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망하게 된 원인을 꼽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성여왕(887~897)을 꼽는다. 그런데 과연 진성여왕이 신라를 망하게 하는데 주요 원인을 제공했을까? 만약 조선이 정조대왕 때문에 망했다고 주장한다면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다. 조선은 22대 정조 뒤에도 27대 순종 때 까지 다섯 명의 임금이 더 있었는데, 조선의 망국은 정조가 아니라 후대 임금들의 실정 때문이라는 것이 대다수 사가(史家)들의 견해이다. 그렇다면 진성여왕 역시 후대에 5명의 임금이 더 있었다. 그렇기에 신라 망조의 원인을 진성여왕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신라가 진성여왕 때문에 망했다고 인식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조’에 있다.
"진성왕이 각간 위홍과 통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항상 궁중에 들어와 일을 보게 하였다. (중략)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이 때부터 2~3명의 미소년을 가만히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자행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위임하니, 이로 말미암아 임금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날뛰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정치 못하여 기강이 문란해졌다"
일연의 『삼국유사』 역시 삼국사기와 같은 인식으로 진성여왕을 평가하였다.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이 된 지 몇 해만에 유모 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등 3,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사용해 정사를 어지럽히자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많은 이들은 진성여왕이 숙부인 위홍과 관계를 했기 때문에, 진성여왕을 숙부와 근친상간을 한 음녀라고 매도했다. 하지만 이는 유학자들과 현대인의 시각일 뿐 신라 당대의 시각은 아니다. "위홍이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왕의 배필은 위홍 대각간이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둘 사이가 공인된 관계였음을 말해준다.
게다가 각간 위홍은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三代目)』이란 향가집을 편찬하였다. 삼대목은 신라왕실 개창이래 모든 향가를 수집, 편찬한 책으로, 신라 전통문화를 집대성하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이 편찬사업이 공식적이었던 것처럼 진성여왕과 위홍의 관계도 공식적이었을 것이다.
『화랑세기』를 보면 선덕여왕과 관련해 '삼서지제(三壻之制 :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제도)'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제(制)'자를 쓴데서 여왕 즉위시에 남편에 관한 공인된 제도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선덕여왕은 이 삼서지제에 따라 용춘과 흠반, 을제 세 사람을 번갈아 남편으로 맞이하는데, 그 중 용춘은 선덕여왕의 숙부였다. 용춘이 선덕여왕의 숙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서지제에 따라 공식적인 남편이 되었다면 위홍이 진성여왕의 남편인 것도 공식적인 것이다.
유학자인 김부식의 눈이나 현대인의 시각에서는 위홍과 진성여왕의 관계가 불륜일지 몰라도 스스로를 '신국(神國)'으로 자처했던 신라인들의 시각에서는 둘의 관계가 공식적이고도 당연한 것이었다. 신라인들은 근친들 사이의 결혼을 '신국의 도(道)'라고 불렀다. 23세 풍월주 양도는 어머니 양명고주가 이부동복(異父同腹:아버지는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누이 보량과 혼인시키려 하자 처음에 반대하다가 나중에 승낙한다. 이에 양명공주는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고 칭찬하였다. 동복남매 끼리의 결혼을 신국의 도라고 더 높이 평가했던 신라인들의 남녀관을 유교적 입장의 김부식의 시각이나 현대인인 우리의 시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골 신분이던 김춘추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으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굳이 진성여왕이 아니더라도 임금이 될 진골 신분의 남성은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진성여왕이 왕위에 올랐을까? 그 해답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진성여왕의 오빠 정강왕의 유조(임금의 유언)에서 추측할 수 있다.
