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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너………좋은글스크랩 스크랩 [스크랩한글] 근대교회사
김연국 추천 0 조회 136 08.04.03 14:2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근대교회사


I. 서론


근대의 의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방법론적이 아닌 실제적인 점에서 나눈다. 두 가지 원칙은 실제적인 것과 연대적인 것

1559년 이후 ‘Magdeburger Zenturien': 고대, 중세, 근대 이렇게 시대구분을 하였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사이다.

1588년 이후 카톨릭 측에서 Baronius의 ‘Annales ecclesiastici'가 발행되었다.

근대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Ernst Troltsch: 18세기. 루터는 그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아직도 중세기 인물이다. 계몽주의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18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 루터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Karl Heussi: 16세기와 18세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측의 Jedin은 17세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K. D. Schmidt, B. Moeller: 근대의 시작은 17세기이다.

1555년은 결정적인 중간휴지: 종교개혁과 근대초기이며 종파의 시대이다. 이것은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을 가져왔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부터 근대라고 한다.


II. 종파의 시대에 대한 개괄


1.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 (1555년)


-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국회(칼 5세가 참석지 않고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에 의해 진행)는 카톨릭파와 루터파 사이에 신앙고백이 다시 일치할 때까지 이 두 파간의 무기한의 종교평화협정을 결정하였다(1555. 9.25의 제국국회 의결).

결정된 내용들

- 종교의 자유는 이 두 파간의 선택에만 해당된다: 카톨릭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  재세례파, 반삼위일체론자들, 영성주의자들 같은 종교개혁의 측면 운동들과 츠빙글리파는 이 협약에서 제외되었다.

- 이 협약에는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cuius regio - eius religio(한 나라에 한 종파: 제후의 종파에 따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종파가 결정됨)라는 원칙이 성립되다.  제후들은 두 종파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며, 국민은 이곳에서 제후의 종파를 따라야만 한다(ius reformandi).

- 과거의 이단정죄법이 무효화되었다: 타종파의 국민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ius emigrandi). 자신의 종파에 속한 지역으로의 이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과 가족의 재산은 소유물 보호법 하에 있게 되었다.

- 성직자인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인 경우 예외가 적용되다: 소위 말하는 "Reservatum ecclesiasticum"(종교상의 예외).  성직자인 제후는 종파의 개종에 의해 사인이 된다.  그는 성직을 잃고 세속의 통치권도 잃게 된다.

- 두 개의 종파가 공존하는 자유도시들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속된다.

- 종교적인 제후국들 안에 있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속한 도시들과 마을은 루터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종교평화협약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파를 인정한 소위 "Declaratio Ferdinandea"라고 불리우는 페르디난트 왕의 개인적인 성명에 들어 있었다.

- 칼5세는 1557년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황제대관을 포기하였다: 그는 1558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떴다.

-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으로 독일 제국에서는 통일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종말을 고하고 종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2. 이 시대의 일반적인 성격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부터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까지에 걸친 시대를 일컫는 “종파의 시대”라는 개념은 이 세기의 종교사회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 1865-1923)와 역사학자 브루너(Otto Brunner, 1898-1982)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1555년까지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반종교개혁 시대를 내포하였던 전통적인 시대구분에 있어서 1555년이 중간휴지(休止)성격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을 때, 일반사와 교회사의 서술에서는 이 개념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독일 제국의 상황에서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이 체결된 1555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을 아주 확실하게 만든 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시대와는 달리 1555년부터 실제적으로 변화된 것은 모든 삶이 종파의 표시 아래 즉 종파적인 대립 아래 있게된 것이다. 중세후기의 종교적인 운동들과 종교개혁의 초창기는 이 종파적인 극화(極化)를 알지 못한다. 상반되게 구별되고 상이한 종파들과 교회들, 국가들과 정치적인 복안들 가운데서 중세 기독교적인 단일문화의 분열은 이 시대를 본래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정치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큰 전쟁에 나타나지만 기독교 선교와 타 대륙에 유럽 세력의 식민지 팽창에서도 보여진다.

  이 시대의 교회사에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카톨릭파의 종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과정, 즉 이 시대에 점점 확실시 되어가고 있는 세속화, 다시 말해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세속화와 연관되어 있다. 종파화와 세속화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종파들과 이것들 상호간의 경계가 모든 삶의 영역을 강하게 결정하면 할수록 종교적인 동기를 가진 갈등들로부터 순수히 정치적인 논쟁들이 되었다. 30년전쟁은 독일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겹침을 보인 것이다. 이 전쟁이 오래가면 갈수록 순수히 권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확실히 나타났었다.

종파적인 논쟁에 넌더리가 난 신학과 교회의 경건에 실제 삶에서 신앙의 사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 제국에서 현저하게 기독교의 탈 종파화에 공헌하였다.

종파의 시대에 근대초기의 제후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건은 종파화와 세속화의 관련을 확실히 하였다.

  종파적인 시대는 종파적인 경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적인 활성화와 영적인 깊이가 있었다.


3. 종파로서의 루터교의 형성


1) 루터교 내부의 교리논쟁들


- 독자적인 루터파 교회로의 발전은 17세기가 지나는 사이에 긴 과정을 거쳐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발전에 대한 길은 맹렬한 신학적인 논쟁을 가져온다. 이러한 논쟁이 어느 정도 해명이 되고 난 후에야 루터교의 공통적인 기초가 발견되어질 수 있었다.

- 이 논쟁들은 정치적인 대립(예를 들면 작센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국 사이)과 신학적인 논쟁과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인문주의적인 사상) 사이에 있어서 신학적인 시작의 차이들은 루터가 죽고난 다음 타인의 눈을 끌도록 한다.

