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2
2월15일[연중 제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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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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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MXmEFk4XJA (김민휘 요한 세례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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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
탄식하시는 예수님, 슬퍼하시는 예수님, 서글퍼하시는 예수님, 생각해본 적 있으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십니다. ‘탄식(歎息)’한다는 말의 의미는 ‘한탄하여 한숨을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앞에 벌어진 실망스런 일을 두고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며 한탄함을 뜻합니다.
예수님 탄식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당대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그릇된 메시아니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켜줄 그들만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들은 권력과 전지전능함을 지닌 세속적 왕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상반된 메시아이셨지요. 평화의 왕, 순종의 왕, 종들의 종으로서 겸손한 메시아였습니다.
또 다른 예수님 장탄식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 숱한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또 다른 그 무엇을 기대했습니다. 더욱 더 자극적인 것, 더욱 더 큰 것, 더 자신들에게 유리한 그 무엇을 끝도 없이 요구해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사적인 욕구를 상시적으로 채워주는 개인 비서, 해결사, 심부름꾼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 마술사로 격하시키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과 관계 맺음 방식 안에서 제대로 된 신앙인들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시험해서 안 됩니다. 내게 이득되는 것만 청해서도 안 됩니다. 좋은 것, 달콤한 것만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모든 상황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 우리가 희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것들도 다 하느님께서 내게 필요하니 주시겠지, 하는 넓은 사고방식이 중요합니다.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당신을 향한 여정에서 무수히 많은 표징들, 기적들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과 하직했지만, 우리 모두는 아직도 하느님 자비의 품 안에서 기쁜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이 좋은 세상, 이 좋은 형제들, 이 좋은 피조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미사성제를 통해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작고 비천한 인간 존재 안으로 다시금 들어오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표징, 더 큰 기적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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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소서, 성령님!’
저는 어렸을 때부터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데에 취직해서 능력을 인정받아 돈을 많이 벌고 예쁜 아내를 얻어 화목하게 살아가는 꿈을 꾸었고 성당 다니면서도 오로지 그것이 성취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꿈과는 전혀 다른 사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기로 결심한 25세 전까지 기도한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 가버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제로서 사람의 영혼을 낚는 어부로 사는 즐거움이 그 이전에 상상해왔던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체했는지 알고 병원에 갔는데 위에 암이 있음이 발견되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의사가 체해서 왔다고 발견된 암을 무시할 수 있을까요? 더 위급한 것부터 치료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청하는 것들을 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임을 아시기에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십니다.
사우디 왕자와 골프를 치고 왕자가 무슨 선물을 원하느냐고 묻자 좋은 골프채 하나 달라고 했는데, 골프장을 선물로 주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하물며 하느님이야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아시고 더 잘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벳사이다의 눈먼 소경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의 눈에 손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그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이끄신 다음 눈에 손을 대는 대신 그의 눈에 침을 뱉고 그의 머리에 두 손을 얹어 안수해 주십니다. 이는 분명 소경이나 그를 데려온 이들이 원했던 행위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만히 보니 육체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보다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 더 급선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를 고쳐주실 때도 또 눈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진흙을 만드실 때도 모두 ‘침을 뱉어’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오로가 아나니야의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침을 뱉거나 안수를 하는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넣어주시는 행위입니다.
태초에 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고 하고 그 이후 성전 오른편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을 축일 수 있었던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모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 즉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만이 영적인 눈이 떠져서 사람을 나무로 보게 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나무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만이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드님이로 알아보기 때문에 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이 성령님이 곧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
그를 다시 벳사이다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다시 죄를 지어 영적인 눈을 잃게 될까봐 그리 이르신 것입니다. 도시라는 곳은 죄의 상징이고, 특별히 벳사이다는 코라진과 카파르나움과 함께 예수님께서 소돔보다도 더 죄가 많은 도시로 꾸짖으신 동네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을 때 소경은 약간 실망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눈으로 모든 것을 명확하게 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혼의 눈이 더 중요한 것을 아셨습니다. 그 사람이 실망해도 예수님은 더 좋은 것을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우리가 드린 기도들의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드릴 때, 우리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더라도, 항상 주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먼저 들어주시려 하십니다.