"나는 불행히 사자(嗣子)가 없으나 누이동생 만(曼:진성여왕)은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이 장부와 같으니 경 등은 선덕 · 진덕 여왕의 고사에 의거해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성이 명민하고 골상이 장부와 같다'는 말과 '선덕 · 진덕 여왕의 고사'에 란 말에는 정강왕의 의도가 담겨있다. 정강왕이 진성여왕을 후사로 삼은 것은 위기타개를 위한 일종의 승부수였던 것이다. 정강왕은 선덕 · 진덕 여왕이 위기의 신라를 구해내고, 신라의 삼한일통의 기틀을 마련한 것과 같은 역할을 진성여왕에게 기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신라는 어떤 상황이었길래, 여성인 진성여왕이 왕위를 잇게 되었을까? 그것은 정강왕이 사망할 무렵(887) 신라가 체제 붕괴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일통을 이룩한 신라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종 무열왕의 마지막 직계인 36대 혜공왕(765~780)이 왕비와 함께 피살되고, 그 뒤를 이어 내물왕계인 선덕왕(780~785)이 즉위하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또 다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유혈상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원성왕(785~798)이 즉위하고, 이후 원성왕계가 신라의 왕위를 잇지만 왕권은 예전과 달리 약화되어 있었다. 원성왕 대 부터 시작되는 신라 하대(下代)는 진골 귀족들 사이의 유혈상쟁의 결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권은 아주 미약했다. 진골 귀족 반란에 의한 왕위 교체는 신라 지배층을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갔다. 하대의 상황을 기록한 『삼국사기』를 보면 당시 왕권 다툼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보여준다.
48대 경문왕 6년 10월(866): 이찬 윤흥이 아우 숙흥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대산군으로 도망갔는데, 왕명으로 그들의 목을 베고 전 가족을 처단했다
경문왕 8년(868) 정월: 이찬 김예 등이 모반하다가 처형당했다
경문왕 14년(874) 5월: 이찬 근종이 반역을 도모해 대궐을 침범했는데, 금군을 출동해 쳐부수었다. 근종이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 밖으로 도망하는 것을 추격해 잡아서 거열에 처했다.
49대 헌강왕 5년(879) 6월: 일길찬 신흥이 반역을 꾀하다가 사형당했다.
50대 정강왕 2년(887) 정월: 한주 이찬 김요가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 주살하였다.
이처럼 신라 하대 진골 지배계급 사이의 반란이 잇달았다. 지배계급의 혼란은 민중생활의 파탄을 불러오는 것이 역사의 상례이다. 『삼국사기』에는 고통스러운 민중생활이 잘 나타나있다.
48대 경문왕 7년(867) 5월: 서라벌에 전염병이 돌았다. 가을 8월에는 큰물이 나고 곡식이 잘 되지 않았다.
경문왕 10년(870) 4월: 서라벌에 지진이 있었다. 7월에는 큰물이 나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며 많은 국인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경문왕 12년(872) 4월: 서라벌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 8월에 국내의 주군(州郡) 들에서 누리가 발생하여 곡식을 해쳤다.
경문왕 13년(873) 봄: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돌자 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구휼하였다.
경문왕 15년(875) 2월: 서울과 동쪽 지방에 지진이 발생했다.
정강왕 1년(886): 나라 서쪽 지방이 가물고 흉년이 들었다.
진성여왕 즉위 당시 신라는 이렇듯 객관적인 붕괴의 길을 걷고 있었다. 지배층의 잇단 반란은 약화된 왕권을 더 약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층은 백성들의 고통은 아랗곳 하지 않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계속하였다. 민중들이 굶어 죽을 때 귀족들은 사절유택이라 불리는 4계절 별장을 옮겨 다니며 환락에 젖어 있었다. 나라가 붕괴 직전에 처해 있는데, 귀족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사용을 불사하던 시기였다.
정강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 공격으로 위기에 빠져있던 신라를 선덕, 진덕 두 여왕이 기회로 반전시켜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듯이, 명민한 천성과 장부 같은 골상을 지닌 진성여왕을 내세워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이룩하려 했던 것이다.