- 논쟁은 멜랑히톤의 제자들(마요르: G. Major, 페핑어: J. Pfeffinger)인 필립파(Philippisten)와  원래 루터의 제자들(플라치우스: M. Flacius, 암스도르프: N. v. Amsdorf)인 순수 루터파 (Gnesioluthraner) 사이에 일어난다.

- 다음의 문제들을 가지고 이 양派가 싸우고 논쟁을 벌였다.

①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논쟁(아디아포라 논쟁, Adiaphoristischer Streit,    1548-1552):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가협정”(Leipziger Interim)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은 카톨릭 교회의 법과 예배 의식을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 이후 많은 지역에서 라틴어로 미사가 다시 드려졌으며 성화와 카톨릭의 축일(祝日)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멜랑히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7성사를 주변적인 것들로 인정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적인 주요 교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제자이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마티아스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는 멜랑히톤과 이 가협정에 대해 승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고백이나 악의 유혹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중간물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플라티우스는 비텐베르크에서 막데부르크로 가서 암스도르프(Nikolaus von Amsdorf)와 루터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가협정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없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디아포라 논쟁이다.

② 마요르의 논쟁(Majoristischer Streit, 1552-1558): 아디아포라 논쟁 이후 종교개혁적인 칭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멜랑히톤의 제자인 게오르크 마요르(Georg Major)는 순수루터파인 암스도르프를 반박하였다. 마요르는 구원을 받는데 선행(善行)을 필수적으로 보았고 이와는 반대로 암스도르프는 선행은 구원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

③ 神人協同說 논쟁(Synergistischer Streit, 1556-1560):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멜랑히톤은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목재와 같은 인간과 협동하지 않고 그가 깨달을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의 의지가 협력하도록 그를 끌어당긴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에 철저했던 제자인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는 이와 반대로 인간은 회심에 있어서 목재(truncus)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플라티우스는 자연적인 인간은 죄에 근거를 둔 악에 대한 의지에 의하여 사탄의 형상을 바꾸어 쓴 것임(ad imaginem Satanae transformatus)을 결론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비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과거부터 있어 온 논쟁이었다.

④ 오지안더의 논쟁 (1550-1556):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88-1552)는 뉘른베르크(Nürnberg)의 宗敎改革史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549년부터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가르쳤다. 그는 의롭게 됨을 信者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적인 내재로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神的인 본성이 신자의 내면에 들어오며 신자는 이 내면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의롭게 됨의 과정에 대한 신비적인 견해이며 멜랑히톤의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됨의 견해와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멜랑히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됨은 그리스도의 義의 공로에 있다. 이것은 “法廷의 칭의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배당하는 의롭다함의 사건이 법정 앞에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법정에서 고소받는 죄인들 앞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한 것이다.

⑤ 성찬의 이해에 대한 논쟁들: 칼빈주의에 대한 은밀한 호의는 멜랑히톤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크립토칼빈니스텐«Kyrptocalvinisten, 숨겨진 칼빈주의자들). 기독론 논쟁은 그리스도의 음부행과 높임을 받은 주님이 언제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편재설).


2) 협정신조(1577)와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 1580)


-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는 이미 교리의 조직적인 확정에 있어서 발전을 이루었다(트리엔트 종교회의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 루터교에서 교리적인 일치에 대해서 주축이 된 것은 제후들이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소위 토르크의 교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가장 주동적인 신학자는 야콥 안드레애(Jakob Andreae. 1528-1590)이다.

- 이 문서는 루터적인 지역교회들에게는 교리적 근간이 되었고 조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Solida Declaratio", “확고한 선언”(SD).

짧은 개요가 이 선언 앞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개요와 SD와 함께 협정 신조(Formula Concordiae, FC)를 구성하고 있다.

- 협정신조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CA)에 대한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해설서이다.  이것은 독창적인 고백서는 아니다

- 이것의 내적인 목적: 상이한 입장을 통일함

외적 목적: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에 대한 교리적인 확실한 경계

- 협정신조(Formula Concordiae: FC)의 중요 결정: 성경은 모든 교리들과 선생들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범이요 표준이다.  고대 교회의 세개의 고백서(사도신경Apostolicum,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와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교의 신조들은 진리의 증거(testes veritatis)이다.  성서는 신앙 진리의 근본이요, 신앙고백들은 이 신앙진리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루터 신학의 도움으로 FC는 인간의 회심과 중생에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FC는 멜랑히톤의 의미에서 칭의의 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 화체론, 미사의 제사와 평신도에 대한 배잔금지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성찬론과 함께 거절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요소에 있다는 현존론(Realpräsenz)이 루터교의 성찬론이 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과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manducatio indignorum, manducatio impiorum)이 성찬의 효력에 예속되지 않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gratia universalis)로 표현된다.

- CA의 50주년 되는 해에 Dresden에서 협정서가 나왔다. 이 책은 루터교 지역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고대 교회의 3가지 고백서(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

CA 와 Apologie;

루터의 슈말칼덴 고백서;

멜랑히톤의 논문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 교황의 힘과 수위권에 대하여, 루터의 대․소교리 문답; 협정신조.

- 모든 루터교가 FC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터교의 지역 교회이면서 FC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 Pommern, Holstein, Branschweig-Wolfenbüttel 과 뉘른베르크, 헷센 카셀과 안할트에서는 칼빈주의가 밀고 들어 오려고 하였다.


3) 루터교 정통주의


- 루터교 정통주의는 16세기후반과 17세기 구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한 부분이다. 주된 표식은 순수 교리에 대한 몰두와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이다.  교리와 논쟁이 이 신학의 주된 원칙이다.

