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로마서 11장
Ⅰ. 하나님의 자비와 경륜 11:1-32
사도는 여기서 이러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반박하고 나설만한 반론을 제의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1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1절).
그 배척은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것인가?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백성은 두시지 않는가? 사도는 가혹하게 보이는 이러한 처사에도 하나님의 많은 자비와 선하심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첫째, 유대인들 중 얼마가 버려졌을지라도 그들 전부가 다 버려지지는 않았다.
둘째, 유대인이라는 줄기는 버려졌을지라도 이방인들이 대신 들어왔다.
셋째, 지금은 유대인들이 버려졌을지라도 하나님의 정하신 기한이 차면 그들이 다시 그의 교회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1. 유대인들의 상태(1-10절)
유대인들 중 많은 수가 버려진 것은 사실이나 전부가 다 버려진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그럴 수 없느니라(1절)'고 말한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을 얻은, 믿는 유대인이라는 선택받은 남은 자들이 있었다(1-7절). 사도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2절) 자들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그가 미리 알고 예정하신 자들이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2절)
여기에 구별의 근거가 있다.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7절)라고 불린다.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7절)
신자들은 '택하심을 입은 자'인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은 누구나 다 그리고 그가 선택하신 자들만이 그렇게 불릴 수 있다. 사도는 그 자신이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밝힌다.
나도 이스라엘인이요(1절).
바울은 선택된 그릇이었고(행 9:15) 게다가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였다. 사도는 엘리야 시대처럼 당시도 이 선택된 남은 자들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훨씬 더 많았다고 암시한다. 여기서 엘리야에 관해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해보자.
1) 이스라엘에 관한 그의 오해를 생각해 보자. 그는 마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이라고는 자기 혼자 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사도는 열왕기상 19:14절을 인용하는데 거기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2절)'하고 있다. 중재치고는 묘한 중재였다! 이 구절은 "그는 이스라엘을 반대하는 편에 서서 하나님을 상대하였다"고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하나님을 상대한다. 엘리야에 관한 말 중에 저가 '간절히 기도하였다'(약 5:17)는 말이 있다. 우리도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처럼, 기도할 때는 그와 같이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엘리야는 이 기도 가운데서 마치 이스라엘에 충성 된 자라고는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하였다. 때때로 신앙의 고백이 얼마나 저조해질 수 있는가를 주의해 보라. 그 당시 이스라엘의 권세자들은 박해하는 권세자들이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3절).
그때 이스라엘의 많은 무리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있었다. 나만 남았는데. 이처럼 하나님께 충성스러웠던 극히 소수의 사람들마저 우상숭배자들의 무리 가운데 숨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박해를 받아 궁지에 몰렸었다.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바알을 위한 제단들이 세워지자 하나님의 제단들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우상숭배를 항의하며 서 있는 그 증거품을 도저히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발한 이유였다. 어떤 한 개인이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그들을 고발하는 기도를 듣는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송을 지지하시고 조만간에 그것을 명백하게 해결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이러한 오해를 바로잡아 주심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4절)
종종 하나님의 교회는 지혜롭고 선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상태에 있다. 배교가 만연해 있는 시대에도 보통은 자기의 순결을 지키고 있는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배교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순결을 지키는 남은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을 자신에게 남겨 두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구별을 두시는 것은 바로 그의 자유로우심과 전능하신 은혜에 따른 것이다. 칠천 그 자체로는 상당한 수이지만 이스라엘의 수많은 무리에 비교해 볼 때는 지극히 적은 수에 불과하다. 이 남은 자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들(4절)'이다. 궁정에도 도시에도 지방에도 어디나 할 것 없이 바알이 우위를 떨치고 있었고, 대부분의 백성들은 다소간에 바알에게 경의를 표했었다. 자신의 순결을 내보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물살이 강할지라도 시내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모습이다. 모두가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때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온전한 정신의 굳건한 의지는 일반적으로 진실함의 상징이다.
