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단체 백의사
양근환의 혁신탐정사 외에도 극우단체 양호단이 몽양의 암살에 조직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김좌진의 보좌관을 지냈다고 하는
김성(金星)이란 인물이 원산에서 조직한 양호단은 서북청년단과 함께 해방정국의 피바람을 일으킨 대표적 단체였다. 주로 반공,반북 테러가
전문이었다. 그런 양호단이 접수한 적산가옥인 유풍기업사 2층에서 암살범들이 암살을 공모했던 것이다.
암살범들이 유풍기업으로 옮겨가도록 주선한 것은 양호단의 간부였던 배광호와 단장 김성의 아들인 김열(金烈, 당시 25세)이었다. 배광호는
당시 모 은행장의 비서로 있으면서 신동운을 경제적으로 돕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당시 우익 테러단체에 관계한 인사들은 서로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개인적 친분관계와 조직적 연결관계가 결합되고
분리되는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관계이고 어디까지가 조직적 연결관계였는지는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점은 이들이 여운형을 바라보고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모두 일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누가 암살을
조종했고, 누가 총을 쏘았는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일일지도 모른다. 이들 모두가 몽양의 거세를 원하고 있었고, 실제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자신의 일처럼 범인들을 감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몽양 암살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중요 테러단체는 바로 백의사이다. 백의사의 사령인 염동진은 백의사 고문이었던 김영철의 소개로
신동운,김흥성 등을 소개받았다. 염동진은 그들에게 여운형이 민족분열을 조장하는 야심가라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몽양 살해에 직접 사용된
미제45구경 권총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몽양 암살직후 친일경찰 노덕술과 타협해서 사건을 축소,무마하는 데 일조를 했다.
테러단체 백의사는 반공,반북에 기초해 주로 대북테러,암살활동을 벌였던 조직이다. 1945년 11월경에 서울에서 월남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의 남의사를 모방한 전문테러단체였다. 백의사의 전신은 해방직전 평양에서 조직되었다는 대동단이다.
평양 모란봉 아래 영명사(永明寺)라는 절의 박고봉과 함께 조직한 이 단체의 성원인 백관옥, 선우봉, 박진양 등이 1945년 9월 3일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장인 현준혁을 백주대낮에 암살한 바 있다.(각주- 현준혁은 당시 평양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여 조만식 선생하고 같이 활동했던
중도좌파 성향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관련자 대부분은 1945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월남했다.
백의사는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야심적으로 조직한 '정치공작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신익희의 '정치공작대'는 주로
북한에서 반탁,반공공작을 하던 조직이었다. 신익희으 정치공작대에는 해방직후 신익희와 연계를 갖고 백창섭이 조직한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여기에는 이규갑,백시영,조영진,김흥배,박문,유익배,정희섭,안병성,유진산 등이 가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익희,
조중서,유진산 등이 정치공작대의 간부였다.
관련자의 진술에 따르면 백의사에서 이성렬, 김정의, 김형집, 최기성, 백시영, 이희주 등으로 구성된 '대이북집행부서'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정치공작대가 연합했고, 1946년 초반 대거 북한으로 밀파되었다. 이들은 여러가지 테러 사건을 일으켰다.
김정의, 조재국, 최기성, 김형집 등은 평양역 광장에서 열린 1946년 3.1절 기념대회에서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 사건으로 소련군 노비첸코 소위가 한팔을 잃었고 수류탄을 던진 김형집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한편 김정의,최기성,이성렬,이희주,최의호 등은
3월 9일 김책의 자택을 습격했고 3월 12일에는 강양욱 자택에 수류탄과 권총을 난사했다. 이 사건으로 강양욱의 아들 딸과 식모, 경비보초 등이
사망했다. 일당 중 최기성은 총격전으로 사망했고, 이희주와 김정의가 체포되었다.
