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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묵상글 (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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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불안할수록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알기 위해서라도 먼저 믿으면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보게 될 뿐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굳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믿음이 큰 만큼 하느님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믿고 의탁하는 만큼 강하게 하느님을 만납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한배를 탔는데 어떤 이는 잠을 자고 있고, 어떤 이는 겁에 질려 허둥거립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있었기에 무서울 것이, 없으며 절박한 생존의 난국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께 위기는 아예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보호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깨운 것을 보면 아직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품 안에 있었으면 아무 걱정할 것이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믿는다고 하였지만, 철저히 맡기지 못했던 제자들입니다. 아마 우리도 같은 위험에 처했더라면 모든 희망을 잃고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려움에 맞서 주님께 살려달라고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허둥대던 제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고, 풍랑과 파도를 지배하는 주님의 능력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이제는 단순한 무서움의 차원을 넘어서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하며 경외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면서 커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따른다기보다 따름으로써 성장합니다.
혹 어려움에 직면할 때 아직도 허둥대고 있다면 믿음의 부족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1베드5,7).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25.34).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수많은 폭풍우 속, 시련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주님께 떠맡기고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성경을 보면 롯의 가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하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19,26). 믿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는 주님의 말씀대로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습니다(민수21,9).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어찌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말입니다”(까롤로 까레또). 믿음 안에서 능력의 주님을 만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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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잠자고 계시는 주님? 잠자코 계시는 주님!
연중 13주 화요일-2011
제가 부산 영도의 한 본당에서 사목을 할 때입니다.
아주 강한 태풍이 부산을 강타하였습니다.
저녁 미사와 모든 모임이 끝나 신자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저 혼자 성당에 남아 성당 문단속을 하는데
얼마나 비바람이 거센지 성당 창문들이 다 떨어져나갈 듯하였습니다.
순간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있다는 무서움이 엄습하였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문을 닫고 수도원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오늘 복음이 생각나면서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먼저 저의 신앙 없음이 깊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없다고 저는 나 혼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무신론자였습니다.
저는 비바람만 보고 주님은 보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무서움은 악과 홀로 대면할 때 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옆에 어린아이라도 있으면 덜 무섭고 덜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여럿이 같이 있고, 힘센 사람과 같이 있으면
훨씬 덜 무섭고 두렵게 되겠지요.
그러나 무서움과 두려움은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근본적으로 하느님 없이 악과 대면할 때 오는 것입니다.
게다가 악과 악의 세력이 엄청나게 크면
아무리 힘 센 사람이 옆에 많이 있어도 무섭고 두렵습니다.
바로 이때가 하느님께 믿음을 둬야 할 때입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악일지라도 주님께는 “까짓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엄청난 파도 앞에서도 주무셨습니다.
엄청난 파도를 “까짓것”으로 여기며 꾸짖으실 수 있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다고 믿는 사람은 그 어떤 악도 “까짓것”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없는 두려움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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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태 8,26)
<앞 장면>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만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도 그 배에 오르시어 동행하십니다.
사실, 배는 항구에 메여 있을 때 안전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항구에 가만히 정박해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항해하라고 만들어졌습니다. 항해하면 당연히 풍랑을 만나고 표류하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공동체)라는 배, “가정”이라는 배를 타고 항해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십니다. 그런데 배 안에 그분이 함께 계시는데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세시풍랑에 배가 휘청거릴 때도 있고, 방향을 잃고 헤맬 때도 있고, 위험에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도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분은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킬 수 있으시지만, 그 풍랑 속에서도 잠들어 계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가 우리가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사실, 그분은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면서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어 죽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의 유황불로 도시를 휩쓸어버리고 하늘 군대로 평화롭게 하실 수 있으면서도 무능하게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니고도 결코 우리의 응답이 없이는 이루시지 않으시는 무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순수한 의탁과 신뢰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주님의 기도”에서도 유혹이나 악을 제거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아버지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도록 가르치십니다. 곧 그 속에서 함께 하시는 그분께 의탁하고 신뢰를 두라고 가르치십니다.
실상, 지금도 당신께서는 배에 오르시어 우리와 함께 풍랑에 휩싸이시고 흔들리면서 항해를 동행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마치 물고기들이 맘껏 물속을 헤험쳐 다니면서도 물 밖에 나와 숨을 깔딱거리면서야 비로소 자신이 헤험칠 수 있었음은 물이 있는 까닭이었음을 알게 되듯이, 새들이 맘껏 하늘을 날다가도 새장에 갇혀서야 하늘이 있어서 날 수 있었음을 알게 되듯이, 그렇게 우리는 풍랑을 맞고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내가 키잡이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물결이 들이치고 배가 흔들려도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그분이 아니라 나 자신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주무셔도 주님이시오 깨어 계셔도 주님이신 그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나야 할 이는 그분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분이 함께 계심에도 두려워하고 있는 이는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배가 가라앉으면서야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키잡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결코 겁낼 일은 없습니다.