- 진리의 가르침을 위해 싸운 루터로부터 루터교 정통주의의 길이 시작된다.  칭의론은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 루터교 정통주의의 중요한 안내자는 멜랑히톤이다.

그의 "Loci theologici"(1521)는 초기 정통주의의 중요한 서적들의 제목과 방법론의 모범이다.

Martin Chemnitz(1522-1586): Loci theoloigici

Leonhard Hutter(1563-1616): Compendium locorum theologicorum

Johann Gerhard(1582-1637): Loci theologici(1610-1625),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된 교리서들이다.

- 이 교리서들은 멜랑히톤이 신학적인 교리의 체계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한 것을 따르고 있다. 신학적인 주요 개념들에 논리적인 규칙을 도입하였다(Loci- Methode).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 표식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과 반대자들의 공격을 정확한 개념화로 방어해야 하는 필연성과 관계가 있다.

- 정통주의의 주요학자들:

Johann Andreas Quenstedt(1610-1688)

Abraham Calov(1612-1688)

David Hollaz(1648-1713)

이들은 소위 말하는 분석적인 방법에 열심이다.  신학은 구원의 길의 질적인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조직적인 짜임으로 교리적인 내용이 조직적으로 창조에서 완성까지, 구원의 목적인 영원한 복락까지 실려 있다.

-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등장 이후에 성서에 대한 정통주의 교리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기초이다.  성서 원칙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에 대한 원칙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의 상용에 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참이며 더 이상의 논증(Beglaubigung)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권위(auctoritas), 완전한 진리(perfectio), 만족(sufficientia)과 명료함(perspicuitas)을 가지고 있다. 성경전체는 낱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口頭靈感設, Vebalinspirationslehre).

- 논리적으로 짜여진 정통주의 성서관은 성서의 역사적인 비평에 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의 성서관의 시작 자체가 성서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4) 게옥 칼릭스트(Georg Calixt)와 소위 말하는 혼합주의 논쟁


- 게옥 칼릭스트(1586-1656)는 당시 중요한 헬름슈테트대학교(헬름슈테트 신학)에서 가르쳤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牙城)인 비텐베르크대학교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에서는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이 명백하게 나타났다.

- 물론 칼릭스트는 정통 루터교 신학자였지만 멜랑히톤에 기인하여 기독교 종파 싸움의 극복에 관심을 가졌다. 30년전쟁이 가져다 준 황폐의 흔적을 보고 그는 모든 종파들이 공동의 근본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그는 사도신경과 제5세기까지의 교리적인 결정에 근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소위 말하는 5세기 동안의 일치(Consensus quinquesaecularis)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정통주의 신학자 칼로프(Abraham Calrov)로부터 종교적인 혼합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 1654년 토른(Thorn) 종교회담 이후 혼합주의 논쟁은 격렬해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은 칼릭스트가 루터와 종교개혁을 상대화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 논쟁들과의 연관 가운데 »루터교«의 개념이 세워졌다.

- 칼릭스트는 자신의 신학에서 특히 윤리를 강조하였다. 물론 교의학과 윤리학이 분리되어져서는 안되지만 두 개의 신학과목으로서 나누이게 된 것은 그에게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종교개혁자의 신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고백의 항목과 덜 기본적인 항목들 사이의 구분으로 칼릭스트는 이미 새시대의 과도기에 서있다.


5)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의 경건과 개혁의 노력


- 루터교 정통주의의 시대는 경건문학, 신앙 그리고 영적인 시의 전형적인 시대이다. 1600년경 이 경건문헌의 全盛은 »경건의 위기«와 »경건의 전환«(W. Zeller)과 연관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신학은 살아있는 신앙, 경건의 욕구에 어떠한 자극도 주지 않았다. 신학과 경건은 종교개혁 이후 3대째의 세대에 특히 논쟁을 하게 되었다. 1600년경을 중심으로 경건운동의 발단에 있어서 엄청난 반대자들(적그리스도로서 교황청)에 대한 두려움과 종말에 대한 위협적인 징조에 대한 공포가 밀려올 수 있게 된다. 그 위에 죄인에게 돌려진 의로 새롭고 거룩한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는 멜랑히톤적인 틀에 있는 칭의론은 얼마 안되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신앙의 내면화, 구체화 그리고 개인화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대교회,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기의 신비 또한 자연철학적인 사조에 있는 모방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이 납득되어 진다.


①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루터와 아른트를 객관적으로 동일시하는 견해는, 스스로를 진리증언의 대열에 선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했던 경건주의의 지도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친첸도르프와 벵엘의 역사적인 자기이해(Selbstverständnis)와 상응한 것이다. 쾨텐(Cöthen) 부근의 에드다이츠(Eddeitz) 출신인 요한 아른트는 발렌슈테트(Ballenstädt) 부근의 바데보른(Badeborn)에서 안할트(Anhalt) 지역의 목사로서 직무를 시작했고(1583년), 그곳에서 1585년의 루터교의 성찬고백서의 철저한 고백자로서 서명하였으며, 그곳 지역교회(Landeskirche)의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과 성호를 긋는 의식(루터는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고 성호를 긋는 의식을 넣음: M. Luther, Das Taufbüchlein verdeutscht 1523, in: WA 12, S. 38-48)이 없는 칼빈주의의 도입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그곳에서 목사직을 잃게 되었고, 1611년 첼레(Celle)에서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이 될 때까지, 쿠베들린부르크(Quedlinburg, 1590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1599년부터), 그리고 루터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Eisleben, 1608년부터)에서 일했다. 묵상과 명상에 몰두했던 아른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1606년부터 수많은 판을 거듭했고, 설교에 그 근원을 둔 경건서적(Andachtsbuch)인 ‘참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들’(Vier Bü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에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최초로 제기되었고 얼마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루터교 지역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 중 첨단의 위치에 있었다. 이 책은 1600년경의 경건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19세기까지 널리 읽혀졌다. 아른트는 루터의 칭의론의 토대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려고 하였다«. 이로써 아른트는 오늘날 경건역사적인 관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J. Wallmann).

