러미를 가늘게 떨고 배를 조금씩 들썩거릴 뿐 꽁치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붉은 혀에서 침이 흘러나와 꽁치에 번들번들 윤기가 흐른다. 게걸스럽게 끓는 침이 사방으로 튄다. 불길이 다 먹고 남은 꽁치 혓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꽁치를 젓가락들이 발을 동동거리며 기다리고 있다. ☆★☆★☆★☆★☆★☆★☆★☆★☆★☆★☆★☆★ 《12》 나귀
김기택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같이 쳐다보자 안 그런 척 나귀는 슬쩍 눈을 돌렸다. 긴 인조 속눈썹을 단 여학생 같은 눈을 조용히 내리깔았다. 털가죽 속에서 흰 뺨이 붉어졌을 것이다. 희고 길고 가는 손가락들을 뭉툭한 발굽 어느 곳엔가 얼른 감췄을 것이다. 눈알 속은 넓고 넓어 하늘이 다 보일 것 같고 내장과 비린내와 부끄러움이 다 들킬 것 같은데 그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고 바닥까지 들여다봐도 아까 보았던 그 여학생은 없고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열 여섯 시간을 견딘 무거운 책가방도 어디에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억센 등뼈와 딴딴한 근육과 거친 숨소리만 열심히 나귀를 견디고 있었다. 눈이 너무 커서 다 내리까는데 몇 분은 족히 걸린 것 같았다. 내가 쳐다보는 동안 나귀는 질긴 가죽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귀만 쫑긋 열어놓은 채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 귀야. ☆★☆★☆★☆★☆★☆★☆★☆★☆★☆★☆★☆★ 《13》 나무
김기택
대패로 깎아낸 자리마다 무늬가 보인다. 희고 밝은 목질 사이를 지나가는 어둡고 딱딱한 나이테들 이 단단한 흔적들은 필시 겨울이 지나갔던 자리이리라. 꽃과 잎으로 자유로이 드나들며 숨쉬는 모든 틈과 통로가 일제히 딱딱하게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이리라 두껍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자리이라라 뿌리가 빨아들인 맑은 자양들은 물관 속에서 호흡과 움직임을 멈추고 나무 밖의 거대한 힘에 귀기울였으리라 추위의 나폭한 힘은 기어코 껍질을 뚫고 들어가 수액 깊이 맵게 스며들었으리라 수액을 찾아 들어왔던 햇빛과 공기들은 그 자리에서 겨우내 얼었다가 독한 향기와 푸르고 진한 빛으로 익어갔으리라 해마다 얼마나 많은 잎과 꽃들이 이 무늬를 거쳐 봄에 이르렀을까 문틈인지도 직각의 모서리인지도 모르고 지느러미처럼 빠르고 날렵한 무늬들은 가구들 위를 흘러다니고 있다. ☆★☆★☆★☆★☆★☆★☆★☆★☆★☆★☆★☆★ 《14》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 《15》 너는 없다
김기택
너의 흔적은 머리카락이나 지문이 아니다 손때 묻은 책이나 냄새나는 옷가지도 아니다 기억 속에 사는 목소리나 표정도 아니다 어느 곳에서나 쌓여 있는 먼지를 보면 지금 네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다 너는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다만 온기가 없을 뿐이다 날아와 여기 쌓이기 전에 너는 끈적끈적하거나 꺼칠꺼칠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뜨거운 바람을 불어내며 단내와 시큼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단내, 아, 그 숨막히는 열기여!) 사람과 사람 사이 베면 피가 나올 것 같은 살가죽 같은 공기를 걸치고 다녔을 것이다 식어버리자 쉽게 흩날리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온기가 있다면 울거나 웃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너는 지금 차갑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어도 풀썩거린다 그렇다 너는 없다 없다는 것보다 더 확실한 너의 흔적은 없다 ☆★☆★☆★☆★☆★☆★☆★☆★☆★☆★☆★☆★ 《16》 기다리 저는 사람
김기택
꼿꼿하게 걷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춤추는 사람처럼 보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는 앉았다 일어서듯 다리를 구부렸고 그때마다 윗몸은 반쯤 쓰러졌다 일어났다. 그 요란하고 기이한 걸음을 지하철 역사가 적막해지도록 조용하게 걸었다. 어깨에 매달린 가방도 함께 소리 죽여 힘차게 흔들렸다 못 걷는 다리 하나를 위하여 온몸이 다리가 되어 흔들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기둥이 되어 우림하게 서있는데 그빽빽한 기둥 사이를 그만 홀로 팔랑팔랑 지나가고 있었다. ☆★☆★☆★☆★☆★☆★☆★☆★☆★☆★☆★☆★ 《17》 다리를 떠는 남자
김기택
컴퓨터 자판을 두리리면서 그는 명렬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자기 꼬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일에 흠뻑 취한 사이 마음은 저 혼자 몰래 춤을 춘다
그와는 무관한 또 다른 그가 엉덩이 밑에서 열심히 놀고 있다 ☆★☆★☆★☆★☆★☆★☆★☆★☆★☆★☆★☆★ 《18》 닭
김기택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목 잘리지 않으려고 털 뽑히지 않으려고 닭발들은 온 힘으로 버틴다 닭집 주인의 손을 할퀴며 닭장 더러운 나뭇바닥을 하양ㅎ게 긁으며.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손아귀 끝에서 그러나 허공은 닭발보다도 힘이 세다.