오늘도 그분께서는 배가 하늘항구에 닿기까지 우리를 이끄시고 동반하십니다. 단지 동반하실 뿐만 아니라 배를 인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주무셔도, 깨어 계셔도 우리의 키잡이시며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죽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27)
주님!
당신은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시지만,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고통과 수난을 몸소 겪으시지만, 온갖 질병을 고치시는 분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당하지만, 부서진 뼈와 마음의 상처를 새롭게 하고 죽은 이마저 살리시는 분
잠들어 계서도 깨어 계서도 저의 키잡이이신 당신이
진정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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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순례 중에 가이드로부터 ‘비잔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잔티움은 교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입니다. 로마의 박해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얻었던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었습니다. 교회에 자유를 준 로마의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입니다. 그 황제가 로마의 수도를 옮기면서 ‘비잔티움’을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때 세워진 교회가 ‘성 소피아 성당’입니다. 가이드는 비잔티움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스에 ‘비자’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는 고향에서 살기 어려워서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때 신탁을 받았는데 신탁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눈 먼 이들이 사는 마을의 건너편으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면 된다,’ 비자는 눈 먼 이들의 마을을 찾아 다녔지만 어려웠습니다. 함께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불평과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도착했는데 건너편의 동네가 훨씬 살기 좋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 때 비자는 깨달았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눈은 뜨고 있었지만 건너편 마을이 훨씬 살기 좋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구나.’ 그리고 비자는 건너편 마을로 가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비자가 세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비잔티움’이라는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고,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눈으로, 계명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찾는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근심과 두려움 그리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나라를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눈을 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눈 먼 이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아브라함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서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던 것은 롯입니다. 안타깝게도 롯의 아내는 새로운 비잔티움을 보았지만 소돔과 고모라에 머물러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빛바랜 교회의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새로운 비잔티움을 찾으려 했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 먼 이들의 도시를 떠나 새로운 꿈과 희망을 찾아 나섰던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과 복음의 기쁨으로 이코니아에, 안티오키아에, 스미느라에, 에페소에, 필립비에, 테살로니카에, 고린토에, 아테네에, 로마에 새로운 ‘비잔티움’을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구세로로 믿고 따르는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눈 먼 이들의 도시’에서 내가 ‘비잔티움’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는 ‘구원의 방주’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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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
-기도와 믿음-
일기쓰듯 하는 매일 강론입니다. 어제는 3개월만에 하늘병원에 다녀왔고 다음엔 10월초입니다. 한번만 더가면 2023년도 지납니다. 소리없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몸살감기 후유증인지 자꾸 눞게 되고 잠이 쏟아져 어제도 아까운 시간 많이 누워지냈습니다.
참 난세亂世입니다. 언제나 말세末世란 느낌이지만 작금의 국내외 현실이 그러합니다. 사람들은 곳곳에서 힘들다 아우성이요 평화로운 곳이 없습니다. 국내 현실도 흡사 내전을 방불케 합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어디나 참 치열한 전쟁같은 상황입니다. 인터넷을 열어봐도 혼란스런 뉴스들입니다. 노아의 방주처럼 찾는 교황님 홈페이지 뉴스입니다.
“교황님은 평화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신다. 피흘리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기도합시다. 기도는 세상을 보호하고 지탱하는 ‘부드러운 힘이다(the gentle force)’.”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폭력이다. 다시 반복되는 시간들이다. 가난, 불평등, 식량, 물, 건강, 교육, 집과 같은 기본적 자원의 결핍이 인간 존엄에 심각한 범죄가 되고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전인류 가족의 참된 진보를 위해 일하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소서.”
“교황님의 7월 기도지향은 성체성사적 삶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 삶의 중심에 미사전례를 놓아야 한다. 미사는 인간관계를 변화시키며 하느님과 형제자매들과의 만남으로 열어주기 때문이다.”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눈에 띤 기사들입니다. 교황님의 시야는 세계 곳곳을 향해 열려 있음을 봅니다. 결국은 7월의 기도지향으로 모아집니다. 성체성사적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미사로 수렴되고 미사는 하루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성 회복에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인해 주는 미사전례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오늘 창세기는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에 대한 일화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가라앉히시는 일화입니다.
소돔을 멸망시키기전 롯가족의 탈출이 참 긴박하게 이뤄집니다. 천사들의 적극적 도움으로 미련으로 쉽게 떠나지 못하는 롯 가족을 초아르에 간신히 피신 시킨후 주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십니다. 그림처럼 소개되는 세 장면을 나눕니다.
1.‘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성읍들과 온 들판과 성읍의 모든 주민,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다보다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다.’
2.‘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가 주님 앞에 서 있던 곳으로 가서, 소돔과 고모라와 그 들판의 온 땅을 내려다보니, 마치 가마에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 오르고 있었다.’
3.‘하느님께서 그 들판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 그래서 롯이 살고 있던 성읍들을 멸망시키실 때, 롯을 기 멸망의 한 가운데에서 내보내 주셨다.’
홍수의 심판에서 구원된 노아처럼, 불의 심판에서 구원된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기도덕분에 살아 난 롯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하느님을 완전히 잃어버린 죄악으로 가득한 무법천지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회복하라는 강력한 회개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아내는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심판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입니다.