젊은 시절에는 정통 루터교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그 일 때문에 희생이 되기도 했던 아른트는 여기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비주의의 넓은 경향 뿐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베르나르의 클레르보(Clairvaux von Bernhard) 이후 실로 유일하게 아가서를 애정적인 방법으로 주석하는 법을 루터교 안에 도입하였다. 그와 나란히 위대한 찬송작시자 필립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가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의 우나(Unna)와 함부르크(Hamburg)에서 같은 영향을 끼쳤다.

아른트의 `참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이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물에 새겨진 고귀한 성품은 잃어버릴 수 없는 지참금을 뜻했다: 신적인 성품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적인 유비사상(Analogiegedanke)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 명백했다. 즉 이것은 죄가 초래하였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는 유사성을 더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분명히 변해야 됨을 깨달았다. 인간은 회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을 통하여, 옛 피조물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피조물로의 부활을 통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전한 변화로서의 거듭남이 여기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거듭남은 사랑 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 자기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려 이웃과 사귀면서 겸손, 사랑, 온유 그리고 온전한 화평을 행하면, 그는 거듭남에 충분히 도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과 영, 영과 하나님 - 이 주제가 `참 기독교`의 실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 아른트 외에 경건운동의 중요한 대표자들과 그들의 저술이 있다:

프레토리우스(Stephan Prätorius, 1536-1603): ‘영적인 보고’(Geistliche Schatzkammer, 1636).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 ‘영원한 생명의 기쁜 거울’(Freudenspiegel des ewigen Lebens, 1599).

헤르베르거(Valerius Herberger, 1562-1627): ‘심령의 설교’(Herz-Postillen).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거룩한 명상’(Meditationes sacrae, 1606).

특히 게하르트에게 있어서 경건과 학문적인 신학은 결합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 이 경건은 수 많은 개혁경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아른트의 문하생 안드레애(J.V. Andreae, 1586-1654)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 교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들이 자주 날카롭게 비판되었다(고발문). 여기에 슙(J.B. Schupp, 1610-1661), 그로스게바우어(Th. Großgebauer, 1627-1661: 황폐된 시온에서 온 파수꾼의 소리), 자우베르트(J. Saubert, 1592-1646), 딜헤르(J.M. Dilherr, 1604-1669), 요한 슈미트(Johann Schmidt, 1594-1658).

- 루터교의 경건서적은 파울 게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의 영적인 시에 또한 감화를 끼쳤다. 이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찬송시 작가에게 17세기 전체를 표시하는 정통주의와 동시에 진심어린 경건의 긴밀한 맺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게하르트의 많은 찬송시들은 아른트의 경건, 특히 그의 ‘낙원의 정원’(Paradiesgärtlein, 1612)에 새겨져 있다. 요한 아른트의 신비적으로 채색된 경건의 언어는 바하(J.S. Bach)의 칸타타와 수난곡의 가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 루터교의 경건서적에 신비적 영성주의의 글들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발렌틴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베트케(Joachim Betke, 1601-1663); 호부르크(Christian Hoburg, 1607-1675).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의 세계와 더불어 괴어리츠(Görlitz)의 야콥 뵈메(Jakob Böhme, 1575-1624)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 30년 전쟁


1) 전쟁의 배경


ⓛ 1608년과 1609년 대립적인 두 파 사이의 정치적이고 종파적인 동맹이 형성되었다. 열렬한 카톨릭 제후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개신교 자유도시인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에 대한 강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독일 제국국회에서 이 도시를 추방시키고 카톨릭을 다시 세워 이 도시를 바이에른으로 귀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루터파와 개혁교회파 제후들이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의 지도 아래 1608년 아하우젠(Ahausen)에서 연맹을 맺자,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편과 세속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카톨릭 성직자 제후들이 1609년 동맹을 맺었다. 팔츠는 개혁교회 국가였으며 라인강 중부를 건너서 전략적으로 위치하고 있었고, 팔츠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한 7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중요했다. 개신교의 제후들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헨리 4세와 협의하였다.

② 윌리히(Jülich)와 클레페(Kleve) 지역에 대한 상속권은 새로운 분쟁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종파들이 다투었는데 결국 반대파들은 일시적인 분할에 합의하였다(이 분쟁 중에 팔츠-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 Wolfgang Wilhelm은 카톨릭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요한 지기스문트  Johann Sigismund는 개혁교회로 개종했다).

③ 합스부르크가 국가들 안에 있는 정치적인 갈등이다. 여기에 능력이 없는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는 제국의 제후들로부터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동안 계속된 혼란 속에서 제후들은 루돌프의 형제인 마티아스(Matthias) 뿐만 아니라 루돌프 자신으로부터 개신교도들을 위한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마티아스는 1606년의 비인의 평화에서 먼저 헝가리, 후에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 루돌프는 1609년의 칙허장 Majestätsbrief에서 보헤미아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 동시에 슐레지엔에 있는 개신교들은 안전을 보장받았다).


