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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리더십을 키우십시오
출 2: 11-15
우리 교회는 지난 목요일부터 어제까지 VBS 여름성경학교를 했습니다. 우리 교회가 자체적으로 한 것이 이번이 네 번째인데 얼마나 은혜롭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어릴 때에 성경학교를 다녀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VBS 여름성경학교는 아이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 교회의 아이들도 이번 VBS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영상과 아이들의 찬양을 라이브로 보신 것처럼 율동도 잘하고, 분반 공부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고, 요절도 외웠습니다. 그 외에 여러 가지의 활동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밖에 나가시면 아이들의 작품을 전시해 놓았는데, 여름성경학교를 한 눈에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설교를 맡은 선생님이 사영리를 가지고 설교한 후에 아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시켰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갈 사람을 손들게 하고 앞으로 나오게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대로 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조용해지더니 하나 둘씩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얻고 한 아이씩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축복 기도하는 저의 마음이 너무 뜨거워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교사들의 말을 빌리면 아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도를 받을 때에 마음이 뜨끈뜨끈하고 간지러운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거지요. 성령께서 구원의 설교를 듣고 결단한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 귀한 순간이었습니다.
삼일간의 VBS 여름성경학교를 지켜보면서 교사들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사들의 리더십으로 인하여 여름성경학교를 훌륭하게 마치게 되었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신경을 썼는지 모릅니다. 클래스룸을 아름답게 그림으로 장식하고, 말씀을 착실히 준비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열정에서 우러나오는 리더십이 있었기에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요즘 리더십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리더십은 높은 지위에 있거나 돈이 많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지요. 리더십은 영향력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 사람이 변화되었다면 여러분은 리더십이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든 작은 영향력을 끼치든 모두 리더십이라고 말합니다.
사회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아무리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일생동안 만여 명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고 또한 영향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한 가정의 어머니는 자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무엇을 먹고 어떠한 것을 입을 것인지 선택하게 됩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영향을 받아서 어머니가 주는 것을 먹고 어머니가 주는 것을 입습니다. 또한 그 아이는 학교에 가서 다른 친구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됩니다. 친구들과 대화를 통해서 새로운 정보로 도움을 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관계 속에서 평생동안 일만 여명의 사람에게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서 믿음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마5:13-14)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 주어라.(마5:39-41)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마20:26-27).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 이 모든 말씀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며 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이 여러 사람에게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믿음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며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기본적인 말씀이지만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리더십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도 공감하시겠지만 세상에 그 어느 것도 배우지 않고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짜가 없습니다. 믿음의 리더십은 내가 키워야 합니다. 나의 믿음 실력을 높여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까지 자라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리더십을 키우기 위한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실 때에 아무나 그냥 쓰지를 않습니다. 외모를 보고 쓰지도 않고, 가문을 보고 쓰지도 않고, 학벌을 보고 쓰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통해서 깨닫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열정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어요. 불의를 모면 참지 못하는 열정이 있었어요. 어느 날 왕궁 바깥으로 나갔는데 자기 동족이 애굽 사람에게 매맞는 것을 봤어요. 순간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열정이 표출됩니다. 그래 애굽 사람을 죽이지요. 얼마나 뜨거운 열정이 있으면 이런 일을 할까요. 모세는 가슴에 뜨거운 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러한 열정을 보시고 믿음의 리더십을 키우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쓰셨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선임제자인 베드로를 보세요. 얼마나 열정이 대단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세요.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내리잖아요. 고기 잡히는 그물이라면 힘든지 모르지요.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힘든지를 모르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빈 그물질을 합니다. 밤새도록 하는 거예요. 이것은 보통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열정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생각했어요. 잘못된 열심이었지만 얼마나 열정이 있는지 모릅니다. 나중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좋아했어요. 하나님은 바울의 이런 열정을 보시고 부르시지요. 그리고는 믿음의 대상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나중에 바울이 자신의 마음을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의 열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뜨거운 열정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여러분의 가슴에 뜨거움이 있으면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믿음의 리더십을 세우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가슴에 불타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우들은 직장에서 일하실 때에도 열정을 가지고 일하세요. 공부할 때에도 열정을 가지고 하세요. 교인들은 열정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주의 일을 하려는 교인들에게 열정을 먼저 봅니다. 주의 일은 얼마나 많이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정이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뜨거운 사람이냐가 중요한 겁니다. 주의 일을 좀 못할 수도 있어요. 못해도 괜찮아요. 그러나 열정이 있으면 괜찮습니다.
