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베드로1 5,5ㄴ-14
마르코 16,15-20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이다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 파견된 어느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소속되어 있던 부대는 밀림 한가운데서 적들에게 포위당해서 그 병사만 살고 전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뒤 그 병사는 홀홀 단신으로 밀림을 헤쳐나와 구조되었습니다.
그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지도를 보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그는 밀림의 지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난 거야!”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종이에는 밀림의 지도가 아닌 영국의 지하철 지도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하철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주신 ‘복음’은 이런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하셨고,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렇게 복음을 선포한 인물입니다.
그의 집이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또한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승천 이후 유다인들의 공격 대상 1호 가정이 그 집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자기 민족으로부터, 또 이방 민족으로부터 미움받아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도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보필하며 복음서까지 집필하였습니다.
그의 안에 있는 복음은 세상 모든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욱 빛을 발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고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입니다.
가끔은 우리가 무슨 복음을 전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성당 나오면 가정이 모두 평안하고 남편이나 자녀도 하는 일이 잘 될 거야!”
이렇게 말하면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요?
남편과 자녀, 가정이 풍비박산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복음은 이보다 더 큰 무엇이어야 합니다.
사실 복음은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다 잃고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때도 우리를 기쁘게 해 주는 무엇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집에 불이 나서 홀라당 다 타버렸는데, 그 가운데서도 무언가 찾을 힘이 생긴다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집은 1억짜리이고 찾고 있는 보석은 10억짜리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의 복음은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2013년 TV프로, SBS 힐링캠프에서 차 사고로 몸 55%에 3도 화상을 입고도 살아난 이지선씨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얼굴과 온몸이 성치 못함에도 “지금이 행복해서 과거의 예쁜 얼굴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합니다.
이지선씨는 대학교 4학년 때 오빠와 차를 타고 신호대기를 하던 중 뒤에서 음주운전 뺑소니 차량에 사고를 당했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의사도 포기한 상태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이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40번의 수술을 해야 했으며, 진통제의 효과가 떨어지는 몇 시간 동안은 극도의 고통을 당해야 했고, 살이 오그라들어 눈과 입을 몇 달 동안 깜빡이거나 다물 수 없었습니다.
목의 살이 오그라들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없어서 목과 척추까지 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그녀는 밝은 면을 보려 노력했습니다.
손가락이 곪아 8개를 잘라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울고 있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더 많이 자르지 않아서 감사하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살게 될 것이고, 또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준 것입니다.
이지선씨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들리는 음성처럼 느껴져 힘을 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이의 자세입니다.
복음을 지녔다면 절망이 그 사람을 짓누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그렇게 쉽게 자신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요?
잉태했다면 그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잘 보살펴야 합니다.
이지선씨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찾으려고 했다.”라고 말합니다.
사고를 낸 사람의 차가 보험에 들어 있어서 감사했고, 몇 달 만에 눈을 깜빡거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감사했고, 손가락으로 글을 쓰고 숟가락을 들 수 있는 것에 감사했으며, 환자복의 단추를 혼자 힘으로 끼울 수 있어서 감사했고, 문을 열 수 있어서 감사했으며, 무엇 보다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매우 행복해서, ‘진심으로’ 과거의 예뻤던 얼굴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참으로 두려운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모든 고난을 이길 힘을 줍니다.
이지선씨는 그 울퉁불퉁한 얼굴로 찬송가를 부르고, 짧아진 손을 들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연예인과 자신이 10가지나 닮은 것이 있다고 하며, 지금 자신의 모습에 매우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이지선씨는 자신의 이런 마음이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다 잃고 그렇게 가난해 졌을 때도 자신에게 빛이 되는 복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진 것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피조물에게 전할 복음이 꼭 있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베드로1 5,5ㄴ-14
마르코 16,15-20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이제는 내가 행해야할 기적
예수님께서 활발하게 복음 선포 사업에 매진하시던 공생활 시절,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목숨까지 바쳐가며 말씀을 선포하던 초대교회 시대 당시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랄 표징들, 기적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마귀를 쫒아낸다든지, 죽어가던 병자들을 치유시킨다든지, 독을 마셔도 쌩쌩하다든지 하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술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외국어와 관련된 기적에서 참 부러웠습니다.