3) 이 실례를 오늘날에 적용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5-7절).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러하다는 말이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들이 있다. 여기서 남은 자란 많은 무리들 중 소수에 불과한 믿는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들'이다(5절). 사실 그대로(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그들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 남은 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생긴다면 그 차별은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이 남은 자에 관해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이들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6절) 곧 행위를 배척하는 은혜에 있다. 선택은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엡 1:5). 바울의 마음은 온통 하나님 은혜의 값없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는 잠시 본 강론을 접어두고 이렇게 외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6절).
다음으로 이들은 무엇을 얻는가? 이스라엘이 헛되이 구한 그것을 얻는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7절).
즉 칭의와 하나님의 영접을 얻지 못하였다.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7절),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고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옛적의 자비가 기억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의 지혜 가운데서 주목하신 자들이었다.
(2)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7절).
어떤 사람들은 선택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의 불 신앙 가운데서 멸망하도록 내버려졌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따라 생명에 이르는 냄새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따라 사망에 이르는 냄새였다. 같은 태양이라도 밀랍은 무르게 만들고 진흙은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다. 그들은 눈이 멀게 되었다. 즉 그들은 우둔하여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된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의 빛도 볼 수 없었고 그 감촉도 느낄 수 없었다. 맹목이나 우둔함은 똑같이 영의 무감각과 어리석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견 이 사실은 매우 가혹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은 매우 가혹한 교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구약으로부터 두 증인을 앞세워 말한다.
1) 자기가 살던 시대의 그와 같은 심판을 말한 이사야(사 19:10; 6:9)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8절).
혼미한 심령(8절).
그들은 꾸벅꾸벅 졸며 잠에 취해 있는 사람들처럼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 속에 빠져있는 것이다.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8절).
그들은 능력을 갖고 있었으나 그들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아보는데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았으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상태는 마치 그들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과 같았다. 오늘날까지. 이사야가 예언한 이대로 이같이 우둔해지는 일이 지금까지 계속 되어 왔다는 말이다. 그들 중 얼마가 눈이 멀고 무감각해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 중 많은 무리에 관해서는 여전히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다윗(9~10절) :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시편 69:22,23절로부터 인용된 그의 글에서 다윗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인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고난을 예언하는데 특별히 그들이 그에게 '초를 마시는'(롬 69:21) 고난을 말하며 그 때문에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예고한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9절). 사도는 여기서 이 예언을 오늘날의 유대인들의 맹목과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발한 화에 적용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먼저 그들의 즐거움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즉 시편 기자가 설명하는 대로 하자면 그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해야 할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가미가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음식물이 독약이 되게 할 것이다. 그들을 살지게 할 그 음식이 오히려 그들을 숨막히게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여기서 그들의 능력과 기능이 파멸할 것을 말하고 있다.(10절).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그들의 눈은 흐려지고 등은 굽어져서 바른 길을 찾을 수 없고 설혹 찾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행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일에 쏠려 있다면 우리의 눈은 흐려진 것이다.
2. 이방인들의 영접과 경고(11-22절)
이 유대인의 배척의 교리를 완화시킨 또 다른 사실은 비록 유대인들은 버려졌을지라도 이방인들은 영접되었다는 점이었다(11-14절). 그는 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주는 경고로써 언급한다(17-22절).
(1) 유대인들의 찌꺼기가 이방인들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11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11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척하신 것은 순전히 그들의 파멸만을 위한 것인가? 그는 통례적으로 하나님의 지혜나 의, 선하심을 헐뜯는 무엇인가가 암시될 때마다 취하는 행동과 같이 이러한 생각에 펄쩍 뛰었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11절).
하나님의 거룩한 지시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하므로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도록 정해졌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도 사실이 그러했다(행 13:46).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므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유대인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공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 무한하신 지혜자가 어떻게 어둠으로부터 빛을 악으로부터 선을 이끌어내시는가를 보라!
같은 의미로 그는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라고 말한다(12절).