주의 일은 마음에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서 믿음으로 해야지요. 열정이 없으면 중간에 그만 둘 수가 있거든요. 경험한 분도 계시지만 주의 일이 쉬운 것이 아니지요. 때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하고 내려놓고 싶기도 하고..., 이런 과정이 누구에게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나가려면 마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어야 끝까지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의 리더십을 갖추게 되어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을 갖기 바랍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세상이 복잡하다고 따라가지 마세요.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무식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고요 심플한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복잡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큰일을 못해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요. 이것저것 계산하고 생각하고 머리 굴리고..., 어떤 사람은 계산만 하다가 인생 끝나잖아요. 그러니 만날 제자리이지요. 발전이 없지요. 이런 사람은 소인배입니다.
물론 계산할 때에는 해야지요. 생각할 때에는 해야지요. 머리 굴려야 할 때는 굴려야지요.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길면 좋지 않습니다. 빨리 믿음으로 결단하고 그 이후에는 앞으로 전진하는 겁니다.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너무 똑똑하면 지도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의 리더십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나오는 겁니다. 속에서 불이 타올라야 하는 겁니다.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쓰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광야로 보내서 훈련시키십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여서 모래에 묻고는 이튿날 나가 보니까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겁니다. 그래 말리지요. '여보시오. 당신들은 왜 동족을 싸웁니까?' 그러니까 싸우던 사람들이 대드는 겁니다. '당신이 우리의 재판관입니까? 당신이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를 죽일 작정입니까?' 모세는 어제 있었던 일을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들이 본 겁니다. 모세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는 바로 왕이 이 일을 알고는 모세를 죽으려고 찾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에 모세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모세를 광야로 내모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믿음의 훈련을 굳이 광야에 가서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훈련이라면 어디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어디에서나 신실하게 잘 받기만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보세를 광야로 보내셨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훈련은 장소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훈련은 광야가 절대적입니다.
요즘 인터넷이 발달되었다고 해도 공부는 어디에서 해야 합니까? 학교에 가서 해야 잘 되는 거예요. 도서관에 가서 해야 잘 되는 겁니다. 일은 어디에서 해야 합니까? 직장에 가서 해야 진도가 나가는 겁니다. 예배는요? 인터넷으로 드리는 것보다 예배당에 와서 드려야 하는 거예요. 기도는 기도원에 가야 더 잘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신앙훈련은 광야에서 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방법을 적용하셔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에게도 적용하셔서 광야의 삶을 살게 하셨고, 예수님에게도 이 방법을 적용시키셔서 광야로 보내서 40일을 금식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광야는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입니다. 광야처럼 훈련받기 좋은 장소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도 광야입니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가나안 속에 광야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나안과 광야가 함께 공존해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있으면 예수를 잘 안 믿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국에 왔기 때문에 이만큼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에요. 한국에 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환경이 예수 믿기가 여기보다 좀 어려워요. 걸리는 것이 많아요. 때로는 잘 믿으려고 해도 안 될 때가 있잖아요. 일이다 뭐다 해서 지치고 힘들고..., 또 대충(?) 예수를 믿어도 아쉬운 것도 없고 말이지요. 집도 있고 부모님도 있고..., 믿는 구석이 있잖아요. 그렇게 열심히 믿지 않아도 사는데 불편함이 없어요.
그런데 미국에 오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 않잖아요. 마음에 품은 대로 일이 되지도 않아요. 공부 열심히 하고 영어 잘하면 될 줄로 알았는데, A학점 나오면 좋은 회사에 취직도 되고..., 이렇게 저렇게 비즈니스를 시작하면 성공할 줄을 알았는데, 막상 닥쳐보니까 마음대로 되지를 않더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나요? 하나님께 매달리지요. 하나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계산이 기가 막히지요. 우리는 한국에 있으면 떵떵거리고 예수를 시원찮게 믿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 아시고 미국이라는 광야를 통해서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미국 생활이 힘들고 어려운 분들이 계세요.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잖아요. 하나님의 훈련기간이잖아요.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평생토록 고생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시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다음 스탭에서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국이라는 광야에서 훈련시키시고 계신 거예요. 믿음으로 잘 훈련받는다고 생각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훈련기간이에요.
올림픽을 보세요. 그 동안 세계 각국의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기간동안 훈련을 받았어요. 그 훈련이 얼마나 힘들어요. 먹는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자는 것도 마음대로 자기 못하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각국에서 선수촌에 집어 넣어놓고는 얼마나 강하게 훈련을 많이 시켜요. 얼마나 제약이 많아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거의 모든 선수들이 중국으로 갔어요. 우리 나라의 선수들도 베이징으로 들어갔어요. 혹독한 훈련기간이 끝나니까 본 경기에 출전하려고 이동한 겁니다.
