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감사의 제사인 화목제의 특징/ 레위기 3:1-5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9RVmNsoaEVM
신앙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의 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용은 복음입니다. 하지만 내용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보존하는 그릇인 교회와 예배 등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믿으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내용을 잘 유지하려면 예배나 교회처럼 그릇과 같은 것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의 내용도 중요하고 신앙의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어야 신앙이 유지되고 튼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내용은 율법이었습니다. 신앙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성전 그리고 절기와 제사 제도 등이었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담을 수 있었던 의식 중에서 제사 제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제사들이 등장하는데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됩니다.
①제사의 목적에 따른 분류입니다. 여기에는 번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이 있습니다. 이 제사를 5대 제사라고 합니다. 번제는 온전한 헌신을 의미하고, 소제는 손으로 수고한 곡식과 식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속죄제는 죄의 용서를 위한 제사였고, 속건제는 하나님의 성물에 관하여 범한 죄 때문에 불결해진 사람이 다시 성결해지는 제사였습니다. 화목제는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②제사의 방식에 의한 분류입니다. 첫째는 화제로 제물을 태워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불의 제사입니다. 요제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흔듦으로써 하나님께 열납 되게 하는 제사입니다. 전제는 이미 있는 제물 위에 추가적으로 기름이나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거제는 어떤 제물을 하나님 앞에 높이 올려서 드리는 제사의 방식입니다. 이런 행위는 이 제물이 오직 높으신 하나님 한 분께만 바쳐진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오늘은 5대 제사 가운데 화목제에 대해서 나누겠습니다.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שֶׁלֶם’(쉘렘)이라고 합니다. ‘쉘렘’은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과 같은 어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서로 ‘샬롬’이라고 인사하며 안부를 묻습니다. 화목제는 말 그래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 평화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평화와 친교를 나타내는 제사입니다.
화목제는 세 가지 경우에 드렸습니다. ①감사제입니다. 인생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았거나 하나님의 은혜로 적들로부터 보호 받았을 때 혹은 사업이 잘 되었거나 기도제목이 응답 되었을 때 또는 목적한 일을 잘 이루었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 식으로 보면 어떤 면이든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것을 깨닫고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삶 가운데 감사한 일이 많이 일어나서 감사의 화목제가 풍성하기를 축복합니다.
②서원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도를 드리면서 이렇게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이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면 제가 하나님께 1천만 원을 헌금하겠습니다.”, “하나님! 지금 제 아들이 몸이 아픈데 고쳐주시면 제 아들을 주의 종으로 드리겠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면 한나는 자식이 없었는데, 기도하면서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사무엘을 얻었습니다. 저희 부부도 신혼 때 모세를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을 했습니다. 저는 모세의 인생을 부모인 저희가 마음대로 하나님께 서원을 한 것이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서원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서원을 갚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가 화목제 중에 서원제입니다.
③낙헌제가 있습니다. 이 낙헌제는 특별한 이유가 없어도 마음에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오늘은 맥추감사절입니다. 맥추감사절은 지난 6개월 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설교를 지난 주일에 했어야 여러분들이 더 의미 있게 맥추감사를 드릴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절기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정리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구약의 화목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진정한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5대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제 그림자는 저를 보여주고, 여러분의 그림자는 여러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구약의 그림자는 누구를 보여줄까요? 골 2:17입니다.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이 무엇인가요? 구약의 율법, 제사, 절기, 사건 등입니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5대 제사는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구약의 제사는 제물의 희생이 전제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우리는 완전한 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는 언제나 번제, 소제, 화목제 순으로 나옵니다. 성경 어디에도 화목제가 먼저 나오고 소제와 번제가 뒤 따라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왜 그런 순서로 나올까요? 번제는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그 몸을 다 찢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소제는 고운 가루처럼 예수님이 한 알의 밀이 되어 죽고 싹이 나 열매 맺힌 후 곱게 갈아져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운 가루가 될 때까지 겪은 수난의 전 과정을 계시해 줍니다.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택한 백성들이 평화를 누리게 되고 죄인들 상호 간에도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화목은 예수님의 희생이 전제 되어야 가능합니다.