청하되 가장 중요한 성령님을 먼저 청합시다. 나머지는 저절로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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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지금은 은퇴하신 전임 마산 교구장 배기현 주교님의 책 “늙은 아버지와 고독한 아들”을 읽었습니다. 마산교구 총대리 시절에 교구 주보에 매주 올린 글을 모은 책입니다. 글 하나하나에 주교님의 진솔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글은 맵시와 내용도 중요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전해지기 마련입니다. 글 내용 중에 ‘담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담배를 배웠다고 합니다. 35년간 담배를 피우던 중 고인이 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1주일을 지낼 기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추기경님은 학도병 시절에 담배를 배웠고, 3번의 결심 끝에 65세가 되어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배 신부! 담배는 그냥 끊는 거야.”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그 뒤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 어느 날 부친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니 담배 끊었다면서? 내 니가 신부가 된 것만 해도 가슴 아픈데 신부가 담배꺼지 끊고 어찌 살끼라고, 도로 푸라!”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담배를 끊으라고 하였던 추기경님의 마음도, 애잔한 마음에 담배를 다시 피우라고 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참 따뜻하게 보였습니다. 주교님은 담배는 끊었지만 하느님 품으로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작동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안 되면 마지막으로 해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컴퓨터도 프린터도 다시 정상이 될 때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안 되면 전문가를 불러서 손을 봐야 합니다. 전원을 끄고 다시 켜는 것은 컴퓨터와 프린터가 미워서가 아닙니다. 다시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저의 방법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 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쿨’하게 인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입자와 파동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밀과 가라지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비유를 통해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잔에 기름을 채워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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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 좀 특이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7,33b=8,23b)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 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 있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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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22-26)
우리는 ‘못 보는 것’과 ‘안 보는 것’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2월 15일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눈먼 이’는 보고 싶어도(보려고 노력해도) 볼 수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못 본 것’은 그 자신의 탓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대화를 합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예수님 말씀은, “그런 일을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런 불행 속에서도 하느님의 일은(하느님의 은총은) 드러난다.” 라는 뜻입니다.
<‘섭리’는 지금 당장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영적으로’ 눈이 먼 것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안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또 자기는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앞의 ‘에파타’ 이야기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과(마르 7,33) 같은 일입니다.
그 일은 당신이 ‘몸의 병과 장애를 잘 고치는 의사’로만 소문이 퍼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신 다음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앞의 ‘에파타’ 이야기에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르 7,36) 예수님께서 병자와 장애자를 고쳐 주신 다음에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일이 많은데, 그것은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고백하지는 않고, 그저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 라는 소문만 퍼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을,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지 마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눈먼 이의 눈을 고쳐 주신 일은 그에게 ‘새 인생’을 주신 일입니다. 그래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을, “이제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 인생을 살아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새 인간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콜로 3,9ㄴ-10)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례는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는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날마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에 가다가 멈추거나 돌아서면,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과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콜로 3,1-4)
신앙생활은 ‘참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간다면, 그것은 생명을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도 전에 이러한 것들에 빠져 지낼 때는 그렇게 살아갔습니다.”(콜로 3,5ㄱ.7)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뜻과는 상관없이 악한 쪽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나쁜 힘’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과거의 삶이 더 좋았다면서 그 ‘나쁜 힘’이 자꾸만 나를 뒤로 끌어당깁니다. 나는 예수님 뒤만 따라가려고 하는데, ‘어떤 나쁜 힘’이 ‘내 안에서’ 나와서, 그것보다 더 좋은 길이 있다면서 나를 자꾸만 ‘다른 길’로(세속으로, 또 욕망으로) 끌어당깁니다. 그렇게 나를 끌어당기는 그 힘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다가와서 끊임없이 나의 신앙생활을 흔들어대고 방해합니다.