신앙생활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환경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직장과 학교를 통해서, 목사를 통해서 훈련을 시키시는 겁니다. 어디에서요? 미국에서요. 이 기간이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머지 않은 날에 본선에 진출하도록 하실 겁니다. 다음 스탭으로 옮겨주실 겁니다.
모세를 40년간 훈련시키시고 애굽에 보내서 온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많은 사람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실 겁니다. 그 때에 가서 여러분이 한 몫 감당하는 겁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조국을 위하여 애쓰듯이,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 몫 감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훈련을 잘 받으세요. 한국 사람들은 훈련을 받으라고 하면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하지요. 너무 똑똑해서 그래요. 어떤 사람은 믿음생활은 은혜를 받으면 되는 것이지, 굳이 훈련을 받아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예, 신앙생활은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는 신앙생활을 뜨겁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고, 훈련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은혜를 받았다고 저절로 리더십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을 키워 보면 알잖아요.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공부를 왜 시킵니까? 단어 외워라. 책 읽어라. 뭐해라. 뭐해라. 왜 강요를 해요? 나중에 철들면 다 할텐데..., 아이들 생각에도 나중에 크면 내가 다 알아서 잘 할텐데 왜 부모님이 왜 그러시나 생각하거든요. 왜 그렇습니까? 훈련시키기 위함입니다. 그 때를 놓치면 나중에는 되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부모는 알아요. 어릴 때부터 그런 저런 훈련을 받아야 나중에 리더십이 발휘되고
좋은교회 교인들은 광야생활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힘드실 때는 즐기세요. 포기하지는 마세요. 하나님 줄을 놓지는 마세요. 시간이 지나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작품이 나에게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믿음의 리더십으로 세워지게 되는 거예요.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자기의 것을 내려놓게 하십니다.
모세가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는데 어떤 훈련받았을까요? 성경에 보면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다고 했어요. 애굽의 왕궁에서 왕자로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양을 치는 신세로 바꾸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 모든 것들이 하루 아침에 완전히 바뀌어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를 믿음의 지도자로 세우셔서 영향을 끼치는 세우는 사람으로 삼으시고자 하셨더라면 다른 훈련을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예배드리는 훈련, 기도하는 훈련, 찬양하는 훈련, 예배는 이런 식으로 드려야 하느니라. 찬양은 이런 방법으로 이런 곡으로 드려야 하느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양을 치는 목동으로 훈련시키셨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모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애굽의 왕궁에서 자랐기 때문에 애굽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애굽의 철학을 배워서 나중에는 자기의 철학이 생기고 자기의 주장이 생기고 자기의 인격으로 굳어졌습니다. 모세가 아무리 세상의 엄청난 학문과 지식과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은 그것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모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게 하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훈련시키시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광야에서 애굽의 앞서가는 학문이 소용이 있어요? 자기의 신앙이나 인격이나 삶이 광야에서 소용이 있어요. 광야는 아무 것도 없는 곳입니다. 의지할 곳도 없어요. 자기의 전공을 발휘할 곳도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잡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의 은사를 주셨지만 그 은사는 내가 사용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사용하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나를 쓰시도록 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리더십을 발휘하여 영향력을 끼치며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리더십을 발휘하면 좋을까요? 믿음의 리더십으로 세상을 섬겨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은 믿음의 리더로 세우기 위해서 훈련시키십니다. 우리를 광야로 내보내십니다. 우리의 것을 다 내려놓게 하십니다. 이 제단을 통해서 믿음의 훈련 과정을 잘 배우셔서 복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믿음의 리더십을 키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여러 통로를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실 때에 잘 감당하게 하셔서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타이밍을 따르라
출 2: 11-15
서론
출애굽기 2장의 주제는 타이밍입니다. 영어에는 Timing is everything 이라는 말이 있
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타이밍을 맞추는 것입니다. 타이밍이
란 시간을 조절하고 때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타이밍을 맞춘다는 것은 할 때 하고 안
할 때 안하는 것입니다. 웃을 때 웃고 울 때는 우는 것이며, 밥 먹을 때 밥 먹고, 잘
때 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리를 해도 때를 잘 맞춰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라면을 잘 끓입니다. 라면도 물이 팔팔 끓을 때 면을 넣어야 되고, 조금 지나면 스프를 넣
어야 되고 계란도 통째로 넣지 말고 풀어서 먹기 직전에 넣어야 맛있게 됩니다. 고기
를 구워도 적당한 때 구워야지 너무 빨리 꺼내도 안 되고 너무 두어도 타서 못 먹게
됩니다. 요리에도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사람이 병들어 약을 먹을 때도 타이밍
이 중요합니다. 약 먹을 시간에 맞추어 먹어야 병이 낫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할 때에도 때를 잘 맞추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장례식에 가서 “참 행복
하시겠습니다.” “기쁘시겠습니다.” 이런 말을 한다면 듣기도 민망스럽고 말하기도
어색하지 않겠습니까?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은 설교 본문도 때와 정황에 맞게 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평생을 부요하고 믿음으로 살던 장로님의 장례식장에 가서 성경본
문을 누가복음 16장 22절 “그 거지가 죽어 장사되매...” 이런 본문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잘못 정하면 말하기도 어색하고 듣기도 딱하고 그런 상황이