수십 년간 죽도록 공부해왔지만 아직도 걸음마 수준인데, 전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느 순간 술술 딴 나라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기적과 표징의 강도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반증이겠지요.
사도행전 28장 3절에 보면 바오로 사도가 탄 배가 난파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한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섬은 이탈리아 반도 아래에 위치한 몰타라는 섬이었습니다.
비가 내리는데다 날씨까지 추워 불을 피우게 되었는데 바오로 사도는 땔감 한 다발을 모아
불속에 넣자, 독사 한 마리가 열기 때문에 튀어나와 바오로의 손에 달라붙습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 사람은 이제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바오로 사도는 태연한 표정으로 독사를 손에서 떼어내어 타는 불속으로 떨어트렸습니다.
사람들은 바오로 사도의 몸이 곧 부어오르거나 쓰러져 죽으려니 하고 계속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는 초대교회 시절 부지기수였습니다.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공생활 기간, 초대교회 시대는 ‘기적의 시대’ ‘표징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예수님과 사도들은 기적을 일으키며 하느님의 권능을 만방에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기적의 원동력,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정답은 명확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그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믿음 없는 표징, 확신 없는 기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것이 사라진다,
우리 인간은 약하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강한 믿음과 확신이
그 숱한 표징과 기적, 치유의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단정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선물로 주시는 표징과 기적은
모든 시대를 통해서 이어져왔습니다.
다만 믿음이 형편없이 약해진 시대, 우리의 시선이 너무나 탁해져서 그러한 기적과 표징들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믿음, 완고한 불신으로 인해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기적과 표징들을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 우리는 사랑의 기적을 펼쳐가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내 작은 선행, 내 작은 헌신, 내 작은 봉헌과 나눔을 통한 사랑의 기적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행해야 할 기적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월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복음: 마르 16,15-20 :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15절)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무지렁이였고 말재주도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만민에게 가르치도록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파견하셨다는 것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온 인류에게 증언하였다. 사도들이 이렇게 파견된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의 창조주를 알아 뵙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복음 선포는 모든 나라와 도시에 있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그분의 섭리는 온 우주를 통틀어 펼쳐지고 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16절) 신앙은 신경을 통하여 교육된다. 신경은 최대한 요약된 형태로 외우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믿어야 할 바를 간략하게 규정해 놓은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음으로써 성숙해지고, 겸손과 사랑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에 합당하게 감사드려야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17-18절) 당시 사도들을 통하여 행했던 일이 오늘에도 영적인 형태로 날마다 이루어지고 있다. 사제들은 구마은총으로 안수함으로써 악령이 머물지 못하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은 자신의 삶으로 온 힘을 다하여 창조주의 영광과 권능을 선포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훌륭한 권고로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악의 불을 끈다면, 그것은 뱀을 없애는 일이며, 악하게 유혹하는 말을 듣고도 악에 끌려 다니지 않는다면, 독을 마시고도 해를 입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표징은 영적이고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에 더욱 큰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다음에게는 믿는 이들에게 주어졌다. 이 은사들은 그것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표징으로 그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다음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19절) 부활절에는 주님의 부활이 우리 기쁨의 이유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승천 때문에 기뻐한다. 보잘것없는 우리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높이 현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부활하신 후 당신 제자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승천하셨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완성되기까지 아버지 오른편에 계시기 위해 육체적 현존을 끝내셨다. 여기서 오른쪽은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오른쪽이라는 것은 복됨의 의미이다. 인간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이 복됨 속에는 오른쪽만 존재한다. 이제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된 “임마누엘”이 되신다.
이제 제자들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떠났다.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었다.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 기적들도 그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기적을 행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복음을 전한다고 한다면,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복음 선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참된 도구가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더욱 확실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