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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제1권에서
나의 아내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끌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미당의 시 [내 아내] 중에서.
**매릴린 옐름의 {아내} 중에서.
----문정희, [나의 아내]({나는 문이다}, 문학에디션 뿔, 2007년) 전문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며, 티베트인들에게는 그들의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이자 정치적인 결정권을 갖고 있는 통치자라고 할 수가 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고,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달라이 라마는 즉, ‘바다와도 같이 덕이 넓고 큰 스승’에게 부쳐지는 헌사인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땅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열반에 들지 않고 다시 인간으로 환생한 관세음보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달라이 라마의 역사는 ‘관세음보살의 역사’이기는 커녕, 차라리 수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도 보인다. 제1대의 겐둡 둡빠에서부터 제14대인 텐진 갸초에 이르기까지, 몽고와 청나라와 중국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던 티베트의 역사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제14대인 텐진 캬초, 즉, 오늘날의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티베트를 탈출하여 인도에 망명 정부를 세운 망명객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의 종교간의 진정한 조화를 추구하는 ‘종교적 다원주의’와 ‘비폭력 평화운동’은 오늘날 전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의 사악한 탐욕을 더욱 더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고, 늘, 항상, 경건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있는 것은 라마 불교의 교주로서 그가 지닌 최대의 덕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라마 불교의 선禪사상이나 달라이 라마의 종교적 영향력을 논하고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머리 속에는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그 달라이 라마와 연관된 매우 좋지 않은 사건이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화가 P는 여성이며 인천여고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서 한 남성과 결혼을 한 바가 있었다. 그 남성은 매우 건강하고 성실한 남편이었으며, 대기업의 해외지사의 사원이었다. 화가 P는 그 남자와결혼을 하자마자 유럽으로 떠나갔고, 유럽에서 10여년 간의 외국 생활을 하다가 귀국을 했다. 남편의 사업은 곧잘 되었고, 그녀의 부부가 귀국할 때에는 한 평생을 먹고도 남을만큼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부부는 화가 P의 향수병 때문에 귀국을 한 것이지만, 그녀는 귀국을 하자마자 대학을 진학하고 대학원까지 마쳤으며, 그리고 급기야는 그 어눌했던 모국어의 솜씨를 단숨에 고쳐버리고, 대한민국 국전을 통하여 화가로서 데뷔를 한 바가 있었다. 화가 P는 매우 자상하고 친절했으며,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도와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미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주 나쁜 단점이 있었는데, 그 나쁜 단점은 그녀를 ‘악모악처惡母惡妻’의 전형이라고 부르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첫 번째는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 하고만 사귀고 있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이렇다 할 돈벌이도 없으면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을 떠나서 혼자 살고 있는 것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최소한도의 경제 개념도 없이 물 쓰듯이 함부로 돈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를 고를 때는 한 계단 내려서고 친구를 고를 때에는 한 계단 올라서라는 말이 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가 있는 것이지만, 화가 P는 그 교훈의 정반대방향에서, 자장면 한 그릇 값도 없는 친구들만을 사귀며, 그 친구들 앞에서만 정신적, 물질적 교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면 날마다 뼈 빠지게 일을 하며 돈을 벌어다가 주는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전혀 없었던 모양이고, 대학입시를 앞둔 아이들의 등, 하교 길과 그 뒷바라지도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이다. 현모양처인 신사임당도 그녀의 곁을 떠나가고 없었고, ‘맹모 삼천지교’라는 맹자의 어머니도 그녀의 곁을 떠나가고 없었다. 이제 화가 P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파산상태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착하고 어진 남편은 조그만 어선의 일용잡부가 되어 망망대해를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화가 P는 아직도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달라이 라마의 설교를 듣겠다고 인도로 여행을 떠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남편이 달라이 라마이며 부처인 줄도 모르고, 그 어질고 착한 남편을 그토록 파멸시켜가고 있는 그녀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불러야 한단 말인가? 과연, ‘비교하지 말고, 과욕하지 말며, 집착하지 말고’, 즉, ‘욕망의 절제’를 통하여 아름답고 행복했던 삶을 강조했던 달라이 라마가, 그녀의 무절제한 과소비를 부추기고, 저 만고의 진리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파괴하라고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악모악처’는 자기 자신의 가정을 돌보지 않고 그 가정을 파탄에 빠뜨리는 여자를 말한다. 화가 P는 달라이 라마의 설교를 들을 자격도 없으며, 그녀의 남편과 그 아이들의 미래를 갉아먹는 암적인 종양에 지나지 않는다.