된다고 했습니다. 잠언 25장 11절 말씀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고 했습니다. 은쟁반을 수로 잘 아로새기고 거기 금사과를 띄우게 되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경우에 합당한 말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돈 버는 일
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 땅을 살 때인가? 아니면 팔을 때인가? 지금이 투자를 할
때인가? 투자한 것을 거두어야 할 때인가? 한 박자 먼저 하거나 한 박자 늦게 하면 남
들 다 벌 때에 자기는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온통 정확한 타이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셔
도 때를 맞추어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도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때
가 되매”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하나 행하셔도 아무 때나 행하신 것
이 아니라 때가 되었을 때 행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위대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은 때가 되었을
때 행하신 것입니다. 하인들이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운 때에 행하셨습니다. 마리아
가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나이다.” 라고 했을 때만 해도 예수님은 “내 때가 아
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라고 하면서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던 것을 성경을 통
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6절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무슨
슈퍼스타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욘사마’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형
제들이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능력이 많으시면 자신을 세상에 나타
내소서! 인기를 끌어 보시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
니다. 여러분 형제들이 안 믿으십니까?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형제들
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7장 30절에도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
니하였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생애는 때가 그른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2005년에도 때를 잘 맞추어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2장은 타이밍이 잘 맞은 경우와 가장 안 맞은 경우가 아름답게 대조되어 있
습니다. 1절로 10절까지는 얼마나 타이밍이 잘 맞았습니까?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낳고 보니까 인물이 얼마나 준수하고 아름다운지 ‘유대인은 아들
을 낳거든 하수에 던져 버리라’고 하는 바로왕의 명령을 알면서도 그 아들을 붙들고
품에 안고 3개월 동안 젖을 먹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얼마나 건강한지 3개월이 되니
까 울음소리도 우렁차고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대상자를 만들
어서 역청을 칠하고 물이 새지 않도록 해서 나일강으로 띄워 보냅니다. “하나님이시
여 이 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하면서 나일
강으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에 누가 나왔습니까? 그 때에 바로의 공
주가 대낮에 목욕을 하러 나일강에 나왔습니다.
바로 그 때에 갈대상자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더니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
다.” 하고서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 갈대 상자를 잡고 거기에 있는 모세를 건져
내지 않습니까? 마침 그 때에 모세의 누이가 그것을 보고 있다가 쫒아갑니다. “공주
님, 공주님 이 아이가 먹고 살려면 젖을 먹여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히브리 여인 중
에 젖먹일 수 있는 유모를 소개해 드릴까요?” 그러니까 바로의 공주가 허락을 해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자기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자기의 젖
으로 모세를 키우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타이밍이 딱딱 잘 맞습니까? 만약에 요게벳
이 2개월 만에 모세를 떠내려 보냈으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아마 4개월 있다가
떠내려 보냈으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딱 3개월 째 떠내려 보냈고, 마침
그 때에 공주가 목욕을 했고, 마침 그 때에 누이가 그것을 보게 되고, 마침 그 때에
공주가 허락을 해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궁중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최고의 교육을 받으며 크게 된 것입니다.
1. 때를 못 맞춘 모세
그런데 11절부터 15절은 참 모세가 타이밍을 잘 못 맞췄습니다. 10절로부터 11절 사이
에 4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고 최고의 교
육을 받으면서 나이 40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참 모세를 바라보고 존경도 했을 것입
니다.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
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너는 애굽 사
람이 아니라고 계속 주입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나 모세는 ‘나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 사람이다’라고 하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의 정체성이 명확했습니다. 그는 나이 40쯤 되니까 동족의 고통 받는 것을 가만히 보
고 있을 수가 없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동족을
이 애굽의 압정에서 건져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가보니까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것
을 보고 있다가 히브리 사람이 없어졌을 때에 좌우를 살피고 애굽 사람을 쳐 죽였습니
다. 그리고는 모래를 파묻어서 그의 시체를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습니다. 이런 범죄를 가리켜서 형법용어로 ‘완전범죄’라고 합니다. 모세가 지
금 완전범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날 또 나가서 보니까 이번에는 히브리 사
람 둘이 싸우고 있습니다. 동족끼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보니까 한
쪽은 옳고 한쪽은 그른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그른 사람을 향해서 “네가 어찌하여 동
포를 치느냐?” 하면서 잘못된 쪽을 향해서 야단을 칩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사람이
뭐라고 합니까? 14절에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
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일이 탄
로되었도다.” 하며 두려워합니다.