2) 30년전쟁의 진행


  1618년 체코의 보헤미아인들은 자기들의 프로테스탄트적 자유가 상실될까 두려워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마티아스(보헤미아의 국왕이기도 함)가 보낸 밀사와 교섭했는데 이 나라에서 가끔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황제의 사신을 창밖으로 내던짐으로써 태도를 표시했다. 이 사건 이후 국왕․황제는 자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를 얻기 위해 팔츠 선제후를 택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프리드리히 5세 칭호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 연맹으로부터 보헤미아인들에게 원조를 제공했고 네덜란드인은 화폐를 보냈다. 마티아스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온 화폐, 밀라노로부터 파견된 스페인의 군대, 카톨릭인 바이에른의 군대의 도움으로 1620년 봐이서 베르크(Weißer Berg)에서 프리드리히 5세를 이겼다. 이로써 겨울왕 프리드리히의 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다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귀족의 약 절반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는 이 토지를 카톨릭 교회교단, 수도원에 기부금으로 증여하거나 그를 도왔던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1621년 프로테스탄트 연맹도 해체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주도권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한 국가인 홀슈타인 제후이기도 한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가 장악했다. 그는 독일에서 몇몇의 주교관구를 획득하여 자기 아들에게 줄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에게 대항하여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알버트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군대를 일으키도록 위임했다. 발렌슈타인은 온갖 국적을 가진 직업 군인을 모집했는데 이들은 보수에 의해서보다는 약탈로 생활했다. 발렌슈타인과 카톨릭 제국의 다른 장군들은 덴마크 국왕을 패배시키고 발틱 해안에 이르러 덴마크 반도까지 침입했다.

  1629년 복권칙령(復權勅令)에 의하여 황제는 1552년 이래 세속화된 영토를 자동적으로 카톨릭교회로 복귀시켰다. 두 개의 대주교구, 12개의 주교구, 이전에 수도원과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100개 이상의 작은 영토들이 포함되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II. Adolf)는 최상급의 능력을 가진 군주로 스웨덴에 있는 모든 당파들을 화해시키고 의회와 조화를 이룸으로 해외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었다. 그는 발틱해 동쪽 해안에서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와 다른 군사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강한 훈련, 고조된 용기와 기동성있는 대포로 이름난 당대의 가장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하여금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면서 전장으로 진군케 했다. 그는 1630년 독일에 상륙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구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의 틸리(Tilly)를 이김으로 남부 독일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프랑켄 지역의 주교관구들, 마인츠, 아욱스부르크, 뮨헨을 차지했다. 그는 1632년 뤼첸(Lützen) 전투에서 피살되었다. 그의 재상 옥센스티에르나는 그를 이어 전쟁을 계속했다. 1635년 독일의 작센은 스웨덴을 배제하고 황제와 프라하의 단독강화(Separatfriede von Prag)를 맺었다.

  이 전쟁의 최후 단계는 합스부르크의 황제(Ferdinand III., 1637-1657)와 스페인과 더불어스웨덴과 프랑스의 전적인 정치적인 싸움이었다.


3)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


  평화회담은 1644년 베스트팔렌, 즉 뮨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베스트팔렌에는 수 백명의 외교관들과 협상자들이 제국과 그 회원국들인 스페인․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스위스․포르투칼․베니스와 다른 수 많은 이탈리아인과 교황을 대표하여 모였다. 신성로마제국은 1648년 구체화된 뮨스터와 오스나브르크의 두 조약에서 타결에 동의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독일의 반 종교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저지를 의미했다. 이것은 독일의 모든 국가들에게 자기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여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의 조항을 경신할 뿐만 아니라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 외에 개혁교회도 인정을 받았다.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여러 주는 주권국과 독립국으로 인정되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칼로부터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에 있는 전진기지를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프랑스는 알사스에 있어서 권리를 얻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브란덴부르크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구와 두 개의 주교구인 동부의 폼메른을 획득하고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팔츠 일부와 전제후국의 한자리를 획득하여 8명의 선제후가 되었다.

  독일은 이 전쟁 중에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 독일은 물질적으로 파멸되고 정치적으로 작은 부분으로 분단되어 오랫동안 유럽문제에 있어서 어떤 역할도 못하였다.


III. 경건주의


1. 슈페너와 독일 경건주의의 발단


1) 경건주의의 발단에 대한 논쟁


- 최근의 경건주의 연구에 의하면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종교적인 갱신운동이며 경건운동이다(J. Wallmann과 M. Brecht).  개인의 신앙체험, 구원 그리고 실천이 있는 신앙, 경건의 실천이 경건주의적 신앙, 사상 그리고 행위의 중심이다.

- 17세기 초 거의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경건주의의 역사가 유럽의 계몽주의와 함께 진행된다.  경건주의는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동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퍼졌다. 

- 독일에서 루터교 경건주의의 전성기는 슈페너와 프랑케가 활동했던 시기인 1675-1720년 사이이다.  실천적인 개혁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계몽주의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건의 실천, 사회윤리적 자극, 교파 논쟁의 극복(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한 거리가 전보다 강화됨).  죄, 은혜 그리고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구별이 된다.

- 확대된 의미에서 경건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요한 아른트와 그에게서 나온 자극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생활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리의 종교개혁을 보충

- 구체적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는 루터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이다.

- 두 가지 표식에서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태동하는 계몽주의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알곡회중으로서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ecclesiola in ecclesia)과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임박한 개선에 대한 희망, 즉 가까운 최후 심판 날의 기대로부터의 전향(J. Wallmann).

- 교회적인 경건주의는 민족교회(바벨론)로부터 탈퇴를 요구한 과격한 경건주의와 구별이 된다.

- 영국의 청교도적인 경건 서적과 중세 후기의 신비주의와 16,17세기의 신비적 영성주의는 경건주의의 뿌리에 속한다. 그러나 경건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리츨(Albrecht Ritschl) (Geschichte des Pietismus)이 주장한 바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상 도피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경건주의를 지배하지 않고 사회 윤리적인 자극이 지배하고 있다.