진성여왕은 즉위하자마자 죄수를 사면하고, 모든 주군의 조세를 1년간 면제시켰다. 그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슴 아파하는 애민군주였다. 백성생활의 안정이 곧 국가 안정의 기틀임을 알고 있었던 그녀는 애민정책으로 신라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인재가 없었다. 선덕, 진덕 두 여왕에게는 김유신, 김춘추라는 인재가 있어 삼한일통의 기틀을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신라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진성여왕 주변에는 인재가 없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 불을 안가리는 진골 귀족들만 있을 뿐 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세금을 독촉하자, 사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원종 · 애노의 난) 이는 세금 징수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더군다나 이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파견한 중앙 장수가 겁에 질려 나아가지 못할 정도였다. 반면 지방의 촌주 우운이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다. 국가에서 보낸 진압군의 장수가 반란군이 무서워 전진하지 못했다는 것은 기본적인 국가 유지 시스템이 붕괴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전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진성여왕은 이를 뒤집을 수 있는 승부수를 생각했다. 바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최치원이다. 그는 당의 빈공과에 급제한 수재로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황소격문」으로 문장을 떨쳤다. 게다가 당나라 희종에게 비은어대와 자금어대를 하사받고, 실록인 『당서』 예문지에 저서명이 수록될 정도로 국제적인 능력을 검증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당나라에서 인정받은 정치철학과 행정능력을 고국 신라를 위해 사용하고 싶어서 귀국을 하였다.(885) 하지만 신라는 최치원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출신성분을 중요시하는 폐쇄적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이 활약할 공간은 없었다.
진성여왕은 신라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념과 그에 따른 새로운 사회체제로의 개편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성군 태수에 지나지 않는 최치원을 파격적으로 하정사로 임명하였다. 이는 그를 중앙 정계에 등용시키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 하정사로서 당나라에서 보인 능력을 중앙 등용의 명분으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적들의 발호로 최치원의 사신길은 좌절되었다. 당나라 사신길이 불통될 정도로 신라의 혼란은 극심했다.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던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시무책을 작성해 올리라고 명했다. 이에 최치원이 시무 11조를 작성해 올렸는데, 시무책에는 신분보다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책을 가납하고 그를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하는 것으로 개혁정치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골귀족들의 격렬한 반대로 그의 시무책은 거부되고 말았다.
결국 시무책이 거부된 최치원은 정계를 떠나 자연에서 은둔의 길을 택하였다. 결국 개혁이 좌절된 신라는 더욱 극심한 혼란이 가중되고, 나라가 망할 위기에 빠져 있었다. 당시 빨간 바지를 입은 도적인 적고적은 지방은 물론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모량리까지 약탈하는 등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예견하면서도 바로 세울 힘이 없었던 국왕의 비극.....
당시 상황을 진성여왕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는 효공왕이 당나라 소종에게 보낸 「사사위표」에 인용된 그의 말에 잘 나타나있다.
"(진성여왕은) 자신을 책하는 생각이 깊어 말씀하시기를 '… 본국이 지금 큰 흉년이 든 데다 좀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 본래 늑대와 이리 같은 탐욕에서 시작해 차츰 홍곡(진시황 때 농민 반란군인 진승이 한 연설문에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랴'는데서 나온 말, 왕위를 꿈꾸는 야심가들이 많이 인용)의 뜻을 자랑하며 처음에 쥐같이 숨어서 살살 뒤주를 뒤지고 주머니를 더듬다가 형세를 타 벌떼 날 듯하여 문득 성을 파괴하고 고을을 노략질하니, 연기와 먼지가 국내에 자욱하고 풍우가 농사를 잡치게 되고, 뭇 도적이 동릉에 더욱 치성하니 농사조차 지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결국, 진성여왕은 신라사회의 소생을 위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기로 하였다. 자신이 왕위를 던지는 것이었다. 재위 11년(897) 6월 진성여왕은 "근년 이래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不德) 때문이다"라며 모든 사태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진성여왕은 주위의 반대를 의식한 듯 "어진 자에게 양위하려는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고 못박았다.
당시 양위 상황은 「사사위표」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관리와 백성들이 재삼 (진성여왕)이 왕위에 머무르기를 청했고, 신(臣:효공왕) 또한 (왕위를 이으라는) 부탁을 굳이 사양하여 명을 따르지 않고자 하였으나 끝내 여러 사람들의 바람을 막으시고 사제로 돌아가셨나이다"
진성여왕은 주위에서 양위를 반대하자 스스로 출궁을 단행해 버렸다. 국왕의 양위선언은 대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제스처 아니면, 신하들의 충성심 확인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양위선언을 실제 실천한 경우는 극히 드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양위선언은 무한한 책임의식에서 나온 진정이었다. 「사사위표」에는 "불이 나무에서 났으나 불이 맹렬하면 나무가 타고, 물이 배를 띄우지만 물이 날뛰면 배가 엎어지는 것이다"라는 말도 인용되어 있다.여기에서 불이나 물은 백성을 뜻하고 나무와 배는 임금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진성여왕의 백성론과 군주론이었다.