모든 움직임이 극도로 절제된 손으로 닭집 주인은 탱탱하고 완강한 목숨을 누른다. 짧은 시간 속에 들어 있는 길고 느린 동작. 힘의 극치에서 힘껏 공기를 붙잡고 푸르르 떠는 다리. 팔뚝의 푸른 핏줄을 흔들며 퍼져나가는 은은한 울림.
흰 깃털들이 뽑혀져나간 붉은 피가 쏟아져나간 닭의 체온은 놀랍게도 따뜻하다. 아직도 삶을 움켜쥐고 있는 닭발 안에서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공기 한줌. 떨어져나가는 목숨을 붙잡으려 근육으로 모였던 힘은 여전히 힘줄을 잡아당긴 채 정지해 있다.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 《19》 먹자골목을 지나며
김기택
먹자골목을 지나는 퇴근길 돼지갈비 냄새가 거리에 가득하다 냄새를 맡자마자 어서 핥으려고 입과 배에서 침과 위산이 부리나케 나온다 죽은 살이 타는 냄새임이 분명할 텐데 왜 이렇게 달콤할까 이것은 죽음의 냄새가 아니고 삶의 냄새란 말인가 필시 그 죽음에는 오랫동안 떨던 불안과 일순간에 지나온 극도의 공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 냄새에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오로지 감칠 맛나기만 해서 천연덕스럽고 뻔뻔스럽다 정말 이것이 죽음의 맛일까 비리고 고약한 냄새인데 혀와 위장이 잠시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죽음을 품어 아름다워지고 풍요해진 산처럼 한몸 속에 삶과 죽음을 섞어놓으려고 서로 한 곳에서 살며 화해하게 하려고 혀와 위장을 맛의 환각에 홀리게 한 건 아닐까 지근지글 타고 있는 것이 고기이건 시체이건 돼지갈비, 그 환각의 맛과 냄새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먹자골목 ☆★☆★☆★☆★☆★☆★☆★☆★☆★☆★☆★☆★ 《20》 먼지에 대하여
김기택
주광성 하루살이 떼처럼 한 줄기 빛 속으로 먼지들이 모여든다 어지럽게 빛을 뒤틀고 돌리며 날아다닌다 손짓 발짓 같은 움직임들이 끈질기게 내 주위에서 기웃거린다 미안하지만 그대들의 몸짓을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누구의 살에서 떨어져 나온 것인지 누구의 슬픈 편견들이 삭아 부서진 것인지 난 알지 못한다 눈물에서도 잉크에서도 묻어 나오고 있지만, 말할 때마다 떨며 목소리에 섞여 나오고 있지만 ☆★☆★☆★☆★☆★☆★☆★☆★☆★☆★☆★☆★ 《21》 멸치
김기택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 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 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팔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 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 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 《22》 물도 불처럼 타오른다
김기택
아직 김이나 수증기라는 말을 모르는 아이가 끓는 물을 보더니 물에서 연기 난다고 소리친다. 물에서 연기가 난가? 그렇지. 물이 끓는다는 건 물이 탄다는 말이지. 수면(水面)을 박차고 솟구쳐오르다 가라앉는 뿔같이 생긴, 혹같이 생긴 물의 불길들, 그 물이 탄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가는 거지. 잔잔하던 수면의 저 격렬한 뒤틀림! 나는 저 뒤틀림을 닮은 성난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을 견디느라 끓는 수면처럼 꿈틀거리던 눈과 눈썹, 코와 입술을. 그때 입에서는 불길이 밀어 올린 연기가 끓는 소리를 내며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었지. 그 말의 화력은 바로 나에게 옮겨붙을 듯 거세었지. 물이나 몸은 기름이나 나무처럼 가연성이었던 것. 언제든 흔적 없이 타버릴 수 있는 인화물 이었던 것. 지금 솥 밑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솥 안에서 구슬처럼 동그란 불 방울이 되어 무수히 많은 뿔처럼 힘차게 수면을 들이받는다. 악을 쓰며 터지고 일그러지고 뒤틀리던 물은 부드러운 물방울 연기가 되어 공기 속으로 스며든다 ☆★☆★☆★☆★☆★☆★☆★☆★☆★☆★☆★☆★ 《23》 바람 부는 날의 시
김기택
바람이 분다 바람에 감전된 나뭇잎들이 온몸을 떨자 나무 가득 쏴아 쏴아아 파도 흐르는 소리가 난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보자고 바람의 무늬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보자고 작고 여린 이파리들이 굵고 튼튼한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 실처럼 가는 나뭇잎 줄기에 끌려 아름드리 나무 거대한 기둥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힌다 ☆★☆★☆★☆★☆★☆★☆★☆★☆★☆★☆★☆★ 《24》 밥 생각