2) 필립야콥 슈페너 -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개략


- 슈페너의 생애에서 경건주의의 시작에 관여된 많은 자극들을 볼 수 있다.

- 1635년 엘사스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슈페너는 청교도주의적인 경건서적들과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에 대한 네 권의 책’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철학(Justus Lipsius)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 당시의 지식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싹텄다.

-1651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653년 철학석사 학위를 받음(토마스 홉즈에 대한 비판)

- 철학과 역사학의 공부 이후 1654-59년까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함. 철저한 루터교 신학부의 중요한 교수들: 요한 슈미트(J. Schmidt), 제바스티안 슈미트(S. Schmidt), 단하우어(J.G. Dannhaner). 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교육.

- 바젤에서 히브리어를 더 배우고 제네바에서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 분파적인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를 만난다.

- 로스토크(Rostock)의 신학자인 그로스게바우어(Th. Grobgebauer)의 개혁서 “황폐된 시온의 파수꾼의 소리”를 통해 슈페너는 민족교회의 부패를 접하게 되었다.

- 166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 교회의 부목사로 일했으며 1664년 신학 박사가 되었다(논문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것이다).

- 1666년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 루터교 목사단의 대표로 부임하였다.

- 바리새인의 거짓 의에 관한 설교(1669) 이후 진실한 기독교인의 모임이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기움 피에타티스가 생기다.  경건주의는 이것으로 교회의 개혁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다.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게움 피에타티스(Collegium Pietatis)의 주동자는 법률가인 슈츠(J. J. Schüz)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모임에 라바디의 사상(교회 밖의 작은 교회, ecclesiola extra ecclesiam)의 주요 중개자이다.  1675년부터 소위 잘호프 경건주의자들이 모이다.  이들은 후에 분리하여 나갔다. 

- 아른트(J. Arndt)의 복음서 설교집-신판의 서문으로 1675년 ‘경건한 소원들’이 또는 ‘참 루터교회의 하나님께 합당한 개선을 진심으로 요망’이 나온다. 이것은 후에 별권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소위 경건주의의 프로그램 책이다.

- 1686-1691년까지 슈페너는 선제후 게옥 3세의 궁이 있는 드레스덴에서 궁정 수석 설교자였다.  성인과 어린이들에게 공개적인 교리문답 교육을 통한 개혁의 노력들. 라이프치히와 함부르크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운동 사이의 논쟁들.  슈페너와 선제후 게옥 3세 사이의 긴장들.

- 1691-1705년 슈페너는 베를린의 교회 협의회 위원과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최고봉에 도달했다.  광범위한 서신 교환.  1694년 잘레 강변의 할레에 프로이센의 개혁적인 대학이 세워짐.  이 대학은 슈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에 특히 영향을 받았다. 

-1705년 슈페너는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세상을 떠났다.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 - 경건주의의 프로그램서


-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교회의 세 계층의 부패된 상태에 대한 진단(지배층, 성직자와 일반 교인들)

2. 예측: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서적인 약속에 근거한 지상의 교회에 대한 더 나은 시대의    희망(유대인 선교와 교황권의 멸망)

3. 교회의 개혁을 위한 6가지 프로그램

  1)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과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는 일(기       도회 모임 제안)

  2)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의 실현

  3) 기독교 신앙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4) 신앙적인 논쟁은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 한다.

  5) 교회 개혁의 핵심으로서의 신학 교육의 개혁. 체험있는 신앙은 배운 지식보다 중요하       다.

  6) 설교는 신앙의 촉진과 열매를 위해 쓰여져야 하지, 설교자의 허영과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3) 슈페너 신학의 개요


- 슈페너의 신학은 특히 그의 설교집에 나타나 있다(복음적 신앙교리, 1688, 일년간 설교한 것의 모음). 근본은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이다. 슈페너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중생의 개념에서 요약한다. 그는 중생을 성결과 구별하였다. 슈페너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중생을 조건으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결을 믿음의 성장을 위한 근본으로서 이해한다. 경건의 실천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여행이다. 슈페너의 교회관(ecclesiola in ecclesia)은 중생과 성결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미 거듭난 기독교인의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교의 칭의론에 대한 고수와 신비적인 영성주의로부터 선을 그은 것은 확실히 칭의에서 시대의 요청으로 성결을 강조하는 바를 옮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와 아른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슈페너의 개혁을 위한 제안들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교 정통주의에 비해 새로운 것: 지상의 교회를 위한 더 나은 시대들의 희망(온건한 천년왕국설)과 고린도전서 14장에 근거한 사도시대적인 교회모임의 재정비. 1676년부터 슈페너는 “에클레시올라 인 에클레시아”(ecclesiola in ecclesia)라는 형태로 자신의 교회개혁지침을 요약하였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대다수의 신앙 향상과 촉진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과 촉진을 통해 기대한다.


2. 아욱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와 할레의 경건주의


1) 프랑케의 생애와 업적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3월 22일 법률가의 아들로 뤼벡에서 태어났다. 프랑케가 태어난지 3년 후 그의 부친은 작센-고타(Sachsen-Gotha)의 에른스트 信公(Herzog Ernst d. Fromme)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프랑케는 고타에서 자신의 훗날의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자극을 받았었다. 에른스트 신공은 그의 재상인 제켄도르프(Veit Ludwig von Seckendorff, 1626-1692)와 함께 30년 전쟁(1618-48)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매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종파간에 있는 증오의 극복과 어린이 교육의 개선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인식하였다.