바로 그럴 때에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하다.”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기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과 핑계일 뿐입니다. 사실 신앙인의 의지는 믿음과 기도의 힘에서 나옵니다. ‘나쁜 힘들’이 과거로, 또는 속세로 끌어당길 때, 우리는 더욱더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사도였던 유다가 그 ‘나쁜 힘’에 굴복하고 배반자가 된 것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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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어떤 눈먼 이의 치유는 어제 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제자들의 소경성을(마르 8,16-17 참조)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 눈의 상징을 활용합니다. 우리가 후회되는 일을 하고는 “내가 그때 눈이 멀었었어.”라고 말합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자신의 인생사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은 구원에 큰 장애가 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세례 받은 사람을 ‘빛을 받은 이’로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빛을 받은 뒤에 많은 고난의 싸움을 견뎌 낸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히브 10,32). 또 신앙의 눈으로 올바로 보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이 세상을 살아가며 좋다고 하는 것들 사이에서 참으로 값진 보물을 구별해 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속이고 기만하는 것을 만나 세상살이가 두렵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처럼 겉모습 너머를 보는 눈, 참생명을 위하여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꿰뚫어 보는 눈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선택은 늘 눈에서, 곧 욕망으로 가려진 눈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창세 3,6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의 치유를 위한 많은 가르침을 주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두 번 나오는 “마을”이란 말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 주실 때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라는 말씀과 시력이 회복된 이에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올바로 보고 신앙의 눈을 뜨고 살아가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이루기를 바라시는 새로운 탈출의 여정을 뜻합니다.(예레 31,31-32 참조)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치유된 이를 “집으로” 보내시며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보내시면서 그가 살아갈 마을로는 가지 말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 마을”이란 그리스도의 빛과 복음의 빛으로 보지 않고 세상의 기준과 자기 통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그 모든 곳이 아닐까요? 세상의 기준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은총을 다시 한번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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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무엇인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우리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겪는 고통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지 못하는 사람의 곁에 있는 사람이 겪는 답답함은 오히려 더 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를 치유해 줄 것을 청한 쪽은 마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장애를 지닌 이들이 당하는 수모와 멸시는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신체적인 장애로 고통도 크겠지만, 모든 장애가 죄로 인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에게 받은 정신적인 상처가 더 컸을 거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눈먼 이의 장애를 없애 주는 기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해 주시고, 다시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명하신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눈먼 이가 받았던 신체적인 상처보다, 치유되고 나서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했던 이들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된 뒤에 겪게 될 심리적인 상처를 막아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겪는 삶의 아픔들은 관계에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신적인 능력을 내게 심어 주셨기에, 내가 스스로 깨닫고, 결심하고, 노력하면 세상에 극복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실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며, 낙심에 빠뜨리는 일들은 모두 우리 사회가 병처럼 끌어안고 있는 편견과 오해, 그리고 이기적 집단주의에서 생깁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 사람의 마음이 악의 유혹을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적 현실을 저주가 아닌, 자비로 보듬어 안아 주시고, 땅이 있는 한 자연의 본성을 그대로 인정해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야말로,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비의 마음이자, 치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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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유시찬 보나벤뚜라 신부님]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쳐 주시는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다른 이들도 등장하면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복음관상 기도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배경 삼아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려오는 장면부터 봤으면 합니다. 사람들과 눈먼 이가 평소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그러는 가운데 각자도 주위 사람들 내지 공동체 소속 사람들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 짚어보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부분은 역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장면인데, 무엇보다 눈여겨 볼 것은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는 행동입니다. ‘마을 밖’ 으로 데리고 나가셨다는 사실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 의미와 깊이를 짚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눈먼 이는 마을 밖으로 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때도 묵상하듯 깊이 생각 속에 파묻힐 것이 아니라 그저 물끄러미 그 행동과 장면을 눈여겨 바라보는 가운데 가르쳐 주시는 바를 낚아 올릴 일입니다.
끝으로 눈을 치유시켜 주신 다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장면을 봅니다. 특히 보내시면서 당부하시는 말씀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는 말마디에 담겨 있는 의미와 깊이를 알아듣는 것도 중요한 점 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관상을 하다 보면 대화 내용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 그 말마디 자체만이 아니라 그런 말이 오갈 때의 분위기, 말하는 이의 표정이나 몸동작 등도 살피면서 기도하면 의외로 좋은 것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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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의 눈을 뜨십시오>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하느님의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은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 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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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물건을 인터넷에서 구매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물론 주로 이용하는 사이트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마 대부분 가격 비교 사이트를 보고서 단 10원이라도 더 싼 쇼핑몰을 이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물건에 대한 비교를 많이 해서일까요? 우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교도 참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사실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동차를 새로 장만하려고 하는데, 자동차와 자전거를 비교하면 어떨까요? “아니, 그렇게 멍청한 비교가 어디 있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둘 다 이동 수단이라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비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사람이 없지요. 쌍둥이라도 성격이 다르고 특기와 재주가 다릅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각 사람입니다. 이렇게 고유한 ‘나’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본당 신자가 새로 부임한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전임 신부님보다 여러 측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강론, 업무 처리, 신자들과의 친교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 비교가 맞을까요?
예전에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어느 할머니께서 역대 본당 신부님에 대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부님은 무엇을 잘하셨고, 저 신부님은 저것을 잘하셨고….”라는 식으로 각 신부님의 고유한 면을 바라보면서 칭찬하셨습니다.