김기택
차가운 바람 퇴근길 더디 오는 버스 어둡고 긴 거리 희고 둥근 한 그릇 밥을 생각한다 텅 비어 쭈글쭈글해진 위장을 탱탱하게 펴줄 밥 꾸룩꾸룩 소리나는 배를 부드럽게 만져줄 밥 춥고 음침한 뱃속을 따뜻하게 데워줄 밥 잡 생각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려주고 깨끗해진 머리속에 단정하게 들어오는 하얀 사기 그릇 하얀 김 하얀 밥 머리 가득 밥 생각 마음 가득 밥 생각 밥 생각으로 점점 배불러지는 밥 생각 한 그릇 밥처럼 환해지고 동그래지는 얼굴 그러나 밥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지면 다시 난폭하게 밀려들어올 오만가지 잡 생각 머릿속이 뚱뚱해지고 지저분해지면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버릴 밥 생각 ☆★☆★☆★☆★☆★☆★☆★☆★☆★☆★☆★☆★ 《25》 뱀
김기택
팔과 다리란 무엇인가 왜 살가죽을 뚫고 몸에서 돋아나는가 나는 안다 팔다리 달린 몸들을 그 몸들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그 끓어오르는 몸 속에 얼마나 많은 울음이 들어 있는가를 갓난것들은 태어나자마자 몸에서 울음부터 꺼내야만 하고 평생 동안 부지런히 지껄여 말들을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쉬지 않고 난폭한 힘을 배설하지 않는다면 끝내는 자신의 열기에 못 견뎌 뇌는 녹고 심장은 타고야 말 것이다 몸 속의 열기가 살가죽을 밀고 터져 나오지 않도록 살가죽 터진 자리마다 거추장스런 팔다리가 돋아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온몸에 차가운 피가 흐르도록 모든 힘을 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얼음처럼 차고 빛나야만 맑아지는 독 그 푸른 힘으로 끓어오르는 열기를 잠재워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가늘고 긴 선 하나만 몸에 남게 될 것이다
가벼워라 아아 편안하여라 팔과 다리털과 꼬리 모든 것이 생략되고 한 줄의 긴 몸으로 단순화되니 머리와 심장으로 언제나 땅을 만질 수 있고 마음껏 땅의 차가운 힘을 마실 수 있고 그 즐거움으로 독은 더욱 올라 꼿꼿하게 날이 서는구나 나무처럼 땅의 고요한 기운을 받아 숨쉬니 굶을수록 눈은 광채를 더하고 빠를수록 몸은 바람보다 소리가 작구나 번잡스럽게 바둥거리던 팔과 다리 그 몸에서 줄 창 쏟아내는 비명과 아우성도 독으로 소화시키면 이내 형체를 버리고 열기와 소음도 버리고 기꺼이 화사한 꽃 비늘이 되는구나 ☆★☆★☆★☆★☆★☆★☆★☆★☆★☆★☆★☆★ 《26》 베개
김기택
귀가 두근거린다 옆으로 누운 귀에서 베개가 두근거린다 베개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난다 동맥이 보낸 박동이 귀에서 울린다 두근두근이 들어오고 나가느라 베고 있던 머리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린다
베개와 머리 사이엔 실핏줄들이 이어져 있어 머리를 돌릴 수가 없다 숨소리들이 모두 입술을 벌려 베개에서 나오는 두근두근을 마시고 있다
고막이 듣지 못하는 소리가 잠든 귀를 지나 꿈꾸는 다리로 퍼져 간다 소용돌이치는 두근두근을 따라 온몸이 동그랗게 말려 있다 ☆★☆★☆★☆★☆★☆★☆★☆★☆★☆★☆★☆★ 《27》 병
김기택
병이 들어오면 몸은 뜨거워집니다 한 그릇 고요한 물처럼 마음은 찬 데 있어야 투명하고 맑아지는데 뜨거운 그릇 속에 앉아 있자니 울렁울렁 속이 일어나 뒤집히고 한 방울 두 방울 기포도 생겨 떠오릅니다 그릇 오목한 바닥에 착실하게 엉덩이 붙이고 싶어도 자꾸 들썩거리게 되고 끝내 마음은 소리지르며 끓기 시작합니다 끓어오르느라 온몸 가득 닭살이 돋습니다 그래도 병을 이기려고 부글부글 끓습니다 마음도 한몸 속에 너무 오래 담겨지면 먼지도 앉고 잡균도 꼬여 흐려지겠지요 비우지도 않고 마냥 채우기만 하면 더 흐려지겠지요 사는 곳이 맑고 고요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니 마음은 가끔 이렇게 푹푹 끓어야 하는 모양입니다 ☆★☆★☆★☆★☆★☆★☆★☆★☆★☆★☆★☆★ 《28》 봄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는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 《29》 비둘기에 대한 예의
김기택