엡 2:14-18을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 되었고,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입니다.
본문 5절을 보겠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화목제를 드릴 때는 제물의 일부를 불에 태웠습니다. 내장에 덮이거나 붙은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을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반드시 번제물 위에 놓고 태워야 했습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을 태우는 곳이 번제물 위라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화목제는 결코 번제 없이 드려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번제는 상번제입니다. 제사장들이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하나님께 양을 한 마리 씩 드렸는데, 그것을 상번제라고 합니다. 상번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줍니다. 그 상번제 물 위에 화목제물을 올려서 태웠다는 것은 우리의 진정한 감사와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제 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에 하는 감사는 예수님의 피와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는 예수님의 희생을 믿는 믿음으로 드려야만 하나님께 상달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리고 싶은 성도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레 7:20입니다. “만일 몸이 부정한 자가 여호와께 속한 화목제물의 고기를 먹으면 그 사람은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요” 화목제물은 제사를 통한 죄사함을 받아야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제물의 피를 의지해서 죄사함을 받았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의지해서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화목 즉 오늘 주제에서는 진정한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는 믿음이 출발점입니다. 구원도, 천국도, 기도도, 예배도, 사역도 다 십자가 대속을 믿는 믿음이 출발점입니다. 찬양도 감사도 예수님의 희생을 믿어야 하나님 앞에 상달 됩니다.
2. 감사는 누구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차별 없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번제에서 사용하는 제물은 소나 양이나 염소였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수컷이어야만 했습니다. 화목제는 어떨까요?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화목제물은 암수 구별이 없습니다. 화목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암수 구별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데는 성별이나 학력 그리고 국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은 분명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자유인들은 종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는 짐승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에 여자는 사람의 숫자에 넣지 않았습니다. 남자 장정들만 셌습니다. 아이들도 사람 수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차별이 심하던 때에 갈 3:28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데도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는데도 차별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에는 ‘췌찬’이라는 특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요즘 공연장에 가면 VIP 좌석이 따로 있습니다. 그 좌석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고 특별한 사람들만 앉습니다. 회당에서 안내하던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끼고, 부요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오면 특별석 췌찬으로 자리를 안내했습니다. 회당에 들어올 때 남루한 옷을 입고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서서 예배를 드리든지, 바닥에 앉아서 드리든지 상관치 않았습니다. 복음 안에서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독실한 예수님 숭배자였지만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에 입문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간디의 친구 중에 앤드류스라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선교사가 간디를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간디가 친구와 교회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안내위원이 간디가 유색인종이라고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로 간디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왜 안내위원은 이런 차별을 했을까요? 복음을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사람끼리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교회 자랑스러운 전통이 이것입니다. 한국은 본래 양반과 상놈이 철저하게 구분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1885년 기독교가 들어오자 이 구분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인사동에 승동교회가 있습니다. 승동교회의 초대 목사님 중에 왕손이 있었습니다. 이 왕손은 말을 타고 유람을 다니는 게 취미였습니다. 그 말을 끄는 마부가 중화동에 있는 경동제일교회를 다니는 영수라는 직분자였습니다. 장로 비슷한 직분이었습니다. 지금은 없는 직분입니다.
엄영수는 기도를 많이 하셨는데, 기도를 할 때 마루바닥에 이마를 부딛히면서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이마에 혹처럼 굳은 살이 박힌 분이었습니다. 엄영수는 유람을 하며 왕손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으시지요?” 왕손이 자기 마부에게 핀잔을 줍니다. “예수를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를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마부 노릇을 더 잘 해야 합죠”
왕손의 집이 인사동 승동교회와 같은 담벼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손이 유람을 다니는 동안 그 부인과 딸들이 인사동교회의 교인이 되었습니다. 결국 왕손도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승동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왕손도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왕손이 부흥회에 참석하여 보니, 예배당 앞쪽에 자기 마부 엄영수가 와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자기 마부에게 “형님”하고 불렀습니다. 엄영수가 돌아다보니 왕손 나으리였습니다. 기겁하여 말했습니다. “제게 형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왕손이 대답했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다 같은 형제인데,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옳지 않습니까?” 이 시대에도 차별이 심한데,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심한 반상문화 속에서 왕손이 상놈인 마부에게 형님이라고 불렀다는 건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승동교회에는 당시 가장 천민이었던 백정들이 많이 모였었습니다. 승동교회의 최초의 장로도 백정이었습니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사람이 교회의 리더쉽이 된다는 건 그 당시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게 당시 교회의 문화였습니다. 사람을 깔보고, 차별하고, 업신여기는 당시 반상문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주 탁월하고 우월한 문화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은 차별을 없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안에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습니다.
