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수행에 힘쓰시게나
딸랑딸랑 작고도 은은한 종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바람에 잠이 깼다. 플럼 빌리지에 온
이후로 처음 들어본 소리다.
몇 시쯤 되었을까? 시계는 오전 5시를 막 넘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방문 앞에 선 채 요령을
흔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 숙소에 있는 스님들이 도량석이라도 하는 것일까?
도량석은 보통 새벽 세 시 정각에 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이 목탁을 치며 도량을 한바퀴 도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게 아니었다.
우리 방문 앞에 있는 이는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거의 20여 분 간 계속 요령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마치 이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반드시 깨우고야 말겠다는 듯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곧 죄책감에서 비롯된 불안감으로 바뀌어 간다. 그렇기에 감히 문을 열고 내다볼 엄두도 못내고
못 들은 척 이불을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다.
플럼 빌리지에서는 게스트가 머무는 동안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술과 담배를 금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젯밤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핑게로 딱 한 잔 만이라며 시작했다가
결국 한 사람 앞에 거의 한 병씩 그러니까 한 박스의 와인을 마셔대며 그것도 남들이 다 잠든
밤늦게까지 떠들어 것이었다.
한 가지만 어겨도 혼날 판에 단번에 무려 세 가지를 어겼으니 쫓겨난다 해도 무슨 할 말이 있으랴
게다가 기상 시간이 되었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으니 또 한가지를 보태고 있는 셈이다.
죄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다시 죄를 낳는다.
일단 죄를 지었다면 자각하는 순간 바로 참회하고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이렇게 죄의 악순환에 떨어지고 마는 법이다.
술은 바로 그 자각하는 힘을 무력화시키는 주범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음주는 지혜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고 모든 악으로 통하는 문이라 해서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숙소의 식구들이 모두 입이 무거운 사람이기를 바랄 수 밖에 없는 신세가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해이해질 수 있었던 것은 수행 가족(Practice family)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탓도 있다. 수행 가족이란 플럼 빌리지가 게스트의 성별과 나이 그리고 사용 언어 등을 고려하여 조직해 준 일종의 팀과도 같은 것이다.
이 팀을 중심으로 머무는 동안 수행 생활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 늦게 온데다 취재라는 특수한(?) 임무를 띠고 있었기에 뒤늦게나마 수행
가족에 합류하지 못하고 별도로 우리끼리 '취재 가족'을 이루어야 했다.
취재 때문에 동분서조 하기 마련 일텐데 어느 수행 가족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필시 그 팀워트
(teamwork)를 깨놓을 것이라는 플럼 빌리지측의 배려(?)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도착한 날 옆방에는 프랑스 어느 잡지사에서 온 기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일주일
간의 취재를 마치고 다음 날 틱낫한 스님을 인터뷰 하고는 떠나버렸다.
"정말 여기에 온 보람이 있었습니다. 틱낫한 스님,Wonderful!"이라고 한마디 남긴 채
그와 함께 다국적 '취재 가족'을 이루었더라면 눈치를 보느라 자못 점잔을 뺄 수도 있었겠지만
플럼 빌리지에서는 보기 드문 '단일민족'팀을 이루자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편안하다 못해
사고를 치고 만 것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는 노릇이지만, 깨끗이 닦아내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왕 찍혔으니 갈 데까지 가보자 하는 심보는 엎질러진 물을 두고 나 몰라라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그나마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방안에만 숨어있을 일이 아니었다.
오전에 로어 햄릿에서 어제의 설법에 대한 질의 및 응답 시간이 진행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일행들을 깨우고 서둘러 세면을 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차에 오르면서 보니 숙소의 식구들은
이미 떠난 지 오랜 듯 인기척이 전혀 없다.
혹 늦을세라 과속하다 프랑스 경찰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서프랑스의 호젓한 시골길을 헤쳐나갔다.
감로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로어 햄릿의 법당에 도착해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행이 법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보통 한국의 법회에서는 설법이 끝나면 곧 질의와 응답이
이어지는데, 플럼 빌리지에서는 그 다음 날로 미룬다.
적어도 하루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정말 풀리지 않는 의문 그리고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이 시간에는 이미 그 답이 뻔한 질문이나 그저 자기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불과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윽고 틱낫한 스님이 들어와 대중을 바라보고 자리에 앉으셨다.
그러자 놀랍게도 유치원 또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먼저 질문에 임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은 한국의 법회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질문이 있는 아이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스님의 옆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앙증맞은
손으로 커다란 마이크를 힘들게 부여잡고 스님에게 나름대로는 진지하게 묻는다.
그런데 역시 아이들답게 그 궁금증은 때로는 천진난만하고 때로는 신선하다.
"스님들은 왜 모두 대머리인가요?"
"스님은 왜 그렇게 말씀을 잘 하세요?"
"여기 계시는 스님들의 베트남 어로 된 법명은 외우기가 너무 어려워요"
아이들의 재미있는 질문 덕분에 좌중에선 간간이 폭소가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은 철없는 아이들의 질문이라 해서 건성으로 넘기는 법은 없다.
설령 그 질문이 황당한 것이라 해도 아이들의 호기심은 십분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더이상 진지하게 물으려 하지 않을 것이고, 건전한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창조성을 잃어버린 채 입을 꼭 다물고 판에 박힌 생각에 젖어들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어른들이 이렇게 대답햇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넌 아직 몰라도 돼. 크면 자연히 알게 돼. 별 것을 다묻고 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