대북테러 전문단체인 백의사를 이끈 염동진이란 인물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염동진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심지어 그의 본명조차도 신비에 감춰져 있었다. 몇가지 새로 발굴된 자료를 기초로 염동진의 약력을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염동진의 본명은 염응택이며 본적은 평남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82번지이다. 염도열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1909년 2월 14일생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신상기록 카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난징에 있는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불령단체에 투신해서 선만(鮮滿)에 잡입, 비밀공작에 종사한 까닭으로 수배됨. 일본 조선총독부 경무국 기록에 따르면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한편 1935년 여름이래 중국재류 불령선인 단체의 결성이라는 보고서 중에는 '낙양군관학교 졸업생 일람표'가 들어있다. 이 낙양군관학교라는 것은 바로 1934년 2월 이래 중국 하남성 낙양 소재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내에 설치,운영되었던 한인특별반을 지칭한다. 정식명칭은 '중국중앙육군 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고, 1년간의 단기과정이었다.
이 한인특별반은 윤봉길의 의거 직후 김구,김원봉에 대한 중국국민당의 지원의 일환으로 설치된 것이었다. 1934년 2월 개교시 한인특별반 입교생은 모두 92명이었는데 그해 8월 김구 계열 입교생 중 25명이 퇴교했고, 1935년 4월 9일 62명이 졸업했다. 졸업생은 김구 계열 10명, 이청천 계열 30명, 김원봉 계열 15명, 기타 7명이었다.
염동진은 이청천계열로 파악되어 있다. 운영문제에서 김구가 재정적 우위를 확보했던 반면 이청천은 총교도관으로 입교생 통솔의 중심 역할을 했다. 자금과 운영의 2원적 체제 때문에 양자의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김구 계열 25명이 퇴교했던 것이다. 당시 훈련교관은 오광선,이범석,조경한,윤경천,한헌 등이었고, 이범석이 학생대장을 겸했다.
이무렵 이청천은 길림성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그 무력기반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한 뒤, 자신이 총사령에 취임한 상태였다. 입교생들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거점인 길림성 일대의 한인사회에서 충원했다. 그러나 과연 염동진이 길림인근에서 거주했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염동진이 선린상업학교 졸업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기록에 '경고특비 제3210호(1935년 10월 12일 작성) 낙양군관학교 졸업 조선인의 신원 및 수배에 관한 건'이라는 자료에 따르면 염동진은 중화(中和)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4월 1일 선린상업학교 본과 제1학년에 입학, 1931년 3월에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후 염동진은 파주군 임진면 문산리 54번지에 잠시 머무르다가 상하이로 건너갔다고 한다. 여기서 이청천파와 연계되어 한인특별반을 졸업한 후 난징에 대기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염동진의 그후 행적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가장 유력한 얘기는 그가 '요춘택이란 중국식 이름으로 변성명하고 중국군 난징 헌병사령부 우편물 검사처에서 일했다. 그후 남의사에 들어갔고, 1937년 중일전쟁후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에서 일하다가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는 설이다. 백의사와 관련을 맺었던 백관옥, 백근옥, 최의호, 조재국, 선우길영 등의 증언이다.
무슨일을 하다가 어떻게 체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 된 뒤 염동진은 관동군 첩보대의 정보원으로 일했다고 한다. '비밀결사 백의사'의 저자 이영신은 염동진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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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응택의 신분은 관동군 첩보대와 접선하는 정보원이었다.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한때 관동군 헌병대에 붙잡혀 문초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그 이후 전향하여 독립군에 대한 다수의 정보를 제공해준 친일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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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그는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고문에 못 이겨서 그랬는지 또는 왜군 정보기관을 이용하기 위해 위장 전향을 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헌병대에 체포당한 얼마 뒤에는 관동군 정보기관의 첩보원이 되어 있엇다. 행인지 불행인지 관동군 헌병대에서의 고문후유증으로 염응택은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시력회복을 위한 치료를 받고자 해서였다.