3. 감사는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구별하여 드려야 했습니다. 2절에 보면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내장에 덮이거나 붙은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은 여호와께 화제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것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예를 들어서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데 그것을 다른 대상에게 돌리면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주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사람과의 화목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콩팥과 기름을 달리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십일조를 자신의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사용 용도가 선하고 좋은 일인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하고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 앞에 구별되게 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되게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합니다. 각 사람의 재능이나, 물질, 시간 등.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화목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는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제물의 내장에 붙은 기름이나 주변의 기름, 콩팥이나 간에 붙은 기름을 다 떼 내어 불로 태워 드렸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중심을 다해서 감사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은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감사한 분이십니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중에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나의 죄를 사해주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나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내세의 소망도 주셨습니다. 올바른 정신도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체면치레나 하듯 감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감사는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번제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못한 사람은 집비둘기나 산비둘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물을 살 돈이 없으면 산에 가서 비둘기를 잡아서 드리면 됐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는데 돈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저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를 드리는 화목제에는 비둘기가 제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로 드려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제물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지갑을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빈손으로 받았지만 감사는 부담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는 자신의 물질을 투자하고 수고와 노력을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0년 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둘 다 성공을 했습니다. 한 친구가 “내가 너희 집에 방문을 해야겠다.”고 하니, 다른 친구가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너는 우리 집을 올 때에 지하 주차장 문을 열 때는 반드시 발로 차서 열어야 한다. 엘리베이터를 누를 때에는 팔꿈치로 눌러야 하고 벨은 이마로 눌러야 한다.” 친구가 들으니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왜 손을 두고 발로 문을 열고, 팔꿈치로 엘리베이터를 열고, 이마로 벨을 눌러야 하니?” 친구의 대답입니다. “야 니가 20년 만에 우리 집에 오면서 빈손으로 오겠냐? 손에 가득 선물을 들었을 텐데. 네가 손을 쓸 수 있겠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4. 감사는 자신의 감정까지 드려야 합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반드시 불살라서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은 내장에 붙은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입니다. 유대인들은 콩팥을 영혼의 좌소로 보고 콩팥 안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콩팥과 내장과 간에 인간의 감정과 생각이 들어 있다고 봤습니다.
감정적인 사람들은 물건 하나를 골라도 그것이 어떤 면에서 유용한가를 따지기보다 육체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나가는데도 상대의 됨됨이를 따지기 전에 자신에게 어떤 느낌인가를 따집니다. 나와 관계가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감정을 따라 행동합니다. 콩팥을 불살라 드리는 것은 감정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 앞에 굴복시키고 주님의 능력으로 처리 받아야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우리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한다면 절대 누구하고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지식을 따르지 않고 감정을 따른다면 하나님과도 불화 하게 될 것입니다.
감정적인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은 잘 받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은혜도 더 잘 받습니다. 의지와 지성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이 와도 자신의 생각으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익이 되거나 정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움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판단으로 측량할 수 없고,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은 우리의 상식과 다르고, 내가 가진 고정관념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감정적인 사람은 감정을 잘 처리 받아야 하고 의지가 강하거나 지성적인 사람은 그 부분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반드시 생각과 감정이 죽어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도 생각과 감정이 죽어져야 합니다.
5. 감사는 타인과 나눔까지 발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없었습니다. 소나 양, 염소와 같은 고기를 먹으려면 반드시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은 성막 뜰 북편에서 동물을 잡고 하나님께 드린 후 제사장의 몫을 드리고 나머지를 먹을 수 있습니다.