차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비둘기는 비키지 않았다. 뻔히 타이어를 보면서도 날아갈 기미가 없었다. 아주 느리게 다가가면서 위협했지만 먹이를 향한 순도 높은 집념과 수많은 구두들을 다 비켜가게 했던 배짱이 타이어 앞에서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아침부터 피와 깃털로 타이어를 더럽힐 수 있는지 물컹거리며 짓뭉개지는 느낌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라는 기세였다. 과자 부스러기를 쪼는 부리에 몸통이 단단히 박혀 있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빠질 것 같지 않았다. 급하게 차를 피했다가는 먹이에 붙어있는 부리에서 머리통이 우두둑 뜯겨버릴 것 같았다. 뒤차가 빵빵거렸지만 먹이 쪼는 부리는 바닥에 둔 채 몸통만 다급하게 날아오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저 몰아일체와 무아지경을 깨트리고 성실한 노숙을 방해할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보험을 두둑하게 들어놓고 비둘기 자해공갈단이 어디엔가 숨어서 지켜볼 것 같아서 귀찮은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타이어는 이빨과 발톱을 등과 무릎처럼 둥글게 구부리고 앉아 다른 비둘기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비둘기가 어서 식사를 마쳐주기를 기다렸다.
아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혀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官理臺帳經(손익관리대장경)과 資金收支心經(자금수지심경)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으며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기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도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장좌불입)"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으로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 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 《31》 삼겹살
김기택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한 시간이 넘도록 내 몸에서 고기냄새가 지워지지 않는다, 불에 익은 피, 연기가 된 살이 내 땀구멍마다 주름과 지문마다 가득차 있다, 배고플 때 허겁지겁 먹었던 고소한 향은 사라지고 도살 직전의 독한 노린내만 남아 배부른 내 콧구멍을 솜뭉치처럼 틀어막고 있다, 고기 냄새를 聖人의 後光처럼 쓰고 나는 지하철에서 내린다, 지하철 안 내가 서있던 자리에는 내 모습의 허공을 덮고 있는 고기냄새의 거푸집이 아직도 손잡이를 잡은 채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나를 차창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상쾌한 바람이 한꺼번에 고기냄새를 날려보낸다, 시원한 공기를 크게 들이 쉬는 사이 고기냄새는 잠깐 파리떼처럼 날아올랐다가 바로 끈적끈적한 발을 내 몸에 찰싹 붙인다, 제 몸을 지글지글 지진 손을 제 몸을 짓이긴 이빨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아직도 비명과 발악이 남아 있는 비린내가 제 시신이 묻혀있는 내 몸 속으로 끈질기게 스며들고 있다 ☆★☆★☆★☆★☆★☆★☆★☆★☆★☆★☆★☆★ 《32》 상계동 비둘기
김기택
비둘기들은 상계역 전철 교각 위에 살고 있다 콘크리트 교각을 닮아 암회색이다 전동차가 쿵, 쿵, 쿵,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비둘기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교각처럼 쿵, 쿵, 쿵, 자연스럽게 흔들린다 비둘기들은 교각 위에 나란히 앉아 자기들 집과 닮은 고층 아파트들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거리를 내려다보듯 비둘기들도 상계역 주변 거리를 내려다본다 도로변 곳곳에 음식물 쓰레기와 물웅덩이가 있다 사람들이 노점에서 주전부리를 즐기는 동안 비둘기들도 거리에서 푸짐한 먹거리를 즐긴다 자동차들이 쉬지 않고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지만 비둘기들은 가볍게 경적과 속도를 피하며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듯 느긋하게 모이를 고른다 가랑이 사이로 비둘기가 활보하는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막연히 남의 구두가 지나갔겠거니 생각한다 비둘기들은 검은 먼지와 매연을 뒤집어쓰고 언제나 아스팔트를 보호색으로 입고 다녀서 상계역에 비둘기들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33》 새
김기택