염동진이 일제에 넘긴 정보는 십중팔구 한인특별반과 김구, 이청천, 김원봉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세력에 관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염동진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 단체 등이 피해를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 한인특별반에 들어간 사람들은 중견간부로 키워지기 위해 선발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김구의 아들 김인을 비롯해 임시정부 간부진의 아들, 친척들이 대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염동진은 암아도 이들에 대한 인적 정보를 비롯해 국민당과 임정의 관계, 김구와 김원봉, 김구와 이청천의 관계 등 내밀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특히 이청천 계열의 피해가 가장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력의 염동진은 해방이 되자마자 온건한 공산주의자로 민족주의자들과도 잘 통했던 현준혁을 암살함으로써 테러,암살공작을 개시했다. 그가 자신의 친일행각을 반성했다거나 자중(自重)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염동진이 내세운 이론은 반소,반공이었다. 그 깃발 아래선 모든 죄악이 사면되고,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었다. 염동진은 자신이 남의사와 일제 특무시절에 배운 온갖 공작방법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염동진을 따라올 만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염동진은 일제 밀정으로 변신한 자신의 처지를 저주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쨌든 중일전쟁 이래로 일제가 가장 증오하던 적, 공산주의자들은 염동진에게 가장 손쉽게 정당화시킬 수 있는 현실의 적으로 설정될 가능성이 높았다. 염동진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저주를 그들에게 퍼붓고 증오했을 것이다. 그것이 일제의 영향이든, 아니면 남의사 시절 이래 현실 속에서 다져진 신념이었든 간에 반공에 관한 염동진의 신념은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해방된 직후에도 염동진은 자신의 반공,반소이념이 여전히 효용성을 가질 수 있음을 정보원 특유의 본능으로 직감했다. 어쩌면 자신의 친일행각이 감춰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신도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극우반공과 민족주의를 표면에 내건 친일밀정 염동진은 정치테러를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그것도 정신적 위협을 가해 압박을 가하는 방식이 아니라 완전히 생명을 빼앗는 폭력과 암살뿐이었다. 이같은 암살과 테러는 정신적으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족반역행위에 불가했다.
현준혁이 암살된 것은 해방되고 18일만이었다. 현준혁이 공산주의자로 지은 죄악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현준혁은 중도우익 민족주의자인 조만식 선생과도 건국준비위원회 업무를 맡을 만큼 합리적인 공산주의자였고 해방되고 18일만에 암살당할 만큼 큰 죄악을 저지를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조직적 여건도 갖취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소련군의 만행핑계를 댄다 해도 그들의 평양입성은 8월 24~25일경이었고, 암살준비에 적어도 1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을 것으로 추정한다면 이들은 8월 26~27일경에 암살을 결정했음이 분명했다. 여기에는 아무런 논리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먹혀들어가자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지목한 인사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가했다. 사실여부와 정당성 유무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테러를 가함으로써 테러를 당하는 인물의 정치적,사회적 지위와 명망성이 대신 자기에게로 돌아올 것이란 '소영웅주의'와 공명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여운형의 암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반성하지 않은 친일밀정 출신의 극우테러리스트는 여운형을 '민족분열자,민족반역자'로 지목하고 공공연하게 테러를 사주했다. 결국 그가 건네준 45구경 리볼버 탄환이 몽양의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그후로도 테러활동을 전개하던 염동진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몽양에 대한 테러와 암살에는 수 많은 개인과 단체가 관련되어 있었다. 짧은 추리력과 정보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엉켜있는 의문의 실타래이다. 그러나 누가 총을 쏘았느냐 하는 점과 상관없이 그의 죽음에는 몇몇 음험한 배후세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첫번째는 악질적인 친일파들이다. 특히 이종형과 염동진 같은 '독립운동을 하다 전향해서 친일밀정을 지낸 인물들'과 경찰을 비롯한 각 부문의 친일파들이 몽양 암살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간에 사상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끝까지 일본에 충성했던 부류이다.