모세는 좋은 동기와 의협심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자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파묻은 것인데 자기 동족들이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고 언제 법관을 삼았느냐
고 도리어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게다가 바로왕이 그 소식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모세는 얼마나 의협심이 강
합니까? 자기 동족을 친다고 쳐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그러고 나가서 또 동족들끼리
싸워도 좋은 편을 들고 나쁜 편을 꾸짖는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
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의협심도 좋고 인품도 좋은 사람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이밍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직 이스라엘
을 해방시킬 타이밍을 맞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의협심은 훌륭합니다. 저는 모세를 볼 때 나도 이런 의협심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의협심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의협심은 누가 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의협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
가 왜 안중근 의사를 존경합니까? 그가 의협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훌륭했지만 타이밍을 잘 못 맞춰서 나쁜 결과를 얻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 타이밍을 못 맞춘 예는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
님이 자식을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려도 아무것도 생기지 않으니까 드디어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자식 하나를 낳아버렸
습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이 이스마엘이 나중에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을 희롱하고 대대로 원수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때를 잘
못 맞춰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 번제를 드린 일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왕은 때를 못 맞췄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올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가 번제를 드리다가 폐위가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때를 못 맞추었습니다. 의협심을
가지고 필요할 때는 오히려 도망가더니 용기를 부리지 말아야 할 때에는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자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그 귀를 다시 붙여 주시고 “검을 가
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열두 영이나 되는 천
사를 오게 하실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직 이렇게 할 때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베드로
를 꾸짖으셨습니다.
2005년도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때 하나님의 때가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0장 3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
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
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독수리 날개침 같은 새 힘을 얻고 살
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호와를 앙망해야 합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기다리는 것
(wait upon)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독
수리 날개침 같은 힘을 주실 것입니다.
2. 때를 못 맞춘 모세의 징표
모세는 그 애굽인을 쳐 죽이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좌우를 살폈습니다. 12절에 “좌우
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사람이 옳은 일을 하면 왜 좌우를 살핍니까? 옳은
사람은 좌우 살필 것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좌우를 살핍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
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
해 사람을 쳐 죽이고 모래로 파묻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방법
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하는 하나님의 법
을 어겼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기도보다는 충동심을 따르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 순간에 “아버지여
내가 저 애굽인을 쳐 죽일까요?” 일분일초라도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냥
가서 의협심으로 쳐 죽이고 파묻었습니다. 충동적인 것은 안 됩니다. 사람이 결혼을
해도 충동적으로 하면 안 됩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져 오늘 결혼했다면 틀
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 물건을 사도 충동구매를 하게 되면 틀림없이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는 자기의 일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모래로 파묻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행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히브리 동족들에게
도 인정받지도 못하고, 바로왕은 모세를 죽이려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두려워해서 미
디안 광야도 도망을 갔습니다.
요한 계시록 3장 7절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
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예수님
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는 열고 닫는 열쇠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 닫으면 열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올해는 예수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
지고 모든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을 때에는 들어가
야 합니다. 축복의 문이 열렸을 때에는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이 닫혔을
때는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때가 아니오니 열 때를 다시 허락하여 주옵소
서!” 하고 기다리고 앙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2005년도에는 나쁜 문은 모두 닫히기를 축원합니다. 좋은 문은 모두 열려지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의 문도 열어 주시고, 축복의 문도 열어 주시고, 건강
의 문도 열어 주시고, 부요의 문도 열어주시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예수께서 올 한
해 모든 문을 다 열리게 하여 주시길 축원합니다.