새는 새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매번 머리를 부딪히고 날개를 상하고 나야 보이는 창살 사이의 간격보다 큰, 몸뚱어리. 하늘과 산이 보이고 울음 실은 공기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러나 살랑거리며 날개를 굳게 다리에 배달아놓는 그 적당한 간격은 슬프다. 그 창살의 간격보다 넓은 몸은 슬프다. 넓게, 힘차게 뻗을 날개가 있고 날개를 힘껏 떠받쳐줄 공기가 있지만 새는 다만 네 발 달린 짐승처럼 걷는다. 부지런히 걸어 다리가 굵어지고 튼튼해져서 닭처럼 날개가 귀찮아질 때까지 걷는다. 새장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날지 않고 닭처럼 모이를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때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가끔, 창살 사이를 채우고 있는 바람을 부리로 쪼아본다, 아직도 벽이 아니고 공기라는 걸 증명하려는 듯. 유리보다도 더 환하고 선명하게 전망이 보이고 울음 소리 숨내음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고안된 공기, 그 최첨단 신소재의 부드러운 질감을 음미하려는 듯. ☆★☆★☆★☆★☆★☆★☆★☆★☆★☆★☆★☆★ 《34》 생명보험
김기택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도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을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있다. 세상 모든 죽음을 낱낱이 겪어 알고 있으면서도 허공은 아무 대책이 없다.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 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 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이요. 사랑이 얼마나 진지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 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 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할 거예요. ☆★☆★☆★☆★☆★☆★☆★☆★☆★☆★☆★☆★ 《35》 소
김기택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36》 소나무
김기택
솔잎도 처음에는 널따란 잎이었을 터, 뾰쪽해지고 단단해져버린 지금의 모양은 잎을 여러 갈래로 가늘게 찢은 추위가 지나갔던 자국, 파충류의 냉혈이 흘러갔던 핏줄 자국,
추위에 빳빳하게 발기되었던 솔잎들 아무리 더워도 늘어지는 법 없다.
혀처럼 길게 늘어진 넓적한 여름 바람이 무수히 솔잎에 찔리고 긁혀 짙푸르러지고 서늘해진다.
지금도 쩍쩍 갈라 터지는 껍질의 비늘을 움직이며 구불텅구불텅 허공으로 올라가고 있는 늙은 소나무, 그 아래 어둡고 찬 땅 속에서 우글우글 뒤엉켜 기어가고 있는 수많은 뿌리들.
갈라 터진 두꺼운 껍질 사이로는 투명하고 차가운 피, 송진이 흘러나와 있다. 골 깊은 갈비뼈가 다 드러나도록 고행하는 고승의 몸 안에서 굳어져버린 정액처럼 단단하다. ☆★☆★☆★☆★☆★☆★☆★☆★☆★☆★☆★☆★ 《37》 수화
김기택
두 청년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승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는 버스 안이었다. 둘은 지휘봉처럼 떨리는 팔을 힘차게 휘둘렀고 그때마다 손가락과 손바닥에서는 새 말들이 비둘기나 꽃처럼 생겨나오곤 하였다. 말들은 점점 커지고 빨라졌다. 나는 눈으로 탁구공을 따라가듯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여 두 청년의 논쟁을 따라갔다. 그들은 때로 너무 격앙되어 상대방 손과 팔 사이의 말을 장풍으로 잘라내고 그 사이에다 제 말을 끼워 넣기도 하였다. 나는 그들의 논쟁에서 끓어 넘친 침들이 내 얼굴로 튈까 봐 자주 움찔하였다. 고성이 오갈 때에는 그들도 꽤나 시끄러웠을 것이다. 운전기사가 조용히 좀 해달라고 소리칠까 봐 가끔은 눈치가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 안에 두 사람말고는 딴 승객은 없는 듯 조용하기만 했고 이따금 손바닥 서걱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 《38》 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마흔이 넘은 그녀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오빠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중년의 얼굴에서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뛰어나왔다.