두번째는 극우파시즘으로 무장한 세력들이다. 이들이 지닌 신념의 한축은 극단적 반공이었고, 다른 한축은 일본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국수주의였다. 이들은 극단적 파시즘을 민족주의로 위장했지만, 역사는 결단코 이들의 이름위에서 민족반역자란 명패를 거두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친일파들과 극우파시스트들은 밀접히 결합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구별되지만 현실의 차원에서는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밀착 관계였던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경향은 어떤 조직이 암살청부를 맡았느냐와는 관계없이 몽양 제거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감춰진 암살배후세력은 바로 단정세력들이었다. 이들은 미소공위의 파탄과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수립을 주창했고, 이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몽양과 타협,화해할 수 없는 적이었고, 반드시 거세되어야만 했다. 구체적으로 누가 암살을 지령했는가 하는 점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수도 있다.
모든 암살이 그러했고, 하수인이 중간지령자 이상을 안다는 것은 곧바로 그에 대한 사형선고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직접적인 암살지령자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정치암살에는 직설법보다는 간접화법과 은유법이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 집단은 조직적으로 범행을 계획했고, 실행했으며 철저히 은폐했다. 송진우에 이어 몽양이 이들의 두번째 과녁이 되었고, 마지막 과녁인 김구도 이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이같은 암살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불행과 재난을 의미했다.
(계속)
첫댓글 이건 대체 누가 쓴건가요.. 황당한 소설을 잔뜩 써놨네요. 염동진의 친일혐의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입증된게 없습니다. 독립투사를 여운형 암살에 관련됬다고 친일파로 몰아세우다니...이건 정말 기가 차는군요,. 게다가 염동진이 김구의 대한 정보를 일제에 넘겼다??? 황당.. 근거가 어딨나요? (염동진이 일제에 정보를 넘겼다는 것도 증거도 없이 그냥 추측으로 써놨군요)
이영신이라는 사람이 쓴 '비밀결사 백의사'라는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관동군 촉탁에 있었다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거기서 구체적으로 무슨활동했는지 알려지지 않은거 뿐이죠.
그리고, 제가 이 글을 쓸때 가장 참조한것이 정병준 교수(現이화여대 사학과) 연구를 바탕으로 쓴겁니다. 그분은 한국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탑클래스에 위치한 분이예요. 그걸 황당한 소설을 잔뜩썻다는등 그런투로 말하니 기분이 거북하네요?
아니 누가 썼던 자시곤 간에 증거가 있냐구요?? 온통 추측글이 잖아요? 염동진은 젊었을적, 그리고 관동군에서 풀려났어도 계속 독립운동 했거든요? 게다가 김구 정보를 일제에 넘겨줬다는 증거가 있냐구요?? 사학계에서 이런 증거없는 추측글은 씨도 안먹혀요.
관동군 들어간건 사실아닙니까? 왜 자꾸 말꼬리 잡죠? 뭐 나중에 풀려난뒤에 독립운동 했다는거 '대동단'인가 하는 단체 결성한거 말하는거죠? 그 단체가 구체적으로 무슨활동했죠? 그 '대동단'이라는 활동에 대해 구체적인 활동내역좀 보여주세요. 살다가 테러리스트를 옹호하는 사람 첨봤네요.
그 단순한 이분법으로 사람을 판단하는데요. 내가 언제 테러리스트를 옹호했습니까?? 광복 초기의 상황은 워낙 복잡해서 그런식으로 단순화할수 없거든요??? 관동군 밀정이라는데 활동 증거가 없구요(고문으로 시력까지 망가젔는데), 염동진이 좌익계열에 대한 테러를 한건 사실이지만 친일혐의는 입증할 수 없거든요?? 게다가 염동진은 젊었을적 만주까지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람인데 좌익계열을 테러리스트 했다고 악질 친일파로 모는게 그게 정당한겁니까? 뭘 말꼬리를 잡아요?
