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학살 현장 아라카와 다리에서
필사적으로 화재가 발생한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마주한 일본 도쿄도 아다치구 '아라카와 다리', 이 다리를 건너야 살 수 있다. 하지만 반대편에는 '자경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다리를 건너오던 조선인들을 무참히 도륙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이었다. 화마가 덮치는 뒤쪽으로도, 칼을 든 자경단이 기다리는 앞쪽으로도 갈 수 없는 끔찍한 학살이 1923년 9월 1일 시작된 것이다.
관동대학살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호센카(봉선화)재단의 신민자 님. 학살이 이루어진 아라카와강 현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3.8.30. 이호 사진작가
관동대학살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호센카(봉선화)재단의 신민자 님이 조선인 학살이 이뤄진 아라카와강 현장에서 전한 당시 상황이다.
그 당시에도 일본 관동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사이에 빈부의 격차는 존재했다. 재일 조선인 중 부유한 조선인은 '옥(玉)'이라 불렀고, 가난한 조선인 노동자는 '돌멩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죽음에는 빈부가 없었다. 당시의 전언에 의하면, 자경단이 조선인을 죽인 후 "돌맹이인 줄 알았는데 옥(玉)이었네"라고 말했다 한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했다. 박재동 화백에 따르면 박 화백의 조부는 당시 일본에 거주했는데, "하숙집 주인 부부가 옷장 속에 숨겨줘서 죽음을 면하셨고, 그로 인해 지금의 나도 존재한다"라고 했다. 박 화백의 전언을 직접 그림으로 표현한 쪽지는 도쿄도 아다치구에 있는 호센카 재단 '봉선화의 집'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호센카 재단에서 발견한 박재동 화백의 사진과 그림들. 좌측 아랫부분의 첫 번째 그림이 박재동 화백의 조부님, 두 번째 그림이 조부를 숨겨주었던 하숙집 부부, 그리고 마지막 그림이 자경단을 묘사한 그림. 2023.8.30. 이호 사진작가
그러나 숨겨진 참혹한 역사가 100년 동안이나 지속돼 왔지만, 가해자인 일본뿐만 아니라 피해국가인 한국 정부도 진실을 밝히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다. '양국의 발전을 위해 과거를 잊자'는 해괴망측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일본 도쿄도는 요코하마시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 '관동대지진 때 학살(虐殺)이 있었다'라고 기술했다는 이유로 교과서를 전량 수거했다고 한다.
도쿄도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항하는 야마모토 씨. 교과서 왜곡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2023.8.30. 이호 사진작가
더욱 비참한 사실은 조선인의 후손으로 아직도 국적을 얻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적'의 문제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 중 약 3.6% 정도가 조선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선적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북한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국적이 없다. 일본에서 살아가지만 국적이 없는 관계로 여권을 만들 수 없어 한국땅을 밟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이들이 한국 국적을 회복하려면 한국에 남아있는 제적등본을 찾아서 증명해야 하는데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관동대학살 100년이 지난 지금도, 학살당한 후손들은 국적 하나 갖지 못한 채 일본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온 나라가 홍범도 장군의 흉상 문제로 시끄럽다. 이념이 가장 중요하다는 대통령. 그러나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 잊혀진 수많은 일제에 의한 피해자들. 그리고 여전히 국적도 없이 일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 100년 전 나라 잃은 설움이 이와 같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관동대지진 100주년을 추모하는 일본 아이고전(展)에서 진행스탭으로 활약해주신 조선적 신분의 재일동포. 고경일 교수의 캐리커처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3.8.30. 이호 사진작가
그럼에도 양국의 민중예술가들은 잊혀진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아이고展 서울 전시회'를 이어간다.
서울 을지로 3가 '전태일 기념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는 9월 1일부터 9일까지 9일간 진행된다. 청산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숨겨진 아픔, 조작된 진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치유되고 바로잡히길 바랄 뿐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 민중이 나서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