36대 혜공왕 이래 국왕이 피살되거나 자결하는 등 신라 하대의 혼란은 계속되었어도 스스로 책임을 통감하고 양위한 임금은 진성여왕이 처음이었다. 왕위를 내놓고 북궁에서 거주하다가 6개우러도 안된 그 해 12월 세상을 떠난 것은 양위가 얼마나 어려운 결단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정치 실현에 대한 진성여왕의 의지는 후대 남성 사가들에 의해 신라 망국의 책임에 대한 자인(自認)으로 악용되었다.
그런데 그녀가 양위한 인물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큰 오빠 헌강왕의 서자(효공왕)였다.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과 거타지에서 당나라 사신으로 간 이찬 양패를 왕의 막내 아들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그녀에게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정작 왕위는 자신의 아들이 아닌 조카 효공왕에게 물려준 것이다. '어진 자에게 양위하려는 나의 뜻'이란 그의 양위의 변은 자신의 아들보다 능력이 있는 조카에게 양위했음을 추측하게 해 준다. 「사사위표」에서 효공왕은 "제가 왕실의 태자로 책봉된 것도 그 분(진성여왕)의 공에 힘 입은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효공왕의 태자 책봉 당시 경쟁자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 경쟁자란 다름 아닌 진성여왕의 아들이었음을 추측되어 진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신라가 진성여왕의 음란함 때문에 망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지만, 신라 당대 기록인 「사사위표」는 진성여왕을 "사심(私心)이 없고, 욕심이 적으며, 다병(多病)한 몸에 한가함을 사랑하고 적당한 시기라야 말을 한다"고 적어 황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진성여왕 당대에 세워진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서 최치원은 "(진성여왕의) 은혜가 바다같이 넘쳤다"고 적어 그를 성군으로 묘사했다. 이 두 가지 당대의 기록은 적어도 진성여왕이 생존 당시에는 음녀가 아니라 때를 잘못 만난 임금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니 진성여왕을 음녀라는 인식은 제고되어야 할 것이다. 남성적인 시각에서, 유교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신라인의 시각으로 진성여왕을 재평가해야 되지 않을까?
첫댓글좋은 글입니다..역사란 이긴자의 전리품 같은 것이라 곧이 곧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늘 다른 관점에서 살피는 안목이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나말의 극심한 정변에서는 진성여왕 뿐 아니라 그 어떤 왕도 성하질 못한데도, 유교사관과 사대관에 골수분자인 김부식 같은 이들에게, 나라를 지배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왕은 좋은 희생양이 되었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흠...잘은 모르지만 여왕의 부군을 동시에 수명을 둔 것은, 성적인 상대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정적이나 국가관리상의 난관으로 부터 보호막이 되어 줄, 후견인 비슷한 역할의 목적이 강했다고 봅니다...즉 여왕의 남편이 다수인 것은, 여왕 개인의 취향문제가 아닌 국가 제도상의 형편이라 보인다 이거죠...물론 여왕도 사람인 이상, 성적인 문제는 해결했겠죠...그러나 여왕이 세 사람의 남편을 둔 이유로 음탕하다는 기준을 둔다면...천여년 이상의 이 나라 지배자였던 (남자)왕들은 전부 음탕한 자들이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특히 왕건 같은 사람은 후궁을 제외한 정실부인만도 스무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세종대왕도 예닐곱명의 부인을 거느렸다죠...그러나 그들에게 처첩이 많은 것은, 정략적이거나 제도상의 문제라 그들을 성적으로 문제시하진 않지 않습니까?...고신 님의 관점에서는 이들도 전부 탕군이라 봐야 하는가요?..아니, 그 쯤되면 색마라고까지 하실것도 같은데요... ㅎㅎ
우명님이 여성분이시라면 대단한 고견이시고 남성분이라 해도 더도 덜도 더 나을 것없는 똑같은 高見이십니다. 진성대왕님께서 잠자리/베개 파트너가 설사 종종 바뀌었다 해도 전 정말 놀라운 일이 우명님같이 멋진 젊은 이가 전진성 진보성뿐만 아니라 편견없는 평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이신거랍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역사란 이긴자의 전리품 같은 것이라 곧이 곧대로 믿을 것이 아니라, 늘 다른 관점에서 살피는 안목이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나말의 극심한 정변에서는 진성여왕 뿐 아니라 그 어떤 왕도 성하질 못한데도, 유교사관과 사대관에 골수분자인 김부식 같은 이들에게, 나라를 지배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여왕은 좋은 희생양이 되었으리라 추측이 됩니다..