이방인의 풍성함이란 그들 중에 있는 많은 무리의 개종자들이었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의 보석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의미로 그는 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라고 말한다(15절).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는 그의 은총이 이방인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고' 계셨다(고후 5:19). 어떤 민족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를 행하는 자는 그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2) 사도가 이 교리를 가지고 사용하는 용도.
1) 같은 유대인의 혈육으로서 그는 여기서 그들을 자극하여 복음의 제공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그들에 대하여 권고의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가운데 의도하신 바는 바로 유대인들로 시기나게 하려는(11절)이것이었다. 따라서 바울도 그 점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14절).
"멸시받는 이방인들이 복음의 모든 위로와 특권들을 가지고 달아나는데 우리도 복음을 거절한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그 몫에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말속에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일에 있어서 칭찬할만한 경쟁의식이 있다. 우리가 우리 이웃 가운데 어떤 사람들처럼 거룩하고 행복하게 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 축복은 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줄어드는 법이 결코 없다.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4절)
바울이 평생을 두고 하는 일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최대한도로 약속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얼마의 사람들만을 구원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그는 자기가 상대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지 몇 명만을 구원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만일 자기들이 몇 명을 구원하는 일에 도구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면 자기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잘 쓰여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2)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는 여기서 그들에게 경고의 말을 한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절).
믿는 로마 사람들인 너희는 구원의 부요함이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이르렀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을 잃어버릴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였기 때문에 이때를 기회로 삼아 이방인들에게 강론을 시작한다. 이것이 그의 특별한 사명의 목적이었다(행 2:21).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우리는 우리가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 일에 중대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방 세계는 유대인의 세계보다 범위가 더 넓었다. 그러므로 거기에서 일하는데는 매우 유능하고 용기 있는 일꾼이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일에 적합하다고 여기시거나 그 일을 위해 잘 준비시킨 자들을 특별한 일로 부르신다.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13절).
그 당시 그 직분을 헐뜯거나 그 직분 때문에 그를 헐뜯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이 업신여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진정 영광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참된 사랑을 품고 있다는 표시이다. 목회 사역이란 영광스럽게 여겨야 할 직분이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로서 그들이 하는 일 때문에 사랑 안에서 높이 존경받아야 하는 자들이다. '내 직분'이란 나의 사역, 나의 봉사를 말한다. 바울이 그렇게 깊이 애착을 두었던 것은 사도의 존엄성이 아니라 사도의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이방인들에게 두 가지 사실은 훈계한다.
①유대인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회개를 바라도록 훈계한다. 이점은 그들의 회개가 교회에 가져올 유익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볼 수 있다.(12,15절). 그것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그들이 다시 영접되기를 간절히 열망해야 한다.
②그들이 유대인들처럼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할 것을 훈계한다(17-22절).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서 받은 특전을 살펴보자.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17절).
그들은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듯이 접붙여졌다(17절). 그런데 이것은 참 감람나무를 돌 감람나무에 접붙이는 농부들의 일반적인 방법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가 교회에 접붙이는 자들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야생 나무로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다. 사람은 나무를 개선하기 위해 접붙이나 하나님은 가지를 개선하기 위해 접붙이신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은 돌 감람나무처럼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맛없고 시큼한 열매만 맺는다.
'원 돌 감람나무(24절, 흠정역에는 '본래 야생의'로 되어 있음-역주) 본래 야생적인 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선천적인 상태이다. 개심이란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지는 것을 뜻한다.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진 자들은 그 나무의 뿌리와 기름짐을 공유한다. 살아 있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자들은 누구나 그 뿌리의 가지로서 그를 함께 받는다. 교회에 접붙여진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특전들 즉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다. 그리스도만이 그 뿌리이시다. 이제 믿는 이방인들이 이 뿌리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특전들을 오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살펴보자.
