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알렉산드로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하느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중에 끊임없이 질문하는 존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연 우리 인간들이다.
인간은 수 만 년 전부터 세상은 무엇이고, 인간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름대로의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철학이고 과학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런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까지 그 사색을 넓혀 나간다.
그러나 철학과 과학은 아직 하느님과 세상 그리고 인간에 대해 완전히 알지도 그리고 말하지도 못한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앎이 넓은 바다의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음을
곧장 깨닫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안다는 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둠이 찾아오면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진다.
그러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곳은 가로등 아랫니지, 세상 전체를 비추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는 가로등 아래일 뿐, 그 외에는 우리가 볼 수 없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안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인정할 때, 참된 앎이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부터 이제 새로운 앎으로 넘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크고 새로운 무엇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앎을 추구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할 수 있다. 세상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는
어느 사제의 말이 생각이 난다.
부산교구 이영훈 알렉산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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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근 실비아 수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예레 26,2) 전하라고 하시고,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실로처럼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실로에는 여호수아 시대와 판관 시대에
성소가 있었지만, 심판을 받아 버려졌습니다.
이제 예루살렘도 그렇게 멸망하고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이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라고 비난하며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멸망을 선포하실 수는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하느님의 뜻을 자신들이 결정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구원을 선포하실 뿐, 심판을 말씀하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하느님의 행동 범위를 인간이 제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상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움직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착각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지고 맙니다.
그들의 착각이 깨지려면 성전이 무너져야 하였던 것이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집인 그 성전을 무너지게 두셨습니다.
복음서의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를 자신들이 다 알고 있는
그 평범한 사람, 목수의 아들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나에게 오는 통로를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명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실 때,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 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떤 경로로 말씀하시더라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안소근 실비아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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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6,1-9 마태오 13,54-58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자 평범한
동네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놀랄 만한 지혜와 힘을 얻었는지 그것만 궁금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인간이시자 참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것들은 편하고 좋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주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는 대로만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새겨듣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힘과 늘 새롭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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