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엔 칠보산이란 산명을 가진 산이 여러 곳 있다. 그리 높지 않아(238 고지)
산악인들에겐 별 인기가 없지만 지역 주민들에겐 말 그대로 보물과 같은 칠보산이 가까이 수원에도
있는데 오늘 우리 느림보가 찾아 가는 곳은 괴산군 칠성면에 위치한 진땡 칠보산이다. 쌍곡계곡
떡바위에서 삐이팀이 하차를 하고 에이팀은 쌍곡계곡을 조금 더 달려 제수리치를 들머리로 해서
막장봉 그리고 발이 빠른 분들은 장성봉을 왕복한 연후에 하산길을 잡기로 계획 되었다.
괴산에서 문경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칠성면을 지나면서 517번 도로로 연결 되는 쌍곡교차로를
만나게 된다. 쌍곡계곡이란 글씨가 음각된
큼직한 바위를 보면서 우회전 하여 진입을 하면 막바로 계곡이 시작되고 탐방지원센터가 보이는데
이 지역이 국립공원이라 한때는 단순한 통과하는 통행인이 아닌 등산복이나 행락복장을 한 사람들에겐
돈을 받았었고 펜션 또한 대중화 되기 전이라 계곡에 텐트라도 치면 자경단 비슷한 마을 청년들이
쓰레기 수거 등등의 명목으로 텐트 당 오천원씩 거두어 가곤 했었는데 몇년 전 날씨가 몹시 무덥던
여름날 우리 느림보가 영덕에 있는 팔각산엘 갔을 때도 아예 계곡 입구 길을 막고 통행세 비슷한 걸
받았던 기억이 나는데 칠성에서 문경 가은읍으로 빠지는 쌍곡계곡 도로도 90년대 말 쯔음 포장공사를
완료한 걸로 알고 있다.
떡바위에서 차를 내리니 변강쇠 오줌줄기 같은 계곡물이 천지를 진동하며 힘차게 내려 꽂힌다.
상큼한 바람 그리고 흑표전차 일개 대대병력이 전속력으로 돌진을 하는 듯한 참으로 감미로운
굉음에(?) 잠시 넋을 놓곤 칠보산 일곱 봉우리를 찾아 보리쌀 소쿠리에 들어 앉아 밥을 훔쳐 먹는
쥐눈깔 처럼 눈알을 이리 저리 사정 없이 움직여 본다.
계곡물소리를 계속 듣고 있노라니 고막도 지쳤는지 잠시 폭풍 전야의 고요를 연상케 하는 정적이 감도는
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 힘찬 펄럭임의 소리를 마치 옆에서 듣는 듯한 지존의 표현이 생각 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쟈의 손수건이란 명문이 담긴
청마 유 치환 선생의 깃발이란 시.
산행뻐스를 따라 다니다 보면 우리나라 물 좋고 산 좋은 곳이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기계충을 앓아
엉금 엉금 머리털이 빠진, 칠복이 놈 대가리 처럼 빼곡하게 들어 선 펜션과 민박집을 보게 된다.
휴가를 맞아 사랑스런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자연 속에서 보낼려고 펜션을 찾는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되겠냐는 것이다. 99프로 이 펜션이란 곳이
남의 서방과 남의 예폔네가 서로 눈이 맞아 불륜의 떡을 칠려고 찾아 오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건전한 선남자 선여인들 께선 한번 생각을 해 보셔요. 펜션이란 곳엘 일년에
며칠을 묵어 보았는지? 보통 사람들은 거의 가질 않는데도 장사가 된다 함은 남의 살에 맛을 들여
떡을 치러 오는 무리가 그만큼 많다는 반증이 아니 겠습니껴? 허긴
이젠 떡을 칠 떡메도 시원찮고 떡판을 빌려 줄 남의 예폔네도 없는 내 신세가 한심할 따름이다.
90년 말 내가 이곳을 지나 다닐 때와 달라 진 점이라면 계곡 주위로 무수히 널부러진 펜션들의 등장인데
이번에 이곳 쌍곡계곡을 오랫만에 찾으면서 우리 선조들의 미래를 내다 보는 선견지명에 다시 한번 더
감탄할 따름이다. 우리 삐이팀의
칠보산 산행 들머리 지명이 바로 떡바위다. 이곳 쌍곡계곡이 후일
그리도 많은 사람들이 허구 헌 날 찾아 와서 떡을 치게 될 줄을 미리 안 선조들께 깊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해 본다.
대부분의 계곡길은 습기가 많아 음습한 기운이 도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칠보산은 전혀 그런 기운을
느껴 보지 못한다. 양기운이
넘쳐 나는 암산을 오르 내리다 보면 마운틴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한다. 세포 구멍 구멍이
모두 열리고 아랫도리 가운데 토막에도 찌릿 찌릿한 전깃줄을 감아 놓은 듯한 생기가 오랫만에
솟구친다. 한 구비를
올라 가니 오랫만에 느림보에 나오신 홍 대장님께서 꽝 꽝 얼려서 마치 샤베트 처럼 된 감을 건네
주신다. 몇 해 더운 여름날 상주에 있는 장각산을 오르다 한번 얻어 먹어 본 일이 절구 처럼 길죽하게
생긴 대봉시 감이다. 방언으론 도오감이라고 하는 지방도 있다.