문정희 시인은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고,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아우내의 새}, {나는 문이다} 등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는 봉건사회와 남성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이며, 이제는 그만큼 낡고 시대착오적인 노래일는지도 모른다. 봉건사회는 유교사상이 지배했던 사회이며,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주의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던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여필종부女必從夫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군위신강君爲臣綱은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부위자강父爲子綱은 아버지와 자식, 그리고 부위부강夫爲婦綱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이상이 ‘삼강三綱’이라면,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 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은 ‘오륜五倫’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때로는 서로가 침범할 수 있는 구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어린 아이 사이에는 질서가 있어야 하며, 그리고 친구와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와같은 ‘삼강오륜’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고 있었던 유교사회에서는 남성은 주존재요, 여성은 어디까지나 부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여성이 여성인 것은 어떤 특질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한 바가 있었고, 심지어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마저도 ’여자는 불완전한 남자‘라고 역설한 바가 있었다. 봉건사회는 남성중심의 사회이며, 그것은 동 서양의 모든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을 낳지 못해도 안 되고, 외간 남자와 음탕한 짓을 해서도 안 되고, 비록, 남편이 첩을 얻었을지라도 질투를 해서는 안 된다. 감히,여자의 몸으로 나쁜 병을 앓아서도 안 되고, 함부로 말 대답을 하거나 말이 많아서도 안 되고, 또, 그리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탐내거나 도둑질을 해서도 안 된다. 이 ’칠거지악七去之惡‘은 모든 여성(아내)들에게 덧 씌워진 멍에이며, 그 멍에를 씌운 힘은 ’여필종부‘라는 남성중심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봉건사회는 농경사회이며, 사회적 이동이 거의 없었던 씨족사회였다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씨족사회의 가계와 그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이며, 그리고 그 씨족사회의 도덕적 질서와 남성지배의 정당성을 합리화시켜주는 유교사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봉건사회는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사회이며, 아내는 반드시 그 남편의 말에 순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그 아내는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이지 않으면 안 되고,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아내는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이지 않으면 안 되고,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남편은 하나님이고 아내는 그 남편의 몸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학문과 예술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를 않았고, 연애를 하거나 배우자를 고르는 일도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를 않았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조차도 허용되지를 않았으며, 어디까지나 가부장적인 순결의 이데올로기 밑에서 칠거지악과 여필종부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사회는 씨족은 물론, 가정이 급속도로 해체되어가고 있는 사회이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남성의 지위를 압도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여성들이 봉건사회의 가부장적인 억압 속에서 뛰쳐나와 고등교육을 받게 되었고, 그 고등교육을 받은 결과, 모든 남성들과 똑같이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할 수가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생활과 그 직업을 쫓아서 산아제한을 하거나 금산禁産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전통적인 남성주의에 반하여, ‘여성호주제’가 그 문패를 내걸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일반직 공무원과 교육직 공무원들의 70%가 여성들로 구성되어가고 있으며, 사법고시와 외무고시와 행정고시마저도 여성들이 50% 이상의 합격률을 자랑하고 있게 되었다. 어느덧 군대의 가산점도 옛말이 되어버렸고, 온라인 통장과 함께, 가정의 경제권도 여성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는 머지 않은 장래에 가문의 혈통도 끊어지게 되었고, 앞으로는 ‘남성해방운동’이 미래의 주요한 사회적 운동이 되어갈는지도모른다. 요컨대 ‘벌벌기는 남자’와 ‘펄펄 나는 여자’가 이 시대의 새로운 신조어가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문정희 시인은 여성 시인이며, 대한민국의 명문 사학 중의 하나인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선호하고, 자유와 사랑과 평등을 그 이념으로 내세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수혜자이자 그 우등생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왜, 그 여성주의의 반대방향에서, [나의 아내]를 쓰게 된 것이며, 이 [나의 아내]를 통해서 그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우리 인간들은 가정에서 태어나 그 가정 속에서 살다가, 그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죽어가게 된다. 