강건너 불이 아닙니다. 기후위기를 통해 인류종말의 어둔 그림자가 지구에도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절박한 생태적 회개의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흡사 풍랑 중에 전복될 위기에 처한 지구 공동체 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중인 공동운명체인 우리들입니다.
저는 올해 수도원 창립 36주년이 된 요셉수도공동체를 묵상합니다. 창립 다음해 1988년 부임하여 35년 동안 세상 바다 항해중인 요셉수도공동체란 배가 지금까지 건재할 수 있었음은 순전히 기도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숱한 전복의 위기중에도 주님께서 수도원의 중심에서 늘 함께 해주셨기 참으로 안전했음을 봅니다.
답은 하나, 기도뿐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이 기도하고 회개합니다. 기도는 한결같아야하고 간절하고 절실해야 합니다.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아브라함이,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큰 풍랑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니 그만큼 믿음이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위기에 처한 제자들의 반응이 신속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짧으며 강력한 기도인지요! 이렇게 겸손히 빈 마음,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요, 참으로 기도해야 할 난세중의 난세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 배움의 여정이요 믿음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빛만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더욱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어나시어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시니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순전히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제자들은 물론 우리가 평생 화두로 지니고 살아야 할 물음입니다. 바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분이신, 토마스가 어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고백했던 예수님입니다. 더불어 인생 항해 여정중 늘 우리 작은 공동체의 배에 중심에 자리잡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팎의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우리 모두에게 좋은 믿음과 더불어 깊은 안정과 평화를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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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믿음이 강한 것은 어떤 것일까요? 기도 잘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믿음이 강한 것과 기도 잘하는 것은 정말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일까요?
손뼉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이 진정 우리 믿음을 잘 표현하는 기도일까요? 아니면 조용히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 믿음을 잘 표현하는 방법일까요?
믿음은 그런 형식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 신앙생활에 풍랑이 닥쳤을 때 그때 드러납니다. 믿음은 우리가 유혹받을 때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렇게 풍랑이 몰아칠 때 진실한 믿음과 허풍 섞인 믿음은 구분됩니다.
기억나시나요? 주님께서 들려주신 두 아들의 비유 말입니다. 한 아들은 밭에 가는 일하는 것이 고됨을 알고 밭에 나가 일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아들은 자신이 밭에 나가 일하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고됨을 알지만, 아버지를 위해 일하러 나가는 아들과 말만 번지르르 발라놓고 일하러 가지 않은 아들의 이야기에서 고난과 고통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선택의 순간은 우리에게도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풍랑의 어둠에 빠져 공포에 질려있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같은 말을 들려주실지 모릅니다.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을 선택할 것인지 그 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 혹은 우리를 떨게 만드는 두려움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왜 겁을 내십니까? 그것이 올바른 길이라면, 그것이 주님께서 들려주신 길이라면 걸어가십시오. 한발만 내디디면 주님께서 우리 옆에서 이렇게 소리 치실 것입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하여라. 어둠과 두려움아, 모두 물러가거라.’라고 말입니다.
레지나와 안젤라
4월호였던 것 같습니다.
성지에 방문했던 레지나와 아녜스에 대해 글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이 다시 성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정정 글을 부탁했습니다.
우선 ‘레지나와 안젤라’로 정정하고 고등학생이 아닌 중학생으로 정정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근황을 다시 알려주었습니다.
남친과 헤어져 슬퍼하던 레지나는 다시 남친이 생겼답니다.
치과에 다니던 안젤라는 아직도 치과에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하하하하
너무 귀엽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멀리까지 다시 찾아와 4월호를 들이밀며 정정을 바라고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근황을 전하는 모습이 참으로 귀엽습니다.
주님께서도 많이 사랑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보살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쁘고 건강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기를 저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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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4.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은 시험 보기 전에 문제와 답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문제와 답을 알려줘도 못 맞추는 멍청이가 있다.”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내는 문제를 어떻게 틀릴 수 있냐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한 번에 60명 정도 되었는데, 모두 100점 맞았을까요? 아닙니다. 틀린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틀리면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저 역시 부끄럽게도 틀렸습니다.
문제와 답을 가르쳐줘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귀담아듣지 않으면 당연히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꺼이 선택하셨습니다. 또 그 나라를 우리가 잘 모르기에 자세히 가르쳐주셨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정답도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만 하면 혹시 잊어버릴까 봐 당신이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이 답이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는 우리입니다. 입으로만 사랑을 외치면서 나만을 위한 사랑을 말하고 또 행동한다면 그 나라에 적합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문제와 답까지 모두 알려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믿음을 통해서 바르게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탄 제자들은 호수에서 큰 풍랑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하셨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지요.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답을 전에 이야기하지 않으셨을까요?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귀담아듣지 않았으니, 절박한 상황에서는 새하얗게 잊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이 전혀 없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든 상황은 우리 곁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셨고 보여주셨던 정답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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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상황을 고민할 때 결말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바람직한 결과부터 생각하고 역방향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이지요(앙겔라 메르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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