이렇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의 습관적인 잘못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차분히 하나씩 고쳐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고유한 면을 발견하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간다면, 어느 순간 어떤 사람도 함부로 판단하고 단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냥 단번에 고쳐주시면 될 것 같은데, 여러 단계를 거치십니다.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시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때 비로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곧바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계속 주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으며 또 제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당 한 번 나갔다고 미사 한 번 참석했다고 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주님의 품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운데 제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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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 회춘이 아니라 회생을>
오늘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고쳐주시지 않고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것도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이 의미가 은밀한 사랑의 표시라고 예전 강론에서는 얘기했는데 오늘은 그 의미를 다르게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오늘 독서와 연결해 묵상해보니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영적인 눈이 새로 열리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열렸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제 새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살던 저 마을은 옛 세상이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의 의미도, 그를 옛 세상에서 빼내시는 의미일 것이며, 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심은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노아 얘기도 같은 의미지요. 홍수로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지만 파국이 노아에게는 새 세상의 시작이고, 그것도 육백한 살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백 년을, 없어져야 할 세상에서 산 셈입니다. 그리고 삼백오십 년은 새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저나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참 의미가 있겠습니다. 이 나이를 십분의 일로 줄이면 환갑까지 산 다음 35년은 새롭게 사는 겁니다.
환갑까지 참 인간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뭐 새로울 것이, 있겠냐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 깨우침을 받고 노아에게서 깨우침을 받는다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지금 새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고작 회춘하려 들지 않고 회생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할 것입니다. 다시 봄을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만큼 뼈를 깎는 아픔이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전에도 예를 든 적이 있지만, 독수리의 회생과 같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이렇게 독수리의 회생에 대해 묘사했지요.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새 발톱과 새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삼십 년을 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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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국, 새로운 시작>
“노아가 육백한 살이 되던 해, 첫째 달 초하룻날에 땅의 물이 말랐다.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내다보니, 과연 땅바닥이 말라 있었다. 노아는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새로운 시작. 이 말은 좋은 말,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선 “새로운”이라는 말이 좋고 아름답습니다.
간혹 새로운 것이 싫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것이 옛 것보다 나쁜 것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옛것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거기에 안주하거나 고집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점점 더 그렇게 되지요. 성당에 가서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야지 마음이 편안하고, 그 자리에 다른 누가 앉아 있으면 괜히 침범당한 것 같아 불쾌하다면 바로 그런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려면 불안해야 합니다.
불안이란 평안하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것이기에 나쁜 것 같지만 꼭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란 쉽게 평안과 편안에 안주하기에 불안해야 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것처럼 불안은 심지어 필요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를 하려면, 또는 묵시록이 얘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하려면 안주하지 않는 복음적인 불안정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정과 불안을 싫어하지요. 그래서 스스로는 가진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곳을 떠나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결국 옛것의 파국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산에 오르려면 인간의 산에서 내려와야 하고 인간의 산과 하느님의 산 사이의 심연을 거쳐야 하듯, 파국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고통스럽지만 이 파국을 두려워하지도 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파국을 맞았을 때 새로운 시작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지혜와 용기를 우리는 독수리에게서 배웁니다.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발톱과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창세기를 보면 노아는 601살이 되는 해 첫째 달 초 하루에 새 땅에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600년을 살고 인생이 파국을 맞았지만 601살에 다시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파국은 새로운 350년의 삶을 위한 파국이요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이 파국을 맞아야 하고 어떤 것이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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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개안開眼의 기쁨, 개안開眼의 여정>
-주님과의 만남-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 116,12-13)
화답송 시편이 은혜롭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마음이 됩니다. 잘 들으라 있는 귀요, 잘 보라 있는 눈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들어라’로 시작되는 베네딕도 규칙이요, ‘보라’ 자주 언급되는 성서에 말마디입니다. 그리하여 귀가 어두우면 보청기도 하고 눈이 어두우면 돋보기를 합니다.
색맹色盲이란, 문맹文盲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색깔을 분별 못하는, 색에 눈멈을 뜻하는 색맹色盲이요, 눈이 있어도 글자를 몰라 읽지 못함을 문맹文盲이라 합니다. 얼마나 답답한 색맹에 문맹이겠는지요. 참 다양한 눈멈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에 눈멀면 보지 못합니다. 탐욕, 애욕, 질투, 분노, 집착, 어리석음 등 모두가 우리를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그러니 육안肉眼만 있는게 아니라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도 있고, 영의 눈인 영안靈眼도 있습니다. 육안의 시력은 날로 약화되도 심안의 시력은, 영안의 시력은 날로 좋아질 수 있습니다. 기쁨도, 감사도, 행복도, 선물도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릴 때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무지나 탐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무지에 눈이 멀어 기쁨을, 감사를, 행복을 곁에 놔두고 슬프게, 불평하며, 불행하게 산다면 너무 어리석은 어처구니 없는 삶입니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입니다. 우리 영적 삶에서 개안의 기쁨은 절대적이요 개안의 여정이 참 소중합니다. 눈이 열려 ‘있는 그대로’ 실상實相을, 진상眞相을 보는 개안開眼이라면, 날로 마음의 눈 밝아지는 개안의 여정이라면 얼마나 바람직하겠는지요. 바로 행복기도 다음 대목은 개안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자주 인용했던 자작 행복기도이던지요!