오늘 우리 삐이팀에서 함께 산행을 하는 동원님은 오랜 세월 방송사에서 근무를 하다 은퇴를 하신
분인데 같이 산행을 하다 우연히 군대 얘기를 하면서 자신이 군생활을 할 적에 윤 일병이라 불리웠다고
하시면서 파평 윤씨라고 자신의 본관을 밝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성명을 할 적에 전 강 희월이라 합니다. 전 염 선영이라고 합니다. 하지 본을 밝히는 분은
드물다. 그만큼 자신의 성씨와 문중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칠십년대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라 정확지는 않은데 과거 조선시대에 과거급제한 사람들을 성씨 별로 나누어 보면
1위가 왕족인 전주 이씨고 2위가 파평 윤씨 그리고 3위 안동 권가 라고 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파평 윤씨 집안에 얽힌 잼난 산송 얘기 한자리 들려 드릴께요.
파평 윤씨인 윤 관 장군은 여진족 정벌로 이름을 떨친 명장이신데 이 장군의 산소가 있는 파주시
광탄면 일대가 연산군 시절 왕의 사냥터로 되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세월이 흘러 후손들의
기억에서 산소의 존재를 없어 지게 된다. 보통 실전을 하였다고 표현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영의정을 지냈던 청송 심씨 심 지원이 윤 관 장군의 무덤과 윤 관 장군이
타고 다니던 가마묘 또한 싹 밀어 버리곤 자신의 아버지 산소를 쓰면서 집안 사람들이 죽게 되면
자연스레 가족묘역 처럼 윤 관 장군 산소 주위로 여러 기의 산소를 쓰게 되었는데 후일 파평 윤씨
집안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집안 싸움이 벌어 지게 되고 송사로 번지게 된다. 무덤에 관한
일로 생긴 송사를 산송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송사 중에서 산송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한 발작도
물러 설 수 없는 두 명문가의 집안 싸움이 나랏님도 해결하지 못한 채 400여년을 끌어 오다 최근에서야
두 집안 서로 양보를 하면서 원만한 해결을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파평 윤씨 집안이 워낙 명문가
이다 보니 청송 심씨 집안의 할머니들 중 수 없이 많은 분이 파평 윤씨인지라 파평 윤씨의 외손이
되는 셈이다.
칠보산 정상 직전의 명품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어느 암봉에 오르니 선두 그룹이 벌써 진지상을 펼쳐
놓았는데 주위의 가깝고 먼 조망이 말로 형용키가 어려울 정도로 감동 그 자체다.
임금이 앉는 용상 뒷 배경 그림이 해와 달 그리고 다섯 산봉우리를 그린 일월오봉도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우리 느림보님들이 앉은 이곳은 일월에 이어 칠보산 칠봉이 자리를 잡은 일월칠봉도가 펼쳐 져 있는
것이 아니던가? 사람이
살다 보면 마냥 머무르고만 싶은 순간들이 있고 오래 머물면 오래 머물수록 좋은 곳이 딱 두 군데 있다.
이렇게 일월칠봉도가 펼쳐 지는 명산 산봉우리와 예폔네 배 위에 올랐을 때다.
마지막으로 실화 한토막 들려 드리면서 다음 단양 황정산에서 뵐 것을 약속 드리며
공부를 못해 삼류 학교를 다니던 내 친구가 국사 시험 시간에 역시나 공부하곤 거리가 먼 앞자리에 앉은
친구의 답안지를 훔쳐 보게 되었는데 질문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이 전사한 곳은?
노량해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은 앞자리 친구가 급기야 답안지에 바다에서 란 답을 쓰게 되고 이를
훔쳐 본 내 칭구놈은 먼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배 위에서 란 명답을 썼고 교무실에서 채점을
하던 선생님은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웃었다고 한다.
분당 탄천변 오두막에서 떡바위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는 돌삐 드립니다.
첫댓글 충무공께서 배 위에서 돌아가신것은 사실이지요.ㅎ
역사책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지난해 개봉해 천만의 관객을 끌어 모았던 '명량'이란 영화에서도
뱃전에 기대어 가슴의 화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최민식의 연기도 그렇고요.
칠보산은 이름만큼이나 아담하고 예쁜 산입니다.
초보자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착한 산..
그런데 그 옆의 보배산에는 송이가 많이 난다는군요.
그렇다면 칠보산보다는 한 수 위??
지난주는 냄비로 많은 젊음과 웃음을주더니,이번주는 떡바위로,ㅎㅎ
돌삐님은. 한번 들으면 죽어도 잊지않는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관주님께서 저에게 귀뜸해줬는데요. 역시..
본론,냄비에서. 떡바위는 같은 혈통이군요.ㅎㅎ.
조상들 선견지명이. 놀라워요.
젊음과 웃음을 주니, 2주 연속입니다.사실 조상들이 구름과 비에대해서는 오늘날보다 더하면 더했지못하지는않았지요.
그래서 어제. 다른팀사진보니 큰바위를 껴앉거나 한 사진들이. 유난히 많았군요. 산송도. 이제야 알았고,이씨조선 10대 명문가 파평윤씨도..
문과 무과 등원한 숫자통게
윤씨 왕비만 3명이.. 이씨조선 10대평문가 검색해보면 자기조상안다지요? 글솜씨. 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