작고 어리던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나왔구나. 긴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뜨려 놓았구나.
삼십 여 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다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39》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김기택
방금 딴 사과들이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국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고층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과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잠깐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추수꾼: 윌리암 워즈워드의 시 ' The Solitary Reaper ' 에서 인용 ☆★☆★☆★☆★☆★☆★☆★☆★☆★☆★☆★☆★ 《40》 어미 고양이가 새끼를 핥을 때
김기택
입에서 팔이 나온다.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연약한 떨림을 덮는 손이 나온다. 맘껏 뛰노는 벌판을 체온으로 품는 가슴이 나온다.
혀가 목구멍을 찾아내 살아 있다고 우는 울음을 핥는다. 혀가 눈을 찾아내 첫 세상을 보는 호기심을 핥는다. 혀가 다리를 찾아내 땅을 딛고 설 힘을 핥는다. 혀가 심장을 찾아내 뛰고 뒹구는 박동을 핥는다.
출처 :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 《41》 얼음 속의 밀림
김기택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 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절망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法과 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들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생각해본다 청정한 法과 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생각해 본다 ☆★☆★☆★☆★☆★☆★☆★☆★☆★☆★☆★☆★ 《42》 연필
김기택
떨어진 연필이 굴러간다 뱀처럼 벌레처럼 제 기럭지를 구부렸다 펴면서 가지는 못하고 옆으로 굴러서만 간다
굴러가는 둥근 면에서 수많은 짧은 다리들이 나오고 있다
연필 속에서 광물성 내장 터지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를 여과시켜서 나무는 가볍고 맑은 소리를 낸다 뾰족했던 연필심도 덩달아 뭉툭해진다
도망가는 연필을 잡자마자 다리는 연필 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손가락이 연필을 꽉 쥘 때 흰종이 밑으로 지층이 깊어질 때 짧고 힘찬 진동이 연필 속에서 버둥거린다
연필 지나간 자리에 걷다가 머뭇거리다 멈추다 종이가 패이도록 달린 발자국이 남는다 ☆★☆★☆★☆★☆★☆★☆★☆★☆★☆★☆★☆★ 《43》 유리에게
김기택
네가 약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작은 충격에도 쉬이 깨질 것 같아 불안하다 쨍그랑 큰 울음 한번 울고 나면 박살난 네 몸 하나하나는 끝이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큰 충격에도 끄떡하지 않을 네가 바위라면 유리가 되기 전까지 수만 년 깊은 땅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바위라면 내 마음 얼마나 든든하겠느냐 깨진다 한들 변함 없이 바위요 바스러진다 해도 여전히 모래인 것을 그 모래 오랜 세월 썩고 또 썩으면 지층 한 무늬를 그리며 튼튼하고 아름다운 다시 바위가 되는 것을 누가 침을 뱉건 말건 심심하다고 차건 말건 아무렇게나 뒹굴어다닐 돌이라도 되었다면 내 마음 얼마나 편하겠느냐 너는 투명하지만 반들반들 빛이 나지만 그건 날카로운 끝을 가리는 보호색일 뿐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 《44》 자가격리
김기택
거리는 행인들이 없어 썰렁했으나 숨 쉴 때마다 사람들이 우글우글하였다.
날숨은 사람들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다. 들숨으로 사람들이 노크도 없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날숨은 들숨을 눈치 보고 들숨은 날숨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든 말들은 목소리가 아니라 침으로 나오고 있었다. 모든 말들은 귀가 아니라 코로 들려오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밀착된 적이 있었나? 내 숨이 이렇게 많은 숨과 연결된 적이 있었나?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에 묻은 사람들을 씻어냈다. 반갑다고 손을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강제로 밀쳐내고 떼어내느라 꽤 오래 걸렀다.