   프랑케는 유명한 고타 고등학교(Gothaer Gymnasium)를 졸업하고 16세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교에서 별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키일 대학교(Universität Kiel)로 옮겼다. 키일 대학교에서 그는 특히 교회사가이며 실천신학자인 코르트홀트(Christian Kortholt, 1632-1694)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케는 외삼촌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이 재단의 장학금은 학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카의 영적인 발전과 모든 행동에 대해 만족을 갖지 못한 그의 외삼촌은 1682년 더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프랑케는 키일 대학교를 그만두고 함부르크에 있는 유명한 오리엔탈 학자인 에드차르두스(Esdras Edzardus, 1629-1708)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후 패배한 학생으로 고타에 돌아왔다. 2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를 압박했다. 마침내 어느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개인교수하기 위해 1684년 라이프치히에 갔다. 그곳에서 프랑케와 이 학생은 슈페너의 사위이며 신학교수인 아담 레헨베르크(Adam Rechenberg)의 집에서 살았다. 프랑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68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으로 성서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성서주석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에 대한 몰입은 정적과 은거에서 내적인 정화에 대한 욕구를 강화하였다. 1687년 프랑케는 회심 이전에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97)를 알게 되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의 루터교 정통주의자의 동의 아래 몰리노스의 몇 개의 글들을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프랑케는 몰리노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겸손의 실천, 참회를 받는 신부를 위한 조언,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의심에 대한 조언의 체험을 배척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고 교리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케는 파울 안톤(Paul Anton)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움 필로-비블리쿰’(Collegium philo-biblicum)을 만들었다. 이것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젊은 석사들의 모임으로 매주 모여 구약과 신약의 한 장을 해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모임은 매우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대학교에서는 단지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행해진 성서해석은 엄청난 학생들을 불러모았으나 또한 프랑케에게 내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687년 가을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이 위기는 일어났다. 이것은 학문과 경건, 자신의 더 존귀한 영광에 대한 학문의 현존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의 삶 가운데 결정을 해야할 문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케는 1687년 다시 외삼촌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뤼네부르크에 있는 잔드하겐(Caspar Hermann Sandhagen) 감독에게서 성서 해석을 교수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프랑케는 외삼촌의 명령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뤼네부르크에서 그는 내적 정화에 대한 필요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요 20:311)에 관한 설교를 부탁 받았다. 원래 그는 살아있고 자신이 체험한 믿음과 죽었으며 가르침을 받은 믿음 사이의 차이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본문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숙고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내적인 신앙의 확신이 결핍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기독교인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그렇게 생각하고 터키인들은 코란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불확실함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전적인 불확실함의 상황 가운데 공허함과 이제 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 그에게 엄습해왔다. 높은 망루에서 전 도시를 관망하는 어떤 사람 앞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전 과정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프랑케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설교를 3일 앞두고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가득한 행복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섰다. “바로 나의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렸다.”

   프랑케는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있었던 자신의 유명한 회심의 체험을 1690/91년에 기록해 놓았다. 그를 무신론적인 회의론자로 만들었던 이성은 다시 신앙에 대한 시녀가 되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글로 프랑케는 이 “내적인 거듭남”을 서술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이런 점에서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는 프랑케의 회심을 루터와 비교하고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안에서 타오르는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이 이제 실천적인 기독교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냄새나는 분뇨 웅덩이”로서 나타났다. 새롭게 얻은 내적인 독립과 확신이 그에게 반박을 제기하고, 적대 관계를 견디어 내고 박해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데퍼만(K. Deppermann)은 프랑케의 뤼네부르크의 회심을 세 가지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

① 프랑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루터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의 승리였다. 의혹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대표적인 유일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되었다.

② 의심의 극복은 논리적인 것이 최종방법이 아니라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서적인 체험에서 찾은 것이다. 프랑케가 계몽주의의 자연신학에 대한 통로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음은 이것과 확실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③ 신앙의 확신에 대한 체험은 계속되는 삶의 방식에 유효한 결론을 주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봉사는 이제 프랑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성을 위한 학문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뤼네부르크에서 회심을 체험한 이후 프랑케는 함부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슈페너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인 요한 빈클러(Johann Winckler, 1642-1705) 목사가 세운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외삼촌을 다시 노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비합리적인 광신의 표시로 여겼다. 빈클러의 교육에 대한 자극들은 프랑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함부르크에 있을 때 프랑케는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에게서 두 달 동안 지냈다 (1689년 1월/2월). 프랑케와 슈페너는 긴밀한 우정을 맺었다. 1689년 2월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바로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정신은 즉시 확실히 나타났다. 교리적이고 신학 논쟁적인 강의 시간은 이제 모든 학부의 학생들을 위한 부흥의 시간이 되었다. 또한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들과 시민들도 청강을 하였다. 수십 개의 소그룹과 기도 모임이 생겨났다. 교수들 스스로 조직적인 학술 연구, 학문의 활기찬 활동의 종말로 대학교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물론 여기에 상처받은 자부심과 수업료의 감소도 한 몫을 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에 참여하였다. 왜냐하면 기도 모임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공 예배를 무시하거나 꺼렸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목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목회적인 차원의 환자심방을 했을 때에 그들의 활동 그룹 내에서 갈등을 겪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새로운 경건운동을 “경건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1690년 라이프치히의 소요가 일어났다.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 ‘콜레기아 피에타티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아 비블리카’가 되었다. 프랑케는 법적으로 이 일에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690년 3월 프랑케에게 모든 성서 주석 강의를 금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소요가 대학교에서 일어났으며 마침내 유명한 법률가인 토마시우스(Christian Thomasius)가 법률고문으로 상담하게 되었다. 법적인 고려에서 이 위대한 계몽주의자는 교황청 같은 루터교 신학부에 완전히 냉소와 경멸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마시우스의 평가서는 프랑케를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어렵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드레스덴의 궁전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슈페너는 작센의 선제후에게 광범위한 평가서를 통해 라이프치히의 경건주의를 후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샤데(Johann Caspar Schade, 1666-1698)와 프랑케의 친구들은 라이프치히에서 추방을 당했다. 선제후의 정부는 1690년 3월 10일 라이프치히에서 기도 모임을 금지했다. 라이프치히 사건에서 비로소 경건주의 운동이 전 독일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해 날카롭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료들과 더불어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전까지 슈페너의 개혁 제안들은 광범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었다. 이제 슈페너와 프랑케는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의 파괴자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경건주의자들을 토마스 뮨처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에어푸르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처럼 프랑케도 에어푸르트에서 자신의 설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러 교회에서 사람들이 경건의 모임에 참석했다. 교구에서는 이 일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프랑케가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자신의 강의에서 몇 명의 동료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하였을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독자의 완전, 직통 계시에 대한 신앙 그리고 선행의인과 관련하여 다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케는 결국 얼마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에어푸르트를 1691년 10월 14일 떠났다.