기독교는 때의 종교입니다. 타이밍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때가 오면 과감하게 들어
가는 도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가만히 앉아있는 종교는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때
가 오고 기회가 오면 그것을 잡을 수 있는 지혜를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고, 그 지혜
를 가지고 잡아서 모든 면에 복 받는 한해가 되시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세
는 때를 잘못 맞춰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습니
다. 그러면 모세의 인생은 끝난 것입니까? 모세는 망하게 되었습니까? 동족에게도 인
정받지 못하고, 바로왕은 죽이려 하고, 히브리인이지만 히브리인에게 갈 수도 없고,
애굽인에게 갈 수도 없는 모세는 미디안 광야고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3. 기회를 또 주시는 하나님
모세의 생애는 끝난 것 같지만 끝났습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손 씻으셨습니까? 아닙
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더 큰 훈련의 기회를 허락하시고 미디안 광야를 예비하신 줄
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는 더 이상 애굽의 왕자가 아닌 평범한 다 깨어지고 부서진 모세가 되었습니다. 아주
절망하고 위축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모세는 이 의협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우물가
에 미디안의 제사장의 일곱 딸들이 아버지의 양을 끌고 왔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떠
서 구유에 담고 구유에 담은 물을 양에게 먹이려고 하니까 남자 목자들이 나중에 와서
는 “어 거기 여자들 비키시오! 우리가 양을 먹인 다음에 먹이시오”라고 합니다. 모
세가 이런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사람입니까? 이런 공정치 못한 일은 두고 보지 못하
는 모세인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도와서 양무리에게 물을 먹입니
다. 이 소식을 미디안 제사장인 르우엘이 듣고 모세를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르우엘이 모세와 함께 살면서 가만히 보니까 모세가 마음에 들었습니
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교육을 받았으니 얼마나 인품이 좋겠습니까? 그래서 자신
의 딸 십보라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십보라에게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
들은 게르솜 이라고 했는데 그 이름의 뜻은 잠시 거하는 객이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라
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때를 주어서 모세를 훈련시키는 것입니
다. 모세는 망한 줄 알았는데 망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비로소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40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인생의 출발이
지 완성은 아닌 것입니다. 저도 91년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12년 동안 교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서 2년 반 동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느끼는 것은 박사학위는 목회의 출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회하
면서 때로는 어렵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산전수
전 겪으면서 훈련되어지면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가는 것이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
가 슈퍼스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모세가 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죽
을 고생을 다하고 여러 가지 훈련을 받고 나이 80이 되니까 그제야 하나님은 “모세
야 이제는 네가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만하니라”하고 출애굽을 맡기시게 된 줄로 믿습
니다.
제 군대 동기생 부부가 며칠 전에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사업에 실패해서 자살했
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이 53세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때를 놓쳐
서 지금 여러 가지로 고통하고 계십니까? 가정이 어렵고 경제가 어렵고, 영적으로 타
락하고 부패하고, 마음으로 절망된 분이 계십니까? 우리 성도들은 아무리 때를 놓쳐
서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되고, 모세처럼 정말 맨몸으로 미디안 광야로 쫓겨 가는 상황
이 되더라도 ‘나는 망했구나. 나는 끝났구나.’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미디안 광야
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십보라도 예비해 주시고 장인도 주시고 게
르솜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 또 다른 축복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언 24장 16절에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
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의인으로서 의인된 삶을 살
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서 의인된 사람인줄 믿습니다. 우리
는 실제적으로는 죄를 지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의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다시 일으켜 세
워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해도 의를 지키고 흥해도 의를 지키고, 잘될 때도 의협
심을 가지고, 쫓겨 가도 의협심을 가진 의인으로서의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
원합니다.
결론
사람들은 어려우면 도피합니다. 대박을 꿈꾸며 강원랜드로 갔다가 전 재산을 다 날린
어떤 사람이 돈이 떨어지니까 장기를 팔아서 돈을 마련하고 아직 덜 아물어서 고름이
나는 몸을 가지고 또 그곳에 갔다고 합니다. 사람이 어렵다고 해서 도피하듯이 죄와
악을 향해서 가면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
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의 길을 따라가겠다.”하는 의지를 가지고 의의 길
을 가게 되면 일곱 번 넘어져도 주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
움이 올 때 주께서 다시 미디안 광야를 예비하시고 더 큰 기회를 주시고 더 큰 축복으
로 역사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에서 끝났으면 모세의 이
름을 우리가 알게 뭡니까? 그런데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훈련받고 하나님의 큰 종
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의 이름이 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어려우십니까? 그래도 ‘의’를 따라 사십시오. 믿음으로 사시고 예수 그리스
도를 붙드시길 바랍니다. 다윗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
나님이여! 다윗의 열쇠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인생에 축복의 문이 열린
한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그렇게 뜨겁게 기도하실 때 문열어주시는 하나님
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게르솜!
출 2: 11-22
어떤 사람이 오랜만에 단골 식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인테리어도 달라지고 종업원들도 산뜻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습니다. 웬일인가 싶어 종업원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 식당 갑자기 싹 달라졌네요. 무슨 바람이 불었나 ... ?” 그러자 종업원이 별 일이 아니라는 듯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어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주인이 바뀌면 싹 달라집니다.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습니다. 본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히 멸망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해 봅니다. “신앙생활은 인생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본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1] 신앙의 본질 : 하나님의 주권 존중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주권(主權 Lordship)이란 ‘주인됨’을 의미합니다. 과연 누가 주인이냐 하는 겁니다.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란 겁니다. 왜 그런가요? 하나님이 창조주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주만물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인간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게 신앙의 출발이며 본질입니다.