한 지인이 코로나19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와 접촉하여 자가격리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리 둘러봐도 말과 손과 숨을 둘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나도 저절로 자가격리 되었다. 허파도 심장도 생각도 따라서 자가격리 되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 때에도 늘 혼자였기에 자가격리는 맞춘 듯 내 몸에 잘 맞아서 방에 틀어박혀 책 읽기에는 더없이 좋았으나
아무리 집중해서 읽으려 해도 눈이 글자에만 머물고 문장 속으로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따라 눈이 나한테 왜 이러나 했더니
아까부터 머리통 속에서 생각만으로도 감염되는 신종 바이러스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출처 : 《문장웹진》(2020 5월호) ☆★☆★☆★☆★☆★☆★☆★☆★☆★☆★☆★☆★ 《45》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김기택
잠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낯이 많이 익은 얼굴이지만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낯선 낯익음에 당황하여 나는 한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도 내가 누구이지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는 쓰레기 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그는 고양이 가죽 안에 들어가 있었다 오랫동안 직립이 몸에 배었는지 네 발로 걷는 것이 좀 어색해 보였다 그는 쓰레기 뒤지는 일을 방해한 나에게 항의하듯 야오옹, 하고 감정을 실어 울더니 뜻밖에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제 목소리가 이상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른 고양이들처럼 서둘러 달아나지 않았다 슬픈 동작을 들킨 제 모습에 화가 난 듯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한참동안 멀어져갔다
구멍의 어둠 속에 정적의 숨죽임 뒤에 불안은 두근거리고 있다 사람이나 고양이의 잠을 깨울 가볍고 요란한 소리들은 깡통 속에 양동이 속에 대야 속에 항상 숨어 있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걸음은 공기를 밟듯 나아간다 꾸역꾸역 굶주림 속으로 들어오는 비누 조각 비닐 봉지 향기로운 쥐약이 붙어 있는 밥알들 거품을 물고 떨며 죽을 때까지 그칠 줄 모르는 아아 황홀하고 불안한 식욕 ☆★☆★☆★☆★☆★☆★☆★☆★☆★☆★☆★☆★ 《47》 직선과 원
김기택
옆집에 개가 생김. 말뚝에 매여 있음. 개와 말뚝 사이 언제나 팽팽함. 한껏 당겨진 활처럼 휘어진 등뼈와 굵고 뭉툭한 뿌리 하나로만 버티는 말뚝, 그 사이의 거리 완강하고 고요함. 개 울음에 등뼈와 말뚝이 밤새도록 울림. 밤마다 그 울음에 내 잠과 악몽이 관통당함. 날이 밝아도 개와 말뚝 사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음.
직선: 등뼈와 말뚝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 온몸으로 말뚝을 잡아당기는 발버둥과 대지처럼 미동도 않는 말뚝 사이에서 조금도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고요한 거리.
원: 말뚝과 등거리에 있는 무수한 등뼈들의 궤적. 말뚝을 정점으로 좌우 위아래로 요동치는 등뼈.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려도 오차 없는 등거리. 격렬할수록 완벽한 원주(圓周)의 곡선.
개와 말뚝 사이의 거리와 시간이 이제는 철사처럼 굳어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음. 오늘 주인이 처음 개와 말뚝 사이를 끊어놓음. 말뚝 없는 등뼈 어쩔 줄 모름.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달리기도 함. 굽어진 등뼈 펴지지 않음. 개와 말뚝 사이 아무것도 없는데 등뼈, 굽어진 채 뛰고 꺾인 채 달림. 말뚝에서 제법 먼 곳까지 뛰쳐나갔으나 곧 되돌아옴. 말뚝 주위를 맴돌기만 함. 개와 말뚝 사이 여전히 팽팽함.
출처 : 《시와 표현》 (2015. 1) ☆★☆★☆★☆★☆★☆★☆★☆★☆★☆★☆★☆★ 《48》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에서
김기택
덤프트럭 앞에서 짐자전거가 앞만 보며 달린다 갓길 없는 좁은 2차선 도로 아무리 빠르게 페달을 밟아도 느릿느릿 돌아가는 자전거바퀴 사자 같은 경적이 쩌렁쩌렁 울며 뒷바퀴를 물어도 헛바퀴만 돌리며 아직도 커다란 플라타너스 앞을 지나가고 있는 자전거
자전거를 삼킬 듯 트럭은 꽁무니에 붙어서 오고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 줄에 달고 가듯 바퀴는 한적하고 발과 페달은 자전거 바퀴보다 빠르게 돌아가고