   이제 슈페너는 프랑케를 구하는데 관여해야 했다. 1691년 늦가을 프랑케는 베를린에 있는 슈페너에게 머물었다. 당시 슈페너는 드레스덴의 궁전 수석 설교자에서 바로 베를린의 교회 평정관이면서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교구장 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궁전에서는 할레에 새로운 대학교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슈페너는 프랑케를 정치가들에게 소개를 시켰으며, 프랑케가 이 새로운 대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를린에서는 할레에 세워지는 새 대학교를 통해 엄격한 루터교적인 대학교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 대한 정신적인 견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을 믿었다. 이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사람들은 1613년부터 브란덴부르크의 왕실이 고백한 칼빈주의와 투쟁했다. 할레 대학교의 설립으로 루터교 내에 관용 정신이 확산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리하여 경건주의자들을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사이의 교리적인 차이는 어떤 본질적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할레의 경건주의의 활동은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M. Schmidt)라는 표어로 요약될 수 있다.


2) 프랑케 신학의 개요


  프랑케 신학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죄의 깊은 이해를 강조하는 루터의 전통에 서 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특히 구원사실의 존재적인 관계는 특히 개인이 중요한 것이다. 회개의 투쟁과 일회적이고 증거할 수 있는 회심의 강조를 통하여 루터적인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사실을 관철할 수 없는 인간론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찰방법이 나타난다. 이것은 루터 신학의 본질적인 것에 강조의 옮김을 뜻한다.


3. 고트프리트 아르놀트(1666-1714)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신학


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Gottfried Arnold)


  아르놀트에게서 신비적 영성주의가 경건주의에 미친 영향이 보여지고 있다. 슈페너와의 접촉외에 아르놀트는 일찌기 급진적 경건주의적으로 교회에 대해 비판하였다(바벨론의 만가, Babels Grablied).

  아르놀트의 교회 역사철학적인 두 권의 중요한 책: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공동체들의 첫번째 사랑’(Die erste Libe Gemeinden Jesu Christi, 1696),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Unparteische Kirchen- und Ketzerhistorie, 1699/1700).

이미 첫번째 작품에서 아르놀트는 소위 말하는 타락 이론(Verfallstheorie)을 적용하였다: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결속된 사람들의 참 교회는 십자가와 박해 아래 있으며 초대 기독교 이후 점점 더 많이 세상에 빠졌다.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아르놀트는 이 타락사상을 교회사 전체에 적용시킨다. 기독교는 특히 콘스탄틴 황제 이후부터 더 많이 퇴보하였다. 그 이유: 교회가 국가와 동맹을 맺음. 교권주의와 교리의 억압. 이 타락은 교황의 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적인 교회들에게도 해당된다. 침묵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은 “장벽교회들” (Mauerkirchen)과 대조를 이루는 내적인 심령의 교회를 이룬다. 제도적인 교회로부터 이단자들과 이탈자들로 정죄를 받은 사람들이 이 기독교인들이지만, 이단자들이 단순히 성인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르놀트에 있어서 척도는 “비당파적인”, 즉 종파들을 뛰어넘는 기독교의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정당화 시키려는 관찰방법이다. 아르놀트는 교회사에 있어서 오류를 제기하였으며 기독교의 역사에서 평신도들과 여성들의 영향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아르놀트의 이 작품은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 역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2) 신비적인 영성주의


  교회 중심적인 경건주의의 역사에는 처음부터 또한 민족교회(Volkskirche)로부터 분리를 불러일으킨 교회 비판적인 경향들이 있다. 이 경향들의 사회적인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는 것과 결혼을 포기하는데 까지 이르는 극단의 개인주의와 같은 공동체 형성이 있다.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은 제도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비판한다: 주요 표지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가진 천년왕국설적인 미래의 희망(계시록 20장), 의롭게 만듦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론에 대한 비판과 만인구원론, 즉 »영원한 지옥의 벌들«에 대한 부정.

이 급진적인 경건주의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경계는 자주 뚜렷하지 않다.

- 급진적인 경건주의의 대표자들:

슈츠(J. J. Schütz, 1640-1690);

페터센(J.W. Petersen, 1649-1726)과 그의 부인(J. E. Petersen, geb. von und zu Merla, 1644-1721);

에파 폰 부틀러(Eva von Buttler, 1670-172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도 결혼하기 전 그리고 루터교 목사로 목회하기 전에는 급진적인 경건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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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11.09 14:10

    첫댓글 감사합니다

  • 06.11.10 10:08

    스크랩해갑니다 수고하세요

  • 07.03.19 18:54

    감사합니다. 항상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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