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26,11-16.24 마태오 14,1-12
‘예언’이라는 말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헤아려 말하는 예언(豫言)과 신탁을 받은 사람이
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과 그 내용을 가리키는 예언(預言)으로 구분하여 쓰입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은 후자의 성격이 강합니다.
물론 하느님의 뜻을 전하다 보면 때로는 미래의 일도 언급하기 때문에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전자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않고 그분 뜻에서 멀어질 때, 백성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죽음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목소리가 되어 진리를 선포해야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언자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언자들을 없애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목숨은 유다의 대신들과 모든 성읍 주민들의 무서운 변덕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과 예언자들도 그가 성전과 예루살렘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마땅히 처형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율법을 어기고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헤로데를 비난한 일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인의 사면도 가능한 임금의 생일날에 오히려 참수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비록 오늘 독서와 복음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예언자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실 일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사명에 충실하였던 예언자들의 신실에
비추어 우리의 말과 행위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망설임 없이 행합시다.
화답송의 시편 저자처럼 예언자로서 겪게 될 고통 속에서도 기도합시다.
“가련한 저는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하느님, 저를 도우시어 보호하소서.
하느님 이름을 노래로 찬양하리라.
감사 노래로 그분을 기리리라.”
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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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루카 신부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26,11-16.24 마태오 14,1-12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허망하고 충격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마태 11,11 참조)이라고 하신 이의 죽음에서 어떠한 영웅적인 모습이 보이지도,
하느님의 극적인 개입이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힘 있는 자들’이 벌인 잔치의 ‘눈요깃감’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죽음으로 지상에서 요한의 삶은 끝이 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따르는 이들의 죽음에서 불사불멸까지는 아니더라도 특별한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우리에게 충격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상 권력과의 거창한 투쟁 끝에 장렬한 죽음을 맞기를 기대하는
우리에게 그러나 수많은 순교자와 예언자,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에서조차 우리가 찾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 정의와 평화, 진실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목숨은 오히려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구원자로 자처하는 이들이 어쩌면 가장 없애 버리고 싶은 목숨,
가장 하찮게 여기는 목숨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의 핵심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과 그에 따르는 비통함이 아닙니다.
악이 하느님의 사람을 죽이지만, 악의 힘으로는 하느님의 사람도, 하느님의 나라도 결코
끝낼 수 없다는 희망을 선포하는 데에 있습니다.
악에 의해서 결코 끝나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우리의 일상에서부터 체험해 봅시다.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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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예레미야 26,11-16.24 마태오 14,1-12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세례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그는 헤로데를 억누르려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부도덕한 이들은 덕을 달가워하지 않고, 거룩함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은 정결함을 보면 참지 못하고, 방종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를 못합니다.
인정 없는 자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은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데와 헤로디아가 있습니다.그 반대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나약한 헤로데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오고, 그 반대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으며,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기 죽음을 허용하고 의로움을 이룹니다.
또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왕관이 됩니다.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따르지만,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릅니다.
악인의 혀는 거짓을 꾸미며 속임수를 쓰지만, 의인의 혀는 진실을 말하고, 악인의 혀는
불의를 증언하는 반면에,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증언합니다.악인의 혀는 자신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침해하지만, 의인의 혀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줍니다.
결국 폭군의 혀는 의인의 피를 부르고. 의인의 혀는 의로움을 외칩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며,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요한의 목숨은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마침내는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치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사실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고,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니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표현한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팽배한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의로움으로 울게 하소서! 진리를 밝히는 성령의 불혀가 되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이 한 몸을 태워 세상의 어둠을 태우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제 뼈 속에 새겨진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혀는 멈추어도 결코 멈추지 않는,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주님, 오늘 제 혀가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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