처음 네 입술이 열리고 내 혀가 네 입에 달리는 순간 혀만 남고 내 몸이 다 녹아버리는 순간 내 안에 들어온 혀가 식도를 지나 발가락 끝에 닿는 순간 열 개의 발가락이 한꺼번에 발기하는 순간 눈 달린 촉감이 살갗에 오톨도톨 돋아 오르는 순간 여태껏 내 안에 두고도 몰랐던 살을 처음 발견하는 순간 뜨거움과 질척거림과 스며듦이 나의 전부인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갗으로 덮여 있는 순간 두 몸이 하나의 살이 되어 서로 구분되지 않는 순간 네가 나의 심장으로 펄떡펄떡 뛰는 순간 내가 너의 허파로 숨쉬는 순간 내 배안에서 네가 발길질을 하는 순간 아직 다 태어나지 못한 내가 조금 더 태어나는 순간 ☆★☆★☆★☆★☆★☆★☆★☆★☆★☆★☆★☆★ 《50》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놓고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트트틈틈들을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지낟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갸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 《51》 파리
김기택
쓰다 말고 던져둔 시 거미 위로 파리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다리 많은 호기심이 발발거리더니 멈칫, ‘거미줄’이란 글자 앞에 선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 무엇엔가 옭아매인 듯 꼼짝 못한다. 파리는 갑자기 두 앞다리를 모으더니 싹싹 빈다. 서 있어도 저절로 오체투지가 되는 몸으로 빌고 또 빈다. 파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미줄에서 몇 글자 건너 ‘거미’라는 글자가 떡 버티고 있다. 수성 잉크가 번져 글자마다 털이 돋아 있다. 글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파리도 한 글자가 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 《52》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김기택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려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에 묻어 더 낭랑하다 귀뚜라미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53》 한 명의 육체를 위하여
김기택
달려가던 승용차가 가볍게 들어올리자 사내는 조금도 꾸밈이 없는 동작으로 빙그르르 공중에서 몸을 돌리고 전혀 무게를 두려워하지 않고 아스팔트 위로 내리꽂혔다 얇은 가죽으로 막아놓은 60킬로그램의 비린내 안에 들어있던 분노와 꿈이 일제히 터진 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은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신속하게 완벽하게 제 위치를 찾아갔다 꿈은 흰 쌀밥 위를 오르는 김처럼 모락모락 공손하고 착하게 흰 골을 떠나 거대한 스모그 속으로 스며들었고 분노는 아스팔트 갈라진 틈을 따라 하수도 속으로 얌전하게 흘러 들어갔다 크고 믿음직스런 두 손이 있었으나 체온이 있을 동안만 가늘게 떨었을 뿐 곧이어 차고 뻣뻣한 힘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누군지 아침부터 해장 한 번 잘했군 지나가던 버스 운전사가 킬킬거렸고 손바닥으로 반쯤 가려진 얼굴들이 킁킁거리며 비린내를 향해 몰려왔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핏줄의 끝 수만 뿌리 모세혈관으로 모여 기지개가 되고 주먹이 되고 눈동자 속으로 빛이 되어야 할 힘들이 해골을 뚫고 풀어져 사방으로 흩어져 간 후 사내는 이제 진짜 육체가 된 것이다 무기력하고 아무 할 일도 없어 마냥 착하기만 한 육체 천국에 사는 사람들처럼 순한 육체가 ☆★☆★☆★☆★☆★☆★☆★☆★☆★☆★☆★☆★ 《54》 화보사진 찍기
김기택
카메라가 첫 셔터를 눌렀을 때 목 위에 묵직하고 뻐근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무게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표정들이 얼떨떨한 그대로 렌즈에 연거푸 박히고 있었다. 얼굴은 목에서 뺄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어리벙벙한 표정 속에서 렌즈는 어설픔과 난처함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움직이는지 모르고 움직이던 목 근육 어깨 근육을 렌즈가 막대기처럼 단정하게 경직시켰다. 웃는지 모르고 웃던 웃음을 김치 웃음과 치즈 웃음으로 바꿔주었다. 모든 제멋대로가 재빨리 공손해졌다. 사진에 고정되기 전에 미리 부동자세가 되었다. 자세는 품위 있는 위치를 찾지 못해 어정쩡하게 세련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여보라는데도 몸과 표정은 자연스럽게 굳어졌다. 렌즈에 포착된 우스꽝스러운 순간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어디를 어떻게 렌즈에 붙들렸는지 몰라 몸에 갇힌 몸은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 《55》 황토색
김기택
겨울 산은 울퉁불퉁한 등을 구부리고 엎드려 누렇게 그을린 햇볕을 받고 있다 그 밑에서 집들도 납작하게 누워 졸음 많은 햇볕을 쪼이고 있다
늦은 2월, 남녘의 햇빛은 황토색이다 겨울 산도 겨울 나무도 겨울 들판도 햇빛이 깊이 들어 따뜻한 땅 색깔이다 짙은 황토색 땅을 닮은 황구와 황소들이 어느 집 마당에서나 졸고 있다 남녘에는 황토색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햇빛을 받으면 수만 년 묵은 빛깔이 우러나와 쳐다볼수록 눈이 따뜻해진다. ☆★☆★☆★☆★☆★☆★☆★☆★☆★☆★☆★☆★
첫댓글 정성껏 올려주셔서
감사히 잘 보고갑니다
멋진 가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