화목제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고, 제사장의 몫이 있고, 경배자의 몫이 있습니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것이고, 가슴고기(갈비)와 소의 네 다리 중에서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의 것입니다. 제사장은 가슴고기는 요제로 드렸다가 자기 몫으로 챙겼습니다. 요제는 제물을 흔드는 것입니다. 우편 뒷다리는 거제를 드렸다가 자기 것으로 취했습니다. 거제는 들었다가 놓는 것입니다. 무겁기 때문에 들었다가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몫은 ‘흔든 가슴’과 ‘든 우편 뒷다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경배자가 먹을 수 있었습니다.
화목제를 드릴 때 서원제나 낙헌제의 경우는 이틀까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삼일 째까지 남은 것은 모두 불로 태워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감사제의 경우는 고기를 당일에 다 먹어야 했습니다. 화목제의 희생제물을 먹되 제물이 소 한 마리라면 그것을 어떻게 하루 이틀에 경배자가 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족, 친지, 이웃들과 나눠 먹어야 했습니다. 화목제는 주변의 사람들과 나눠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교제를 위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는 이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나눔에 대한 대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눅 6:38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우리가 이웃에게 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주시는데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 주십니다. 주님이 제시하시는 축복의 비결은 나눔입니다. 저희 가정에서 그동안 하나님께 헌금한 것이 10억은 넘을 것 같습니다. 작년 한 해만 해도 4천만 원이 넘었으니까요. 제가 받는 사례비는 뻔하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나누고 아이들에게 돈이 들어가는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는 나눔까지 발전해야 합니다.
6. 감사할 때 인생이 즐겁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넘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마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혹은 이 세상의 악함 때문에 마음이 슬프고 애통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감정적인 것도 문제지만 너무 감정을 억제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어떤 감정이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진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큰 도움을 주어서 내가 그에게 감사를 표현할 때 마치 로봇처럼 딱딱하게 감사를 표현한다면 상대는 나의 진정성을 의심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자기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나이 때는 어린 아이 때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에 감사해서 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신 27:7입니다.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화목제를 드리면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임합니다. 그래서 감사를 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화목제로 감사제를 드릴 때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의 제물도 드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과 누룩을 넣은 유교병도 드렸습니다. 무교병은 하나님께 태워서 소제로 드리고, 유교병은 고기 먹을 때 나눠 먹었습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대에 가족과 친척과 이웃이 함께 고기를 먹었으니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이렇게 화목제로 감사제를 드리고 나면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선물은 기쁨의 선물을 주십니다.
요즘 제 아내가 혼자서 하루에 수십 번씩 예배를 드리면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저에게 자기는 요즘 영적인 기쁨이 충만하답니다. 자기는 찬양을 해도 눈물이 나고, 기도를 해도 눈물이 나고, 성경을 읽어도 눈물이 난답니다. 예배 시간에도 눈물이 난답니다.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서 나는 눈물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감사와 감격이 충만하여 기쁨이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도 기쁘고, 길을 가는데도 즐겁고,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즐겁고, 공부를 해도, 친구를 사귀어도 즐겁고, 무슨 일을 하든지 즐겁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화목제의 기쁨, 감사제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축복합니다.
구약의 5대 제사 중에서 화목제는 세 가지 경우에 드렸습니다. 감사제와 서원제 그리고 낙헌제 즉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오늘 설교는 그 중에서 감사제를 통해서 감사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1. 진정한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제 되어야 합니다. 2. 감사는 누구나 드릴 수 있습니다. 3. 감사는 하나님께 드릴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4. 감사는 자신의 감정까지 드려야 합니다. 5. 감사는 타인과 나눔까지 발전해야 합니다. 6. 감사할 때 인생이 즐겁습니다.
텍사스의 한 실업가가 「일백만 번의 감사」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그 책이 몇 년 전에 국회 도서관에 들어 왔습니다. 책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문장만 일백만 번 적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 책을 출간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감사한 마음이 생기고 감사를 느낄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우리도 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