성경을 보면, 모든 신앙인들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시24: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하나님이 만물과 만인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기도의 여인 한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삼상2:6~7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세상만사가 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뤄진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실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세상만사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뤄진다는 겁니다.
장로교회의 창설자인 쟝 칼뱅의 신학 사상 즉 칼빈주의(Calvinism)의 핵심은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입니다. 성경을 가장 잘 요약한 것으로 너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 살면서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이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를 갖게 된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피조물이기에 인간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그어놓은 게 바로 선악과 계명입니다.(창2:16~17) 이를 신학에서 ‘창조 언약’이라 말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이란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가 있었죠. 그 중에 생명나무 열매는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고, 선악과는 따먹을 수 없다는 한계를 정해놓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범죄와 타락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뱀(사단)이 유혹할 때 결정적으로 여자가 넘어간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주권을 넘본 겁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인생의 온갖 고통과 영원한 사망)이 여기서 기인합니다.
그런 사실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 아닙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탑을 높이 쌓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흩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언어의 혼잡이 생긴 것 아닙니까? 외국어 공부하느라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나요?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신앙은 본래 주인인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겁니다. 죄의 뿌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고, 그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아버지로 모시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의 성숙도입니다. 신앙이 미성숙할 때는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합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행동합니다. 그러다 다급해지면 마치 심부름 시키듯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런 모습은 아주 미숙한 어린 아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섭섭해 하십니다. 이런 미숙한 신앙인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으로 앞장서시는 분이지 인간의 뒤를 따라가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컨트럴(control)하시지 인간에게 컨트럴(control)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존중하고 순종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과 함께 하시고 당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들일수록 신앙이 성숙해지도록 변화시켜 가십니다. 이게 바로 연단입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예외 없이 이 연단의 과정을 다 거쳤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이 연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과정은 불편하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신앙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일단 신앙의 정상에 올라서면 내리막길처럼 인생이 아주 쉬워집니다. 이게 바로 형통의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누가 나오죠? 모세! 모세도 마찬가지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이 시간 그 과정을 함께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절대 주권 신앙으로 성숙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러분, 성경 보면 모세는 120세까지 살았습니다.(신34:7) 흥미롭게도 그의 120년 생애는 40년씩 세 단계로 나눠집니다. D. L. 무디는 이 세 단계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 40년 동안은 모세가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I'm somebody.)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애굽 공주의 양자로 들어가서 당대의 최고 학문을 공부하고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얼마나 프라이드가 대단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모습은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미숙한 신앙의 단계입니다. 잠시 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되죠? 살인 사건에 연루되어 미디안 광야로 망명합니다. 애굽의 왕자가 하루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겁니다. 이 두 번째 40년 동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보던 모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I'm nobody.)을 깨닫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되죠?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로부터 40년 동안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끌고 엄청난 기적의 역사를 연출합니다. 이때 모세는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I'm God's body.)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가장 성숙한 신앙입니다. 내가 대단한 줄 아는 것은 착각이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줄 아는 것은 오해요,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 붙잡히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2] 미성숙한 신앙 : ‘나’ 중심의 신앙
모세는 처음 40년 동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가 주인 행세를 하는 신앙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말하자면 ‘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최고의 부귀와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러다 보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신앙 상태를 짐작하게 해 주는 사건이 본문에 나옵니다. 11절~12절.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그는 어려서 어머니 요게벳의 품안에서 자랐습니다. 공주의 양자인 모세를 길러주는 유모로 채용됐었죠. 보나마나 모세에게 신앙심과 애국심을 심어줬을 겁니다. 모세는 이렇게 해서 신앙인이 된 겁니다. 그러나 아직 미성숙한 가운데 자기 능력으로 뭔가 큰일을 할 수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피러 궁궐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다 애굽 감독관이 강제 노동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화가 난 모세는 애굽 사람을 때려죽이고 암매장을 합니다.
