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려는데 피아노가 말썽이다.
강릉 시내 집에서부터 필요도 없는 것을 끌고 왔다.
필요 없는 다른 짐들은 다 버리면서도 피아노는 특별한 존재였다.
사실 부모님과 같이 살 때도 복잡하고 사치스런 가구 같은 것은 없었다.
이사를 하려는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아버지가 읽으시던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었다.
아버지의 책들은 내가 자라면서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어쩌면 지금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습관을 키워주게 된 원인이었다.
Minimal Life가 유행이다.
나는 사실 불교경제학자 이기에 굳이 미니멀 라이프가 아니더라도, 소박하게 사는 것이 습관이고 나의 인문학적 철학이었다.
문제는, 아버지의 책과 피아노였다.
피아노, 아마, 십여 년은 뚜껑 한번 열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30 년이 넘은 피아노.
아버지 교사 박봉으로 네 형제를 대학 보내고, 그것도 전부 서울, 춘천 외지로..그 중 둘은 또 일본 유학을 보내고...
그리고도 그 불타는 교육열로 산 피아노였다. 내 여동생 둘은 물론, 내 딸 둘도 피아노를 배웠다.
전혀 음악적 재능이 없는 네 여자들에게 피아노늘 가르친 것은, 아버지와 나의 어설픈 교육 철학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지나 나나 아이들 학원 보내고 학교 보충 수업 하고 야자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색이었다.
아버지는 늙은 교사에 속했는데도, 전교조 선생 만큼이나 일부 교육철학은 진보적이었다.
우리 내 형제나 내 딸들에게도 항상 ‘놀아라’, ‘잘 놀아라’가 전부였던 것이 나와 아버지였다.
화가이고 보석디자이너인 내 두 여동생 역시 미술 교습 한번 받아 보지 못했다. 그러고도 화가가되고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나와 아버지의 교육 방법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피아노는 특별했다. 앞 집에 작은 놀이방을 운영하는 혼자 사는 늙은 아줌마가 있었는데, 아마 나이가 어머니 쯤 될 거 같다.
그 아줌마에게 우리 가족 네 여자가 피아노를 배웠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여동생들과 내 딸 둘의 가장 초보적인 체르니 악보였다.
네 여자 전부 음악에는 지독히도 관심이 없었던지, 집안에서 그나마 값나가는 그 물건을 그냥 사치품으로 남아 있게 만드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그리고 항상 피아노는 우리 집 거실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어쩌면 나와 아버지의 실질적이고 혁신적인 교육철학의 허전함을 달래주던 사치품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 물건 본래의 효용성은 고사하고 교육적으로도 전혀 쓸모가 없었던.
그래서 이사하는데 가장 거추장 스러웠던. 그런 물건인데도 굳이 용을 쓰며 가지고 왔던 것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네 여자에 대한 교육적 사치 때문이었다.
나의 그러한 심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유럽의 르네상스가 발전할 수 있는 그 당시 귀족들의 그것과도 닮아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상업의 발달과 동양으로 부터의 신기한 문물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신에서 인간으로 변화하는 시점에서 유럽의 르네상스는 시작이 되었다.
그 와중에 르네상스의 예술을 발전을 한 것이다. 다분히 귀족적이고 사치품이었던 유럽의 음악은 그렇게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혀 음악적이지 않았던 가족들이, 기여코 전혀 쓸모도 없는 피아노를 애지중지 끌고 다닌 것은, 우리들 안에 잠자고 있었던, 귀족적 사치를 요원했던, 신분 상승의 흔적은 아니었는지.
르레상스가 계몽사상과 인문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근대국가로 발전한 초석이 되었듯이, 그래서 그런 자본주의가 우리를 괴롭히고 있듯이, 피아노도 나를 괴롭히나 보다.
이제, 나는 그 악연을 끊고자 한다. 어제 집 수리를 같이 하던 인부들과 이야기 하면서 피아노를 처리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시골 동네서 가장 음악이 필요한 아이에게 기부하자고 약속을 했고, 인부들은 수소문하기로 했다.
첫째 딸, 주희는,
"아빠, 나....그거 시집 갈 때 가지고 가서 딸 낳거든 줄거야..버리지 마"
라고 전화로 떠들었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교만과 사치를 훌훌 내던저 버리고 오로지 내 속에 나만 만날 것을.
" 쓸데없는 거 안고 사는 거 아니다. 그리고 너 시집 갈지 않갈 지도 모르고, 너 애 날지 안 날지도 모르잔어......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줄거다..."
"어..아빠 알앗어..아빠 맘대로 해..."
역시, 첫째 딸은 시원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