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신 아우구스티노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엘 7,9-10.13-14 마르코 9,2-10
“진정한 변화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지향하는 진정한 변화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래 지녔던 선하고
순수한 모습을 되찾는 것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까요?
우리 각자가 믿음 안에서 성숙한 변화를 지향하며 희망할 때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변모사건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이에 대한 베드로의 강한 거부와 부인
이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고 찬란한 변모 사건을 통해서
당신께서 겪게 될 고난과 십자가가 끝이 아니며, 그로써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시리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제자들이 종말에 누릴 구원의 은총을 앞당겨 주는 사건임과 동시에
그러한 은총이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임을 확증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듯이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영광스럽게 변하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외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고 내적 변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따라서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라면
정신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으로 변해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반드시 성령에 의해 우리 생각과 의지가 새로워짐으로써 새로운 삶의 형태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재이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으며 언젠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에게 변모하신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사람들 특히 고통받는 이들과 고독 속에 지내고 버려진 이들, 병자들, 불의와
횡포와 폭력에 유린당한 수많은 사람들 마음에 ‘사랑과 희망을 담는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은총의 빛으로 다른 이들을 비출 수 있을 때
이웃과 공동체, 온 사회가 좀 더 밝아지게 될 것이고 함께 성화된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전주교구 김창신 아우구스티노 신부
************
정용진 요셉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엘 7,9-10.13-14 마르코 9,2-10
오늘 복음의 배경은 산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에 오르시는 예수님을 되풀이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유혹의 마지막 장소는 산이었습니다(4,8 참조).
예수님께서 참행복의 말씀을 들려주신 곳도 산이었고(5,1 참조),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곳도 산이었습니다(15,29 참조).
복음서 끝에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산에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28,16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구약의 두 인물도 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모세는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계시를 받고 산에서 내려와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합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그 산을 내려와 예언자의 길을 당당히 걸어갑니다.
이렇게 산은 인간이 하느님을 내면 깊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여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변모’를 희망하며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산에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으로 살기를 단념하고 하느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복을 받아
세속적 의미에서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데에만 매여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과 함께 머무르려고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참된 주님의 모습과 그 영광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산에서 그분을 뵈었으니 이제 다시 산을 내려와야 합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 산에 머물고 싶어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산을 내려오시어 하느님 아버지께
받은 사명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십니다. 성당에서 또 고요한 기도 속에서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생각하는 산을 경험합니다. 지금 우리도 이 산을 다시 내려가야 합니다.
주님이신 스승께서 당신의 생명을 쏟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셨듯이,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산에서 들은 말씀과 산에서 본 그분의 참모습을 마음에 품고
형제들을 섬기고자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
한재호 루카 신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다니엘 7,9-10.13-14 마르코 9,2-10
나이를 먹으면서 얼굴은 삶의 흔적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 삶의 흔적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닮은 얼굴(마태오 복음 17장 1-9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영광의 얼굴을 갖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희망의 표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을 닮을 수 있을까요?
첫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얼굴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로오가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2코린 3,18)
해바라기가 항상 해를 바라보다가 해를 닮게 되었듯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얼굴 안에 새겨진 그분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살 때
어느새 그분의 얼굴을 닮아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얼이 하느님의 얼, 곧 성령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말로 ‘얼굴’은 ‘얼’과 ‘굴’이 합쳐진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영혼의 굴, 영혼의 통로가 얼굴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자유롭게 드나들 때 우리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상징하는 구름이 제자들을 덮었던 것도, 사도 바오로가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런 이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구름 속에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렇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 말씀에 귀를 귀울이며
성령을 우리의 얼로 삼을 때 우리 또한 예수님을 닮은 얼굴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