가정은 존재의모태이며, 영원한 안식처이고, 그 존재의 삶의 근거이다. 할아버지가 살다가간 곳도 가정이며, 할머니가 살다가 간 곳도 가정이다.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도 가정이며,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도 가정이다. 아들이 살고 있는 곳도 가정이며, 딸이 살고 있는 곳도 가정이다. 손자가 태어난 곳도 가정이며, 손녀가 태어난 곳도 가정이다. 요컨대, 가정은 이 세계의 중심인 것이고, 봉건사회와 유교사상이 남성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존재의 근거인 가정마저도 해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남성과 여성과의 성 차이는 인정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 차이가 성 차별과 인간 차별의 잣대로 악용되어서는 아니된다. 봉건사회가 남성중심주의로 기울어져 있었다면, 현대자본주의 사회는 여성중심주의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남자는 사냥을 하고 사회적인 활동을 하기에 더 적합한 존재이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아이를 양육하기에 더 적합한 존재이다. 남자는 그 가족들을 위해서 돈을 벌어와야만 하고, 여자는 그 가족들을 위해서 더욱 더 훌륭한 살림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너무나도 자명하고 분명한 생물학적인 역할 분담이 자본주의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에 의하여 파괴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고 있는 이상, 그 어떠한 방법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모든 공직사회와 군대마저도 여성들이 장악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며, 내가 누구의 자손이며, 누구의 사생아인지도 모르는 마당에 역사와 전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또한 나의 성씨가 문씨이면 어떻고 아베(또는 부시)이면 어떻게 될 것이며, 자기 자신의 죽음마저도 지켜주고 물 한 그릇 떠놓아 줄 이가 없는 그의 사후가 도대체 무슨 명복이 있을 것이란 말인가? 현대사회는 모든 가계의 전통과 그 존재의 근거인 가정마저도 해체되어가고 있는 패륜사회이며, 그 패륜사회의 궁극적인 원인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문정희 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수혜자이자 우등생으로서, 왜, 그 기득권을 버리고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던 것일까? 왜, 그는 남성보다도 더 남성다운 그 극렬한 여성주의자들의 반대방향에서,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를 그처럼 소망했던 것일까?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의 해체는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파렴치한 만행이며, 그 가정이 해체되면 인간의 역사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아제한, 금산, 여성호주제, 수많은 사생아들----. 우리 인간들은 이제 사랑하는 아내도 없고, 그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가정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자는, 그 극렬한 여성주의자들은, 나와 문정희 시인같은 구 시대의 인물들에게 이렇게 비난을 퍼부어 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여성들은 더 이상 아이를 낳는 기계도 아니고, 그대 서방님들의 방이나 치워주고 차나 끓여다 주는 몸종이 아닙니다“라고----. 또한, ”우리 여성들은 가계의 혈통 따위나 따지는 전근대적인 인물도 아니며, 그 지긋지긋한 족보와 가정중심주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라고----. 그러나, 그러나, 그대들 극단적인 여성주의자들이여, 그대들의 죽음은 기껏해야 양로원의 죽음일 수밖에 없으며, 이 땅의 무남독녀의 외딸과 무녀독남의 외아들, 그리고 그 사생아들의 ‘바다’보다도 더 외롭고 쓸쓸한 삶을 그대들은 과연 어떻게 보상해주어야 할 것이란 말인가?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과 그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는 시이며, 이 세상의 떠돌이--나그네들을 그 존재의 근거인 가정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남성은 씨를 뿌리고 또 뿌리는 존재이며, 여성은 낳고 또 낳는 존재이다. 남성은 돈을 벌어오고 또 벌어오는 존재이며, 여성은 아이를 기르고 또 기르는 존재이다. 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인 역할 분담을 성 차별로 인식하고, 그것을 남성중심주의로 몰아붙이는 세태풍조야 말로 가장 나쁜 악습이며, 우리 인간들의 역사를 최후의 종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는 시적 화자가 소망하는 아내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 진정한 아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든 남성들의 이상적인 아내일 수도 있다.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는 오직 사랑하는 남편과 그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는 ‘현모양처’의 시이며, 부처(예수)와도 같은 대성인大聖人을 낳을 수 있는 어머니의 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진 아내의 사랑에 의해서 ‘가화만사성’이 이루어지고, 모든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기 때문이다.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정희 시인의 [나의 아내]는 이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인간들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오오, 나의 사랑하는 아내여!
오오, 모든 인간들의 어머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