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신앙
- 한글날에 생각하는 가톨릭 신앙
요나 1,1-2,1.11; 루카 10,25-37
연중 제27주간 월요일; 2023.10.9.; 이기우 신부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한 이래 한글은 중국의 한자문화를 유교의 본령으로 섬겨온 지식층들에 의해 부녀자들이나 상민들이나 쓰는 언문으로 취급 받아 온 역사도 있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가장 과학적이고 창조적인 원리로 이루어진 문자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로 자판을 입력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가장 효율적인 문자가 한글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을 때 신앙의 선각자들은 언문(諺文)으로 천시되어 오던 한글의 대중적이고도 선교적인 효용성에 눈을 뜬 덕분으로 주요 교리를 4·4조의 한글가사로 된 ‘천주공경가’ 등을 짓기도 하고 한글로 쓰여진 교리서로 ‘주교요지’로 펴냈는가 하면 한글로 주요 성경을 번역한 ‘성경직해광익 (聖經直解廣益)’ 등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식층들이 한문을 고집하고 있을 무렵부터 행해 진 이러한 노력은 민중의 복음화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한글 보급을 통한 문화의 복음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이요 신앙은 문화라는 토양에 뿌려지는 복음진리의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문화에 처음 신앙의 씨앗을 뿌리셨고, 예수님께서도 유다인으로 태어나 그들의 율법 문화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 땅에 복음이 중국을 거쳐 처음 들어올 무렵에는 한문으로 표현된 유럽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조상제사 문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빚어진 갈등은 박해까지 초래하게 되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조상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의 표현으로 해석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악, 미술, 조각, 문학 등 문화의 여러 분야에서도 신앙은 한국적으로 제한 없이 표현되고 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문화에 담긴 가치관에 있어서는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 전해지고 있는 그리스도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큰 도전은 기복신앙으로 나타나는 현세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을 한글과 한국인의 사고방식으로 표현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졌으나, 한국인의 문화에 깃들인 현세주의적 가치관의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지금도 큰 숙제입니다.
오늘 독서로 들으신 요나 예언서에도 당시 고대 중동 문명의 최첨단이었던 니네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드러나 있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던 배가 풍랑을 만나 위험해지니까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기도한다든지 제물을 바쳐 노여움을 가라앉힌다든지 서원을 한다든지 하는 모습이 그런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예언적 요소는 제물로 뽑혀서 바다에 던져진 요나를 큰 물고기가 삼키게 했다가 하느님의 분부로 다시 육지에 뱉어져서 니네베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했다는 지점에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모세로부터 받은 하느님의 율법을 문화로 삼아온 유다인 율법교사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율법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혈연과 지연에 따른 인식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심으로써 이웃이란 혈연이나 지연을 넘어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강도를 만나 죽을 뻔한 사람은 유다인이었고 사마리아인과는 상종도 싫어하는 사이였지만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자신들이 당한 지역차별의 감정도 무릅쓰고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동족이었던 유다인 사제나 레위인도 외면했던 사람을 생면부지의 사람이, 그것도 미움받던 사마리아인이 마음을 다해서 도와줌으로써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편협한 율법문화에 갇혀 있던 율법교사를 깨우치고자 하셨습니다.
한국 문화 속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신앙의 메시지를 심는 일이 문화의 복음화 사명이라면, 한국 교회는 한국의 민족에 대하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처럼 진정한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