기준을 세우고 역사를 봐야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두세명 이상의 남자를 상대했으면 유교의 관점을 떠나서도 음탕한것 아닙니까?
흠...잘은 모르지만 여왕의 부군을 동시에 수명을 둔 것은, 성적인 상대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정적이나 국가관리상의 난관으로 부터 보호막이 되어 줄, 후견인 비슷한 역할의 목적이 강했다고 봅니다...즉 여왕의 남편이 다수인 것은, 여왕 개인의 취향문제가 아닌 국가 제도상의 형편이라 보인다 이거죠...물론 여왕도 사람인 이상, 성적인 문제는 해결했겠죠...그러나 여왕이 세 사람의 남편을 둔 이유로 음탕하다는 기준을 둔다면...천여년 이상의 이 나라 지배자였던 (남자)왕들은 전부 음탕한 자들이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요...
..특히 왕건 같은 사람은 후궁을 제외한 정실부인만도 스무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세종대왕도 예닐곱명의 부인을 거느렸다죠...그러나 그들에게 처첩이 많은 것은, 정략적이거나 제도상의 문제라 그들을 성적으로 문제시하진 않지 않습니까?...고신 님의 관점에서는 이들도 전부 탕군이라 봐야 하는가요?..아니, 그 쯤되면 색마라고까지 하실것도 같은데요... ㅎㅎ
우명님이 여성분이시라면 대단한 고견이시고 남성분이라 해도 더도 덜도 더 나을 것없는 똑같은 高見이십니다. 진성대왕님께서 잠자리/베개 파트너가 설사 종종 바뀌었다 해도 전 정말 놀라운 일이 우명님같이 멋진 젊은 이가 전진성 진보성뿐만 아니라 편견없는 평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이신거랍니다.
박여사라 할까 박여인/박소저/박처녀/박씨/박女ㄴ/박대표/박누부/박누님/박언니... 아름다운 여인 제 어미인 육여사보다도 내 맘에 드는 figure/외모 갖춘 박근혜양을 이명박보다 는 정말 겨우 촌충만큼이나 낫다고나 할꺼나???!!!!
세상 역사를 잘은 모르지만 영국 여왕을 보더라도 남편을 서너명씩이나 두지는 않죠? 그리고 그당시 법률 제도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막연히 추측으로 때려잡으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이남자 저남자 정사를 벌이고 정치에 끌어들이면 나라 꼴이 제대로 될까요?
그리고 이런 말이 있죠,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고,,,,, 그냥 음탕하다고 인정하면 되는 겁니다, 정치가 어떤들 뭐가 어떤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ㅎㅎ...그럴지도 모르죠....다만 고신 님의 의견에 인정하기 위해서는, 배우자를 여럿 둔 점은 다른 왕들도 똑같은 입장이니, 고신 님이 그들도 똑같이 음탕했다고 말씀하신다면.. 여왕 역시 음탕했다고 인정할 순 있겠군요....혹 그러실 의향이 계실지....?
여왕이 음탕 하면 모든 남성 왕 들은 걸레 라고 봐도 되나요 흐흐흐~영국여왕사 도 보면 음지에 의한 즐거움 은 잇엇 답니다 ^^
에긍긍 글쎄요.. 우짤까나... 뿌리 혼잡스리 흔들어도 세계史上 헨리 8세는 실속보다는 명분에서 1000년 만년(?) 길이 기억되는 집정자이겠지요.
역사 공부 많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