첫째, 자랑하지 말라(18절).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자랑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다. 믿음의 법은 스스로 자랑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랑하든지 간에 일체의 자랑을 배격한다. '가지들이 꺽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지 말라. 즉 네가 그들보다 하나님께서 더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히려 '네가 뿌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비록 네가 접붙여졌을지라도 너는 여전히 뿌리에 의해 보전되는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접붙여진 가지는 '본성을 거슬러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졌는데(24절) 이는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은혜의 행위로 말이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임(18절)'을 알라(그 의미를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 말이 보충되어야 한다).
둘째,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절). "안심하지 말라. 네 자신의 힘과 현재의 위치를 지나치게 확신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은 높은 마음을 방지할 수 있는 거룩한 예방약이다. 그러면 이처럼 언제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행복한가? 무엇을 두려워하라는 것인가? "당연한 얘기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특전들을 잃어버린 것처럼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특전들을 잃지 않도록 두려워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는 악을 우리에 대한 경고로 받아 들여야 한다. 교회가 그들의 특전으로서 갖는 특허증은 어떤 일정 기간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바른 자세를 갖는 한 계속 유효하다. 그러면 그들은 어째서 꺽어졌는가? 그것은 그들이 받을만한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불 신앙으로써 스스로를 꺽은 것이다. 그들이 '원 가지들'(21절)이었을지라도 불 신앙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도 아끼지 아니하셨다. 규례도 오랜 관습도 그들 조상의 신실함도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하였다. 비록 그들이 자주 주장하는 바였지만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변호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었다. 이것이 여기서는 준엄이라고 불린다(22절). 준엄이라는 단어는 호되게 들리는 말이다. 나는 그 단어가 성경에서 여기 말고 다른 어디에서도 하나님께 돌려지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신앙고백 상 자기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어 오던 사람들이 그를 반항한다면 다른 누구에게 보다도 그들에게 가장 엄하게 대하신다. 모든 심판 가운데서 영적 심판이 가장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그 심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8절). 다음으로 "너희 접붙여진 자들은 어떻게 하여 섰는가?" "어떤 수단을 이용하여 섰는가? 의지하는 은혜인 믿음으로 섰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가 너희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들을 파멸시킨 것은 불 신앙이었고 반면에 너희는 믿음으로 섰다." 어떤 조건에서 섰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22절).
즉 너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의지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는 것이다. 우리 행복의 조건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 자신을 간직하는 것이다.
3. 유대인 배척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23-32절)
이 유대인 배척의 교리를 완화시키는 또 한가지의 사실은 그 배척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 이 유대인들의 개심이 여기서 어떻게 묘사되었는가? 그들의 충만함(12절)이라고 말해지는데 그것은 곧 그들이 교회에 덧붙여짐을 말한다. 이것은 세상을 많은 빛과 힘과 아름다움으로 부요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영접이라고 불려진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영접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처럼 놀라운 일일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기꺼이 환영할만한 일이다. 이것을 '그들이 다시 접붙여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3절)
접붙여진 가지는 뿌리로부터 수액과 힘을 공급받는다. 그와 같이 진정으로 교회에 접붙여진 영혼은 소생시키는 뿌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힘과 은혜를 받는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누려왔으나 이제는 그들의 불 신앙으로 말미암아 빼앗겨 버린 그 특권들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여질 것이다.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4절)
그것은 또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그들이 교회에 덧붙여진다는 것은 곧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2) 그 일은 무엇에 근거해서 발생하며 우리는 무슨 이유로 그 일을 기다려야 하는가?
1) 처음 익은 곡식 가루와 뿌리가 거룩하기 때문이다(16절).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좋은 시작은 좋은 끝을 약속한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를 뿌리와 동일한 것으로,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로 이해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거룩하였다면, 다시 말해 그들이 언약 안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의 몸인 떡 덩이와 그 지체들인 가지에게 은혜를 보이셨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이며,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16절).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지혜로운 자식을 낳지는 못할지라도 자유민은 자유민을 낳는다. 은혜가 유전되지는 않을지라도 외적인 특전들은(몰수되기 전까지는) 유전된다. 유대인 가지들은 그 뿌리가 거룩하였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간주된다.