이때의 모세의 신앙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행7:22~23,25 “22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23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 ”자기 자신을 과신하고 자기가 뭔가 하려는 모세의 교만한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모세의 착각이 산산이 깨지고 맙니다. 13절~15절.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 ”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다 오히려 코너에 몰리자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방법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왕의 추격을 피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물론 단순히 이 사건만으로 그가 도망자가 된 건 아닐 겁니다. 명색이 애굽의 왕자인데 일개 감독관 한 명을 죽였다고 그 시대에 문제가 됐겠습니까? 그렇게 된 데에는 애굽 궁궐 내부의 권력 투쟁이 한 몫을 했을 겁니다. 바로의 공주 즉 모세의 양어머니는 ‘하셉수트’(Hashepsut)로 무남독녀입니다. 그래서 자기 남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에게 왕위를 양보합니다. 그런데 자신도 아들을 낳지 못했습니다. 모세를 양자로 삼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남편과 궁녀 사이에 아들 즉 서자가 태어나는데, 다음 바로 왕이 됩니다. 그가 당시 왕인 ‘투트모스 2세’(Thutmose II)입니다. 하셉수트가 마음만 달리 먹으면 모세에게 왕위가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왕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모세가 눈엣가시죠. 그래서 이런 계기에 애굽 대 이스라엘 민족 문제로 비화시켜 모세를 제거하려고 했던 겁니다.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섭리였고, 그 결과 모세는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하려는 노력이 물거품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때때로 이런 신앙 자세를 가질 때가 많습니다. 내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 욕심을 채우고, 내 생각을 주장하고, 내 방법을 행사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결국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3] 하나님의 연단 : 미디안 광야 훈련
바로 왕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모세는 이제 미디안 광야로 피신합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연단이 시작됩니다. 15절(하). “...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그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도망자 모세의 한심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때부터 간섭하십니다. 모세가 우물가에 앉아 있는데, 때마침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이드로)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이러 옵니다. 그런데 목자들이 횡포를 부리자 의분을 느낀 모세가 그들을 쫓아내고 르우엘의 딸들이 양떼에게 물을 먹일 수 있도록 잘 도와줍니다. 집에 돌아간 딸들이 아버지에게 이런 사연을 말했고, 모세는 그 집으로 초청됩니다. 르우엘이 모세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집에서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모세로서는 얼씨구나 했죠. 21절~22절. “21 모세가 그(르우엘)와 동거하기를 기뻐하매 그가 그의 딸 십보라를 모세에게 주었더니 22 그가 아들을 낳으매 모세가 그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하여 이르되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가 르우엘의 집에서 살면서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뭐라고 지었나요? 게르솜! 무슨 뜻인가요? “내가 타국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 이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이런 뜻이죠. 그의 고난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 그의 신앙은 정금처럼 연단하신 겁니다. 욥이 극한 시련 가운데 고백한 그대로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시편기자도 고난 가운데 이렇게 고백했죠.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제머대로 살았는데 고난을 통해 연단됨으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고백입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이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을 하는 겁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다! 이런 자기 부인이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집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 세월을 보내면서 자기 교만, 자기 고집, 자기 욕심, 자기 방법, ... 모든 게 깨짐을 경험합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계획으로 가는 계단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실패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뜻이다.”(로버트 슐러)
캐나다 록키산맥에 무릎 꿇은 나무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 폭풍우를 견뎌내며 자라온 나무인데, 마치 무릎 꿇은 것처럼 순종하는 자세로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나무가 명품 바이올린을 만드는 재료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시련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훈련을 받으면 멋진 명품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4] 성숙한 신앙 : 하나님 중심의 신앙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후, 그러니까 모세가 80세가 됐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주인으로 일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모세가 정말 성숙해져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도약하는 단계입니다.
출애굽기 3장을 보면, 호렙 산에서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출3:10~12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 ” 모세는 자신이 이제 아무 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려고 길을 떠납니다. 성경은 그 광경을 아주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출4: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내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너무 초라하죠. 그러나 그의 손이 무엇이 있나요? 지팡이!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떼를 돌볼 때 사용하던 평범한 지팡이 아무 것도 아닌 지팡이! 그러나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신다는 증표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붙잡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붙들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증표! 이 지팡이 하나로 홍해를 갈랐고, 반석에서 물을 냈고, 무수한 기적을 연출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면, 소년이 예수님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져옵니다. 아무 것도 아니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붙드시고 축사하시자 5천명이 넘는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매 돌로 물리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돌멩이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니까 천하의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한 방에 무너뜨렸습니다. 기독교 역사 상 성경 다음으로 위대한 명작으로 일컬어지는「천로역정」은 본 번연의 평범한 펜대에서 탄생했습니다. 그 펜대를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준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모세는 “아, 게르솜!” 이라고 탄식할 정도로 아픈 시련이 있었지만 그 연단 과정을 통해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모세를 “여호와의 종 모세”(the servant of the Lord)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신34:5, 수1:1,13,15, 8:31,33 등) 모세가 하나님을 주인 삼았을 때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 지식, 내 경험, 내 생각, 내 야망, 내 재물, 내 지위, 내 권세, 내 명예 ... 하나님 앞에 별게 아닙니다. 질그릇일 뿐입니다. 고후4:7 에 나온 대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혹시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보낸 40년 세월처럼 “아, 게르솜!”하며 탄식하고 있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실 겁니다. 부디 이 진리를 붙잡고 진정한 승리의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