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이 찾아왔다. 삼십 대 후반의 여교사 둘. 반가이 한창 수다를 떨던 중, 뜬금없이 묻는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시냐고.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노라고.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이제야 좀 살 만한데 다시 돌아가라니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게다가 얼굴조차 난 젊어서도 그다지 잘생겼던 것 같지 않고 차라리 지금이 나은 것 같노라며 농까지 곁들였다. 한데도 제자들이 물러서질 않는다. 그래, 답해주마. 타임머신에 대해 질문하면 사람들의 답은 대개 둘로 나뉘곤 하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가장 후회되는 시절, 이렇게 둘 말이야.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그 두 순간이 하나란다. 바로 자식이 태어나던 날이지. 그날 이후가 내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나날이었거든. 하지만 동시에 가장 아쉬운 세월이기도 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정말 더 좋은 애비가 되어 진짜 진짜 잘 키웠을 텐데 말야.
내 딴엔 이만하면 현답(賢答) 아니겠느냐 싶어 살짝 거들먹거리려는데, 제자 녀석들이 서로를 마주보더니 난데없이 눈물을 쪼르륵 흘리는 게 아닌가. 실은 그날 그들은 작정하고 왔던 거였다. 교사하랴, 공부하랴, 무엇보다 육아의 고통을 호소하려던 젊은 워킹맘들. 공감과 동정을 구하고자 했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답을 듣고 만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 다시 묻는다. 정말 나중에는 지금 이때가 그렇게 기억이 되나요. 그럼 그럼, 그렇다마다. 제자들은 행복한 표정으로 연구실 문을 나섰다.
내 안의 여실한 젊음
하지만 나인들 그때 알았으랴. 예나 제나 젊음의 소중함을 젊은이가 어찌 알겠느냐. 그런데 이젠 안다. 아니까 좋고, 그 덕에 저런 이야기를 젊은이들한테 전해 줄 수 있으니 참 좋다. 뿐이랴, 나이 든 지금조차 나중에는 또 그립고 소중해 하리라는 것 또한 미리 알게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나이 드는 건 참 다행한 일이다. 나이 안 드는 게 문제지, 드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나이 안 들면, 미안한 말이지만, 죽는 거다. 오래 나이 들수록 감사할밖에.
물론 늙는 게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기름진 피부에 주름이 지고, 숯같이 검던 머리숱은 바래거나 빠지고, 근육은 줄어 힘차게 달리지 못하며, 달리면 이내 숨이 차는 걸 결코 좋다 할 수는 없으니까, 늙을수록 죽음에 한 발짝 가까워지니까. 나이는 들어도 죽고, 안 들어도 죽는 거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오기마냥 희망이 생긴다. 궁색하게 살지 않겠다. 풍요롭게 살겠다. 탱탱한 피부에 금목걸이 걸치는 풍요, 가능하지도 않고 가능하다면 오히려 추하게 되는 그딴 풍요 말고, 은발의 머리에 낡고 오래된 카디건 하나 걸쳤어도 눈과 귀와 가슴과 머리가 지혜로 충만한 내적 풍요 말이다. 늙음은 젊음의 반대말도, 젊음의 결여도, 젊음이 사라진 상태도 아님을 나는 나이가 들면서 절실히 깨닫고 있는 중이다. 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젊음은 여실하기만 하다. 젊을 때 듣던 음악을 여전히 듣는다. 그러면 젊은 시절의 그 느낌이 그대로, 어떨 때는 그때보다 더 충만히 살아난다. 클래식은 이제 비로소 좀 들을 만하다. 눈도 어두워지지 않았다. 이제야 그림과 자연의 풍광, 그 비밀이 조금씩 보이는 듯하다. 낭만과 감동과 경이가 끊이질 않는다.
풍요롭게 성장하는 젊음 배워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고전만이 아니다. 난 요새 젊은이들이 좋아한다는 음악도 들어보고, 영화나 드라마는 물론, 예능의 트렌드도 꾸준히 따라가 보려 한다. 미술 전시회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억지로 마음에 들어 할 필요나 의무야 없다. 실망하고 실패하는 것도 훌륭한 배움이니까. 무엇보다 노안을 밝혀서라도 책을 계속 읽으려 한다. 심지어 젊어서는 멀리 팽개쳤던 과학책 읽는 게 요즘은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다. 솔직히 잘 이해도 못하면서, 읽고 나서는 금세 다 잊어버리면서도, 그냥 신기하고 신날 때가 많다. 지식을 뻐길 일도 없고, 입시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니 이보다 즐겁고 자유로운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 늙음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그렇게 젊음을 껴안은 채로 점점 커지는 것이었다. 쇠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롭게 성장하는 것이었다. 청춘이 부러운 것도 참이지만, 젊은 날은 참 엉망이기도 했다. 하여, 비록 그때는 필요하고 또 옳은 일이긴 했으되,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타인을 정죄하기 바빴던 탓에 스스로는 가꾸지 못했던 인품이라든가, 짐짓 성공과 출세를 향하면서도 마치 가정과 직장과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척 살아야 했던 바람에 정작 돌보지 못했던 자신의 내면, 그 피폐함과 곤핍함을 채우지 못한 채 그냥 이렇게 끝나버리고 말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지 않은가.
늘어만 가는 호기심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궁금한 게 많아지고 호기심은 늘어만 간다. 젊을 때 진작 그랬어야 하는데 이제야 진정한 젊은이답게 사는 듯하다. 아무리 다시 따져 봐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게 아니라 이게 바로 먹는 거 같다. 다행히 자식놈도 애비더러 그렇게 살라고 응원해주니, 아무래도 제자야, 지난 번 답은 취소해야겠다. 비로소 젊게 사는 나더러 타임머신 타고 젊은 날로 돌아가란 말은 역시 하지 않는 게 맞지 않겠는가.
정재찬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입니다. 자신의 명강의로 꼽히는 시 읽기 강좌를 《시를 잊은 그대에게》라는 책으로 엮어 대중들에게 시 읽는 기쁨을 알린 에세이스트이기도합니다. 또 다른 저서로는 《그대를 듣는다》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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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고운 걸음주신
동트는아침 님 !
감사합니다 ~
쌀쌀한 날씨지만
지인과 따뜻한 정을 나누는
행복한 주말보내시길
소망합니다
~^^
고맙습니다...망실봉님!
새해 福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가 되십시오.
반갑습니다
바다고동 님 !
격려 말씀주셔서
감사합니다 ~
올 한 해도 건강과
행운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밀되시길....
반갑습니다
목자 님 !
고운 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편안하고 여유롭게
복된 주말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