이 사실이 다음과 같이 좀 더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28절).
여전히 옛적의 자비가 기억되는 동안에는 그 사랑이 그들의 특권들을 회복시킬 것이다. 비록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그처럼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복음에 원수가 될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이 일은 점차로 사라지고 그들의 조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기억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경건한 조상들 때문에 보다 나은 대접을 받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그들에게 자기 감람나무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 사실은 옛 정을 인하여 그들이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격려가 된다.
2)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다(23절).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셔서 버려져 시들어 버린 자들을 접붙이실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그러므로 불 신앙이 제거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제거하실 수 있다. 사실 전능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불 신앙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3) 이방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본래 돌 감람나무인 네가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졌다면 본래 참 감람나무의 가지들인 이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것은 배척된 유대인들을 업신여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을 저지하기에 아주 적절한 제언이다. 또한 그가 여기서 주장하는 바는 이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30절).
하나님께 자비를 얻은 사람들이 종종 과거에 그들이 어떤 존재였으며 어떻게 그 자비를 얻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이방인을 부르신 이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그렇다면 하물며 그들이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을 얻지 않겠느냐?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절). 즉 너희가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그들이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려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어느 한 쪽이 독점할 수 없는 법이다. 자비를 얻은 사람들은 친히 자기가 받은 자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비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 구약의 예언과 약속 때문이다. 그는 이사야 59:20,21절로부터 매우 주목할만한 예언을 인용한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①약속된 그리스도의 오심 :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26절).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구원자이시다. 이사야를 보면 그 사실에 대해 '구속자가 시온에 오시리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가 구속자라고 불리고 여기 로마서에서는 구원자라고 불린다. 그는 그 속의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하신다. 이사야서에서는 그가 시온에 오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을 때 그는 아직 세상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가 이 예언을 기록할 때는 이미 그가 오신 다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시온에서 오리라고 한 그의 나타나심의 열매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②이 오심의 목적 :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26절).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파멸하지 않도록, 그리고 죄악이 우리를 주장하지 않도록 경건하지 않음을 제거하시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는 야곱에게서 그것을 돌이키시기 위해 오셨다. 그가 그들에게서 불 경건을 돌이키시고 모든 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 말고 더 큰 어떤 친절을 그들에게 베푸실 수 있었겠는가?
이사야서59:20절을 보면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여 야곱 중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오직 자기의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 오신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란 구원자가 그들에게 오리라는 것이며 나의 영이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사도는 여기서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27절)'라는 말을 덧붙인다. 죄의 용서가 그 기초로서 놓여진 것이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사도는 이 모든 사실들로부터 하나님은 확실히 그 백성을 위해 많은 긍휼을 준비해 두셨다고 결론을 내리며 이 진리로써 그의 결론을 입증한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절).
그러한 은사와 부르심들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나 그를 유효하게 부르신 사실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는다.
(3) 유대인들의 개심의 시기와 범위 : 그 일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인가? 사도는 이것을 비밀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았고 그 백성의 현재 상태를 보아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척된 유대인들의 상황은 과거에 이방인들의 상황이 그랬던 것처럼 나쁘게 보였다. 이제 그는 이방인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늘 겸손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사실로서 이 비밀을 잘 알게 하려고 하였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25절)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무지는 자만의 원인이 된다. 여기서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1) 그들의 현재 상태 :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25절).
단지 일부분만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의 평화에 관한 일을 알고 있는 남은 자가 있다(7~8절).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32절).
즉 감옥에 가두듯이 그들을 가두어 두셨다는 말도 그와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서서 불 신앙의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들은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다 그러면 믿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다.
2) 이 복된 변화가 언제 일어날 것인가? 그 때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는' 때로서 복음이 본래의 의도된 성과를 거두고 이방 세계에까지 이른 때를 말한다. 하나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그의 모든 사역을 마치실 때까지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완악한 상태로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겠다는 것은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의 값없는 은혜 때문이었다.
3) 그들의 개심의 범위 :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26절). 그는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절).