“주님,
당신을 만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옵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기쁨, 개안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인 것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은총이 바로 마음의 눈이, 무지의 눈이 열리는 개안인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릴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바로 세례성사는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림을 상징하는 입문성사입니다. 바로 오늘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복음의 일화와 제1독서 창세기 노아의 홍수 역시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초대교회와 초대교부들은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벳사이다에서 눈먼이를 고치시는 내용이 은혜롭습니다. 바로 그 어디나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리는 자리가 벳사이다입니다. 오늘 개안은 그대로 무지의 눈이, 마음의 눈이 열림을 상징하니 그대로 세례 은총입니다. 개안은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니 그대로 개안의 여정을 상징하는 다음 복음이 은혜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바로 점진적인 개안의 과정은 그대로 우리 평생 개안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날로 주님과의 만남과 더불어 함께가는 개안의 여정에 밝아지는 마음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례성사로부터 시작된 개안의 여정은 날마다의 성체성사, 주기적인 고백성사라는 두 평생 성사 은총이 날로 우리 마음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답이 바로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무지의 어둠도 점차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지막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저 마을로 들어가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대중의 인기와 호기심에 거리를 두는 예수님의 겸손한 면모입니다. 이처럼 평생 날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과의 만남중에 서서히 좋아지는 마음의 눈, 마음의 시력입니다. 날로 마음의 눈이 밝아질수록 주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한 참사람이 됩니다. 무지에 눈멀 때 괴물이요 폐인이 될 수 있지만 개안과 더불어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노아는 홍수의 와중에도 방주에 머물다 구원되니 그대로 물로 새롭게 태어난 세례성사의 구원 은총을 상징합니다. 역시 방주에서 나오는 구원의 여정도 점차적인 과정을 밟습니다. 얼마나 신중한 믿는 이의 처신인지 믿는 이들의 모범인 노아입니다. 세례의 구원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그의 첫 제사가 참으로 개안한 노아의 모습입니다. 말그대로 세례를 통해 신인류 노아의 재탄생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노아는 제단을 쌓고 번제물을 골라 그 제단 위에서 바쳤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셨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짐이 우리의 개안의 여정에 큰 가르침이 됩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우리의 무지의 악, 무지의 어리석음, 무지의 탐욕을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지속가능한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주님의 확약의 말씀인데, 무지한 사람들의 탐욕으로 인해 기후위기를 초래함으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위협받고 있으며 지속 가능했던 순환의 삶이니 무너지고 있으니 이것은 순전히 무지한 인간탓입니다. 참으로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시점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개안의 여정과 더불어 우리 무지의 눈을 밝혀 주시어 생태적 회개의 실천에 더욱 분발 노력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 성실한 이들의 죽음이, 주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하네.”(시편116,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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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마르8,25)
<영적인 눈을 뜨면!>
오늘 복음(마르8,22-26)은 '예수님께서 벳사이다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먼 이에게 손을 대시니,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태생 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입니다.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던 이들의 믿음, 예수님께서 손만 대어도 치유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이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그를 낫게 합니다.
생활성가 중에 '내 눈을 뜨게 해 달라.'는 성가가 있습니다. 이는 육적인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에서 해방시켜 달라는 성가입니다.
우리 안에는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우물 안 개구리처럼, 보이는 것에 갇혀 있고, 지나가는 것에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을 뜨게 되면,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여!'
'신앙은 곧 신비'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 뒤에 부활이 감추어져 있고,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주님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뜬 이후 한 생을 기쁨의 눈물 속에서 살아가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생태계의 주보성인이신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합일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 안에 숨어 계시는 주님을 만나 뵙고 기뻐합니다.
그 기쁨의 찬미가가 피조물의 찬가인 '태양의 찬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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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 25)
보게 되는
여정이
은총입니다.
꽃을 꽃으로
나무를 나무로
사람을 사람으로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어야
건강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지와 편견에
마음이 닫혀
볼 수 없는
우리들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모르는
사람은 사랑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우리의 것을
내어 보이는 것에서
사랑은 자라납니다.
하느님께 멀어지면
하느님의 것을
영원한 것을
알아 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듯
사랑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볼 수 없는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이 우리의
빛입니다.
빛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도
볼 수 없는
우리가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합니다.
보아야
알게 되고
보아야
만나게 되는
회복의 은총입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시간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다시 사람이
보이는 사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시력의 회복은
사랑의
참된 회복
빛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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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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