네, 친일혐의는 입증할 수 없는거 사실입니다. 다만, 관동군 정보원으로 있었다는건 분명한 사실이죠.
게다가 멀쩡한 독립운동가를 악질 친일파로 몰아났는데 보는 내가 더 기분이 거북하군요?
백의사를 굉장히 미화한 글을 썼던 이영신氏가 쓴 '비밀결사 백의사' 上권 p22, p68~69에 나와있으니깐, 나한테 걸지마십쇼. 저는 정병준 교수하고 서중석 교수가 쓴 책을 기반으로 정리한거뿐이니깐요. 제가 더 기분이 뭐하네요. 참...
님한테 건게 아니고요 이 글 자체의 모순을 지적한겁니다. 실증주의에 입각해 봤을때 증거없는 추측글이 너무 많네요.
네, 그렇죠. 이 암살배후에서 '추측글'은 제가 쓴게 아닌 정병준 박사의 '몽양 여운형 평전'(http://durl.me/8f6yu 내용대로 쓴건데, 이 암살배후 부분은 실제로 매우 복잡해서 '추측성글'이 막 나오게 된겁니다. 암살배후 가담자들이 계속 거짓 진술을 남발해서 말이죠.
게다가 이 글 말미를 보면 단정세력이니 파쇼세력이니 얼버무린 감이 좀 오는데 이게 사실 따지자면 백의사를 지시했던 김구나 이범석까지 올라가거든요. 염동진이 악질 친일파라면 그런 사람을 쓴 김구나 이범석까지 책임이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님이 쓴건지 저자가 쓴건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얼버무린 감이 나는데 또 말미엔 이들손에 김구가 살해됬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결국 말하고 싶은건 족청계가 모든걸 지시했다는것 같은데 사실 백의사는 김구 선생의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김구가 백의사하고는 1946년까지는 가까웠던건 사실이지만, 그 전후로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백의사는 CIC 정보망하고 연계를 맺었던 세력이었어요. 여튼, 이게 굉장히 복잡하죠.
말미에 정병준 교수가 김구 암살을 백의사와 연계시킨게 안두희가 백의사 요원이라는 글 때문인것 같은데 그것에 대해 반박글도 있지요. 한번 참조해보시길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5/01/11/200501110500023/200501110500023_1.html
도진순 교수는 김구 연구에 권위 높은 사람이긴하지만, 이 사람 사실 문제 많은 사람이예요. 예를들어 '치하포 사건'에서 일본인 상인을 '계림장업단'이라 주장했던 사람이었죠. 제가 봤을때 김구 암살 배후도 역시 극우파의 소행이라는거 100%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동진의 과거행적이나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쉽사리 확찝어서 말하기 힘듭니다. 그렇기 떄문에 광복직후의 상황은 너무나 복잡한거고 함부로 말하기 힘든거에요. 염동진에 대해 일단 사료가 거의 없습니다. 증언 조금 남아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추측하면 안됩니다.
해방정국은 다루기 정말 힘듭니다. 그리고 염동진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자료는 거의 전무한 수준이죠. 하지만 염동진이 관동군에서 있었다는건 틀림없습니다. 다만, 구체적인 자료나 물증이 없기 때문에 '친일파'로 단정하지 않는거죠. 이건 백의사 단원 출신들이 직접 증언한 부분이기 때문이니깐요.(http://durl.me/8f9tn
그게 말이죠 정황상 증거가 없으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젊은 나이에(고등학교 졸업하고) 집떠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해 첩보활동 펼치다 관동군에 고문받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서 어쩔 수 없이 변절하는척 했는지 아니면 진짜 했는지는 며느리도 모르는 겁니다.그리고 관동군에 들어가서 활동증거- 저 글에 있는것처럼 김구 정보를 넘겼다느니- 하는건 근거가 없구요..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수 없다 이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