그들은 틀림없이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참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큰 목자장이신 그리스도 아래 이방인들과 함께 한 양우리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일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즉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전과 그 기간 동안 그리고 그 후에 유대인들 중 많은 무리가 깨닫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끝에 가서야 성취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Ⅱ.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에 대한 찬양 11:33-36
사도는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유대인의 배척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나서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지혜와 주권을 인정하며 찬양하는 글로써 끝을 맺는다.
1.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33~34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깊도다(33절).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음의 모든 비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할 만큼 심오한 것이다(벧전 1:12). 그러니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더욱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다. 사도는 자신이 그 깊이를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음을 실토하며 그 바닥을 헤아리기를 단념하고서 겸손히 앉아 그 깊이를 찬미한다. 대부분의 사실들을 이러한 불완전의 상태 속에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눈앞의 이익만 보는 좁은 시야를 깊이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사람의 풍성함이란 얄팍해서 이내 바닥이 드러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함은 깊다. 하나님의 지혜는 심오할 뿐만 아니라 풍성하기도 한데 그 정도는 지식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듯이 드러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고 배열하여 일체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판단은 측량하지 못할 것이며. 그의 판단이란 곧 하나님의 지혜와 목적을 말하며 그의 길이란 이러한 지혜와 목적의 수행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것은 찾지 못할 것이다. 비밀한 일들은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한다(요13:7).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행위의 판단과 하나님의 섭리의 길은 심오하고 신비스럽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캐내어 알려고 하지 말고 잠잠히 찬미해야만 한다.
사도는 이점을 특별히 그 묘한 변화 즉 적당한 시기가 이르면 다시 유대인들을 받아들일 목적을 가지고서 유대인들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영접한 이 사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그 까닭을 다 알 수 없는 방법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점들에 관해서 '깊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찾지 못할 것이로다. 즉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뒤에 어떤 흔적이나 발자취도 남기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그의 섭리의 길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다. 그는 그 흔적이 나타날 만큼 그렇게 자주 한 길을 가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연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라는(34절) 질문이 따른다. 대체 그의 각의(cabinet- council)가 된 어떤 피조물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지혜를 나누어 주셔서 그가 취하시는 길을 아는 어떤 피조물이라도 있느냐? 사도는 동일한 도전을 제기한다(고전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34절).
그는 또한 거기에다가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34절)' 라는 말을 덧붙인다. 주의 마음을 안 자는 그를 나타내었다(요 1:18).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지시하거나 가르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2. 하나님의 지혜의 주권(35~36절)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이러한 모든 일들에 있어서 자기가 하시고자 하는 것을 행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고 그에게는 불의가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
(1) 사도는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빚진 자인 것을 증명 할테면 해보라고 도전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35절).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어느 누가 하나님께 자기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나이다'(대상 29:14). 우리가 이행할 수 있는 모든 의무들은 보답이 아니라 단지 반환일 뿐이다. 사도는 여기서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그 보상이 치루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그것이 다시 그에게 갚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자기 때문에 손해 보게 하시지 않으리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결코 감히 이러한 요구를 하지 못한다. 사도는 먼저 여기서 유대인들의 불평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말을 꺼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이는 교회의 특권들을 빼앗아 가셨을 때 그는 단지 자기의 것을 가져가신 것뿐이다. 다음으로 그는 이방인들의 무례한 말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 말을 꺼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복음을 보내셨을 때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그처럼 많은 호의를 빚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 자신의 선하신 즐거움 때문이었다.
(2) 그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으로 해결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36절).
즉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만물의 샘이자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전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최종 목적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 만일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면 세상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만사가 마침내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여기서 짤막한 송영과 함께 글을 끝맺는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절).
바울은 사람에 관한 하나님의 지혜를 광범위하게 강론해 왔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 모든 문제들이 그 안에서 해결되어야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함으로써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행위를 얘기할 때는 우리의 논쟁을 경외로 가득찬 찬미로 끝을 맺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